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反)식민주의 선봉에 나선 유고연방의 자취

2018-08-31     장아르노 데랑스 | <르 쿠리에 데 발칸> 기자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는 이 나라가 과거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망각하게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각국의 민족 해방 투쟁, 특히 아프리카 독립을 지지한 국가로서 각인됐다. 같은 시기, 소련 연방이 미국과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에 신중한 태도를 견지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진들이 있다. 새로운 세계질서의 토대를 세우려 했던 비동맹운동 지도자들의 사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1892~1980) 대통령이 하얀 유니폼을 입고서 아드리아해 북쪽에 있는 브리오니 섬에서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독립국가, 또는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는 국가의 수반들을 맞이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들은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1948년 단절 이후 소련에 의해 코민포름에서 추방당하고, 반식민주의 투쟁을 지원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강대국들 사이에서 활약하게 됐다. 1954년 알제리 독립전쟁 초반에 있었던 만성절 테러에 대해 소련과 프랑스 공산당이 의심의 눈길을 보낸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UN 내부에서 민족해방전선(FLN)의 목소리를 이어받은 첫 국가였다.  

“티토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연맹의 핵심 지도부는 제3세계 국가들의 해방 투쟁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 점령군에 항거한 레지스탕스의 복사판처럼 여겼다. 그들은 베트콩의 투쟁과 같은 민족해방전쟁에 감동을 받았다”라고 다닐로 밀리크는 회상했다. 전직 외교관인 밀리크는 1960년대부터 기니, 시에라리온, 가봉, 기니비사우, 앙골라, 공고민주공화국에서 근무하고 2011년 은퇴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1992년 축소된 유고슬라비아 연방(1) 그 후 세르비아로 변모한 조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었다. 밀리크는 “우리 또한 오토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였다. 따라서 식민지 상황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파르티잔의 경험 속에서 단련된 티토주의

교리가 따로 없는 티토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르티잔(공산주의자 게릴라 조직)의 경험 속에서 단련된 정치적 실천이다. 요시프 브로즈(‘티토’의 본명)(2)는 게페우(소련의 비밀경찰인 국가정치보안부)에서 온갖 시련을 겪은 소련 공산당 중진이자, 코민테른 숙청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으나 해방 전쟁 당시, 재빠르게 소련과 선을 긋고 소련의 명령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의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하면서 소련은 체트니크를 비롯한 모든 저항 운동의 연합을 촉구했다. 체트니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런던으로 망명한,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충성하는 세르비아인들의 게릴라 조직이다. 

티토로서도 파시스트 및 나치 점령군과 치르는 전쟁은 새로운 사회주의 연방 국가 설립을 위해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였다.(3) 그는 파르티잔이 전쟁 당시 보여준 용기를 높이 평가해, 영국에 감금된 체트니크의 석방을 요구했다. 영국은 1943년 체트니크를 풀어줬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알바니아와 함께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내부 저항운동 덕분에 해방된 국가다. 

1944년 가을 세르비아의 동북쪽에 소련의 붉은 군대가 진군했지만 큰 소득은 없었고 티토는 이를 빌미로 1948년 이후 스탈린에게 대항할 정당성을 얻었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대중적인 기반을 이용해 스탈린주의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사실, 붉은 군대 덕분에 권력에 오른 동유럽의 공산당들은 대중적인 기반이 없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티토의 이런 행동과 관련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국가주의의 일탈’이라고 비난했다.

처음에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부는 소련을 모델로 삼기를 원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에드바르 카르델(1910~1979)이 만든 사회주의 이론인 노동자 자주관리의 도입과 같은 혁신안들이 점차적으로 등장했다. 냉전으로 이분화된 세계 속에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결의한 탈식민지화를 위한 약속들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국제사회에서 빛나게끔 했다. 부분적으로는 기회주의에 의해서였다. 공산주의 운동에서 고립된 티토는 동맹이 필요했을 뿐 아니라,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경험한 새로운 사회주의의 정당성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게는 또한 완전히 전복된 세상이 가져다줄 가능성을 알아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소련과 소련에 복종하는 공산 국가들은 반식민지 해방 투쟁의 열기를 알아차리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공산당이 세계 주요 도시에서 권력을 잡아야만 식민지 국가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소련은 서양과의 관계에 집착하고 있었다. 소련에게 데탕트는 꼭 필요했다. 현 정당 선택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소련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했다”라고 밀리크는 말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독자적인 포지션을 이용할 줄 알았다. 소련과 서양, 양 진영의 긴장 상태 속에서 능란하게 줄타기를 잘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1955년 반둥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4) 그러나 티토는 그 전 해에 유럽 국가수반으로는 처음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도를 방문한 대통령이었다. 티토는 1956년 7월 19일 브리오니섬에서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와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와 만나며 비동맹 노선의 기반을 세웠다. 이런 외교적인 활약을 펼치며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매우 적극적으로 알제리 혁명 지원에 나섰다. 

1958년 1월 19일, 프랑스 해군은 알제리의 오란 해안에서 슬로베니아 화물 선박을 조사했는데 배의 화물창에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줄 무기들이 가득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언론 또한 전쟁 취재로 유명했다. 몬테네그로 언론인 스테판 라부도빅(2017년 11월 사망)은 1959년부터 민족해방전선의 부대에 합류했다. 카메라를 들고 그는 종전 시까지 모든 전투를 촬영했다.

반식민주의 투쟁을 통해 영향력 확대

알제리 혁명 동안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실망을 맛보았다. 아메드 벤 벨라 알제리 대통령 시절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알제리에 대한 영향력은 매우 강력했으나 1965년 우아리 부메디엔의 쿠데타 이후로는 축소됐다. 1958년 기니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기니에 수천 명의 파견원을 보냈다. 그리고 포르투갈 식민지 국가들의 해방 운동을 지원했다. 

1961년 콩고의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의 암살에 대해 티토는 ‘동시대 역사상 가장 큰 범죄’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1960년과 1970년대에 아프리카에서 중국과 소련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선두였던 제3세계 국가에 대한 사회주의 교육이 가로막혔다. 그러나 저개발상태에서 어렵게 벗어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반식민주의 투쟁 덕택에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어려운 중재는 결실을 보았다. 우리나라에도 어려운 지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프리카 혁명에 무기를 공급했다”라고 밀리크는 말했다. 

티토는 여러 번 아프리카에 방문했는데, 매번 그의 요트 ‘Galeb’을 타고 가서 허세를 부렸다. 1961년 봄 72일간의 여행 동안 그는 가나, 토고, 리베리아, 기네, 말리, 튀니지를 방문했다. 그는 호화로운 선물과 50여 명의 가수와 뮤지션, 부인 야반카 브로즈의 의상 디자이너 여러 명 등 1,400명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배에 올랐다. 그의 부인은 기항지마다 다른 의상을 선보이며 과시했다. 콰메 은크루마 기니 대통령은 티토를 ‘이 시대의 가장 현실적인 대통령, 아프리카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5)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베오그라드에 있는 유고슬라비아의 역사박물관, 아프리카 예술 박물관, 티토의 묘지 등 티토를 기념하는 명소를 방문한 사람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인종차별정책과의 투쟁에 대한 참고자료가 별로 없다는 점에 놀랄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부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소련과 관련이 깊다고 판단하고 라이벌인 범아프리카회의(PAC)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밀리크는 이렇게 변명했다. “우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해방 운동을 지원하고 싶었지만 아프리카민족회의 내부의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너무 스탈린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서로의 비전이 완전히 달랐고, 우리가 범아프리카회의(PAC)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불신했다.” 

반면 1980년대에 유고슬라비아 연방 군사학교에서는 남서아프리카인민기구(SWAPO), 즉 나미비아 해방 운동을 펼치는 수백 명의 장교들을 양성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1975년 앙골라, 모잠비크가 독립한 이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두 국가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많은 지원을 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재정지원하고 관리하는 조나스 사빔비의 게릴라 부대와 앙골라는 적대시했다.   

198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보기관은 아르헨티나 정보기관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반공산주의 크로아티아 게릴라병 1,500명을 상륙시키려는 대규모 작전을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공산주의 전복의 중심지 중 하나로 간주됐다. 이를 폭로하는 자료가 최근 남아프리카공화국 군대의 비밀문건에서 발견됐다.(6)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 기간에는 소련이 대처할 여유가 없을 것이라 예상하고, 유고슬라비아 체제 전복 작전을 올림픽 기간에 펼칠 예정이었다. 

티토의 죽음, 남아공의 작전 취소

그러나 남아공 스파이들은 아마도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관계를 잘 파악하지 못했던 듯하다.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내정간섭 이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사실상 군대의 위기 경보를 강화했다. 티토가 죽을 때까지 집착했던 바르샤뱌 조약(7)에 대한 적대적인 제스처라고 판단했었기 때문이다. 1979년 9월 티토는 쿠바에 방문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요트 Galeb에 올랐다. 티토는 제6회 비동맹운동 회의에서 피델 카스트로가 원했던 친 소련 노선을 막는 데 성공했다. 

여하튼 미국이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기로 결정하고, 티토가 1980년 5월 4일 사망하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작전을 취소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창시자 티토의 장례식에는 냉전 시대의 모든 국가수반과 지도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 카스트로는 참석하지 않았다. 

티토의 서거 이후 뒤를 이은 정부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이런 외교적인 번영을 즉각 팔아버리지는 않았다. 2006년 크로아티아 대통령 스티페 메시치는 쿠바에 방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베테랑 외교관 부디미르 론카르와 동반했다. 그는 1987년~1991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마지막 외교부 장관을 지냈으며, 불같은 관계였던 티토와 카스트로 사이를 자주 중재했었다. 크로아티아는 2009년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기 전까지 비동맹운동의 회원국으로 남아있었다. 

2008년 코소보가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 외교부 장관 뷔크 제레믹은 전 세계를 다니며 코소보가 신생국가로 인정받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세르비아가 옵서버 지위를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 연합 또는 이슬람협력기구 같은 기구들의 단상에 올라 연설하기도 했다. 세르비아는 또한 빈사 상태의 비동맹 노선을 되살리고자 했으나 성과는 없었다.(8) 

이렇게 구연방의 국제적인 명성을 이용하고 공리주의적 명분을 들어, 다른 국가들을 현혹하려는 행위는 규제돼야 한다. 2017년 여름, 베르그라드에 있는 역사박물관의 ‘티토와 아프리카’ 전시의 관리인 안나 슬라도예빅은 말했다. “반식민주의와 반파시즘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유산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를 계승한 모든 국가들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려고 한다.”  


글·장아르노 데랑스 Jean-Arnault Dérens
<르 쿠리에 데 발칸(Le Courrier des Balkans> 기자. 로랑 제슬린 Laurent Geslin과 함께 『물이 섞이는 곳. 유럽의 끝 발칸에서 코카서스까지』(La Découverte, Paris, 2018)를 공저했다.

번역·김영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완벽한 남자 에마뉘엘 마크롱』등이 있다.

(1) 1992년 태동한 새로운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RFY)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만이 포함돼있다. 2003년에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바뀌었고, 2006년 두 공화국은 갈라진다. 
(2) 가명이었던 ‘티토’는 그의 이름에 덧붙였다.
(3) Jože Pirjevec, 『티토의 생애』, CNRS Éditions, Paris, 2017년
(4) Françoise Feugas, ‘비동맹운동의 반둥 회의에 대해’, Manuel d'histoire critiqu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호외판, 2014년 
(5) 인용, Jože Pirjevec, <티토의 생애>, op. cit.
(6) Hennie Van Vuuren, 『Apartheid, Guns and Money: A Tale of Profit』, JacanaMedia, Johannesburg, 2017  
(7)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군사적 동맹(1955~1991).
(8) Jean-Arnault Derens, ‘Prodiges et vertiges de la diplomatie serbe 코소보 독립 막기 총력 외교 세르비아, 절반뿐인 성공’,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