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유대민족 중심체제로 가나?

네타냐후의 위험한 유대민족국가법 채택

2018-08-31     샤를 앙데를랭 | 언론인

지난 7월 19일, 이스라엘 국회 크네세트는 이스라엘을 ‘유대민족 국가’로 규정하는 헌법적 위상의 새 기본법을 통과시켜 논란을 빚고 있다. 종교와 출신에 따라 이스라엘 국민의 권리 기반을 정립하는 이 법을 통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자신의 이념을 완수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우리가 시오니즘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헤르츨(1)이 ‘유대민족 국가’의 개념(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내놓은 뒤 122년이 지난 지금에야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를 규정하는 기본 원칙을 법으로 정립했다.” 7월 19일 새벽 3시 35분, 이스라엘 의회가 새 기본법을 채택한 뒤 이런 견해를 밝힌 네타냐후 총리. 그는 유대민족 국가의 진정한 창시자가 되고자 한 것일까?

네타냐후 총리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민족국가로, 자국 내 모든 시민의 개인적인 권리를 존중한다. 중동 지역에서 오직 이스라엘만이 이 같은 권리를 존중한다.” 그런데 국가의 개념 정의에 있어 유대인 사회만을 우선시한 이 법의 여러 규정에서는 비유대인의 권리가 침해된다. 다수의 아랍인 소수민족을 포함해 이스라엘 내 비유대인 사회의 규모가 2백만여 명에 달함에도 새 기본법에서는 “자연권 및 문화·종교·역사적인 권리 측면에서 오직 유대인만이 이스라엘에서 배타적으로 자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히브리어가 이스라엘의 언어”라고 정한 이 법에 따라 아랍어는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차후 특수한 지위로 규정될 것”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헌법이 없는 이스라엘에서 이 기본법은 현행 법전에 새로이 추가될 예정이다. 그런데 이 법안 그 어디에서도 1948년 5월 14일에 선포된 이스라엘의 독립과 관련한 문구는 보이지 않는다(1948년 독립선언문에서 이스라엘은 ‘유대민주주의국가’라고 선언하며 민주주의와 유대민족주의 두 가지 모두를 수용했다-역주). 사실 네타냐후 총리는 시오니즘의 역사에 대한 자신의 저서에서도 단 한 번도 이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2)

뿐만 아니라 당시 정부 수반이었던 다비드 벤구리온 이스라엘 초대 총리가 이스라엘 독립일에 낭독했던 이스라엘 판례 기본법 내용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스라엘은 각국에 흩어져 사는 모든 유대인들의 이민에 대해 개방적이며, 자국의 모든 거주민을 위해 나라를 발전시켜 나아간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따른 자유와 정의, 평화의 원칙을 기반으로 수립되며, 아울러 종교, 인종, 성별과 무관하게 모든 시민에게 노동권과 참정권의 완벽한 평등을 보장하고, 양심·제의·교육·문화 측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보장한다”던 내용을 외면한 것이다.

네타냐후는 민족주의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인 수정시오니즘의 창시자 블라디미르 지이브 야보틴스키(1880~1940)와도 분명히 입장이 갈린다. 우파인 리쿠드 당의 총수 네타냐후 총리가 야보틴스키의 이름을 자주 언급하는 것은 사실이다.(3) 그러나 이 시오니즘 우파의 유서 깊은 지도자가 1940년 생애 마지막에 했던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일은 결코 없다. 

대영제국의 자치령으로서 유대민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의 건설에 우호적이었던 야보틴스키가 말년에 추구했던 나라는 유대인 대통령과 아랍인 부통령으로 이뤄지고, 모든 시민들이 그 출신이나 종교에 무관하게 동등하게 살 수 있는 나라였다. 유대인 사회와 아랍인 사회, 그리고 두 민족 각각의 언어가 법에 따라 동일한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4)

1977년에서 1982년까지 메나헴 베긴 정부(리쿠드당)의 요직을 지낸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 아리에 나오르 정치학 교수는 “야보틴스키의 자유주의적인 민족주의 시각은 유대민족 국가에 대한 이 신(新)기본법의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와 구별된다”고 지적한다. “신기본법에서는 소수민족의 모든 공동 권리를 거부하며, 이로써 민족 중심의 정치체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유대민족 국가로 인정해야 한다”

이렇듯 네타냐후 총리는 2012년 사망한 아버지 벤지온 네타냐후가 잡아놓은 이념적 틀에 갇혀 있다. 한때 야보틴스키의 보좌관을 역임했던 학자 벤지온 네타냐후는 비극적인 관점에서 조명한 유대인의 역사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가 태동하기 수백 년 전인 머나먼 상고시대 이집트에서부터 반유대주의가 생겨났으며, 이런 위험이 여전히 존속한다는 점을 입증하려 했다. 그는 2009년 2월 7일 아들과 함께 출연한 채널 <Aroutz2> 인터뷰에서도 “우리는 늘 민족말살의 위협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홀로코스트가 다 지나간 옛일이라 생각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아랍민족은 곧 적이었으며, 3년 후에도 “이 땅은 유대민족의 땅이지 아랍인을 위한 땅이 아니다. 이곳에는 아랍인의 자리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랍인들은 우리의 조건을 결코 수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5) 이에 벤지온 네타냐후는 이스라엘 국민들이 이런 위협을 인지하도록 해야 한다는 임무를 아들에게 맡기고 떠났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아랍인들이 우리를 몰살하려는 의지를 버렸다고 생각하는 좌파의 믿음이다.”(6) 베냐민 네타냐후가 집권 1기(1996~1999) 직전에 발간한 저서들에는 이런 주제들이 풍부하게 다뤄졌다.  

그러나 최초 집권 당시 젊은 신임총리였던 네타냐후는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압박 하에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의장과 손을 잡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헤브론 일부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철수하겠다는 내용의 2개 조약도 체결해야 했다. 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거절할 수 없었던 이런 양보 행보로 말미암아 1999년 총선에서 그는 우파세력 및 이스라엘 정착촌 내에서 지지기반을 잃었고, 서방국가들은 이런 네타냐후의 태도에서 실용주의 노선에 대한 희망을 기대했다. 

이후 2009년 3월 다시 한번 집권에 성공한 네타냐후는 이제 버락 오바마를 상대해야 했다. 새로이 백악관에 입성한 버락 오바마는 네타냐후에게 팔레스타인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영토 내 이스라엘 정착촌의 건설을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다. 6월 4일, 네타냐후는 어느 한 엄숙한 연설 자리에서 자신의 속내를 감춘 채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법안에서 그는 자신의 이념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조건들을 제시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유대민족 국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법안에 대해 라말라(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행정수도)의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역시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이건 결코 안 되는 일이다. 이집트 및 요르단과의 협상 과정이나 오슬로 협정 진행 과정에서도 이 같은 국가개념이 제시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에서조차 이스라엘이 이와 같이 정의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2011년에 맨 처음 유대민족 국가에 대한 기본법 발의안을 크네세트에 제출한 인물은 아브라함 모슈 디슈터다. 당시 중도우파 카디마 당 소속 의원이었던 그는 이후 리투드 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법안은 “독립 선언문의 정신에 부합해 유대민족 민주주의국가인 이스라엘의 가치를 법전에 명시하기 위해 유대민족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뜻을 지향했다. 하지만 우파는 먼저 이스라엘을 ‘유대민족 국가’로 정의한 뒤, 그다음에 ‘민주국가’로 규정하고자 했지만, 좌파에서는 “유대민족 민주국가”를 요구했었다. 양측의 논란이 지금까지 계속되던 상황에서, 네타냐후 총리는 지금이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에 가장 적기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일단, 내부적으로도 네타냐후는 거리낄 게 없었다. 2015년 선거 이후 구축된 연정 체제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우파 성향을 보였고, 따라서 미온적인 ‘국제사회’와의 위협요인들을 피하는 가운데 계속해서 정착촌 건설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의회 내에서도 연정 체제는 같은 목표를 추구하며 이념적으로 통일된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런 행보는 특히 시민사회에 대한 비정부기구의 영향력을 줄이는 법이나 정착촌에 대한 보이콧 금지법, 그리고 신메시아주의 성향의 시오니즘 종교 정당 ‘유대인의 집’ 대표인 나프탈리 베네트 교육부 장관이 제정한 원칙을 준수하지 않는 단체에 교육시설 접근을 금지하는 법 등 여러 가지 주요 법안들을 통해 나타났다. 

특히 교육과 관련한 이 마지막 법은 팔레스타인 영토 점령에 반대하는 퇴역 장병 연합 Breaking the Silence 및 B’Tselem 같은 점령지 내 인권단체 등 시민단체를 주요 타깃으로 삼고 있었다. 유대 사회를 ‘재정비’하는 이 같은 요소들은 벤지온 네타냐후의 시각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7) 같은 ‘유대인의 집’ 정당 소속인 아예렛 셰이크 법무부 장관은 제일선에서 대법원과 담판을 짓고 있는 인물이다. 지나치게 자유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평을 듣는 대법원 판관들은 향후 몇 달 내로 새 기본법을 저지할 만한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에 법무부 장관은 “만약 대법원에서 이 법을 폐기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을 의미한다”고 예고했다. 

국제적으로도 네타냐후 총리는 이보다 더 호의적일 수 없는 상황에 있다. 미국에서는 이스라엘 우파의 든든한 지원군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을 차지하고 있고, 유럽 쪽에서도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지원사격을 기대할 수 있다. 이들 두 나라와 맺은 협정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네타냐후 총리는 헝가리와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등 비셰그라드 4국의 아낌없는 지지를 받고 있는데,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이끄는 이 비셰그라드 4국의 도움으로 네타냐후 정부는 EU 측에서 날아오는 비난을 견제할 수 있다. 

사회학자 에바 일루스는 일부 ‘비자유주의’ 국가와 네타냐후 정부 사이의 이념적 유사성을 지적했는데, “이들 모두 자국의 민족, 종교, 인종이 다른 나라와 섞이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우월성을 확신하면서도 (민주주의의 옷을 입고 있어야 그에 따른 특권들을 계속 누릴 수 있으므로) 민주주의를 내세우고자 하는 국가들에 좋은 본보기가 되는 셈”이다. 

설령 그 과정에서 반유대주의와의 싸움을 포기하게 되더라도 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사회주의 좌파 종교 정당인 메레츠 당의 의원을 지냈던 니찬 호로비츠 기자는 헝가리와 폴란드의 각국 수반들이 네타냐후 총리와 맺은 관계의 근간을 이루는 원칙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내 반유대주의를 용서하시오. 그리하면 나도 당신네들의 (팔레스타인 영토) 점령에 대해 용서해줄 테니.”(8) 

반발하는 이들에게 당근을 제시한 네타냐후

지난 7월 19일 찬성 62표 반대 55표 기권 2표로 최종 채택된 디슈터의 유대민족 국가 법안은 여러 차례 수정 과정을 거쳤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으며, “종교나 인종에 기반을 둔 지역 신설”을 예고하는 조항도 다시 작성됐다. 그 대신 “유대민족 국가는 유대인의 이주확대를 국가적 가치로 간주하고, 이를 장려, 지지,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라는 내용이 들어갔다. 이스라엘 민주주의 연구소 부소장 겸 법학자인 모르데샤이 크렘니처는 “그렇다고 이 법의 ‘인종주의’ 성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꼬집었다. 

13개 의석을 보유한 좌파연합의 아랍계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 표결 직후 “여당이 아랍인 차별을 인정하고 강화하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수립한 꼴”이라고 비난하며 이 법안을 찢어버렸다. 8월 11일에는 좌파 연합 지도부의 호소 하에 이스라엘계 아랍인 수만 명이 텔아비브 거리에서 가두행진을 벌이며 법안의 폐기를 촉구했다. 이 법이 180만 명(전체 인구의 20%)에 달하는 아랍인들을 보다 낮은 지위의 국민으로 격하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뜻에 동조하는 수많은 유대인들과 (두 명의 전직 장성을 포함한) 좌파 인사들도 지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이스라엘 국기 옆에 놓인 20여 개의 팔레스타인 국기는 네타냐후 총리에게 있어 그저 “유대민족 국가 기본법이 필요하다는 증거”로만 보일 뿐이었다. 

이스라엘의 또 다른 15만 소수 민족 드루즈인과 시르카시아인들 역시 정부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다는 입장이다.(9) 이들 소수민족(의 남성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32개월간의 의무 병역을 수행하고 있는데, 각각 14만 5,000명과 5,000명에 이르는 이 병역 인원(인구의 1.62%)은 유대인들보다 입대 비율도 높다. 그중 10%가 장교직에 오르고 일부는 높은 장성급에 이르기도 한다. 한 드루즈인은 사단장을 역임하며 참모직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주요 보병대를 지휘한 여단장들도 다수 존재한다. 게다가, 보안국이나 경찰청 수뇌부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8월 4일에는 드루즈인 5만 명이 유대인 5만 명의 지지를 받으며 텔아비브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평등에 관한 구호를 외치면서 “우리는 2등급 국민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의 정신적 지도자를 맡은 셰이크 모와팍 타리프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에게 희생과 충성, 헌신이 무엇인지 가르쳐줄 이가 아무도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나라에 조건 없이 충성을 바쳐왔음에도 이 나라는 우리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는 이 나라와 완전히 뜻을 같이하고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에도 완벽하게 연대해왔는데, 그런 우리에게서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상황이 이러하자 네타냐후 총리는 이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제안을 내놓는다. 유대민족 국가 내에서 드루즈인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적절한 법을 채택하고, 아울러 병역을 수행하는 비유대인들에게 경제적 이권도 제공해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드루즈인들은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새로운 기본법은 이스라엘과 해외 유대인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서도 종교, 문화, 정치적인 차원에서 상당한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8월에 로널드 로더 세계유대인의회 의장은 네타냐후 정부에 대해 “유대교와 하스칼라(유대계몽주의: 유대인에게 거주 사회와의 융합을 장려하는 운동) 사이의 연계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쳤다”고 엄중한 경고를 보내며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남겼다. 

“네타냐후 총리가 평등이라는 신성한 가치를 훼손시킨다면, 그의 수많은 지지자들은 그가 유대교의 유산을 등지고, 시오니즘 윤리 및 이스라엘의 정신을 외면했다 생각할 것이다. 정치권에서 들려오는 이런 소식들은 이스라엘을 결코 부강하게 만들지 못한다. 외려 이 나라를 약화시킬 것이며, 장기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사회 통합을 도탄에 빠뜨리고 경제 성장은 물론 국제적인 지위도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 있다. (…)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젊은 유대인들은 정통파가 아닌 유대인들과 비유대계 소수민족 및 성 소수자들(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을 차별하는 이 나라의 일원이 되길 거부할 것이다.”(10)

하지만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네타냐후 총리가 꽤나 큰 지지를 얻는 것으로 나타난다. 민주주의연구소의 한 연구 결과에서는(11)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52%의 유대인이 새 기본법에 호의적인 반면, 40%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전체 유대인의 60%가 이 법에 평등의 원칙이 포함되길 바라지만, 우파 유권자의 69%는 이 법이 현안대로 발효되길 바라고, 72%의 이스라엘 국민들은 자신을 종교인으로 규정한다. 네타냐후의 뒤에는 이렇듯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버티고 있다. 따라서 네타냐후 총리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기 총선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다.  


글·샤를 앙데를랭 Charles Enderlin
언론인.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 『22세기 세계』 등의 역서가 있다. 

(1) 시오니즘 이론가 겸 빈에서 활동한 언론인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1896년 『유대민족 국가』라는 책을 출간해,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유대인들을 한데 모아 강대국들의 지원 하에 유대민족 국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며 근대 시오니즘 운동을 창시한 인물이다.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지지를 크게 받지 못한 가운데 팔레스타인 영토 내에 유대민족의 나라를 세우자고 했던 그는 1897년 세계시오니즘기구를 설립했다.
(2) Benjamin Netanyahu, 『A Place Among the Nations : Israel and the World』, Bantam, New York, 1993. 히브리어 버전은 『태양 아래 한 자리 Une place sous le soleil』(Ed. Yediot Aharonot, Tel-Aviv, 1995)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3) Dominique Vidal, ‘Aux origines de la pensée de M. Netanyahou’,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6년 11월호. 
(4) Zeev Jabotinsky, ‘유대인과의 전쟁 Les Juifs et la guerre(1939~1940)>’(히브리어 버전), 야보틴스키 연구소, Tel-Aviv, 2016. 
(5) Aroutz 2, 사후 방영 인터뷰, 2012년 4월 30일.
(6) Ari Shavit, ‘Haaretz’(히브리어), Tel-Aviv, 1998년에 제작돼 2012년 4월 30일 발표된 인터뷰.
(7) Charles Enderlin, ‘Israël à l’heure de l’Inquisition 이스라엘 우파의 끝없는 탈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6년 3월호‧한국어판 16년 5월호.
(8) Nitzan Horowitz, ‘Netanyahu’s dark deal with Europe’s radical right’, <Haaretz>, 2018년 7월 9일.
(9) 오스만 제국 시절 북방 코카서스 출신의 다양한 인구가 팔레스타인에 정착했으며, 그 후손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 지역에 살고 있다. 
(10) Ron Lauder, ‘Israel: This is not what we are’, <The New York Times>, 2018년 8월 13일.
(11) ‘The Peace Index’, 2018년 7월 31일, www.peaceindex.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