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지난 국가주의의 귀환 또는 탈피?

‘반(反)박정희‧문재인 대 친(親)노무현’의 정치공학

2018-08-31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자유한국당 김병준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은 7월 17일 비대위원장에 취임했다. ‘김병준 비대위’ 체제를 완비하자마자 같은 달 30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았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뒤 권양숙 여사를 예방했다. ‘김병준 비대위’의 첫 대외 행보. 봉하마을에서 첫 행보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가 비록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역임했다 해도,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 자격으로 방문한 것임을 감안할 때 매우 이례적일뿐더러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평을 받았다. 


김 위원장은 이날 봉하마을 방문에서 “새로운 시대, 탈국가주의 시대를 열 때가 됐다”고 말했다. 정치학 교수 출신인 그가 보수개혁의 지렛대로 준비한 탈(脫)국가주의를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연결 짓는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반(反)박정희, 친(親)노무현’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 

김병준 비대위원장의 ‘탈국가주의’라는 키워드는 일단 초기 마케팅에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논리와 독특한 접근법은 자유한국당의 오랜 계파싸움에 신물을 내던 많은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을 떠나 일단 그 자체로 다른 느낌을 줬다. 김 위원장은 이후 탈국가주의의 대안도 명확히 했다. 즉 이제는 자율주의가 국가주의를 대체해야 하며, 자율주의라는 새로운 모델의 중심에는 시장과 공동체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의 탈국가주의‧자율주의를 ‘주의’가 아닌 정치인을 중심으로 다시 표현하면, 반(反)박정희‧문재인에 친(親)노무현이다. 정치에 전혀 무심한 사람이라도 단박에 눈치챌 수 있을 만큼 기존 한국정치의 통념에서는 불가능한 조합이 탄생했다. 김 위원장의 관점에서 문재인은 노무현의 계승자가 아니며, 오히려 (계승자까지는 아니어도) 박정희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리하여 김 위원장은 박정희식 개발과 문재인 정부 국정 기조를 모두 국가주의로 봤고, ‘노무현 정신’에서 자유와 분권을 강조하며 자율주의를 끌어냈으며 자신이 그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자유한국당 당 대표실에 걸려 있는 박 전 대통령의 사진을 떼어내고 싶다는 심정을 피력할 정도로 매우 비판적이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해 감옥에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자유한국당에서 공공연하게 반(反)박정희 입장을 밝히기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는 그렇게 하고 있다. 그는 “박정희식 국가개입에 동의하는 사람은 같이 갈 수 없다”며 “조국 근대화와 안보제일주의로는 미래세대를 이끌 수 없다”고 말했다. 남북관계에서도 안보보다 평화를 중시함으로써 ‘박정희 정부’로 대표되는 남북적대를 걷어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김 위원장이 국가주의 프레임으로 문재인 정부를 비판한 대표적 사례는 정부가 검토한 ‘먹방 규제’였다. ‘먹방’ 규제나 학교 커피자판기 설치 금지법 개정안 공포 등과 같은 것이 “국가주의적 문화”이며, “국가주의가 사회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김 위원장과 문 대통령이 각각 정책실장과 비서실장으로 참여정부에서 함께 일한 사실과 이후 친문세력과의 경험이 김 위원장으로 하여금 문 대통령에게 모종의 라이벌 의식을 창출케 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국가주의를 몰아붙인 반면 김 위원장은 자신이 정권 창출에 기여했고, 실제로 몸담았던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는 자율, 시장, 분권을 중시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주변에서는 “가치라는 측면에서 노 전 대통령의 적자는 문 대통령이 아니라 자신(김병준)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마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김 위원장과 접촉한 자유한국당의 한 중진 의원은 “박원순 시장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문 대통령과 싸우겠다고 해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1)

김병준 위원장의 ‘국가주의 대 자율주의’와 ‘반(反)박정희‧문재인 대 친(親)노무현’은 우선 지지부진한 이른바 보수 개혁과 관련해 어쨌든 화두를 던졌다는 측면에서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또한 보수 개혁의 뜨거운 감자인 인적 청산 문제를 우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술적으로 유효하기도 하다.

조금 더 복잡한 ‘국가주의’ 논의를 전개하기에 앞서 인적 청산 문제를 짚고 넘어가자. 김 위원장은 자유한국당의 인적 청산과 관련해 ‘고장 난 자동차’론으로 현재 우회로를 택한 상태다. 

8월 20일 경기 과천 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열린 자유한국당의 ‘2018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김 위원장은 소속 의원들과 탈국가주의 및 ‘고장 난 자동차’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 당 혁신 방안과 정기국회 전략 마련을 위해 마련된 이 날 연찬회에서는 예상대로 일부 의원들로부터 강력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비대위 출범 후에 김 위원장이 구체적인 혁신보다는 ‘국가주의’ 등 가치 논쟁에 주력하는 데 대한 불만과 함께, 언제라도 대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뇌관이라 할 인적 청산 문제가 불거졌다. 맞물린 두 사안을 두고 친박 김진태 의원 같은 이들이 직설법으로 김 위원장을 공박했다. 이날 토론을 대화체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병준: 인적 청산을 하지 않으면 그걸로 혁신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다른 생각이다. 지금 우리 당은 고장 난 차다. 차가 고장 났는데 고치지 않고 좋은 기사만 영입한다면 차가 갈 수 있겠나. 먼저 차를 고치고 난 다음 인적 부분을 고민해야 한다. 

김진태: 운전사가 아닌 차가 고장 났다고 하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 그동안 차는 고장 난 게 없는데 운전사가 문제였다. 20대 총선 전에는 아무 문제 없이 잘 나갔는데 2년 만에 왜 이 모양이 된 건가. 결국 총선 참패, 탄핵, 지방선거 대참사,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우리 당을 이끌던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다.

김병준: 한국당이 180석, 200석으로 잘 나갔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당들은 어떤 사건들로 인해 쉽게 무너지는 구조다. 체질이 단단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더 단단한 우파정당을 만든다는 차원에서 가치와 같은 기본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가야 한다. 
박완수: 가치 재정립을 하자는 데는 동의하지만 운전자에게도 책임은 크다. 당 지도자의 한마디가 수십만 당원을 부끄럽게 만드는데 당의 이념과 가치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 중요한 건 국민 눈높이에 맞는 리더가 국민의 상식에 부응하는 정당을 만드는 것이다. 최근 우리 당은 특수활동비 폐지를 통해 국민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는데 이 기회를 놓쳤다. 가치 정립도 중요하지만 나중에 지도자가 바뀌면 소용이 없다.

김병준: 잘못된 지도자가 나왔을 경우 그 지도자가 나온 환경과 배경에도 문제가 있다. 그런 지도자가 나오지 않게 기초를 분명히 해야 한다.(2)

이 대화에서 드러나듯, 친박계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리더십과 지도자에 초점을 맞추며 친박계에 대한 국민적인 인적 청산 요구를 무력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이들은 “자동차가 문제없다”고 김 위원장과 다른 현실진단을 내놓은 뒤 운전사에 방점을 찍어 동승한 자신들의 책임은 구렁이 담 넘듯 피해간다. 

반면 ‘고장 난 차’를 언급하는 김 위원장에게서는(친박계를 포함해, 정확하게는 친박계를 중심으로 인적 청산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만), 당내 역학상 당장 인적 청산이 불가능하기에 가치 논쟁을 통해 시간을 벌면서 동시에 그 시간을 활용해 인적 청산이 가능한 구도를 만들어 내겠다는 의중이 읽힌다. 각자도생에 돌입했지만 아직은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는 친박계로서는 살아남기 위해 김병준을 ‘길들이는 데’ 진력할 수밖에 없다. 친박 의원들은 인명진 비대위원장과 홍준표 대표를 거치며 버텨낸 저력이 김병준 비대위원장 체제에서도 작동하리라고 믿고 있을 법하다.   

이렇듯 김병준 발(發) 가치논쟁의 핵심은 인적 청산인데, 만일 논쟁을 통해 새로운 보수 가치 정립에 성공한다고 해도 적정한 시점에 인적 청산이 따라오지 않으면 결국 탁상공론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 겉으로는 이들이 가치를 논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서로 살수를 날리고 있는 형국이다. 

‘노무현의 계승자’를 자처해야 하는 이유 

가치논쟁을 거친 새로운 보수 가치 정립과 이어질 인적 청산에 성공하면 자유한국당뿐 아니라 김병준 위원장에게도 새로운 길이 활짝 열리게 된다. 김 위원장이 탈국가주의를 통해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우고 ‘노무현의 계승자’로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보수 정권을 창출하겠다고 나선 동인은 그의 정치적인 욕망이다. 자유한국당의 길을 열면서 자신의 길을 함께 열겠다는 좋게 말하면 정치적 포부, 일반적 용어로는 야망. 

정치학자로서 옆에서 조언하는 대신 야당의 대표를 맡아 현실정치의 의제를 스스로 산출하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학자의 학문적 양심, 혹은 식견과 현실정치가의 욕망 혹은 타협 사이에는 융합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불가능한 이야기이지만, 아무런 정치적 야심 없이 순수하게 보수의 가치를 정립하게 하는 데만 기여할 생각이었다면 김 위원장이 굳이 ‘노무현의 계승자’가 될 필요는 없었다. 

‘노무현의 계승자’를 자처함으로써 오히려 보수 가치 논쟁을 꼬이게 하고 당내 반발을 불러올 뿐인데, 김 위원장은 왜 무리수를 뒀을까. 박근혜 탄핵에도 불구하고 자유한국당 안에서 박정희 청산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시점에서 어느 누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을 맡는다고 해도 그에게 박정희 청산은 매우 힘겨운 과제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김 위원장은 거기에다 노무현 계승까지 언급한다. 

“보수가 아니라 노무현 이중대로 가는 것”이라며 “자유민주주의 위기를 가져온 우리당의 무능과 분열에 대한 맹성을 통해 자유대한민국을 굳건히 세우는 것이 비상대책이지 이승만, 박정희 다 버리고 가는 것은 비겁하고 분열적인 것”이라는 ‘김병준 비대위 체제’에 대한 김문수 전 경기지사의 비판은 자유한국당 내에서 아주 중뿔난 의견이 아니다.  

김 위원장이 스스로 판단하기에 보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는 데 ‘노무현 정신’이 꼭 필요하다면, 노무현을 직접 거론하지 않으면서 그의 가치만을 채용하면 그만이다. 브랜드를 빼고 콘텐츠만 쓰는 방법이 여러모로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이 ‘노무현의 계승자’를 강조한 이유는 보수 가치 수립 못지않게 정치가로서 자신의 가치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개인적 야망 때문에 정치적으로 변절한 철새 정치인이 아니라, 한때 한 배를 탄 정치적 동지들 가운데서 누구보다도 올곧게 정치적 신념을 지킨다는 대중적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수 가치 설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 구현을 위해 ‘노무현’이란 브랜드가 필요했다고 나는 판단한다. ‘변절자가 아닌 개혁가’라는 그런 대중적 이미지는 자신의 욕망을 밀고나가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동시에 욕망을 추동하는 데 필요한 자기 확신의 욕구 또한 작동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모두에 언급한 대로 ‘반(反)박정희·문재인 대 친(親)노무현’이란 기이한 노선이 등장하게 된다. 
사실 조금 더 큰 잣대를 들이대면 국가주의와 관련해 박정희‧노무현‧문재인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판단도 가능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 사람 모두에게서 국가주의를 볼 수 있다.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한탄한 노무현만이 박정희·문재인과 차별되는 탈국가주의자였을까. 물론 노 전 대통령에게선 지방분권화의 집념과 의지가 목격되고 행정수도 추진, 공기업 지방 이전 등에서 어느 정도 실천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노 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이 말한 대로 국가주의를 배격하고 소위 자율주의를 신봉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이제 이쯤에서 우리는 국가주의의 의미를 검토해 보아야 하지 싶다. 

국가주의가 말하지 않는 것

김병준 비대위원장이 말한 국가주의는 무엇일까. 김 위원장은 비대위원장 취임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사회를 좀 자율의 정신이 넘치는 세상으로 만들자. 그래서 오늘 이제 국가주의 논쟁이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국가가 너무 시장이나 공동체에 너무 깊이 개입하기보다는 시장과 공동체의 자유를 존중하고….”(3)

이 인용문을 통해 또한 다른 여러 문맥을 활용해 김 위원장의 자율주의가 우선적으로 ‘시장 자유주의’를 상정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시장의 자율을 극적으로 강조한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는 다분히 나쁜 인상을 받고 있기에, 자유주의 대신 자율주의라는 단어를 선택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자율(自律)은 자유(自由)에 비해 단어 자체에 규율이 담겨 있어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무한정한 시장의 자유를 회피하려는 의지를 담았다고도 볼 수 있다. 혹은 내용과 무관하게 밖으로 그렇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를 담았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는 기존 자유한국당의 친기업‧친재벌 정책과 궤를 같이한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으나, 자율의 ‘율(律)’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과 같은 기본적인 규율을 포함하는지가 아직 밝혀지지 않아서 친기업‧친재벌의 정도는 확인되지 않았다. 희망적으로 관측해 CSR 같은 기업 내‧외부의 기본적인 규율을 포함하는 시장자유주의라면 김 위원장의 구상을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재벌의 하수인 노릇을 한 자유한국당의 기존 행태에서 일단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과거의 자유한국당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편이 더 타당하지 싶다.

김 위원장은 국가 개입을 억제케 해야 한다면서 개입의 대상으로 시장 외에 공동체를 들었다. 국가개입과 시장의 자유 사이에는 분명 길항관계가 존재한다. 한데 국가개입과 공동체의 자유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존재할까. 

시장과 개인의 자유를 최대로 존중하며 국가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말하자면 로버트 노직 등이 표명한 정통 자유주의 국가론의 핵심이다. 비슷해 보이는 신자유주의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존중한다는 형식적인 언명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바람에 실제론 개인의 자유가 자본의 자유에 철저하게 구속되는 사태가 빚어지고 만다. 노직이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에서 표명한 최대한의 개인의 자유와 최소국가 구상은 신자유주의에선 무너진다. 자본의 자유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제하려면 최소국가를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내버려 두면 되지만, 자유를 억제하기 위해선 개입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소위 진보진영에서는 박정희 정권 등의 권위주의 국가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유주의 사상의 전통과, 시장의 횡포를 제어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을 옹호하는 국가주의의 전통이 모두 발견된다. 그렇기에 한국적 정치지형에서 김 위원장이 말한 시장과 공동체의 자유 및 국가개입의 최소화는 얼핏 새로운 보수 가치의 정립을 위한 유효한 관문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시장과 국가·정부 사이의 동학과 달리, 공동체와 국가 사이의 동학은 달리 해석될 여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쟁점은 우리가 어떤 국가, 어떤 공동체를 가지고 있는가에 모아진다. 김 위원장의 설명대로 국가와 별개로 존재하는 공동체가 있다는 전제하에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했을 때, 즉 국가주의를 탈피해 공동체의 자유를 신장했을 때 우리에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중상주의의 그림자 너머

플라톤의 대표작 『폴리테이아』를 흔히 ‘국가’라고 번역하고, 또한 이 책에서 철인통치를 기술한 것에 착안해 국가주의의 연원을 그리스로까지 끌어올리는 의견이 있을지 모르지만,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전제하는 국가주의는 근대의 현상이다. 상비군‧관료제‧주권 등과 같은 근대국가의 구성요소 없이 국가주의가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상의 공동체’인 국민국가가 성립하는 여명기에 유럽에서 중상주의가 나타나는데, 중요하게 거론되는 중상주의와 고전경제학 사이의 차이는 논외로 하고, (유사)주권을 근거로 한 중상주의의 대외적 배타성과 대내적 개입정책은 국가주의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올리버 크롬웰이 1651년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 간의 모든 물품운송을 영국 국적 선박으로 제한한 항해조례를 반포한 것이나, 루이 14세의 재무장관 장 바티스트 콜베르가 펼친 정책이 중상주의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특히 ‘콜베르티즘’의 주인공 콜베르(1619~1683)는 보호관세를 통해 외국제품의 수입을 제한하고 국내산업 육성과 독점상사(獨占商社) 지원을 통해 프랑스 제품의 수출을 촉진하는 정책을 펼쳤다. 절대왕정의 중상주의인 ‘콜베르티즘’은 보호무역과 유치산업(幼稚產業, Infant industry) 육성을 근간으로 후발 자본주의 국가나 동북아 신흥공업국에서도 시행됐다. 물론 자본주의 이전 단계에서 등장한 ‘콜베르티즘’과 이후 산업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근대국가의 중상주의적 경제정책 사이에는 고전경제학의 인식이 개입하기에 내용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지만 원형은 동일하다. ‘근대국가의 중상주의적 경제정책’에서 중상주의를 국가주의로 바꿔 써넣어도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절대왕정의 중상주의와 근대국가, 특별히 한정해 한국과 같은 동북아 신흥공업국의 (신)중상주의 사이에는 행태적 유사성 외에도 또 다른 유사성이 있는데, 중상주의의 혜택을 특정 집단이 독점한다는 것이다. ‘콜베르티즘’에서 수혜자는 프랑스 왕실이고, 경제개발연대 한국에서 수혜자는 독점 재벌과 부패한 정치집단이었다.

국가주의의 대표적 형태인 (신)중상주의를 시행한 한국은 강력한 국가주의로 경제발전을 이끌었지만, 정작 한국이란 (근대)국가는 기괴한 형태로 출범해 왜곡된 모습으로 성장했다. 한반도, 특히 남한에서는 조선이 근대화를 거쳐 근대국가로 이전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일본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됨에 따라 세계적으로도 드문 기묘한 ‘국민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우선 미국의 전후 구상과 냉전체제에 편입되면서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데, 그 자본주의는 중상주의와 결합한다. 17세기 프랑스가 아닌 20세기에 남한에서 시행된 중상주의는 산업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했지만 사실상 ‘콜베르티즘’과 다름없었다. 

일제 잔재 청산이 좌절되면서 온존하고 발호한 친일세력을 중심으로 일제로부터 과대성장국가를 물려받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디자인 아래 독재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하는 경로를 걸은 한국은 내부적으로 국민국가다운 동질의 공동체를 수립할 기회를 전혀 가지지 못했다. 일제 패망 후 밑으로부터 자발적인 열기에 근거한 건준이 친일세력을 척결하고 통일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면 그런 과정을 통해 한국은 근대국가로서 정체성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서 보듯 한국에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이후 한국의 현대사는 정통성을 상실한 지배계급이 체계적이고 구조적으로 민중을 배제하고 약탈하는 시스템을 발전시킨 기록으로 점철된다. 온존한 친일세력이 권력을 부당하게 독점한 가운데 형성된 남한의 지배계급은, 친미세력으로 휘장을 바꿔 달았다가 점차 산업화세력이란 그럴듯한 신분으로 과거를 세탁하는 수순을 밟는다. 4‧19와 6‧10 등을 통해 민중은 프랑스 절대왕정이나 다를 바 없는, 혹은 더한 약탈적인 지배체제에 균열을 만들어냈지만, 그러나 결정적 균열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약탈적 지배체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프랑스에는 ‘콜베르티즘’ 뿐 아니라 프랑스 혁명과 혁명정신이 투영된 공화주의가 존재한다. 반면 잘못된 출발을 아직 바로잡지 못한 탓인지 한국에서는 국민국가에 걸맞은 시민사회의 성장이나 공동체의 발흥이 목격되지 않고 있다. 다만 시민적 저항에 힘입어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주의를 물리쳐 상당한 수준의 개인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는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국가주의 혹은 중상주의 개입의 성과를 특정 집단에 편중시킨 약탈적 국가시스템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다시 김병준 위원장의 보수 가치 개혁으로 돌아가, 시장과 공동체의 자유를 신장하고 국가주의를 억제한다는 발상은 한국 실정에서 과연 유효할까. 결론적으로 김 위원장의 착상은 마케팅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고, 인적 청산과 관련해 전술적인 우회로를 확보했다는 이른바 정치공학 측면에서도 나쁘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국가 의제 측면에서는 유효하지 않다.

우선 경제적 과실과 정치 권력이 특정 집단에 편중된 약탈적 국가시스템을 변경하려면 국가주의를 폐기할 것이 아니라 과도적으론 국가주의를 강화해야 한다. 시스템의 정비는 시스템을 통제할 때만 가능하고 불완전한 시스템을 그 상태로 놓아버리면 영영 바로잡을 수 없게 된다. 시스템을 정비해야 할 가장 시급한 대상은 시장이다. 과대성장국가가 과대시장성장국가로 바뀐 지 이미 오래다. 이 상태에서 국가의 개입을 포기하면 우리는 국가가 아닌 한 줌의 지배계급이 사회를 완전하게 통제하는, 특히 시장이 사회를 철두철미하게 장악한 ‘리바이어던 사회’로의 완벽한 이행을 남한에서 목도하게 될 것이다.

반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주의의 개입은 철저하게 차단돼야 한다.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시민사회의 역량 강화를 통해서 이 과업은 추진될 수 있다. 촛불혁명의 의의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지만, 과도한 국가주의에 의한 개인 자유의 침해를 시민들이 저항을 통해 막아낸 것이란 설명도 가능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추진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퇴행적 조처들은 앞으로 영구히 폐기돼야 한다. 촛불혁명 이후 전개된 이런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려는 모든 시도는 반역사적이다. 김 위원장의 용어를 그대로 써서 참고로 문재인 정부의 국가주의는 개인이 아닌 시장을 주된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상기하고 넘어가자.  

따라서 김 위원장이 ‘탈국가주의의 자율주의’라는 새로운 보수 가치를 정착시키고 싶다면 CSR 등 기본적 기업 내외부 규율을 전제한 시장기능 활성화와 개인의 자유 신장을 기본값으로 잡고 논의를 진척시켜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자율주의의 ‘율(律)’에 아직도 기대를 걸고 있다. 김 위원장이 공동체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개입을 억제해야 한다고 한 관점은 다소 허황해질 수 있다. 그가 시장과 공동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공동체는 시장 외의 시민사회 및 공공영역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애초에 잘못된 국가가 배태되는 바람에 공공과 시민사회에 걸쳐 이른바 공동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제대로 형성된 걸 보지 못했다. 굳이 찾아내자면 시장과 공공영역에 걸쳐 존재하는 기득권과 부패 연합이 시민사회를 억누르는 현상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런 현실진단 없이 공동체의 자유 신장이란 말을 쓰게 되면 김 위원장이 기득권 세력의 이익 재생산에 발 벗고 나서 곡학아세한다는 비아냥거림을 듣게 될 뿐이다. 

공화주의는 가능한 대안인가

공동체의 자유보다는 어쩌면 공화주의가 더 현실적합성이 큰 용어일 수 있다. 한동안 ‘잠행 모드’를 유지한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6선‧부산 중구영도구)이 공화주의를 내세운 건 재미있는 대목이다. 6‧13 지방선거 참패에 책임을 지는 의미로 2020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후 공식적인 활동을 자제한 김 의원이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며 공화주의를 들고나온 의도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김 의원은 8월 27일 ‘길 잃은 보수정치, 공화주의에 주목한다’를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공화주의’를 화두로 던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무너진 보수의 가치와 세력을 재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김 의원 측은 8월 24일 낸 보도자료에서 “견제와 균형을 중시하는 공화주의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절대 권력의 출현을 막는 역할을 하며, 민주(주의)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여야는 국정 파트너’라는 것 또한 넓은 의미의 공화주의 정신이다. 국정이 최고 권력자나 특정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운영되지 않으며 모든 국민의 목소리를 잘 반영하는 게 공화주의라는 헌법정신에 입각한 진정한 협치의 정치”라고 밝혔다. 또한 “보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므로 ‘우파’라는 용어가 정치 이념으로서 더 적합하다”며 “이번 세미나에서 공화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진정한 우파 정치’로 나아가기 위한 해법을 찾아보고자 마련했다”고 적시했다. 

김 의원의 뜬금없는 공화주의 공세는 김병준 위원장의 ‘탈국가주의 자율주의’의 대항마로 제시됐을 가능성이 크다. 본격 사상투쟁이라기보다는 자유한국당 당권경쟁을 겨냥한 마케팅 성격이 강하다. 

그럼에도 보수정치가 외양상일지언정 사상과 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양상은 바람직해 보인다. 본심이 무엇이든 계파 말고는 아무런 정치철학이 없는 집단보다는 이념을 모색하는 자세와 과정은 한국의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된다. 더불어 김 의원이 공화주의를 의제화하도록 촉매 역할을 했다는 측면에서도 김 위원장의 가치 논쟁은 긍정적인 효과를 가진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정치 마케팅을 위한 ‘아무 말 대잔치’보다는, 당사자가 직접 공부해서 구체적인 의제화/이념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긴요하다. 

예컨대 공화주의의 대전제는 ‘공동선’인데 전술한 대로 ‘공동선’이 존재하지 않는 기형적 구조의 한국사회에서 ‘공동선’의 모색 없이 공화주의가 가능할 것인지, 만일 ‘공동선’을 모색하려면 어떤 수순을 밟아야 할지 진득한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김 위원장의 ‘탈국가주의의 자율주의’ 또한 정교화하는 진지하고 반복된 토론을 거쳐야 한다. 공화주의가 가능하려면 인내하며 토론하는 관행이 먼저 수립돼야 한다고 할 때 자유한국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때아닌 사상논쟁은 유의미한 움직임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이 모든 논쟁을 넘어서는 핵심 의제를 놓쳐서는 안 된다. (사실 자유한국당 구성원 모두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공화주의를 구현하면 좋지만, 공화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 여건이 미비한 상황에선 공화주의 자체보다는 공화주의로 갈 수 있는 여건을 하나씩 구축해야 함은 당연한 이야기다. 내가 판단하기에 이 시점에서 자유한국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는 벌어질 많은 토론의 대전제는 인적 청산이다. 촛불혁명이 심판한 것은 박근혜 개인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 파탄에 책임 있는 많은 자유한국당 의원들 또한 심판당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가 아직도 부끄러움을 모른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만일 그들 중 다수가 다음 총선에 다시 출마해 국민이 심판하는 상황이 초래된다면, 자유한국당은 역사로부터의 심판을 모면하지 못할 것이다. 역사와 시대로부터 단죄받기 전에 자유한국당이 스스로 박근혜 정부 부역자들을 심판해서 철저하게 도려내야 한다. 

정치는 명분과 의제를 중시하지만, 현실의 매 단계에서는 책임을 이행하며 발전한다. 자유한국당이 살아나고 이른바 보수가 부활하려면, 금배지를 달고 아직도 후안무치하게 떠들고 있는 자유한국당 내의 많은 정치 모리배들을 완벽하게 솎아내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다. 

김병준 위원장의 ‘탈국가주의의 자율주의’는 성패는 재삼 강조하거니와 이런 인적 청산에 달려있는데, 의제 주도를 통한 정치 구조화로 인적 청산에까지 성공한다면, 그를 다음 세대 보수 정치를 책임질 유망한 정치인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자율주의는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 않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1)  “‘반박, 친노’ 김병준의 새 보수 실험”, 2018.07.30., 경향신문
(2) “김병준 ‘한국당은 고장난 자동차’…친박 ‘車 아닌 운전자 문제’, 2018.08.20. 서울신문 
(3) “[인터뷰] 출범 첫날부터 '험난'…김병준 한국당 비대위원장”, 2018.07.20. 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