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불법체류 노동자 파업 그후 10년

체류증부터 조합원증까지

2018-08-31     뤼시 투레트 | 기자

파업 이후의 시간은 대체로 험난하다. 따라서 뭉쳤던 이들도 자연스럽게 흩어지기 마련이다. 2008년, 용기를 내 한데 모여 합법화를 주장했던 프랑스의 불법체류 노동자들도 이 과정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날 이후로 너무 다양해진 그들의 진로는 집단의 투쟁과 개인의 생활이 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준다.


지난 2012년 건설업체 ‘에파주’에 정규직으로 취직한 아마두 마이가(1)는 사내 노동총연맹(CGT)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그에게 CGT는 이미 익숙한 곳이었다. 말리 출신인 그는 불법체류 신분을 벗어나 체류증을 얻기 위해 CGT의 깃발을 들고 14개월 동안 파업을 벌였던 적이 있다. 이제 33세가 된 그가 파업에 참여한 날들은 현재 은퇴를 앞둔 노동자들의 파업참여일보다 더 많을 정도다. 새롭게 알게 된 이곳의 노동조합원들에게는 이런 그의 경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회사 동료에게 베르나르 티보 위원장을 몇 번 만났었다고 했다.(2) 그랬더니 그가 ‘농담하지 마! 나는 위원장을 단 한 번 봤는데!’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 시절 찍었던 사진 몇 장을 보여줬다. 내가 유명한 노동조합 운동가들과 알고 지낸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노동조합은 체류증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가?

마이가는 과거 파업을 하며 알게 된 동료들과 함께, 그들의 출신지인 말리에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단체를 조직했다. 2016년 프랑스로 귀화한 그는 그 후로도 노동조합 선거에 빠진 적이 없고 시위에도 항상 참여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일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2017년 7월에는 파리 외곽 보몽-쉬르-우아즈에서 열린 추모 시위에도 참여했다. 1년 전 이곳에서 경찰 검문 중 사망한 아다마 트라오레를 기리는 시위였다. 어떤 시위든 불법체류자 행렬이 있으면 마이가는 항상 그들과 합류한다. “나도 바로 그곳에서 시작했다. 나는 물론, 많은 동료들이 그들에게 힘을 보태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체류증을 받지 못한 그들을 지지하고 있다.”

10년 전인 2008년 4월 15일, 프랑스의 불법체류 노동자 수백 명이 체류증 발급을 요구하며 파업을 선언하고 회사를 점령했다. 과거 말리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만큼, 이미 출신국에서 사회운동을 경험한 노동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모두들 처음 참여하는 사회운동이었으며 이를 통해 노동조합과 관련된 수많은 법규와 실무를 배울 수 있었다. CGT의 센-생드니 보비니 지역지부를 맡고 있으며 CGT 내 이주노동자 연합의 공동책임자로 있는 장-알베르 기두는 말했다. “이곳에는 다른 노동조합 운동가에게는 없는 경험을 쌓은 이들이 많다. 고용주와 협상할 줄 알고, 조직을 활성화하는 법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불법체류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노동조합 운동가들로부터 “불법체류 노동자들은 체류증을 받고 나면 보기 어렵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오랜 투쟁으로 녹초가 된 조합원들끼리 연락하기 힘들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법체류 노동자들에게 있어 노동조합은, 단지 체류증을 얻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럴까? 과거 함께 활동했던 불법체류 노동자들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전례 없던 시위에서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은 어떤 성과를 건졌을까?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2008~2009년 파업을 벌였던 조합원들을 만났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 합법화가 되자마자 노동조합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불법체류 노동자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회운동을 한 차례 벌이고 난 뒤에는 다시 일상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정치학자 소피 베루는 “CGT에는 일종의 믿음이 있다. ‘시위가 있으면 참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사회운동에서 대단한 효과는 발견하기 어렵다. 물론 1968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파업하는 동안은 무급여이기 때문에, 파업에 참여했던 조합원들은 빚으로 생활해야 했다. 체류증을 받은 후에는 이 빚을 갚기 시작했다. 초과근무를 자처하는 이들도 있었고, 본업과 부업을 병행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노동조합은 대부분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된다.

게다가 그동안 직장이나 개인의 삶에서 조금의 변화도 꿈꾸지 못했던 이들은 합법화가 된 후 상대적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특히 어떻게든 직업이나 직장을 바꾸기를 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받은 임시 체류증의 유효기간은 1년에 불과하다. 1년 후 무직 상태이거나 직장이나 직업을 바꾼 경우에는 체류증 갱신이 거부될 수도 있다. 이처럼 그들의 머리 위에 놓인 다모클레스의 검이 결국 요구사항을 외치기보다는 순응하는 편을 택하도록 종용하는 셈이다.

“고용주는 파업을 절대 잊지 않는다”

불안정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는 일터로 돌아가는 것조차도 난항의 연속이다. 건설 현장에서 단기계약직으로 일해 온 방주구 트라오레는 파업 당시 대표단으로 선출돼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함께 파업에 참여했던 동료들의 일자리 회복을 위해 여러 회사를 방문했다. 그는 그러던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 동료는 자기 직장도 아닌 옆 회사를 점거할 때 행렬 맨 앞에 섰던 사람이었다. 파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고용주는 ‘지금은 일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나서서 개입하긴 했지만, 그가 일자리를 다시 얻은 것은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뒤였다.”

파업에 참여했던 마마두 디아카테와 그의 동료들 역시 보복성 피해를 받아야 했다. 이들은 연대노총(Solidaire)과 불법체류자를 돕는 지역단체의 도움으로, 본인들이 다니던 청소회사 건물을 39일 동안 점거했다. 파업이 끝나자 고용주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들을 밖으로 내몰려고 했다. 파업에 참여했던 한 노동자는 이렇게 하소연했다. “고용주는 우리가 파업을 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는 파업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에게 쓰레기장이 깨끗하게 청소되지 않았다는 둥 끊임없이 등기를 보내왔다. 파업 전만 해도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난 적이 없다.” 

이후 사내대표로 선출된 디아카테의 경우, 아침 6시에 업무가 시작되는 집에서 가까운 작업장 대신, 5시부터 시작되는 멀리 떨어진 작업장으로 배치가 되기도 했다. 별다른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업으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만난 과거의 불법체류 노동자들은 모두 노동조건이나 일자리 면에서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다. 오랫동안 하수도 건설 업무를 맡아왔던 방주구 트라오레는 배관 및 보일러 보수 관련 직업자격증명서(CAP)를 취득했다. 대학원에서 세포생물학을 전공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외식업 분야에서 단기계약직을 전전하는 데 만족해야 했던 무사 쿨리발리는 2년간의 도제식 교육을 이수해 지금은 품질관리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다.  

수레를 운반하는 일을 해왔던 모하메드 디에고 은자이 역시 최근에는 대형 화물차를 운전하고 있다. 체류증을 발급받으면서 사회적·지리적인 이동을 해야 하는 탓에 노동조합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있다. 은자이의 경우 화물차 운전 연수를 받기 위해 파리를 떠나 렌 지역으로 이사해야 했고, 그곳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노동조합의 제약도 없고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지도 않았던 그는 결국 CGT를 떠나게 됐다. 2009년과 2010년 일드프랑스 지역 내 연합파업에 참여했던 압둘 코나테도 유망한 직종인 기중기 운전 연수를 받기 위해 2016년 마옌 지역으로 이사했다. 그는 현재 단기 일자리를 찾기 쉬운 낭트에 거주하고 있다. 

코나테는 체류증을 발급받는 계기가 됐던 마시 지역 지부에 아직도 소속돼 있기는 하지만 낭트에서는 노동조합 활동에 전혀 참여하고 있지 않다. 그는 그 이유를 “아직 이 지역을 잘 모르고, 시간도 여유롭지 않다. 지금은 어린 아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고 싶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2008년 당시 20대가 대부분이었던 불법체류 노동자들은 이후 가정을 꾸리면서 노동조합과 멀어지기도 했다. 이제 부모가 된 젊은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떠나 결국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가게 됐다.

노동조합 활동을 지속시키는 이들

어떤 단체에도 소속돼 있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비공식적인 형태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도 있다. 동료들의 일자리 회복을 돕고 있는 방주구 트라오레나, 아직 불법체류 신분인 동료 건설노동자들에게 합법화 요구를 권하고 있는 보카르 쿠마르의 예가 그렇다. 은자이도 동료들의 급여명세서를 함께 봐주고 ‘누락’된 초과근무수당을 요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들이 잘 알고 있는 관련 법규들을 통해 이제는 동료들을 보호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합법화된 후로도 전통적 의미에서의 노동조합 활동을 이어가는 노동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대개 직원대표기구가 설립된 대형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소피 베루는 “CGT는 사내 노동조합과 노동조합 활동의 연관성을 잘 알고 있다. 직장 내에 노동조합이 있고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적극성을 가지게 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무사 트라오레의 경우가 그렇다. 1994년 19세 때 학업을 위해 프랑스에 온 그는 비자 문제로 대학에 등록할 수가 없었고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2007년 환경전문기업 ‘베올리아’에 취직한 그는 텔레비전을 보던 중 레스토랑 체인 ‘버팔로 그릴’의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건물을 점거해 급여명세서를 흔들며 합법화를 요구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후 그는 CGT 마시지역 지부의 간부 레몽 쇼보와 만났고, 그와 함께 베올리아 내에 불법체류 노동자를 위한 연맹을 조직했다. 이들은 2008년 봄 에손 지역 소재 회사 차고지를 점거했다. 트라오레는 피켓을 들고 시위에 참여하며 사기를 북돋웠고 고용주와의 협상에도 참여했다.
무사 트라오레가 체류증을 발급받은 지 몇 달 뒤, 빌-드-마른 렁지스 지역에 위치한 차고지에서 또다시 시위가 불거졌다. 그는 자연스레 발언권을 쥐게 됐고 경영진 및 직원대표들 간 논의에도 참여했다. 트라오레는 “내가 파업의 협상 자리에 참석할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찾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CGT의 대표로 선출된 그는 동료들을 신뢰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 공동체, 즉 말리 출신의 많은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이들 중 글을 읽거나 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그친다. 심지어 휴가 신청서를 쓰는 것조차도 이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롭게 임기를 시작하는 사람이면 으레 그러하듯 트라오레도 노동자들이 기술적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많은 일을 하고 있다.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그는 이제 교육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경력이 많은 노동자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결국은 노동조합 대표단이 됐다.

트라오레처럼 여러 노동자 조직들이 잘 정착된 대기업에서 일하는 것은 사실 과거 불법체류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특히 노동조합 활동이 거의 없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2008년 봄에 석 달에 걸친 점거 농성 후 체류증을 획득했던 에손 지역 청소업체 ‘밀레니움’의 노동자 47명은 결국 다시 파리 전시회장이나 에어쇼 박람회장 등의 통로를 쓸고 닦는다. 근무시간이나 급여 등 노동조건도 다시 형편없어졌다. 이 회사에는 2백여 명의 직원들을 조직할 만한 노동조합 전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체가 된 파업, 10년 사이의 변화
 
CGT의 노동조합 대표단인 모디보 디아와라는 “당장은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2011년, 노동자 몇 명이 CGT 마시 지역 지부를 찾아왔다. 과거 체류증을 발급받았을 때도 CGT의 도움을 얻었던 이들이 다시 이곳을 찾은 이유는 회사 내 노동조합 지부를 만들고 선거를 위한 명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도움을 받아 요구사항을 수정한 이들은 마침내 시간제 근무 일반화에 성공했고 일부는 상근직으로 채용되기도 했다.

당시 선거에서는 전국단위 노조 중 CGT가 후보들을 등록한 유일한 조합단체였다. 투표는 온라인으로 진행됐는데, 글을 모르는 노동자들도 많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선거가 가능했을까? 노동자들의 일터는 제각각이었지만 생활반경은 대체로 비슷했다. 이주 노동자 숙소에서 거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형성된 친밀하고 가족적인 관계가 투표 결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투표 결과 CGT 후보가 최소 득표수를 넘기면서 선출됐고, 2015년에 또다시 선출됐다. 불법체류 노동자들은 이제 노동조합을 의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일드프랑스 내 대부분의 행정구역에서는 이들을 위한 법률상담도 제공됐다. 반대로 정부 당국에서도 노동조합 단체들을 노동자 합법화 문제를 논할 적법한 교섭상대로 여기고 있다.

CGT의 에손 지역 지부 집행위원회는 과거 불법체류 신분으로 파업에 참여한 바 있고 최근에는 유통기업 ‘리들’에 정규직으로 채용된 알산 칸을 내세우고 있다. “지역지부의 운동가들은 은퇴한 이들이거나 기업에서 선출돼 대표위원 활동시간에 대한 혜택을 받고 있는 직원들이 대부분이다”라고 말한 그는 기업에서 선출된 경우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단기 계약직을 전전해온 그는 매주 새 계약서를 쓰면서 다음 날에는 노동조합의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휴가를 쓰겠다는 어려운 말을 해야만 했다. CGT 내 이주노동자 연합의 공동책임자인 마릴린 풀랭은 “이 문제는 불법체류 노동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노동조합 활동에 참여할 시간을 낼 수 없는 소외된 모든 노동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알산 칸은 정규직이 되고부터 노동조합 활동 참여를 위해 시간을 ‘조율’할 수 있게 됐다. 지난 2월과 3월, 6주에 걸친 불법체류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 준비를 도왔을 때도 그는 시위 첫날 국제특송기업 ‘크로노포스트’의 물류센터를 점거하는 현장에 응원 차 방문하고자 회사에 휴가 일정 변경을 신청했다. 다행히도 그와 마찬가지로 세네갈 출신이며 프랑스민주노동연맹(CFDT) 소속인 그의 사장은 이 휴가 신청을 수락했다.

2018년 초 진행된 이 파업 시위에는 일드프랑스 소재  7개 기업에서 일하는 총 160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이들은 대부분 단기 계약직이었으며 쓰레기 수거 및 재활용 처리, 물류운송, 특송 우편물 배달, 음식배달 등을 하고 있었다. 점거 시위 하루 전, 불법체류 노동자들은 파리 외곽 몽트뢰유에 위치한 CGT 사무실에 초대됐다. 시위대표단이 단상에 올랐다. 2009년 보비니 노동거래소에서 열렸던 시위 준비 모임에서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높이는 조합원들의 모습을 좌중에서 지켜보기만 헸던 불법체류 노동자들과는 대조적이다.

게다가 이들은 매주 열리는 노동조합활동 조직 관련 회의에도 계속 참여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그것이 당연시 여겨지지 못했기 때문에 불법체류 노동자들의 참석은 몇 주에 한 번으로 그치곤 했다. 다른 법적 요건의 변경 없이 체류 합법화만을 요구한 불법체류 노동자들은 두 달 만에 체류증을 받을 수 있었다. 2008~2009년에는 1년이 걸렸던 일이었다. 

결국 노동조합 운동가나 파업노동자들이 이 투쟁에 전력투구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조성된 만큼, 파업 이후로 몇 달 안에 해당 기업들 내 노동조합 지부가 세워지는 모습을 예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글·뤼시 투레트 Lucie Tourette
기자. 저서로 『On bosse ici, on reste ici! La grève des sans-papiers: une aventure inédite(이곳에서 일하고, 여기에 머무른다! 불법체류 노동자 파업: 전대미문의 모험)』(La Découverte, coll. ‘Cahiers libres’, Paris, 2011)(공저)이 있으며, 다큐멘터리 <On vient pour la visite(방문을 위해 왔습니다)>(Asplan-Vezfilm Limited, 2012)를 제작했다.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미래 대예측>등이 있다.

(1) 무사 트라오레, 모하메드 디에고 은자이, 보카르 쿠마르를 제외하고 본 기사에 실린 노동자들의 이름은 전부 가명이다.
(2) 1999년부터 2013년까지 프랑스노동총연맹 위원장을 맡았던 베르나르 티보는 2014년 이후 국제노동사무국(BIT)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박스기사 1

“이곳에서 일하고, 살고, 머무르다”

2002년부터 2004년, 그리고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내무부 장관을 맡았던 니콜라 사르코지는 임기 중 ‘불법 이민과의 전쟁’을 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그가 내무부에 있는 동안 불심검문의 빈도가 강화됐고 정식 체류증을 소지하지 않은 외국인들이 체포되는 일도 많아졌다. 이민자 체포는 2002년 4만 9,470건에서 2008년 1만 1,692건으로 2배 이상, 추방은 2008년 2만 9,796건을 기록하며 약 3배 증가했다.(1) 인류학자 스테판 르 쿠랑은 “달리 말하면. 체포된 이민자 5명 중 1명 이상이 추방됐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동안 불법체류자들은 ‘위협 속에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2)

민자에 대해서는 프랑스어 시험을 시행하고 재산 하한선을 적용하는 등― 2007년 11월 20일 발효된 이민·통합·난민에 대한 법은 이민자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듯했다. 불법체류 중인 노동자들도 고용주로부터 추천서를 받을 경우 체류증을 발급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절차는 여전히 예외적이었고, 불법체류자들이 그다지 종사하고 있지 않은 특정 직업군(일례로 산업디자이너 등)만이 혜택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규정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만 보였던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마침내 체류증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불법체류자들은 자신들의 합법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도움의 원천으로 노동조합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2008년 4월 15일, 파리 내에서 근무하던 3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근무지를 점거하고 나섰다. 토목, 건설, 숙박, 외식업, 청소, 제조업, 간병 등 다양한 분야의 유명한 기업들이 대상이 됐는데, 여기에는 다국적 환경전문기업인 ‘베올리아’,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퀵’, 토목건설기업 ‘아르카뎀’, 그리고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쉐파파’, ‘비스트로 로맹’, ‘피자 마르자노’ 등이 포함돼 있었다. 파업이 시작되자 고용주들은 모범적인 노동자로 여겼던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모습에 매우 놀랐다. 이런 파업 시위는 주로 노동총연맹(CGT)과 인권단체 드루아 드방(Droits Devant), 연대노총(Solidaire), 전국노동연맹(CNT) 등의 도움으로 조직된 것이었다.

이 전례 없는 시위는 노동업계의 전통적인 시위 방식(근무지를 점거하는 형태의 파업)과 불법체류자들이 주장하는 핵심 요구사항인 ‘합법화’를 실현했다. 결국 몇 주에 걸친 파업 이후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체류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점거 시위가 해산되자마자 프랑스 경시청은 이들의 합법화를 곧바로 중지했다. 이듬해인 2009년 가을, 불법체류 노동자들의 요구에 CGT와 연대노총을 포함해 11개의 노동조합 및 단체들은 다시 한번 시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6,800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근무지를 점거하거나 고용주연맹과 같이 상징적인 장소를 점거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파업은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중에는 1년이 넘도록 점거가 지속된 곳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불법체류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이상 뒤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전에는 고용주들도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의 행정적 신분을 모르고 있을 수 (또는 모른 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결국 체류증을 발급받지 못한 노동자들은 일자리마저 잃게 됐다. 

(1) ‘La gestion des centres de rétention admisnitrative peut encore être améliorée(행정유치시설 운영은 더욱 개선될 수 있다)’, rapport d’information n.516(2008-2009) de M. Pierre Bernard-Reymond, Sénat, Paris, 2009/07/03.
(2) Stefan Le Courant, ‘Ce que fait la politique de contrôle de l’immigration(이민통제정책의 결과)’, Champs pénal/Penal Field, vol.VII, 2010, https://journals.openedition.org/champpenal/



박스기사 2

관리직과 노동자 대표, 선택의 기로

체류증을 획득한 노동자들은 때로는 극적인 선택지 앞에 놓이기도 한다. 무사 쿨리발리와 무사 트라오레는 합법화 이후 단순노동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제는 직장에서의 승진과 노동조합과의 약속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트라오레는 1997년 ‘베올리아’에서 일을 시작한 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늘 쓰레기차의 뒤를 따르는 환경미화원으로 일해 왔다. 그는 일을 시작한 때부터 체류증을 발급받게 되기까지 12년 동안 직장에서 어떤 형태의 ‘자구책’도 시도한 일이 없었다. 혹시 주위의 관심을 끌게 될까 두려워 연수나 교육도 전혀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체류증을 발급받은 후로는―개인 시간을 내어―폐기물 처리 및 도시정화 관련 직업자격증명서(CAP)를 취득하는 데 성공했고, 운전면허도 B급 면허와 C급 면허까지 추가로 취득했다.

그 후 운전 일을 맡으면서 폐기물 메탄화 처리 및 분리수거에 대한 교육을 이수했다. 2014년에는 다른 환경전문 기업인 ‘위르바제르’에 채용돼 지역 내 폐기물 수거 위탁계약을 맺었다. 그는 이후 현장관리감독 교육을 받은 뒤 2015년과 2016년에는 현장 감독직의 대리근무자로도 여러 차례 투입되기도 했다. 현재 트라오레는 노동조합 대표단이자 노동자 대표이면서 기업운영위원회 소속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상급자가 되면, 계속해서 노동자 대표직을 맡을 수 있을까? 최근 트라오레의 사장은 그에게 관리직 자리를 제안했다. 대신 폐기물 처리소를 떠나는 조건이었다. 트라오레는 “너무 어려운 결정이었다”며, 당시 상황과 심정에 관해 이야기했다. “월급도 대폭 오르고 회사 차도 사용할 수 있게 되지만, 다른 폐기물 처리소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동료들은 ‘우릴 버리지 말라’고 했다. 결국 나는 조금 손해를 보기로 했다. 하지만 계속 나아갈 것이라고. 돈이 행복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동료들이 나를 대표로 뽑아주지 않았던가!” 

결국 그는 원래대로 다시 운전대를 잡기로 했다. 트라오레는 지금도 기존 근무지에서 노동자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이곳을 떠났다면 직급이 올라갈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료들은 내가 매수됐다고 말했을 것이다.”

반면 쿨리발리는 반대의 선택을 했다. 의도한 선택은 아니었다. 세네갈 다카르 시의 외곽 지역 출신인 그는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으나 화학공업 분야에서 일했던 그의 아버지는 이를 단호히 반대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로 건너와 세포생물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박사과정을 등록할 때가 돼 서류상의 문제가 생겼다. 학교등록이 되지 않아 체류증도 나오지 않게 된 그는 결국 불법체류 신세가 됐고, 학업도 멈춰야 했다. 그 뒤로 8년 동안 외식업계에서 단기 계약직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 2010년, 노동총연맹(CGT)의 도움을 받아 그와 동료들은 종일 근무지를 점거하며 시위를 벌였고, 그 결과 사장으로부터 체류증 발급에 필요한 서류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석사과정까지 학업을 마친 그는 노동조합 지역지부 운동가들과 함께 동료들의 서류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고, 노동조합 교육도 여러 차례 받았다. 지역지부 간부 한 명이 자리를 떠나게 되자 그 뒤를 이어받기도 했다. 그는 자발적으로 전화와 일정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고, 법률 상담소 운영에도 도움을 줬다.

한편 쿨리발리는 체류증을 발급해준 회사에서 3년간 계약직을 유지하며 품질관리책임 교육을 병행했다. 그는 “외식산업에서 일했고 생물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니 뭔가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먼저 식품기업 ‘소덱소’에서 품질관리 실습을 마쳤고 이후 보건위생 분야에서도 실습을 거쳤다”고 덧붙였다. 보조 직원으로 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책임자가 된 그는 현재 품질규정을 준수하고 관리절차를 마련하고 있으며, 직원 대상으로 품질·위생·안전 관련 기준들을 알려주고 있다. 쿨리발리는 말했다.

“처음 교육을 이수하기 전까지는, 정규직 노동자가 되면 노동조합에 전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 자리에 오고 보니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품질관리 책임자라는 것이 중간에 낀 자리였다. 경영진에서도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결국 직장에서의 앞날을 확보한 대신, 노조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