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군부의 영원한 귀환

2018-08-31     크리스토프 자프를로 |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전직 크리켓 선수 임란 칸은 지난 7월 파키스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고 총리로서 연립 정부를 이끌게 됐다. 부패를 척결하겠다는 연설과 ‘새로운 파키스탄’을 건설한다는 프로젝트 덕분에 칸이 이끄는 정당은 유권자 32%의 마음을 샀고, (총 272석 중) 116석을 차지하면서 제1당에 올랐다. 하지만 많든 적든, 군부의 지원 없이는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7월 25일에 치러진 파키스탄 총선은 지금까지 치러진 여느 선거보다 군부의 막대한 영향력 아래 진행됐다. 파키스탄이 1947년 8월에 영국연방인 인도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 세 차례의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군부는 3차례에 걸쳐 약 30년(1958년~1970년, 1977년~1988년, 1999년~2008년) 파키스탄을 통치했다. 하지만 10년 전부터 군부는 무대 전면에 나서기를 그만뒀다. 그리고 부정으로 얼룩지기는 했지만 투표를 통해 민정이 들어섰다.

앞서 2008년에 치러진 선거에서는 순식간에 민주적인 권력 이양이 이뤄졌다. 파키스탄인민당(PPP)은 창당자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딸인 베나지르 부토의 암살에 따른 동정여론 덕택에 2월 총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8월에는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이 대통령직을 사임한 후, 베나지르 부토의 남편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로부터 5년 후 파키스탄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임기를 끝낼 수 있었고, 그 이후 진보 성향의 파키스탄인민당(PPP)의 뒤를 이어 보수 성향의 파키스탄무슬림연맹(PML-N)이 집권했다. 

하지만 군부는 민주적 분위기가 자리잡는 듯하자 반감을 표출했다. 파키스탄에서 군부는 ‘체제(Establishment)’라고 완곡하게 지칭된다. 하지만 군사첩보기관인 파키스탄 정보부(ISI)가 수행하는 핵심역할 때문에 반대파에서는 군부를 ‘딥 스테이트(Deep State: ‘국가 심장부’ 또는 ‘국가 안의 국가’라는 뜻으로 정부 안에 깊숙이 뿌리박힌, 강력하지만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세력을 뜻함-역주)’로 묘사하기도 한다. 선거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시민권력이 자리 잡으면서 군부에 불안감이 생겼다.

실제로 정부 요직에 오른 파키스탄인민당(PPP)과 파키스탄무슬림연맹(PML-N)의 일부 지도자들은 군부에 반하는 정책을 시행하려 했다. 그 중에는 파키스탄 군부가 주된 적으로 여기는 인도에 대한 협력정책도 있었다. 예를 들어 자르다리 대통령은 2008년 11월에 16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뭄바이 테러 사건을 조사하면서 인도와 협력하려 했다(인도 뭄바이 테러를 자행한 테러범들이 대부분 파키스탄 출신으로 밝혀졌다-역주). 그러나 이 테러 사건은 파키스탄 군부가 개입된 것으로, 자르다리 대통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사를 포기해야 했다.

자르다리 대통령의 뒤를 이은 나와즈 샤리프는 파키스탄무슬림연맹(PML-N) 소속으로 이미 1990년부터 1993년까지, 그리고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총리를 역임했던 인물로, 역설적이지만 덜 온순한 일면을 보였다. 기업가 출신의 샤리프 총리는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에 대한 대항마로서 군부의 도움을 받아 정치가의 길을 걸었지만, 1990년대 말 이후에는 군부로부터 벗어나려 노력했다. 

샤리프 총리는 인도와의 군비 경쟁은 소모적이며 인도와의 교역을 늘려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두 번째 임기에는 인도와 평화정책을 맺기 위해 노력했다. 이 평화 정책은 군부 수뇌부를 자극했고, 군부는 1999년에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후 2013년 총리로 재취임한 샤리프 총리는 2014년과 2015년에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를 거듭 만나며, 인도와의 평화정책을 재추진했다. 그러나 군부의 입장에서는 인도와의 관계가 정상화되면 카슈미르 지역의 분할을 인정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군부의 막대한 예산이 사라질 것이었다. 따라서 군부는 양국 관계의 정상화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보이며, 이에 대한 방해공작을 펴기에 이르렀다. 

샤리프 총리는 자신의 정책을 고수했고, 군부는 끊임없이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군부에 그를 제거할 기회가 전혀 예기치 않게 주어졌다. 국제탐사도보언론인협회(ICIJ)가 파나마 로펌 모색 폰세카의 내부자료를 입수·공개한 조세도피·돈세탁 자료, 즉 파나마 페이퍼스에 샤리프 총리 가족의 이름으로 해외에 설립한 8개 사업체와 관련된 사기행각이 드러났다.(1)

군부의 사주를 받은 사법부는 이 문서를 놓치지 않았다. 사법부는 대법원의 요청에 따라 구성된 조사위원회에 군부 인사를 참여시켰고, 대법원은 샤리프 총리가 정치인으로서 ‘성실함’과 ‘미덕’을 요구하는 헌법을 위반했다고 선언했다. 샤리프 총리는 2017년 7월 28일 부정부패 혐의로 해임됐으며, 자격박탈과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군부는 샤리프 총리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누가 샤리프 총리를 대체했을까?

군부 입장에서 가장 간단한 것은 권력을 직접 장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군부는 10년 전부터 이를 피해왔다. 먼저, 군사쿠데타는 국제사회의 압력과 제재가 가해진다는 점에서 파키스탄 군부가 치르게 될 부담이 컸다. 또한 파키스탄이 국제통화기금(IMF) 등 외부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도 군부가 전면등장을 자제한 이유이기도 했다. 군부는 과거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탈취한 무샤라프 장군(1999~2008)의 전례에서 매우 복합적인 교훈을 얻었다. 따라서 군부는 손을 더럽히지 않고, 군부를 대신할 인물을 내세워 인도·아프가니스탄·미국·중국 등 불편한 이슈들을 통제하면서 분란에서 중립을 지키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후 파키스탄은 중국과 함께 중국 서부와 인도양 사이에 통신망 등을 구축하는 560억 달러 규모의 ‘중국-파키스탄 경제 회랑(China-Pakistan Economic Corridor)’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군부가 필요로 하는 인물은 군부의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것은 물론, 투표에서 선출될 만큼 인기가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파키스탄은 표면적으로는 민주정권의 이미지를 유지했기에, 국외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고, 국내에서도 국민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선거를 거쳐야 했다. 지난 70년간 파키스탄은 인도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할 강력한 정권에 대한 욕망과,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혼란을 겪어왔다.(2) 이런 상황에서 임란 칸은 변덕스러운 성격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유일한 후보자였다. 

칸의 인기는 칸의 과거 스포츠 경력(칸은 1992년에 파키스탄 크리켓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크리켓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과 암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설립하는 등 자선활동을 편 덕분이기도 하지만, 부패척결을 내세운 투쟁 때문이기도 하다. 부패척결은 1996년 파키스탄정의운동(PTI)을 창설한 이래 칸이 주창하는 바이기도 했다. 군부 입장에서 부패와의 전쟁은 거대 권력가 집안(자르다리-부토, 샤리프 등)이 사적으로 누리는 풍요로움에 분개하는 중산층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기존 정치 지도자들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는 두 가지 장점이 있었다. 

결국 군부와 칸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칸과 군부 사이에는 ‘민족주의에 대한 집착’이라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경쟁 후보들과 달리, 칸은 어떤 지방과도 연관성이 없었다. 부토 가문은 신드 지역에, 샤리프 가문은 펀자브 지역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반면 칸은 파슈툰족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3)(그러나 그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사는 파슈툰족이 쓰는 파슈토어 언어를 쓰지 않는다), 크리켓 국가 대표팀 주장이었다는 이력 때문에 지역 간 분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엘리트에 속한다. 군부는 민족적 단일성 구현을 바랐고, 칸이 가졌던 범(汎)파키스탄적인 정체성을 받아들였다. 특히 군부가 연방주의 쪽으로 기울어진 현재 추세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이 범파키스탄적 정체성은 군부의 기호에 부합했다. 

군부는 앞서 2010년 파키스탄인민당(PPP)과 파키스탄무슬림연맹(PML-N)이 지방에 더 많은 자율성과 재정지원을 규정한 제18차 헌법 개정을 도모하자, 반감을 표출한 바 있다. 칸 총리의 민족주의는 인도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났다. 그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인도에 대한 비난을 계속했다.

이밖에도 이슬람에 대한 칸의 호의적인 언사는 파키스탄 무슬림 정체성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군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았다. 바람둥이 이미지(두 번의 이혼경력)에도 불구하고, 칸은 종교에 대한 경건함과 사회 보수주의를 보여줬다. 2012년, 칸은 ‘종교를 향한 나의 여정’이라는 글에서(4) 서구의 유물론과 부도덕함, 『악마의 시(The Satanic Verses)』 사태(5) 당시의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비판에 대응해 자신이 이슬람에 대해 재발견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칸은 크리켓 경기에서의 승리를 ‘알라의 뜻’이라고 했다. 

이후 칸은 서구화된 파키스탄 엘리트들과 (칸의 표현에 의하면) 이슬람교와 무관하게 비관용적인 급진주의자들이 대화할 수 있도록 중재하기도 했다. 칸은 중재자를 자처하는 한편, 점차 전통과 특히 가족적인 가치 등을 강조함으로써 이슬람교도들의 입장을 변호했다. 그는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 법의 엄격한 적용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2013년부터 파키스탄 탈레반과 협상하기를 바란다고 밝혔으며, 탈레반의 사법체계와 대미 투쟁을 칭찬하면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을 옹호했다. 

칸은 2010년대 초 아프가니스탄 국경 지역에서 일어난 미국의 드론 공습에 반대하면서, ‘타협하지 않는 민족주의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칸이 이번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 축소를 결정한 이후 이미 복잡해진 미국과의 긴장 관계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칸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위와 같이 ‘굴하지 않는 민족주의자’라는 이미지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감성도 이용했다. 그는 세 번째 아내와 함께 유명한 수피교 성인의 무덤을 참배했다. 칸이 속한 파키스탄정의운동(PTI) 당은 파키스탄무슬림연맹(PML-N)에 대해 말리크 뭄타즈 후세인 카드리의 처형에 책임이 있는 정치조직이라며, 유권자들에게 이들을 뽑지 말라고 촉구했다. 카드리는 2011년 1월에 펀자브 지역의 살만 타시르 주지사를 암살한 인물이었다. 

타시르 주지사가 힌두교도, 기독교인, 아하마디아교도 등 종교적 약자가 가장 먼저 희생되는 신성모독법에 반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중 아하마디아교인들은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규정하면서도 19세기에 태어난 선지자를 믿는다. 칸은 이와 관련해서 “선지자 무함마드가 마지막 선지자라고 믿지 않는다면 어느 무슬림도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할 수 없다”라면서 이 법(이미 수백 명의 남녀가 이를 근거로 투옥돼 있음)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가장 민감한 주제는 지금까지 가장 급진적인 당파에 의해서 악용돼왔다. 

군부는 칸을 지원하기 위해 칸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매체들(파키스탄 주요 일간지 <돈(Dawn)> 등)을 혹독하게 통제했다. 군부는 세무조사 위협에서부터 유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단을 이용해 언론인들에 대한 협박을 시도했고, 유럽연합과 영국 연방 소속 옵서버들은 이를 두고 “표현의 자유와 자기 검열의 자유를 막는 장애물”이라고 묘사했다.(6)

이런 조작들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정의운동(PTI)은 총선에서 절대 다수표를 얻지 못하고 총 272석 중 116석, 1/3에 못 미치는 32%의 의석만을 차지했다. 반면 파키스탄무슬림연맹(PML-N)은 64석(전체 선거표 중 24%), 파키스탄인민당(PPP)은 43표(13%)를 차지했다. 여러 압력에도 불구하고 전 여당 지도자들은 선거에 출마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계에 막 입문한 정치인들이 총선에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거둔 사실은, 군부가 은밀하게 힘을 실어줬다는 가정을 뒷받침해준다. 예를 들어, 전통적으로 군부와 가까운 조직인 ‘라쉬카르 에 타이바(Lashkar-e-Taiba: 파키스탄 무장단체-역주)’의 이슬람운동 조직원들은 (군부의 영향력 하에 있는) 선거관리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무소속 후보로 출마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경우는 또 있다. 이슬람교 율법인 샤리아 (및 살만 타시르 주지사의 암살자)를 옹호하기 위해 1년 전에 결성된 정당인 테릭-이 라바익의 경우 4%의 표를 획득했다. 급진적인 이슬람 성향의 이 신진 정치인들은 전통적 이슬람 정당인 이슬람당(Jamaat-e-islami)과 이슬람성직자회의(Jamiat Ulema-e-Islam)의 뒤를 잇고 있다. 하지만 이들 간의 동맹은 그 속도를 잃고 있다. 

의회의 분열이 ‘군부’ 입장에서는 골칫거리이기는 해도, 칸이 의회에서 소수정당과 연정을 구성해서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과반의석을 확보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칸이 이끄는 파키스탄정의운동(PTI)은 파키스탄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펀자브를 포함해서 가장 큰 지역 두 곳을 이끌고 있다. 이는 파키스탄무슬림연맹(PML-N)이 아깝게 놓친 성과지만, 군부에 있어서 천만다행인 일이다. 군부 입장에서 펀자브 지역은 핵심 장교들을 모집하는 곳이며 샤리프 가문의 영향력이 우려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의 형제인 사바즈 샤리프는 2009년부터 펀자브 지역을 통치하고 있다.

위와 같이 힘이 분산된 상황에서 칸은 자신의 정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군부의 지시에 복종하게 될 것인가?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는 군부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자르다리 전 대통령은 상황을 받아들였다. 칸 신임 총리는 그 방법을 만들어내야 하지만, 아마도 중도적인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칸 총리는 제18차 헌법 개정을 완화함으로써 아마도 파키스탄을 다시 중앙집권화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군부가 원하는 대로 펀자브 지역을 여러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현재 하원 의원의 절반 이상이 펀자브 지역 소속이어서 한 정당이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되면 요새를 구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군부는 이를 막고자 한다. 

하지만 칸 총리는 군 예산을 삭감하지 않으면 파키스탄 국민들에게 약속한 ‘이슬람 복지국가’의 재원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군 예산은 군인연금을 제외하고도 파키스탄 전체 지출 중 5번째에 속한다. 또한 칸 총리가 더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중국, 그리고 인도와의 관계에서 영향력을 갖기를 원한다면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파키스탄 전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금융 위기와 파키스탄무슬림연맹(PML-N)과 파키스탄인민당(PPP) 등 야당 간 단합도 극복해야 할 사안이다. 마지막으로 칸 총리는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될 것이다. 샤리프 전 총리를 감옥에 가두면 그를 순교자로 만들 위험이 있고, 석방하면 야당의 힘이 엄청나게 커질 위험이 있다.

유일한 해결책은, 샤리프 전 총리를 또 다시 망명길에 오르게 하는 일일 것이다.  

글·크리스토프 자프를로 Christophe Jaffrelot
파리정치학교(시앙스포) 산하 국제학연구소(CERI)·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소장 겸직. 저서로는 『Le Syndrome pakistanais(파키스탄 신드롬)』(Fayard, Paris, 2013) 외에 로렌스 루에(Laurence Louër)와 공동 집필한 『Pan-Islamic Connections. Transnational Networks Between South Asia and the Gulf』(Hurst, Oxford University Press et Penguin, London, New York et New Delhi, 2017) 등이 있다.

번역·이연주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Panama papers’, 국제탐사도보언론인협회, Washington, DC, 2017년 1월 31일.
(2) 이 핵심 논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Le Syndrome pakistanais(파키스탄 신드롬)』, Fayard, Paris, 2013.
(3) 다음을 참고할 것, Imran Khan, 『Pakistan: A Personal History』, Bantam, London, 2012.
(4) Imran Khan, ‘My journey into religion’, <The Muslim Times>, 2012년 2월 14일.
(5) 『악마의 시』는 영국작가 살만 루시디의 소설로 1988년에 출판됐다. 무함마드를 풍자하고 코란을 악마의 계시로 빗댄 이 소설은 무함마드를 모독하는 행위라 하여 이슬람계의 격분을 촉발, 파키스탄을 선두로 한 이슬람 여러 나라에서 즉각 발간 중지됐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가 작가 루시디에게 사형을 선고한 이후, 루시디는 어둠 속에 숨어 피신생활을 계속했다.(역주)
(6) ‘EU monitors team says Pakistan election not a level playing field’, <Reuters>, 2018년 7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