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았다. 이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게 하지 말자고 조용한 다짐을 할 때도 된 듯한데, 거리에 나붙은 전쟁 불사 현수막들이 섬뜩하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은 나쁘고 평화는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걸까. 왜 사람들은 전쟁이 나쁘다고 하면서도 불가피할 때가 있다고 생각해버리는 걸까. 그것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이 일으킨 전쟁을 비난하기 위한 명분으로 잠시 평화를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은 아닐는지.
삶의 원리이자 태도로서 평화, 전쟁의 반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적극적 삶의 질문으로서 평화를, 나는 때때로 놀라운 동화들에서 만나게 된다.
동화책들이 보여주는 평화는 무엇보다 ‘타인에 가닿는 상상력’이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는 한 아이가 라면을 먹을 때, 지구 다른 곳의 아이들에게 벌어지는 일을 상상력의 이어달리기를 통해 보여주는 책이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이웃집 미미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이웃나라 남자아이는 자전거를 탄다. …그 이웃나라 여자아이는 빵을 팔고… 그 맞은편 산 너머 나라 남자아이는 쓰러져 있다.”
이 책은 평화가 무엇에서 시작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것은 상상력을 통해 타인의 슬픔과 상처에 가닿는 일이다. 동화 마지막 장면에서 쓰러진 남자아이 곁에서 불던 황량한 바람은 라면을 먹고 있는 아이의 창문 커튼을 흔든다. 그 상상력은 타인(의 고통과 상처)을 향해 뻗어나가서는 아픈 바람이 되어 내게 돌아온다.
일본 자위대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계기로 일본의 동화작가들이 펴낸 <하늘은 이어져 있다>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전쟁은 따뜻하고 상냥한 얼굴을 무서운 얼굴로 변하게 하고, 친구의 축구공을 “찢어버려”라고 말하게 한다. 몇십 년이 흘러 이미 끝난 것 같았던 전쟁은 아버지의 절망과 구타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런 전쟁은 “서로에 대해 알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무엇보다 하늘은 이어져 있다는 상상력은 평화의 출발이다.
그러나 지금 이런 상상력을 가진다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무탄트 메시지>는 5만 년 동안 집단을 이뤄 살고 있는 호주의 참사람 부족 이야기다. 이들은 뛰어난 감각과 직관을 가지고 있다. 고래와 의사소통을 하고 수십km 떨어진 동료와 텔레파시 대화를 나눈다. 황당하다. 그러나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무언가 걸린다. 유년기의 인류는 추수 때 벼가 낫에 베이며 지르는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1) 지금 우리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그렇게 훈련받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복수와 전쟁의 큰 북소리들, 개발과 성장의 광휘에 묻혀 그 속에서 신음하는 것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것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자기 아닌 것들이 내는 소리’를 듣기 위한 상상력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은 ‘다른’ 접근이다. ‘관습의 틀’을 깨는 상상력이다.
<똑똑하게 사는 법>은 제목만으로는 결코 읽고 싶지 않은 책이다. 그런데 결코 똑똑하지 않아 보이는 표지의 다양한 얼굴들을 보고 간신히 책장을 넘겨본다.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는 법’은 “우리에게 잘 맞고 나름대로 쓰기 편하고 즐겁게 식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란다. “손과 손가락은 가지각색이라서 젓가락질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이라는 것이다. ‘코끼리를 제대로 감상하는 법’은 “달밤의 코끼리… 사막에 있는 코끼리… 공기 방울 속에 들어가 하늘을 나는 코끼리…”를 상상하다 다시 “동물원에 있는 코끼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뱀의 길이를 제대로 재는 법’은 “길이를 재는 목적을 뱀에게 설명하며 이해”시키는 일이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쓰레기 분류법’이다. ‘작아진 모자와 구두’ 같은 ‘어쩔 수 없어요’ 쓰레기, ‘썩은 양파’나 ‘뚜껑을 잃어버려서 굳어진 물감’ 같은 ‘미안해요’ 쓰레기, ‘닳아버린 연필과 크레파스’ 같은 ‘고마웠어요’ 쓰레기처럼 분류하는 것이 제대로 된 방법이다. ‘싸움을 제대로 하는 법’은 어떤가. “정정당당하게 실컷 싸우다가 상대방이 항복하면 딱 멈추고 시원하게 화해해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 싸움을 하는지, 왜 싸움이 벌어지는지… 어떡하면 싸움을 안 해도 되는지도 잘 모르지요. 즉, 싸움을 하고 나서 그런 점을 스스로 깊이 생각해보는 것이야말로 싸움을 제대로 하는 법”이다.
관습의 틀을 깨고 뒤집어보는 것은 평화를 위한 좋은 훈련이지만, 결국 평화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것을 ‘고양된 삶’이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돈과 이기심을 앞세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빼앗고 있는 멕시코 농민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사바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마르코스 부사령관이 지혜로운 농민 안토니와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 형식으로 된 이야기다. 이들의 싸움은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지금 제대로 살기 위해서 하는 고귀한 싸움이다. 이 이야기들은 싸우며 걷고 있는 그들 삶의 철학이면서 지구 반대편 나의 편한 잠을 깨워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새벽별처럼 묻는다.
<청구회 추억>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인 신영복 선생이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20년간의 감옥 생활에 들어가지 직전인 청년 시절, 우연히 만났던 아이들과의 인연과 관계에 대해 옥중에서 쓴 글이다. 터무니없는 군사정권의 조치에 억울하고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 그는 놀랍게도 그가 만났던 아이들과의 관계를 되돌아본다. 이 글에는 동료들과의 친교 자리에서 남루한 옷차림의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그것이 혹 ‘장난’은 아니었을까 하는 성찰, 그들 삶의 설움에 어찌하지 못하는 고뇌 등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그의 ‘관계’와 ‘만남’에 대한 지향은 그 뒤 출간한 책들에서도 거듭 확인되지만, 이 책은 그 핵심을 잘 보여준다. 그가 관계하려는 이들은 삶이 힘들고 남루하다. 그의 관계 지향은 그의 붓글씨 ‘하방연대’(下方連帶)처럼 늘 아래로 향해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침묵하기 위해서다.
신형철은 “오늘 당신의 놀이에 동참하는 일, 어제 당신의 상처를 이해하는 일, 그래서 내일 당신과 함께 침묵하는 일”(<몰락의 에티카>)이라고 썼다. 이 말만큼 평화를 잘 얘기해주는 것도 없다. 지금 함께 놀면서(동화되면서) 그 속에서 세상의 아픔들에 가닿아 그 아픔에 우는 일. 삶의 번다한 수다를 내려놓고 자기 삶을 되돌아보기 위해 침묵하는 일.
평화박물관은 올해 5년째 ‘어린이 평화책 순회 전시회’를 열고 있다. 앞의 책들을 포함해 150권의 책이 선정돼, 전국 40여 개 어린이도서관을 돌며 아이들을 만난다. 조금 전까지 친구와 우당탕탕 장난을 치다가 작은 도서관 구석에서 우연히 손에 쥔 <내가 라면을 먹을 때>란 그림책을 읽은 뒤 찾아왔을 어떤 어린 친구의 짧은 침묵이라면, 평화책 전시회가 헛되지는 않겠다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