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되고픈 러시아의 꿈은 왜 사라졌나?

2018-08-31     엘렌 리샤르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냉전 종식 이후 공동안보 메커니즘을 갖추고 화해 무드로 들어선 유럽. 러시아는 그 안에서 자국의 미래를 보았다. 한편 서유럽은 민족주의 반동의 위험을 감수하며, NATO라는 검을 집안 문턱까지 들였다.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에서 불편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마치 러시아 연방평의회 대기실에서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기다린 느낌이다. 알렉세이 푸치코프 러시아 상원의원은 서구 언론을 불신한다. 그는 완벽한 프랑스어로 “(서구 언론은) 나와의 인터뷰에 15분도 할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 하원 외교위원장을 지냈고, 러시아 TV채널 ‘TV센터’의 정치프로그램 ‘포스트-스크립텀’을 20년째 진행해온 그는 한 시간 반 동안 질문에 성실히 답해줬다.

한때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연설문을 작성하기도 했는데, 그때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는 옛 지도자에 대해, “권좌에 오르기 전에는 그저 당내 농업전문가였고, 꽤 순진했다”고 회상했다. 푸치코프 의원은 러시아 대통령의 대외정책의 열렬한 지지자로, 2014년 우크라이나 내전 이후 미국, 캐나다, 영국 입국금지 명단에 올랐다. 

고르바초프, 유럽의 중심에 서기를 원하다

고르바초프의 궤적에는 러시아 역사가 함축돼 있다. 그는 러시아가 유럽이라는 거대한 무대 중심에 다시 서길 바랐다. 서구파였던 그는 특정 궤도를 고집하던 슬라브파와는 반대로, 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 시절부터의 러시아를 유럽에 매어두려고 부단히 노력했다.(1) 1980년대 말, 이런 방향성을 펼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양분된) 블록의 개념을 벗어난 국제질서가 도래한 것이다. 당시 유럽에 대한 그의 꿈이 어떻게 실패했는지 짚어보지 않고서는 오늘날 러시아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1985년 가을, 고르바초프는 파리로 첫 해외 방문을 가면서 유럽 및 서구 지도자들을 의식한 외교정책인 ‘유럽공통의 집’을 발표했다. 그 장소로 프랑스의 수도를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샤를 드골이 ‘대서양에서 우랄산맥에 이르는 유럽’을 표방했던 것과 맥을 함께한 것이다. 모든 국가가 신탁통치에서 완전히 독립하고, 그 안에서 러시아가 공산주의를 포기하는, 그런 유럽을 말이다. 이는 한때의 엉뚱한 생각처럼 보였다. 당시 러시아는 드골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련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이 분단되고, 구대륙의 중심에서 소련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집착했다.

‘공통의 집’의 목표 중 하나는, 미국과 유럽 연맹국 사이를 적당히 벌려놓고 미국이 협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국방비 지출부담 때문에 군비경쟁을 종결시키는 것이 시급하다고 봤다. 평화적 공존을 보장하기 위한 전략적 등가였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균형점에 불과했다. 두 차례의 멸망 위기가 세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갔다. 

1983년 9월,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소련 방공군 장교는 핵미사일 공격으로 오인할 뻔한 사건을 겨우 막아냈다. 1983년 11월, NATO의 군사훈련 ‘에이블 아처 83’을 두고 소련은 훈련을 가장한 실제 공격이라고 의심했다. 푸치코프는 “과학자들이 ‘핵겨울(핵전쟁이 일어난 뒤에 계속된다는 어둡고 긴 겨울 상태)’이라는 무시무시한 개념을 만들었다. 나는 냉전을 끝내자는 쪽이었다”고 회고했다. 1985년 11월, 어렵사리 성사된 제네바 회담에서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는 핵전쟁이 절대 발발하거나 확산되지 않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1986년 10월, 레이캬비크 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대범한 제안을 했다. 5년 안에 핵무기 50%를 감축하고, 이후 5년간 핵무기를 완전히 해체하자는 것이다. 레이건은 이에 동의하면서도 전략방위구상(SDI) 계획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소련은 SDI가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우주무기이기 때문에 군비경쟁을 다시 촉발할 것이라고 봤다.(2) 불신의 심연을 없애기 위해 고르바초프는 일방적인 양보를 했다. 1987년 12월 8일 체결된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 따라 소련은 핵미사일 1,836기를 폐기하기로 했는데, 이는 미국보다 2배 이상 많은 수치였다.

1988년, 사회주의 블록이 내부적 어려움에 짓눌리는 가운데 ‘유럽공통의 집’은 전략적인 일관성을 지켜나갔다. 소련 경제는 난기류에 들어섰고, 고르바초프는 사유재산제도와 계획경제시스템 도입 없이는 절대 난기류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동유럽에 부는 민주주의 열망은 그의 신념에 확신을 더해줬고, 결국 역사의 흐름 속에 정치적 개방을 시도했다. 이념적 대립은 접어둔 채 목표는 더 이상 블록 간 협력이 아니라, 공통의 가치(자유, 인권, 민주주의, 주권) 아래 확장하는 유럽에 녹아드는 것이었다. 당시 외교관이었던 블라디미르 루킨의 말을 빌리면, “유럽으로의 회귀, 러시아가 오래 머물던 변두리의 문명화”였다.(3) 

알렉산드르 사마린 주 프랑스 러시아대사관 참사관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는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고, 공산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자명했다. 러시아는 1998년 이후 WTO 회원국이 됐다. 현재는 자본주의 국가로서 보호무역주의에 반대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러시아의 퇴직 외교관은 “모두 우리가 궁지에 몰렸다고 느꼈지만, 일방적으로 양보하겠다고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사태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 국가 내 소련의 무력개입을 정당화하는 이른바 ‘브레즈네프 독트린’(브레즈네프의 ‘제한주권론’에 따라 소련의 체코 군사개입이 이뤄짐-역주)’에서 이야기한 ‘사회주의 형제국’의 제한적 주권론에 회의적이었다. 그의 개혁·개방 정책은 사회주의 형제국들의 민주자유화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무력개입도 거부하면서, 결국 소련 연방의 해체가 가속화되고, 소련이 영향력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의 전향적 자세에 서방국가들은 여러 약속들로 응답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고르바초프는 통일독일의 중립화를 지지했다(그렇지않으면 통일독일은 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 두 군사동맹조약에 가입해야 했다). 또한 그는 통일독일을 1975년 헬싱키 최종의정서에서 출범한 유럽안보협력회의(냉전시기에 동서진영 간 긴장완화를 위해 창설한 범유럽 안보협력기구, CSCE)에 편입시켰다. 동서 간 데탕트의 시대가 이어졌다. 그러나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다시 긴장이 고조됐고, 35개국이 서명했던 헬싱키 의정서는 두 진영 간의 흥정물로 전락했다. 

서구는 러시아가 여러 해에 걸쳐 강조한 국경불가침 원칙을 받아들였고, 독일의 분단과 동유럽·중유럽 내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그 대가로 사회주의 진영은 인권과 기본권(사상·양심·종교·신념의 자유 포함)을 존중하기로 약속했다. 소련의 눈에는 CSCE가 미국, 캐나다, 소련, 유럽 전 국가를 아우르는 유일한 기구로서 유럽과 가까워질 초석이라고 믿었다. 

1990년대, 서구와 한 배를 탔다고 믿다

1990년, 고르바초프 이외에도 범유럽주의를 옹호하는 세력이 생겼다. 과거에 평화주의를 표방했던 새로운 동유럽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급작스럽게 서부진영에 편입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고, 이런 성향 때문에 비무장 중립지역이 형성됐다. 바츨라프 하벨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은 당선 다음 날 두 군사동맹을 해체하고, 외국군은 모두 동유럽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해 미국을 당황스럽게 했다. 더욱이 로타르 더 메치에어 동독 총리가 통일독일의 중립화를 주장하면서 헬무트 콜 서독 총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동유럽 지도자들은 미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새로운 대(大)유럽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고민을 나눴다. 프랑수아 미테랑은 확장된 유럽안보시스템에 통일독일을 편입시키길 원했고, 러시아에도 자리를 마련해줬다. 그는 1989년 12월 31일 대통령 연말인사에서 선언했다. “유럽은 반세기 전 우리가 알던 유럽이 아니다. 과거 두 초강대국에 의존하던 유럽은 집으로 돌아가듯 본래의 역사와 지형으로 돌아갈 것이다. 헬싱키 의정서를 시작으로 1990년대에 진정한 의미의 유럽연맹이 탄생해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연합할 것이라 믿는다.”

그는 소련의 고립을 막기 위해 동심원적 구조의 범유럽을 설계했다. 이에 따라 유럽경제공동체(EEC)의 12개 회원국들은 구(舊)공산권 국가들을 포괄하는 확장된 범유럽협력기구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했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도 세력 회복 중이던 독일을 유럽 안에 편입시키려 했다. 1990년 2월, 그녀는 더글라스 허드 외무장관에게 “동유럽 국가들과 궁극적으로는 소련을 아우르는 확장된 유럽연맹”이라는 선택지를 협상테이블에서 강력하게 내세울 것을 지시했다.(4)

고르바초프는 이런 변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990년 3월, 동독에서 최초로 치러진 자유선거에서 기독교민주연합(CDU)이 승리한 이후,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서독이 동독을 흡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세는 헬무트 콜과 그의 주요 동맹자인 조지 H. 부시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당시 소련은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었다. 차마 적국을 지원할 수 없었던 미국은, 독일에 대신 아량을 베풀 것을 권했다. 독일은 소련군 본국송환이라는 명목 하에 135억 마르크(약 9조 원) 지원을 약속했고, 이는 소련을 협조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1991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체결하면서 서방국가들은 강력한 핵무기 감축안을 성사시켰다. ‘인민 민주주의’ 국가들은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1991년 7월, 고르바초프는 런던 G7 정상회담에서 경제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수익성 없는’ 투자를 할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1991년 12월, 소련 붕괴는 범유럽 프로젝트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NATO는 파죽지세로 인민 민주주의 국가들과 구소련 발트국가들을 편입했다. 유럽연합(EU)도 같은 행보를 보였다. 

1993년, 미테랑은 동유럽 국가들의 NATO 가입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다. 군사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길 바랐던 동맹이었다. 미국에서도 이 때문에 러시아에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촉발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1946년 소련의 확장제지 정책을 창시한 조지 케넌은 1997년 NATO의 확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전후 미국정치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다. 이 결정은 러시아 민주주의 발전을 해하고, 냉전 분위기를 형성할 것이다. 러시아는 NATO의 팽창을 군사행동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른 곳에서 자국의 안보와 미래를 보장받으려 할 것이다.”(5)

1987~1991년 주소련 미국대사를 지낸 잭 매틀록은 미국의 오만함을 비판했다. “수많은 미국 정치인들이 냉전 종식을 무슨 군사적 승리처럼 여긴다. NATO가 확장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돼선 안 된다. 오히려 미국이 어떻게 중유럽 국가들의 독립이 유지될 거라고 이들을 안심시켜줄 수 있을지, 그리고 유럽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책임질 안보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돼야 한다.”(6)

1990년대, 사회·경제적 혼란으로 쇠약해진 러시아는 지정학적 이권을 지킬 수단이 부족했다. 미국의 특별한 파트너로서 강대국의 위치를 유지하고 싶어 했던 러시아에게 서방국가들은 러시아의 기대에 부합하는 조건들을 제시했다. 러시아는 미국의 동의하에 구소련에 산재해있는 핵무기들을 회수했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자리를 보존했고, 7대 자본주의 강대국을 의미하는 G7에 들어올 것을 제안받았다. 

아나톨리 아다미친 러시아 외무차관(1986~1990)은 “당시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연했고, 우리는 서방국가들과 한배를 타고 있다고 믿었다”고 회고했다.(7) 러시아 지도자들은 NATO의 확장이 군사적 위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보단 자신들이 고립될 것을 걱정하며, 이를 최대한 막고자 노력했다.(8) 1991년 12월, 보리스 옐친은 러시아가 ‘장기적으로’ NATO에 참여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안드레이 코지레브 러시아 외무장관은 CSCE(이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로 명칭 변경)의 결정을 NATO보다 더 우선시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21세기, 폐쇄적인 동맹의 시대는 끝났다

러시아가 이처럼 NATO를 격하시킨 것은 NATO가 1999년에 UN의 위임도 없이 인권보장을 이유로 유고슬라비아를 공습한 사건 때문이다. 러시아의 눈에 비친 NATO는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영역권 밖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듯했다. 주프랑스 러시아대사관의 유리 루빈스키 전 정치부 참사관(1987~1997)은 고백했다. “NATO의 베오그라드 폭격은, 나 같은 ‘공통의 집’ 프로젝트 지지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줬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친유럽 정책은 몇 년 동안 긍정적인 관성력을 행사했다.”
 
2000년, 첩보 기관 출신 관료가 러시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것이 옐친의 친서방·민주적 시대와의 결별을 의미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푸틴 대통령 취임 초반에 가장 두드러진 행적은 과도한 친유럽 정책을 잊자는 것이었다. 2001년, 푸틴은 분데스타크(하원) 연설에서 “유럽은 인적자원, 영토, 천연자원, 경제, 문화, 국방 면에서 자신의 역량과 러시아의 잠재력을 융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9·11테러 때는 대테러 동맹을 제안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를 무너뜨린 동맹군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12월, 미국은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리처드 닉슨이 1972년에 체결한 조약이었다.

2007년 2월, 푸틴은 뮌헨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계선과 장벽을 강요한다”며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판했다. 2008년, 푸틴은 조지아 대통령의 남오세티야 공격을 막고, 캅카스 지역에서의 NATO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는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고, 심지어 2009년 1월 유럽안보조약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러시아는 유럽에서 외면받자 옛 소련(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역경제통합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 와중에도 최대 무역파트너이자 주요 가스수출지역인 유럽에 결코 등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 프로젝트 덕분에 EU와 파트너십 협상을 하기에 더 좋은 입장이 됐다고 믿었다. 

그러나 2013~2014년 분란을 촉발한 EU-우크라이나 협력협정 진행에서 소외된 러시아는 EU를 비판하고 나섰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경제·역사적 관계를 감안하면 자국이 협상에 관여하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했지만, 유럽의 생각은 달랐다. “러시아 세력권이라는 발상 자체가 비합법적이며, 합법적 관심의 범위와 이를 표출하는 방식은 여전히 모호하다”고 영국 정치학자 리처드 사쿼는 분석했다.(9)

루빈스키는 “범유럽 노선은 크림반도에서 부서졌다”고 인정했다. 러시아는 유럽과 다시 특별한 관계가 되리라는 착각은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는 조건 하에서만 가능했다. “러시아는 ‘위대한 유럽’이 아닌, 역사 속의 유럽에 하위적 지위로 종속될 것을 제안받았다”고 사쿼는 설명했다. 러시아가 원한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지난 2월 13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벨기에 외무장관과의 공동기자회견에서 “우리는 (2014년 발동된 경제제재를 풀어달라고) 어느 누구에게도 애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파트너십이 재개된다면, 유럽으로 회귀하자는 고르바초프식 비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일 것이다. 

“세계는 변했다. 폐쇄적인 동맹과 블록의 시대는 끝났다”고 피오도르 루키아노프 <러시아 인 글로버 페어> 편집장은 말했다. 사마린 참사관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유럽만 이성을 되찾는다면, 러시아는 언제든 위대한 유럽을 건설할 준비가 돼있다. 우리의 목표는 통합의 통합이다. 즉, 유럽연합과 유라시아연합의 친목과 조화다.”

오늘날 러시아는 유럽을 주요 파트너로 생각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역사적 숙명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더 크다. “러시아는 유럽문명을 구성하는 일부가 맞다. 러시아와 EU의 관계는 우리가 세계정세의 중심이던 냉전시대 때와 같은 방식으로는 맺어질 수 없다. 아시아-태평양, 중동,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는 과정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판단했다.(10)

러시아는 다극화된 세계에서 강력한 한 축을 구현하길 바라고 있다. 러시아는 유로존 위기와 브렉시트 때문에 EU에 대한 흥미를 잃었고, 현재는 도널드 트럼프가 유럽-미국 관계를 단절시키는 상황을 즐기고 있다. “가라앉는 배에 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경은 동정으로 바뀌었다”고 질 레미 구소련 투자자문회사 사장은 단호히 말했다. 푸틴의 고문인 블라디슬라브 수르코브의 말에 의하면, “크림반도 합병은 서양을 향한 러시아 대여정의 마침표다. 서양문명에 합류하려는, 유럽인들의 ‘좋은 가족’이 되려는 수많은 헛된 시도들의 종착점인 것이다.” 이제 러시아는 ‘지정학적 고독’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글·엘렌 리샤르 Hélène Richar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이보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Marie-Pierre Rey, ‘La Russie face à l’Europe. D’Ivan le Terrible à Vladimir Poutine’, <Flammarion>, coll. ‘Champs Histoire’, Paris, 2016.
(2) Guillaume Serina, ‘Reagan-Gorbatchev. Reykjavik, 1986: le sommet de tous les espoirs’, <L’Archipel>, Paris, 2016.
(3) Marie-Pierre Rey, ‘Gorbatchev et la “maison commune européenne”, une révolution mentale et politique?’, <La Revue russe>, n° 38, Paris, 2012.
(4) Mary Elise Sarotte, ‘1989: The Struggle to Create Post-Cold War Europ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9.
(5) Andreï Gratchev, ‘Un nouvel avant-guerre? Des hyperpuissances à l’hyperpoker’, <Alma Éditeur>, Paris, 2017.
(6) Jack Matlock, ‘Superpower Illusions: How Myths and False Ideologies Led America Astray-And How to Return to Reality’,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2011.
(7) Lenta.ru, 2018. 5. 15.
(8) Kimberley Marten, ‘Reconsidering NATO expansion: a counterfactual analysis of Russia and the West in the 1990s’, <European Journal of International Security>, vol. 3, n° 2, Cambridge, 2017.
(9) Richard Sakwa, ‘Russia Against the Rest: The Post-Cold War Crisis of World Ord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
(10) Sergueï Lavrov, ‘Russia’s foreign policy in a historical perspective’, <Russia in Global Affairs>, n° 2, Moscow,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