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태극기, 난민… 정체성 강박의 거대한 부조리극

2018-08-31     정혁 | 작가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던 7월 중순의 어느 토요일. 서울 한복판에서는 성 소수자들의 최대 축제인 ‘퀴어 퍼레이드’와 각종 동성애 반대 단체들의 맞불 집회가 시청 앞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후 내내 이어졌다. 


예년에 비해 반대 집회 참가자들 중 젊은이의 비율이 확연히 늘었고, 성 소수자들이 ‘사랑’을 외치는 것만큼이나 반대 측에서도 계속 ‘사랑’을 강조했다. 이들의 말 속에는 종교적 사랑과 가족 간 사랑이 흘러넘쳤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가 그들의 진정성을 대변했다. 반대 집회 참가자들의 행진 선두에 젊은이들이 섰고, ‘양심적 동성애 거부’라고 적힌 피켓도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했다.

그날 저녁에는 난민 수용을 결사반대하는 ‘촛불집회’도 열렸다. 이로부터 일주일 전 주말에는 ‘생물학적’ 여성들에게만 참여가 허락된 시위에서 “여성도 국민이다”는 구호가 터져 나왔고, 그 사이 평일에는 이주인권단체들의 난민 수용 촉구 집회도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사법부의 반동적 판결로 인해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는 외침이 등장했고, 일부 여성들은 소위 말하는 극우 보수 세력의 ‘태극기집회’에도 참석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한국 인권운동의 실패”라고 규정한 난민 문제는 두 달 동안 그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한 채 그저 방치에 가까운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주권=국민=국적’이라는 등식
 
이번 난민사태는 일종의 ‘쇼크’였다. 불과 1년 반 전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외칠 때 우리 모두가 강조해 마지않았던 바로 그 고결한 ‘국민’이, 내전을 피해 머나먼 이국땅에 들어온 이들을 향해서는 “국민이 먼저다”라는 잔인한 비수가 될 줄이야. 사실 “국민 우선”이라는 표현은 이미 20~30년 전부터 프랑스 ‘국민전선’의 중심 구호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 극우 정당이 지닌 파시즘적인 성격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 주는 말이다.(1) 이제 한국에서도 보편적 인권을 뒤로한 채 “국민이 먼저다”라는 구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결국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성격을 띠고 있는 위기”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인구 5천만 명이 넘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자, 난민협약에 가입한 지 25년이 넘었으며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했다고 자랑하던 ‘인권 선진국’이, 단 500명의 난민에게도 이렇게 집단적 신경증을 드러내며 대혼란에 빠지는 모습은 마치 한 편의 거대한 부조리극 같았다. 나는 약 1년 전에 한국인 최초로 난민구조선 선장이 된 이의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다.(2) 나는 이때만 해도 “우리 사회가 난민에게 배타적”이라는 그의 말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물론 고질적인 ‘단일민족 판타지’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주자들의 인권상황이 조금씩 개선되는 과정이라 믿었고, 난민 역시 그저 낯섦의 문제가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이미 20여 년 전에 “국민 우선”이라는 구호에 직면한 프랑스의 사상가 ‘에티엔 발리바르’는 이것이 결국 ‘인종주의’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런 인종주의의 생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게 바로 ‘민족주의’라는 점을 간파했다. 발리바르에 의하면, 인종주의는 ‘우리의 정체성’에 낯선 인간 집단들을 배제하기 위한 모든 형태의 지칭이다. 불안정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에 자신의 정체성과 그에 상응하는 존엄성 및 향유 가능성을 박탈당할 위험에 놓인 사람들은, 다중적인 ‘소속의 파괴’에 저항하며 배제와 추방의 욕구에 매혹당하기 쉽다. 계급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소외됐다고 느끼는 이들은 ‘국민’이라는 정체성 자체에 기대, 국가 내에서 (이주민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서고자 하는 것이다.

사회 불평등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한국에서도 지금 “국민이 먼저다”라는 구호가 대규모로 터져 나왔고, 더 이상 ‘인종 차별’을 외면할 수 없게 됐다. 누군가는 여전히 난민 반대와 인종 차별을 연결 짓는 걸 거부하겠지만, 강고한 단일민족 판타지 하에 국적과 국민 그리고 주권을 동일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정체성 강박은 언제든지 ‘배제와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이번에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인종주의의 혐의를 벗기는 더욱 힘들다.
 
정체성 강박이 불러온 기만
 
난민사태를 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난민 반대 시위 동참이었다. 오죽하면 무슬림 남성과의 결혼생활 25주년을 맞은 이주 당사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정혜실 이주민방송(MWTV) 공동대표가 이런 글까지 썼다. “어떻게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을 앞세워서 다른 소수자인 난민을 억압하는 일에 동조하는 것을 넘어서, 혐오표현이 난무하는 글들을 쓰고, 유포하고, 청와대 청원까지 가게 됐는지, 나는 분노하다 못해 절망하고 있고, 비참해하고 있다.”(3)

물론 다양한 페미니즘 스펙트럼 하에서 극히 일부의 몇몇 페미니스트들이 난민혐오에 동조했다고 해서 그것이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 전체를 평가 절하하는 요인이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동조했던 “무슬림 남성들로 인해 한국 여성들이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된다”는 논리 자체가 예전부터 백인들이 유색인 남성을 인종차별 하면서 내세웠던 것과 거의 똑같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성폭력 예방 활동을 벌여온 ‘잭슨 카츠’는 이 문제의 핵심을 이렇게 지적한다. 여성을 폭행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같은 인종과 민족 내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백인 여성들 역시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백인 남자에게 폭행당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한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백인 여성들은 삶에서 가장 큰 위험이 되는 사람은 이들이 아니라 유색인 범죄자들이라고 하는 얘기를 항상 듣는다. 유색인 남성을 폭력적인 짐승처럼 묘사하는 분위기는 백인 남자들의 책임을 다른 데로 돌리는 구실을 한다.

결국 백인 여성들의 자기방어 전략이 왜곡되고, 실제로는 가장 위협적인 백인 남자들의 폭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4) 그리고 이것이 고착화되면 백인 사회의 여성폭력은 그저 개인적인 일탈로 간주되고, 다른 인종의 성폭력은 마치 이들의 문화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한마디로, 인종 차별을 당연시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와는 표면적으로 완전히 다른 상황 설정이지만, 에티엔 발리바르도 ‘정체성 변질에 맞선 투쟁’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압축적으로 분석한다. “거무스름한 피부를 가진 외국인들에게 매력을 느낄지도 모르고 따라서 국민적인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위험을 나타내는 우리나라의 여성들을 (필요하다면 여성들의 뜻에 거슬러서라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리바르는 정체성 강박이 투사된 “국민 우선”이라는 구호가 실제로는 “배제와 정화의 완곡어법”일 뿐이며, 곧 차별과 추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5) 또한 여성의 의사와 무관한 남성 본위의 보호 의식 역시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는 일종의 ‘여성혐오’일 뿐이다. 그러므로 무슬림 남성과 한국 여성의 안전을 직결시키는 논리는 어떻게 보든 기각돼야 마땅하고, 페미니즘의 입장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토록 허술한 논리가 난민 반대의 이유로 활용될 수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정체성 정치의 명암
 
성 소수자들의 퀴어 퍼레이드나 페미니즘 집회는 자신이 어떤 집단(젠더·인종·민족 등등)에 속하는지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 사회운동이다. 둘 다 넓은 의미에서는 ‘정체성 정치’의 범주에 들어가는데, 해당하는 정체성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 과연 얼마나 열려 있는가를 살펴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나는 성 소수자가 아니지만 몇 년째 계속 퀴어 퍼레이드에 동참하고 있으며, 딱히 정체성 운동이라기보다는, 그저 우리 모두의 인권을 위한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물학적 여성들에게만 참여가 허락된 페미니즘 시위는 함께할 수 없고, 이는 명백히 정체성 정치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태극기집회’는 어떨까?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 ‘정체화’가 진행됐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하고 배타적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참석자들의 정체성이 일치하지는 않는 편이고 주제도 여러 가지이므로 아마 본격적인 정체성 정치라고 부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에 기반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 일정한 출신성분을 가진 한국인들만의 활동을 한다면, 그건 정체성 정치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토착민들이 이주민이나 난민을 향해 인종차별적 구호로 시위를 하고, 프랑스의 국민전선처럼 “국민 우선”을 내세우는 각국의 극우 정당 의원들이 상당수 의회에 진출하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정체성 정치와 현실 정치가 긴밀하게 연결되는데, 그 양상은 각국의 정치 환경에 따라 상이하며 ‘정화와 추방’이 작동하는 방식도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보통 ‘리버럴’에 가까운) 좌파가 주도하는 정체성 정치의 흐름이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정치철학자인 ‘마크 릴라’는 “정체성이 미국 정치에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으로 통한다”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시민권 운동은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건설적인 행동 방식의 한 예”를 제공했다고 말한다.(6) 여성주의 운동 및 동성애자 권리 운동 역시 시민으로서의 평등과 존엄을 인정받기 위한 대표적인 정체성 운동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보편적이며 평등한 시민권의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초기 정체성 정치의 개척자들은, 미국 사회를 더 관용적이고 더 정의롭고 더 포용적인 곳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통점·동등성·연대 등을 중시하는) 시민적 지위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신자유주의적인 ‘레이건주의’가 몰고 온 사회 변동과 함께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관심으로 전이됐다. 극단적 개인주의와 자신의 머리 바깥에 펼쳐진 세계에 대한 무관심, 자아분석과 정치활동의 혼재 및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집착 등이 심화되면서, 합리적인 토론이나 공평한 대화의 장도 점차 사라졌다.(7) 

마크 릴라는 ‘정체성 진보주의자들’이 “자기 자신과 유사하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설득”해야만 하는 평범한 민주정치를 외면하면서, 결국엔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대중영합적 정치선동가’가 대통령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분석했다. 정리하자면, 유럽에서 정체성 정치의 ‘성공’은 극우 정당의 의회 진출을 이룬 한편 미국에서 정체성 정치의 ‘실패’는 반동적 포퓰리스트의 당선을 불러왔다. 결과적으로 현세대의 정체성 정치는 여러 가지 의미로 파시즘적 징후와 연결되는 셈이다.

세계시민주의적 감수성의 필요성

아마도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정체성 정치가 본격화된 건 소위 말하는 ‘민주화’ 이후일 것이다. 정체성 운동이 성장하며 마침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려던 시점에, 불행히도 신자유주의적 변동 역시 진행되고 있었다. ‘헬조선’이 고착화되기 전, 그러니까 분노사회의 혐오정치가 만연하기 전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한국의 정체성 정치는 제대로 성숙되기도 전에 다중적인 소속의 파괴에 직면했고, 곧 철저한 각자도생의 양극화 사회를 맞이했다.

앞서 여러 측면에서 지적했듯이 소외된 다수는 더 넓은 공동체를 향하기보다는 ‘자폐적인 정체성 집착’에 빠지기 쉽다. 한국의 정체성 정치는 연대보다는 배제의 욕구가 더 강한 시대에 이미 진입한 것으로 보이며, 곳곳에 극단주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운동의 지향점이 무엇이든 간에 언제나 분열적 신경증의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최근의 난민사태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어쩌면 이는 앞으로 한국 시민사회의 중대한 과제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어떤 활동이든 그저 정체성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함께 균형을 맞춰줄 짝이 필요하다는 걸 명심하자.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영향을 항상 받고 있는데, 이런 시대에 한정된 정체성만을 고집하는 건 우리가 복잡한 세계와 맺고 있는 다층적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울리히 벡이 말한 것처럼, 다양한 행위자가 다양한 위치에서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세계화의 시대에는 타자를 “다르며 또한 동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세계시민주의적 감수성이 필요하다.(8)

“다르지 않기에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피상적 ‘보편주의’와는 달리, 세계시민주의는 근원적으로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와 다른 타자의 정체성을 그 자체로 동등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민한 감수성은 적당한 거리 두기를 통해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냉철한 현실주의로서 역할을 하고 그런 과정은 타인을 재발견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체 게바라가 밑줄을 그은 괴테 전기에서도 말하지 않던가. “극도로 예민한 사람만이 아주 차갑고 냉정할 수 있다.” 반동의 시대, 파시즘을 예방하는 게릴라가 되기 위해 우리는 좀 더 예민하고 좀 더 냉정해져야 한다.  


글·정혁
시사문화 블로그 ‘The Story of ART’를 운영하며, 몇몇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1), (5)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파리 10대학 명예교수), <Droit de cité. Culture et politique en démocratie>(1998), 한국어판 <정치체에 대한 권리>(2011)에서 인용.
(2) 정혁, <[인터뷰] 한국인 최초 난민구조선 선장 김연식>, 오마이뉴스, 2017년 8월 25일.
(3) 정혜실, <[기고] 제주 예맨 난민에 대한 혐오표현과 청와대 청원 사태를 지켜보며>, 난민인권센터, 2018년 6월 19일.
(4) 잭슨 카츠(Jackson Katz), <The Macho Paradox>(2006), 한국어판 <마초 패러독스>(2017)에서 인용.
(6), (7) 마크 릴라(Mark Lilla,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The Once and Future Liberal: After Identity Politics>(2017), 한국어판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 정체성 정치를 넘어>(2018)에서 인용.
(8) 울리히 벡(Ulrich Beck), <Macht und Gegenmacht im globalen Zeitalter>(2002), 한국어판 <세계화 시대의 권력과 대항권력>(2011)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