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샷과 참을성 없는 관객

2018-07-31     제라르 모르디야 | 작가 겸 영화인

현대의 관객은 시간에 쫓기는 이들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행동이 개시돼야 하고, 그 뒤의 시퀀스도 기관총이 발사되는 빠른 속도로 연결돼야 하며, 여러 개의 샷(shot)이 벌새가 날갯짓하는 속도로 이어져야 한다. 

 
현대의 관객은 마치 참을성 없는 아이와 같아서, 영상과 음향에 대한 최소한의 욕구가 즉각적으로 충족되지 않으면 울며 발을 동동 구른다. 따라서 곧바로 입에 젖꼭지를 물려주거나 손에 딸랑이를 쥐여주면서 주의를 딴 데로 돌려야 한다(혹은 둘 다 필요할 수도 있다). 감히 말하건대, 오늘날 영화의 대부분은 공갈 젖꼭지와 딸랑이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다시 말해 10W 출력의 돌비 스테레오 스피커와 3D 특수 효과의 든든한 지원을 등에 업고, 핵 재앙, 우주 전쟁, 치명적인 전염병, 괴물, 초현실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이제 영화는 켜졌다가 꺼졌다가 하는 전등, 환자에게 최면제를 투여하는 의사 프란츠 메스머가 사용했던 회전거울과 비슷한 존재가 돼버렸다. 즉, 관객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도록 눈을 어지럽히고, 관객이 아무것도 듣지 못하도록 귀를 현혹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나오는 문구와도 일맥상통한다. “영상에 결합된 것들이 많아질수록 영상은 더욱더 생생해진다. 영상에 결합된 것들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을 흥분시킬 가능성은 점점 더 커진다.” 관객의 초조함을 달래준다는 명분하에, 말초적인 자극은 늘어나고 지성과 감성은 줄어들고 있다.
 
이브 로베르에 따르면, 르네 클레르 감독은 거의 원 테이크(1 take)로만 영화를 찍었다. 제라르 필립과 함께한 영화 <Les Grandes Manoeuvres(위대한 전략)>에서는 같은 장면을 두 번 찍은 후에 감독이 “다시 갑시다!”라고 말해서 배우들이 깜짝 놀랐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감독에게 묻자, 그는 “좀 더 빠른 속도로 연기하세요!”라는 주문을 내렸다고 한다. 영화(영어로는 Moving, 움직임에서 유래된 Movie)는 음악과 비슷한 속도를 지닌 예술이다. 이 속도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프레임 안에서 샷의 길이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샷의 길이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1930년대에는 평균 12초였지만 지금은 2.5초도 되지 않는다.(1) “좀 더 빠른 속도로 연기하세요!”라는 요청은 더 이상 배우들에게 유효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촬영과 편집의 몫이 됐다. 
 
샷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이미지가 풍부해지고 화려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만 관객은 관람료를 낸 보람을 느낀다. 영화관의 팝콘이 엄청나게 큰 용기에 담겨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그러나 그 효과는 역설적으로 나타난다. 겉으로는 화면 속 멋진 장면들이 관객의 성급함을 만족시켜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 관객은 그로부터 거리감을 느끼고,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믿는다. 같은 맥락에서, 수많은 영화(그리고 비디오 게임) 속에 등장하는 폭력 장면은 사실 폭력에 대한 가공물, 피가 분출하고 총격이 빗발치는 그럴듯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 고통, 괴로움, 공포는 관객의 마음에까지 가닿지 않는다.
 
기술적인 발전, 특히 영화와 TV에서 스테디캠(어떤 배경에서도 유연한 이동 촬영이 가능하게 해주는 카메라 고정 장치)을 광범위하게 활용하게 된 덕분에 관객은 “화면의 한 가운데”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관객은 이미지에 압도돼 뒷걸음치고 만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이런 압도감은 관객을 이미지의 포로가 된 시민, 새로움이라는 설탕을 목구멍 가득 밀어 넣은 소비자로 전락시킨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 이해하고 싶은 것(이데올로기, TV 프로그램)을 주장하지 못하고, 정치가 투영한 이미지에만 현혹되는 시민(매주, 영화 평론가들은 ‘놀라운’ 신작이 발표됐다고 떠들어댄다).
 
영화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수많은 장면들로 가득 채워진 화면은, 카드놀이에서 얼간이들(관객, 유권자)을 홀리기 위해 카드를 이리저리 옮기는 모습과 비슷하다. 우리는 매번 진다. 그리고 영화가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나 귀신의 집이 되기를 자처할 때 영화도 질 수밖에 없다. 대화나 담화의 경우 짧은 것이 가장 좋기 때문에 ‘짧은 문구’, 트윗, 슬로건이 각광을 받는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촬영하던 로저 무어에게 한 기자가 이 영화의 가장 특별한 점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대사가 두 줄밖에 없어요!”(아마도 본드는 “My name is Bond. James Bond”라고 말한 대사를 얘기하는 듯싶다-역주)
영화는 가장 진정성 있고 심오하게 표현될 때 관조적인 예술이 된다. 그러나 요즘 같을 때 어떤 스튜디오가 자크 타티의 <Play Time>, 큐브릭의 <2001: A Space Odyssey>, 블랙 에드워드의 <The Party>, 누리 빌게 제일란의 <Winter Sleep>,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 혹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5분이 넘는 미사 장면이 등장하는 베리만의 <Winter Light>에 단 1유로, 단 1달러라도 쓰려고 할까? 우리에게 보고 듣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우리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사로잡으며, 시간과 공간을 아름답게 담아낸 영화들이 사라지고 있다. 
 
볼 만한 가치가 있고, 지속적으로 주의를 환기하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달뜨게 하는 이런 영화에는 대부분 관객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속도가 충분히 빠르지 않으면 평론가들과 스튜디오들은 한목소리로 외친다. ‘지루해!’ 그리고 이 지루함(주제를 벗어나는 이야기,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감각)은 현대 관객들에게 사탄과 같은 존재, 즉 영화관에서 뛰쳐나가고 TV 화면을 멀리하게 만드는 악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두 개의 TV 및 영화 분야가 있다. 첫 번째는 <투르 드 프랑스>의 전체 재방송이고(장-뤽 고다르는 ‘한 인간이 진정으로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라 평했다) 두 번째는 포르노 영화다. 성관계 장면이 충분히 오래 지속돼야, 마치 아침운동 수업에서처럼, 그것을 보는 관객들에게 영화 속의 행위를 따라 할 욕구와 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참을성 없는 관객은 광고와 판매에 대한 극심한 욕망이 만들어낸 산물이기도 하다. 판매를 위해서는 고객에게 군침을 흘리게 만들고 고객의 주의를 분산시켜야 한다. 파블로프의 개를 조련하는 것만큼이나 간단하다. 우리가 제품(블록버스터 영화, 선거 후보)을 선보이면 관객 또는 시민은 개처럼 침을 흘린다. 그리고 그 제품을 시야에서 없애면 그들은 욕구불만과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식료품, 가정용품, 서비스뿐만 아니라 영화, TV, 정치에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추기경의 고귀한 미덕만큼이나 높아진 성급함의 수준은,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경영이 차지하는 막대한 비중을 방증한다. 근무 시간 중에 휴식 시간, 한가한 시간, 고민할 시간은 없다. 신성한 생산성의 문제 앞에서, 일을 하는 현대인들은 하루 내내 고개 한 번 들 틈도 없이 일에만 파묻혀있어야 한다. 화면에서 절대로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영화관 화면의 경우 광고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고, 회사 컴퓨터의 경우 수익을 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월급쟁이, 시민, 관객은 모두 조급함에 길들었다.
 
TV 프로그램 제작자들의 숨은 조력자는 바로 리모컨이다. 광고주들(그리고 정책 책임자들)의 절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엄청난 기기는 소파 위에 가만히 누워서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릴 수 있도록 해준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현대의 TV 시청자들은 같은 영상을 보고 분석하며, 즐기는 것을 조금도 참을 수 없다는 듯 끊임없이 채널을 바꾼다. 다른 채널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들도 절대로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현상이 325개 채널을 볼 수 있는 패키지에 가입한 것이 아까워서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일까? 
 
시청자는 모든 것을 봐야 하고, 그 모든 것을 보기 위해서는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오로지 광고(이미지와 메시지), 공영 및 민영 채널의 모든 편집 정책에서 중심축을 담당하는 광고만이 기억에 남을 뿐이다. TF1의 회장인 파트릭 르레는 방송국의 임무는 시청자들의 뇌를 “비워주는 것, 즉 시청자를 즐겁고 편안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광고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 채널의 책임자로서 지나치게 직설적인 발언이기는 했지만, 최소한 그 솔직함에는 손뼉을 쳐줄 필요가 있다. 
 
현대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는 초조함과 조급함은 전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인 전쟁, 기후 변화, 빈곤,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보여주는 신호다. “인류 멸망의 날이 오기 전에”(카를 크라우스) 모든 것은 빨리 진행돼야 하고,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먹고 마시고, 가능한 한 많은 영상을 보고,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 바오로 사도의 시절에,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었던 데살로니가인들이 바로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다.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 성 바오로 사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방탕한 생활에 몸을 내맡겼다. 폭음을 일삼고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며 웃고 춤을 췄다. A.D. 50년경에 살았던 데살로니가인들처럼 현대의 관객들은 어떻게든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어 한다. 하기야 신은 이미 죽었으니,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는 이미지들이 무심하게 이어지는 화면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시간을 보낼 방법이 있을까?  
 
 
글·제라르 모르디야 Gérard Mordillat
주요 저서로 『La Tour abolie(파괴된 탑)』(Paris, 2017) 등이 있다. 오는 8월 24일 금요일, Arte 채널에서 방영될 예정인 영화 <Mélancolie ouvrière(노동의 우울)>의 감독이다. 
 
글·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영어로 된 영화의 경우. 출처: Wired, San Francisco, 2014년 9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