마음껏 권력자들을 비웃어보자!

‘오페레타 천재’ 오펜바흐의 볼테르적인 삶

2018-07-31     아가트 멜리낭 | 극작가 겸 번역가

시대를 앞선 음악가 자크 오펜바흐는 독일에서 10형제 중 일곱째로 태어나지만, 당시의 유대인 학살 세태에 떠밀려 파리로 내몰린다. 이윽고 19세기 중반의 격동과 축제적 분위기로 휩싸인 파리를 평정하고, 마침내 프랑스 고유의 오페라 장르 ‘오페레타’를 창시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자크 오펜바흐가 프랑스 제2 제정의 ‘왕’이었고, ‘미치광이 사바트(광적인 춤)’에 대한 명성은 그와 함께 끝났다고 말했다.(1) 그는 “돈을 좇은 광대”, “불길한 유대인”으로 취급받았으며, 좀 더 우호적으로 표현하자면 “익살스러운 새”였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그의 음악에서 퇴비의 열기가 느껴진다고 했고,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이를 “비(非)음악”이라고 규정했다. 사람들은 오펜바흐가 만든 적도 없는 “상스러운 캉캉춤”(2)을 두고 그를 비난했으며, 그의 진정한 창작물인 프랑스식 오페레타(희가극)를 괄시하고 경멸했다. 

오페레타는 음악을 통해 은밀하게 조롱하고, 예기치 못한 전개로 웃음 폭탄을 터뜨리는 정치적 풍자극을 말한다.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는 오펜바흐가 “지상의 권력자들과 그랜드 오페라(정가극)의 가면을 벗겼다”고, 그의 저서 『오펜바흐, 제2 제정의 비밀』(그라세, 1937년)에 서술했다. 클로드 드뷔시는 오펜바흐의 선험적인 반어법을, 니체는 그의 볼테르적 정신을, 장 콕토는 그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1819년 쾰른에서 야곱 오펜바흐는 음악가 집안의 10형제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쾰른은 혁명과 제정 시기에 20년간 프랑스에 속했다가 오펜바흐가 태어나기 5년 전에 프로이센으로 편입됐다. 오펜바흐암마인 출신인 그의 아버지 이삭 에베르스트는 성을 오펜바흐로 바꿨다. 교회 성가대장이자 음악교사, 카바레 바이올리니스트, 성가 작곡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야곱은 첼로 연주에 열정을 쏟았다. 

이 아이가 미래에 작곡가가 되리란 건 자명했다. 그러나 넘치는 재능에 비해 수업은 지루하기만 했다. 그의 미래는? “유대인은 죽어라!” 1819년 여름의 반유대인 폭동에서 시위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상황이 이럴진대 어떻게 그가 독일에서 성공하겠는가? 파리로 가는 수밖에! 이삭은 아들 둘을 데리고 파리 마르티르 거리의 작은 다락방으로 향한다. 그들의 발밑에서 꿈에 그리던 음악 도시의 선율이 재잘거렸다. 쇼팽, 베를리오즈, 프란츠 리스트의 그 로맨틱한 파리 말이다. 

1832년, 파리는 당시 통치자였던 ‘시민왕’ 루이 필립 1세에 맞선 민중봉기와 콜레라 창궐로 인한 과다출혈에서 막 벗어난 상태였고, 자크 라피트 재무장관과 같은 ‘은행가들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이삭은 어린 아들을 예술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했지만, 루이지 케루비니 교장은 외국인 학생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한다. 그러자 이삭은 “제발 그의 연주를 한 번만 들어보라!”고 애원했고, 그 결과 야곱은 예외적으로 입학한다. 이후 이삭은 독일로 돌아갔다. 그리고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줄리어스와 야곱만 파리에 남는다. 당시 이들의 나이는 각각 15세, 13세였다. 

예술학교에서의 1년은 지루했고, 그만하면 충분했다.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자크로 바뀐 것도 이 시기였다. 14세가 되던 해에 파리의 보헤미안 성격을 지닌 오페라코미크 오케스트라에 입단했고, ‘범죄의 거리(탕플 대로의 별칭)’를 드나들었다. 원숭이, 간이무대, 배럴오르간 등 온천지가 무대였다. 범죄가 들끓고, 순결이 조롱당하고,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는 등 멜로드라마가 불같이 일었다. 영화 <천국의 아이들>의 배경도 바로 이 시기다. 멋쟁이들이 거닐던 이탈리아 대로 부근에 위치한 이곳도 싫증 나기 시작할 무렵, 그의 재능에 매료된 유명 그랜드 오페라 ‘유대 여인’의 작가, 플로망탈 알레비를 운 좋게 만나 작곡수업을 받게 된다. 

오펜바흐는 17세에 오케스트라를 떠난다. 이것은 진정한 역경의 시작이었다. 파리 사람들은 캉캉춤의 원조인 ‘샤위(Chahut)’를 췄고, 거대한 극장홀에서 가면을 썼으며, 터키 카페에 몰려들었다. 이런! 사람들은, 기쁨을 주지만 빵은 주지 않는 오펜바흐의 왈츠를 추기 시작한 것이다!

매력적인 동향인이자 사교계의 한 작곡가가 이 청년에게 살롱의 문을 열어줬다. 피아노와 첼로의 듀오는 큰 성공을 거뒀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거장, 오펜바흐를 칭송했다. “나는 전신이 악마의 모습과도 같다.” ‘호프만의 이야기’에서 노래하듯 말이다. 마르고 홀쭉한 몸, 독특한 악센트와 두상! 혹시 마술사가 아니었을까? 이후 사랑과 성공이 뒤따랐다. 영국 여왕 앞에서 공연을 마친 후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결혼하고 개종까지 한 상태였다. 오펜바흐는 행복했다. 왈츠와 가곡을 연마한 지 10년이 지나자 그는 오페라 극장과 오페라코미크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헛된 희망이었지만 말이다. 6개월간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난 정부를 이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다. 정중하지만, 독재적이다!”(3)
1848년 혁명 이후 알퐁스 드 라마르틴이 선포한 제2공화국은 노동시위 억압으로 빠르게 피로 물들었고, 마르크스가 명명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4)에 의해 1851년에 사라졌다. 대통령이자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는 “민중의 삶, 사회 및 정부의 활동을 희극으로 여겼다. 속된 말로 상스러움을 은닉한 가면무도회라고 말이다.” 같은 시기, 오펜바흐는 데자제 극장에서 오페라 ‘오야야예, 섬들의 여왕’을 창작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악기를 타고 도망치는 모험담은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기상천외한 축제, 공연, 산업. 이것이 파리의 새로운 삶이었다. “부르주아가 지난 세대를 통틀어 가장 거대한 생산력을 만들어냈다. 기계화, 산업과 농업의 화학화, 증기 항해술, 철도….”(5) 

파리 시장이던 조르주 외젠 오스만 남작은 파리의 도로망을 개조했다. 이 때문에 물가가 상승했고, 빈민들은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이 기회를 빌려 오펜바흐는 자신만의 극장을 갖길 원했고, 결국 자리를 얻었다. 그렇게 만든 부프 극장에서 빈민 풍자극 ‘두 사람의 맹인’을 상연했고, 대중은 포복절도했다. 곧이어 미래의 주연이 될 오르탕스 슈나이더를 데뷔시킨다. 

하지만 여름용 극장에서 공연을 올리기에 파리의 11월은 너무 추웠고, 박람회도 연이어 문을 닫기에 이른다. 이에 오펜바흐는 슈아절 거리에 현재의 부프-파리지앵이 되는 겨울용 극장을 개관했다. 이곳에서 중국풍 오페라 ‘바-타-클랑’을 선보였고, 큰 성공을 거뒀다. “왈츠와 폴카를 추자. 뛰놀며 춤추자.” 부프 극장은 그야말로 대유행이었다. 3개월 만에 16편을 상연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작곡가, 연출자 그리고 가극작가들을 재촉하는 역할까지 자처한 그는 통풍이 발병했음에도 불구하고 멈출 줄 몰랐다. 레프 톨스토이도 그를 “진정한 프랑스인”이라고 찬송했다.(6)

에우리디케를 찾아 지옥으로 떠난 오르페우스는 “나는 여론의 노예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본래의 신화에서 벗어난 오펜바흐의 첫 번째 그랜드 오페라 ‘지옥의 오르페우스’는 환영받지 못했다. 신화와 정반대로 표현한 올림퍼스의 모습에 에밀 졸라도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쥘 자냉이 이폴리트 드 빌메상 소유의 <르 피가로>에 비평을 쓰자,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한 대중들이 극장에 밀려들었다. 성공이었다! 오펜바흐는 3년 만에 작품 10편을 선보였다. 게다가 오페라코미크에서도 마침내 그의 작품 중 하나인 ‘바르쿠프(Barkouf)’가 상연됐다. 그러나 극본에 개 짖는 소리가 나오는 작품은 크게 환영받지 못했고, 결국 공연은 중단됐다. 

1860년, 오펜바흐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언론에서 ‘직선의 아틸라’라고 불렸던 도시건축가 오스만이 파리 개조사업을 완공한 해였다. 이때 ‘범죄의 거리’도 싹 밀려 사라졌다. 한편, 전 내무부 장관이자 오페레타를 사랑했던 사를 드 모르니 공작은 오펜바흐에게 ‘슈플뢰리 씨는 그날 집에 있을 것이다’라는 극본을 써줬고, 영국에서부터 독일까지 온 유럽이 오펜바흐를 찬양했다. 

‘바-타-클랑’에 등장하듯, “언제나 춤추고 노래하라!” 그리스의 모든 왕들과, 정절이 부서져내려 연푸른 무도화가 돼버린 ‘아름다운 엘렌’을 보라! 

오펜바흐와 그의 극작가들, 쥘 메이약과 뤼도빅 알레비는 성공을 거뒀다. 이들은 국가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 역대 엘렌 중 가장 아름다웠던 슈나이더는 관능이 넘쳐흘렀다. 원작 『일리아드』를 아쉽다고 느꼈던 우울한 영혼들은 신과 왕들의 ‘지옥의 몸놀림’에 빠져들었다. 

향락, 떠들썩함, 몸놀림…. 파리는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엘리제궁 회랑에는 원숭이 우리가 놓이고, 엠마누엘 드 그라몽 카데루스 공작은 호화로운 4륜마차에 커다란 달걀을 자신의 정부 슈나이더에게 실어 보냈다. 카페에서는 방탕자, 귀족, 매춘부들이 잔치를 벌였다. 화류계의 여왕 코라 펄은 다이아몬드를 걸친 채 ‘오르페우스’를 연기했는데, 에밀 졸라의 『나나』에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한 만찬 자리에서는 나체의 무용수 위에 샐러드를 올려 대접하기도 했다. 

“우리는 파리로 대거 몰려갔다.”(7) 1867년, 파리에서 두 번째 만국박람회가 개최됐고, 오펜바흐는 ‘파리지앵의 삶’을 완성했다. 음악가 레날도 안(Reynaldo Hahn)은 “온 사회가 변장한 채로 광란의 전율 속에서 스스로를 조롱했다”고 적었다. 두둥! 오펜바흐는 절정기를 맞이했다. 그는 ‘제롤스탱 대공부인’을 바리에테 극장에 진출시켰다. 발정 난 귀족 부인이 그녀의 무료함을 달래려고 전쟁을 일으킨 군대를 검사하고, 아버지의 검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이야기다. “우린 배가 터지도록 쑤셔 넣었다.”(8) 오펜바흐는 오직 돈에 관한 이야기만 등장하는 ‘군도’라는 작품도 썼다.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의 말을 인용하자면, “꿈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자본주의 사회”가 위험한지도 모르고 천하태평 했다. 적어도 부르주아들은 오펜바흐와 외젠 라비슈와 함께 웃고, 꿈을 꾸었다. 

“우리는 여전히 즐기고 있지만, 이제 더는 아니다.” 매춘부 마르게리트 벨랑제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제2 제정은 16년 만에 마지막 불씨를 태우고 있었다. ‘라 페리콜’은 충격적이었다. 왜 배고픈 빈민층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단 말인가? 프로스페르 메리메는 “모두가 두려워하지만, 그 이유를 모른다”고 말했다. 슈나이더는 무대에서 은퇴했고, 메이약과 알레비는 오펜바흐 곁을 떠났다. 1870년, 스당전투의 패배를 끝으로 제2 제정은 막을 내렸다. 공화주의자들이 “위대한 풍속파괴자”라 불렀던 오펜바흐의 세계도 무너졌고, 그는 망명했다. 라인강을 사이에 둔 두 나라는 그를 “스파이”,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했다.

‘프로이센 유대인’은 파리코뮌 이후 복귀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해있었고, 그는 전혀 모르는 낯선 대중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몽환극의 시대였다. 끝없는 공연들과 수백 명의 스텝들. 빅토리앵 사르두 극본 ‘당근 왕’은 멍청한 채소가 나라를 통치하는 이야기다. 혹시 이 당근이 나폴레옹 3세일까? 오펜바흐는 ‘오르페우스’를 전막 20장의 몽환극으로 재구성해 무대에 올렸다. ‘라 페리콜’에도 1막이 추가됐다. 
반면 사르두의 또 다른 극본 ‘증오’는 처참히 실패했다. 568명에 달하는 스텝들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오펜바흐는 집요했고, ‘돈키호테’를 꿈꿨으나, 그게 끝이었다. 금융업자들이 자본을 철수한 나머지 그는 파산했고, 저작권을 빼앗겼다. 파리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와 조르주 비제가 ‘카르멘’과 ‘박쥐’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오펜바흐는 미국에 진출해 공연을 하며 재기를 꿈꿨다. 그리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서 ‘고적대장의 딸’을 무대에 올렸다. 파리코뮌의 주검 위에 자리 잡은 공화국은 그의 복귀작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1881년, 그가 생전에 끝내 완성하지 못한 환상적인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는 “샹젤리제의 작은 모차르트”(조아키노 로시니가 붙인 별명) 사후에야 비로소 대성공을 거둔다. 1880년, 자크 오펜바흐는 우리의 곁을 떠났다. 그가 꿈꾸던 오페라의 뱃노래에 맞춰, 변장한 뮤즈의 인도를 받으며, 미소를 띤 악마처럼 그렇게 떠나갔다. 사람들은 그가 별밤에 첼로를 연주하던 날에 신들이 즐겁게 회동하며 지옥의 캉캉춤을 췄다고들 말한다. 

“옛날 옛적 아이제나흐에 클라인자크라는 이름의 난쟁이가 있었다.”
마치 오펜바흐의 개처럼 말이다.   


글·아가트 멜리낭 Agathe Mélinand 
극작가이자 번역가. 아리스토파네스(Les Solitaires intempestifs, 파리, 2017년)와 카를로 고치(L’Avant-scène Théâtre, n° 1379, 파리, 2015년 3월)의 작품들을 번역했다. 

번역·이보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Jules Claretie, 『La Vie moderne au théâtre. Causeries sur l’art dramatique』, Georges Barba Éditeur, Paris, 1869.
(2) Édouard Drumont, 『La France juive』, Flammarion, Paris, 1886.
(3) Jacques Offenbach, ‘Le Roi Carotte’, 1872.
(4) Karl Marx, 『Le 18 Brumaire de Louis Bonaparte』, Garnier-Flammarion, Paris, 2007(1reéd.: 1851).
(5) Ibid.
(6) Léon Tolstoï, 『Journaux et Carnets, tome 1: 1847-1889』, Gallimard, coll. 『La Pléiade』, Paris, 1979.
(7) Jacques Offenbach, ‘La Vie parisienne’, 1866.
(8) Jacques Offenbach, ‘La Grande-duchesse de Gérolstein’, 18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