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히스토리’와 서구의 출발점

세계화는 언제 어디에서 시작됐는가?

2018-08-31     알렝 비르 | 프랑쉬 콩테 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글로벌(월드) 히스토리는 과대평가된 서구 역사를 재구성하는 시도다. 그 의도는 정당하다. 그렇다고 글로벌 히스토리가 유럽이 한때 세계 역사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서구는 세계화를 통해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해 왔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역사의 중심이 서구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 

 
월드 히스토리, 글로벌 히스토리, 빅 히스토리.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이 세 개념은 1980년대 미국에서 처음 등장해 학계에서 선풍을 일으킨 후 1990~2000년대에 유럽, 라틴아메리카, 아시아로 퍼져나갔다. 이 개념들은 관련 저작들이 방법론과 인식론에서 서로 상이하고 도출하는 결론 역시 달라, 진정한 의미의 학파를 이루지는 못했다. 
 
글로벌 히스토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세계를 중심에 두고 인류 역사를 고찰하고 서술하는 새로운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를 각 국가의 고유 역사에 맞춰 축소하지 않고, 유럽중심 혹은 서구중심의 시각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최근까지도 역사가들은 유럽이나 서구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술해오면서, 지난 수 세기 동안 비유럽(비서구) 지역의 관점은 배제했다. 심지어 비유럽 고유의 역사는 부정당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글로벌 히스토리는 국가별, 대륙별, 문명별 비교 접근법을 시도하고, 각 방법론에서 차이점은 물론, 공통점을 찾을 것을 제안한다. 이 과정에서 모든 국가와 대륙, 문명은 균형감 있게 다뤄지는데, 이 점이 커넥티드 히스토리(1)와 유사하다. 글로벌 히스토리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각 국가가 교류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상호작용과 그로 인해 가까워진 공간들 사이의 왕래 그리고 유럽의 확장으로 발생한 생물학적, 문화적 이종교배와 결합이다.
 
글로벌 히스토리는 유럽 위상의 예외성을 제거하고, 다른 대륙과 다른 세계에 기준을 제시했던 유럽의 오랜 특권을 박탈함으로써 유럽과 유럽의 역사, 존재 형식, 사고의 범주와 가치를 상대화하고, 지방화한다(‘유럽의 지방화’는 서발턴 연구그룹의 일원인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교수가 만든 웅변적 용어이다).(2) 또한, 피지배 사회의 자원과 기득권을 도구화하지 않고서는 유럽의 지배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피지배자들을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시킨다(여기가 글로벌 히스토리와 서발턴 연구가 만나는 지점이다).(3)
 
더 나아가 인류 진보의 중심이나 동력이 유럽이나 서구가 아니라 다른 대륙, 다른 사회였다는, 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중국, 인도 심지어 아프리카도 종종 유럽보다 훨씬 선진적이었고 이들 비유럽 문명을 차용한 덕분에 유럽이 일인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4) 그렇게 해서 유럽이 주도하는 세계사는 곁길로 들어섰고 이제 그 길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5)
 
‘역사는 언제나 현재형으로 쓰인다’라는 원칙을 글로벌 히스토리가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글로벌 히스토리는 통상적으로 ‘세계화’ 또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영감을 얻었다.(6) 세계화는 시간상으로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에 나타났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1970년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방안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하면서 세계화가 시작됐다. 세계화는 제품, 자본, 정보 그리고 작게는 사람의 이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확대하고 강화하고 가속화했다. 
 
그리고 국가와 국가 연합(자본주의 세계 이전에 결성된)의 틀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세계화 이전에 취했던 입장 전체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아가 상황을 전복시키기까지 했다. 미미하고 일시적인 전복도 있었지만 좀 더 장기적인 것도 있었다. 일례로 서유럽과 미국의 산업은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 타이완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다른 ‘호랑이’와 ‘용’들의 약진과 중국, 인도, 브라질의 부상으로 상대적으로 뒷걸음질했다. 이 점에서 세계화가 글로벌 히스토리의 주요 개념이라 할 수 있는 관점의 전복을 이끌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점점 심각해지는 전 지구적 환경위기 역시 인류가 운명 공동체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유럽의 ‘예외적’이고 ‘특별한’ 위상에 대해
 
현재는 언제나 과거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생겨난 과거에 대한 환상 역시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히스토리가 세계화는 어제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우리는 수긍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계화가 인류의 여명부터 시작됐다거나 나아가 그 시초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이었다고 믿게 하려는 시도에 대해선 우리는 좀 더 신중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7) 
 
 호모 사피엔스의 전 지구적 이동으로 일찍이 생물학적, 문화적 혼합이 빈번했다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다. 또한, 땅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던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서로 다른 인종, 문명, 그리고 ‘세계’(페르낭 브로델과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말하는 ‘제국 세계’ 혹은 ‘경제 세계’도 될 수 있다) 사이에 다양한 형태의 교류 및 상호차용이 활발히 이뤄진 것 역시 확실하다. 하지만 땅이 분리되고 15세기에 유럽의 항해가, 상인, 정복자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떠나면서 인류는 감히 가능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크기의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그 후 3백 년 동안 유럽의 확장은 계속됐다. 그 결과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라는 거대한 세 대륙이 서유럽 중심의, 서유럽이 주도하는 하나의 경제적, 정치적, 이념적 관계망에 편입됐다. 그렇게 되면서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세계가 서로 연결되고 거기서 이전 세계와 결합하고 종속돼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탄생했다. 이 세계에서 유럽은 머리와 심장이었다. 그 유럽을 중심으로 다른 나라와 대륙은 유럽의 필요에 따라 재편됐다. 유럽의 필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가치의 가치화, 형성 중인 가치(칼 마르크스), 즉 자본의 형성과 재생산을 말한다. 그렇게 해서 지구상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서로 다른 공간들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세계로 재편됐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확장 이전 시기에 대해 글로벌 히스토리 또는 월드 히스토리를 언급하는 것은 용어의 과용이다.  
 
여기서 유럽의 ‘예외적’이고 ‘특별한’ 위상에 대해 다시 한번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우리가 찾아야 할 답은 왜 16세기부터 유럽의 함선들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필두로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뒤이어 덴마크, 프러시아, 스웨덴- 대서양, 인도양, 중국해, 동해로 진출하고 리스본, 세비야, 앤트워프, 암스테르담, 함부르크, 런던 등 유럽의 항구를 연결해 위에서 언급한 바다를 지배하고 무역을 독점하는 기반을 마련했냐는 것이다.
 
왜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페르시아, 아랍, 스와힐리의 함선이 나가사키, 닝보, 반텐, 말라카, 캘리컷, 수라트, 호르무즈, 무스카트, 아덴, 말린디에서 아프리카나 미국, 유럽의 대서양 해안을 향해 출항하지 못했냐는 것이다. 1498년 5월 어느 날 바스코 다 가마가 대서양을 지나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남해안 캘리컷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보다 몇십 년 전에 정화(鄭和)라는 중국의 항해가가 원정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도착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해안을 따라 더 내려가 희망봉을 돌아 리스본 항구에 입항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 질문은 일방적인 방식으로 고찰됐고 그 결과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인류가 가야 할 유일한 길은 ‘발전’이고 유럽이 그 누구보다도 빨리 이 길에 접어드는 행운을 누렸다거나 유럽의 문화적 특징(‘그리스의 기적’,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이뤄진 경이로운 지적·사회적·문화적 진보-역주), 로마법, 자치도시의 존재, 개인의 기업가정신…)이 ‘발전’의 길을 닦았다는 것이 지금까지 고찰된 가정이다. 심지어 ‘백인’의 확고한 우월성 덕분이었다는 최악의 가설도 있다. 그렇다고 질문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유럽인가?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의 질문이 아니지만, (난해)하다고해서 이를 변명삼아 명확한 대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은 유럽이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을 세력 확장의 출발점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유럽 역사의 독창성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즉, 유럽은 생산자가 제품 형태의 자본을 통해 화폐 자본의 축적을 용이하게 하고, 또 화폐자본 소유자가 노동자를 무력화하고, 생산수단을 독점화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같은 생산과정의 친 자본가적 조합은 자본 가치의 크기를 엄청나게 확대시켰다.
 
마르크스 자신도 이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역사적 조건에 대해서는 달리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저작에 흩어져있는 직관을 통해 휴리스틱 발견법(복잡한 과제를 간단한 판단 작업으로 단순화해 의사 결정하는 경향)으로 판단해볼 수 있는 몇 가지 단서(8)를 찾을 수 있다. 전 인류 사회의 역사가 탄생시킨 생산방식 중 가장 먼저 고찰해야 할 것이 봉건제도다. 유럽에서는 대략 8, 9세기에, 일본에서는 12, 13세기에 시작된 봉건제도는 생산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아니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유일하게 적절한 체제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관계 형성이 양적(자본 축적의 규모, 속도, 양), 질적(형태) 발전을 제한하는 여러 장애에 지속적으로 부딪혔다. 한마디로 봉건제도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로서 자본 형성에 필수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충분조건이 되려면 교역과 식민지의 확장이 있어야 한다. 중세 말기에 시작된 확장은 봉건시대의 유산과 봉건시대를 끝낸 생산의 자본관계 형성을 기반으로 근대까지 지속됐다. 가장 주요한 확장의 양태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식민지다. 약탈이나 아메리카 대륙의 광 개발로 유럽으로 귀금속이 쏟아져 들어오고 노예 노동력 기반 플랜테이션 농장 체계가 발전하고 노예무역을 통해 아프리카로부터 노동력을 계속 공급받았다. 그리고 아시아 시장을 정복하고 몇몇 지역을 식민화했다. 
 
유럽 강대국들은 넘쳐나는 상품과 돈을 가로채기 위해 경쟁했고 중상주의 정책으로 격화된 경쟁은 종종 전쟁으로 이어졌는데 세계적인 규모로 확산되기까지 했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군사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행정과 조세제도를 개선했고 공공대출도 확대했다. 이 모든 현상은 자본이 다양한 형태로 축적되는 규모와 속도를 가속화시켜 산업혁명이 일어날 조건을 마련했고 부르주아지라는 강력한 사회계급의 부상을 가능케 했다. 
 
결론적으로 1차 세계화 덕분에 유럽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문명들 사이에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관계망을 조직하고 통제하면서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기 시작했고 생산의 자본관계가 완성되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수단을 소유하게 됐다.  
 
 
글·알렝 비르 Alain Bihr 
프랑쉬 콩테 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이 기사는 2018년 9월 출간 예정인 『Le Premier Age du capitalisme(1415~1763) Tome 1: L’expansion européenne(자본주의 시작(1415~1763) 1권: 유럽의 확장)』 (Page 2(Lausanne), Syllepse(Paris)에서 발췌한 것이다. 
 
번역·임명주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
 
(1) Connected histories. 역사학자 산제이 수브라마냠(Sanjay Subrahmanyam)이 사용한 용어. 지역에서 세계로 여러 단계의 상호작용 연구를 통해 국가별 역사와 각 문화적 공간 사이에 쳐진 칸막이를 해체하는 역사 접근법을 말한다.(편집자 주)
(2) Jack Goody, 『L’Orient en Occident(서양 속의 동양)』, Seuil, coll. ‘La librairie du XXe siècle’, Paris, 1999. /Jack Goody, 『Le Vol de l’histoire. Comment l’Europe a imposé le récit de son passé au reste du monde(역사의 비상. 유럽은 어떻게 자신의 과거를 전 세계에 강요했나)』, Gallimard, coll. ‘NRF Essais’, Paris, 2010. / Dipesh Chakrabarty, 『Provincialiser l’Europe. La pensée postcoloniale et la différence historique(유럽을 지방화하기. 포스트 식민시대의 사상과 역사적 차이』, Éditions Amsterdam, Paris, 2009.
(3) 서발턴 연구 그룹이 시작한 사상운동. 엘리트의 사관이 아닌 민중의 눈으로 식민시대의 인도역사를 재구성했다.(편집자 주) Partha Chatterjee, ‘Controverses en Inde autour de l’histoire coloniale(인도 식민역사와 논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6년 2월호.
(4) John M. Hobson, 『The Eastern Origins of Western Civilis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5) Andre Gunder Frank, 『ReOrient : Global Economy in the Asian Ag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1998.
(6) Serge Gruzinski, ‘Faire de l’histoire dans un monde globalisé(글로벌 세계에서 역사 읽기’, <Annales. Histoire, Sciences Sociales>, 66e année, n° 4, Paris, 2011. 10-12.
(7) Andre Gunder Frank et Barry K. Gills, 『The World System : Five Hundred Years or Five Thousand?』, Routledge, Oxford, 1993.
(8) 여러 가설을 평가해 발견에 도달하게 하는 단서.(편집자 주)
(9) Alain Bihr,『La Préhistoire du capital. Le devenir-monde du capitalisme(자본의 선사시대. 자본주의의 미래세계)』, Éditions Page 2, Lausanne,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