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력의 결핍

2018-08-31     레지스 드브레이 | 작가

“모든 남자는 쉽게 믿는다.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 프랑스의 명문 공학 계열 그랑제콜) 졸업생은 남자다. 그러므로 에콜 폴리테크니크 졸업생은 쉽게 믿는다. ‘쉽게 믿는다’의 유의어: 속이기 쉽다.”


남자들 중 가장 순진하지 않은 부류는 누구일까? 교활함과 영악함이 무기인 정치인들, 그리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이 임무인 전문가들일 것이다. 그리고 전문가들 가운데 헛된 꿈을 꿀 가능성이 가장 낮은, 다른 말로는 가장 신뢰할만한 이들은 누구일까? 바로 경제전문가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상 가장 진지하고 신중한 인물은 누구였을까? ‘프랑스 최고의 경제전문가’라 불리는 레몽 바르 전 총리와,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에 모두가 인정하는 지성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이 아니었을까?

여기에 희대의 사기꾼 두 명이 있다. 대중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에콜데민(광산 분야의 그랑제콜)을 졸업한 엘리트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이 둘은 1976년부터 1978년까지 3년 동안 프랑스의 내로라하는 고위 인사들을 쥐락펴락했다. 그리고 수억 프랑을 공중에 날려버렸다. 발자크의 소설에 버금가는 이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1)

이탈리아 출신의 TV 수리공 알도 보나솔리와 공상가적 기질이 있는 벨기에의 백작 알렝 드 빌가는, 전 총리였던 앙투안 피네를 매개로 당시 프랑스의 대통령과 총리였던 발레리 지스타르 데스탱과 레몽 바르를 만났다. 이 둘은 개발되지 않은 원유층을 원격으로 탐지하는 기술을 비롯해 ‘세기의 발견’을 자신들이 해냈다면서, 국영 정유회사인 엘프아키텐(Elf-Aquitaine)이 이 기술을 선점할 경우 경쟁사들보다 월등히 앞서나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석유 위기에도 문제없이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

그리고 단 한 번의 해상비행으로 소련의 핵잠수함을 발견해낼 수 있는 이 기술이 전략적인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는 만큼, 자신들이 접촉한 당국자들에게 절대적인 기밀을 요구했다. 점성술과 연금술에 푹 빠져 있는 이 두 명의 ‘학자들’ 주위로, 국제적으로 비주류에 속해 있던 사람들과, 오푸스 데이(성직자 자치단)가 있는 바티칸, 본, 워싱턴, 브뤼셀의 열렬한 유럽 통합 지지자, 광적인 반공산주의자, 명예 정보요원, 부패한 변호사들이 모여들었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스위스 연방은행(UBS)장인 필립 드 웨크가 이 계획을 지지하고 나섰다. 게다가 엘프(Elf)의 유능하고 존경받는 회장 피에르 기요마와 최고의 과학기술학교를 졸업한 그의 직원이 이 계획에 관심과 열의를 표명한 것은, 이 사기 사건이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3)

그들이 대체 왜 그랬는지, 권력 유지를 위한 불법 자금을 축적하려 한다든지, 복잡한 음모가 숨어 있다든지 하는 등의 추측들에 관해서는 여기에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지 성역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경제적 자산이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이어진 사회적 관계에서도 상업적 요소와 각종 불법 거래는 언제나 존재했으니 말이다. 

다음으로,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좀 더 돈이 되는 모험에 나섰다. 시험 비행을 하고, 회사를 설립하고, 두 주인공인 자신들에게 돈을 지급하는 것 등이었다. ‘델타’이니 ‘오메가’이니 하는 이름의 기기들, 원유층을 탐지한다는 이 기기들에 대한 사전 점검 따위는 없었다. 외국 출신 2인조 사업가의 정확한 과거 행적, 그들이 자산을 축적한 과정, 그들이 내세운 직책과 학위의 진위를 확인하는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TV 수리공은 핵화학 교수로 탈바꿈했다). 

그 후 많은 일들이 있었고, 프랑스 대통령이 극비에 직접 실험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원자력청(CEA) 소속의 젊은 화학자 쥘 오로비츠가 아동들도 가능한 한 지극히 간단한 수준의 테스트로 이 두 사기꾼, 허풍쟁이, 협잡꾼, 망상가, 잡부 나부랭이(정확히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으므로)의 사기 행각을 밝혀낸 것은, 그로부터 무려 3년이 지난 후였다.

결핍에의 충족욕구와 거짓의 힘은 정비례한다
  
르네 데카르트의 ‘이성적인’ 나라에서 이렇게나 늦게 진실이 밝혀진 이유는, 천재적인 허언가들이 다음의 세 가지를 적절히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최적의 순간, 집단 효과, 불가사의하고 신비한 것에 대한 높은 가치평가다. 집단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형성된 거대한 흐름의 통상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겠다.

1. 1973년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보복성 원유가격 인상으로 촉발된 석유파동의 여파는 엄청났다. 원유가격은 4배가 올랐고, 시추비용도 터무니없이 상승했다. 따라서 극심한 경제 침체가 나타났다. 어떻게든 이 위기에서 벗어나야 했다. 실질적인 수요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상의 공급이 등장했고, 또 그것이 매력적으로 비쳤다.
결핍에의 충족이 시급하고 간절할수록, 결핍을 채워주는 ‘공급’에 대한 신뢰는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기대되는 효용가치가 클수록 가격은 올라간다. 예를 들어 인간은 영원한 삶을 얻을 수만 있다면,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과 신자에게 요구되는 의무와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비만 환자가 단기간에 체중을 줄이는 약을 얻기 위해 이 정도의 대가를 지불할 지는 의문이다. 다시 말해, 당시에는 프랑스 영토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너무나 절실했던 나머지, 모든 중요한 점검과정을 건너뛰고 유명인사들의 연락처를 무기로 내세우는 사기꾼에게 뛰어난 엔지니어 대접을 해줬던 것이다.

2. 한 사람의 언어란 있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믿음도 있을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믿기 때문에 내가 믿는 것이고, 나의 믿음은 그 사람의 직책과 자질에 근거한다. 내가 1976년에 해저 유전탐지기의 존재를 믿었던 것은, 총리와 프랑스 최고의 국영기업 수장이 그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를 믿겠는가?

3. 게다가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비밀을 공유했다. 신비한 것에는 언제나 후광이 있고, ‘태초부터 감춰져 있던 것들’에는 창조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것이 바로 영지(gnosis)의 원칙, 즉 세상을 구원하는 지식이자 불가사의, 불확실성, 비책, 카발라(Kabbalah)의 상징에서 비롯되는 깨달음이다. 두 ‘발명가들’은 엘프의 엔지니어들이 자신들의 실험공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렇다고 해도 엔지니어들은 그들이 늘어놓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분명히 한 번쯤은 들어보지 않았을까? 
이것은 바로 비정상적인 두 인물이 정상적인 상태로는 접근할 수 없는 그 무엇,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그 무엇에 도달해 있었다는 증거다. 은밀한 과정을 통해 설명이 불가한 현상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마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마디로, 그들이 이뤄낸 ‘과학적’ 쾌거는 어찌나 대단했던지, 프랑스에서 가장 명망 높은 집단 안에서도 가장 위엄 있고 신뢰도가 높다는 대통령까지도 이 놀라운 발견이 경쟁국인 미국의 손에 넘어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우리의 마술사 선생님이 만들어낸 게임에 속수무책으로 놀아났던 것이다.

우리의 지성은 생각과 사고에 근거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장 티롤도 이렇게 말했다. “전문가 없는 민주주의는 재앙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각종 믿음이 판을 치게 되기 때문이다.”(2018년 3월 3일 <Le Point>) 그는 또한 “전문가들의 신뢰도가 점점 더 떨어”지고 그 틈새를 파고든 포퓰리즘이 모든 종류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비판했다. 

환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과학을 믿자고? 맞는 말이다. 문제는,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과학자들, 고학력자이자 ‘프랑스 최고의 경제전문가’인 레몽 바르의 측근들이 이 망상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또 두 명의 가짜 약장수를 정부의 가장 은밀하고 중요한 성소에까지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그들의 난처함과 당혹스러움은 이해한다. 전문가와 바보, 그리고 우리의 정신적 안정을 보장해 주는 믿음과 이성을 구분 짓는 경계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가장 똑똑하다는 이들에 의해 제기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어이없는 이야기에는, 우리를 확실하게 안심시켜 주는 그 무엇, 세상에 믿을 게 하나도 없다고 탄식하는 우울한 영혼들에게 반박할 수 있게끔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 없는’ 세상, 강력한 비판 앞에서는 어떤 정치적 권력, 어떤 기구나 조직, 경험적으로 확인된 진실도 파괴되고 해체되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사라져버리는 세상에서, 믿음은 위기 속에서도 건재하며 또한 여전히 확실하고 안정적인 가치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

누가 감히 허무주의(Nihilism)를 말하는가? 국가가 현명하다고 내린 결정에 실망할 때면, 우리는 언제든지 엉터리 속임수에 넘어갈 수 있고 또 기분에 따라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동시에 ‘가짜 뉴스’의 범람에 분노하고 ‘팩트 체크’를 독려하는데, 지금은 정말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 시대이다. 

어떤 집단도, 어떤 정치 세력도, 어떤 직업 부류도 터무니없는 이야기, 즉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쉽게 공유되는 대상’이자 데카르트의 후예인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등등한 기세를 자랑하는 이런 이야기들이(최근 우리의 외교 정책과 관련된 수많은 일화들이 이를 증명한다) 온 세상을 장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보잘것없는 편견에 얽매이거나 앞날을 향해 욕설을 퍼붓지는 말자. 좌파이든 우파이든, 독실한 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육식인이든 채식인이든, 지구인이든 외계인이든, 우리는 모두 다 천성적으로 잘 믿고, 계속해서 무언가의 결핍 상태에 있다가, 다음에도 또 속임수에 넘어갈 것이 분명한 얼간이들이다.  


글·레지스 드브레이 Régis Debray
작가. 이 기사의 긴 버전은 잡지 <Medium>의 2018년 7~9월호에 실려 있다.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Pierre Péan, 『V: Enquête sur l'affaire des avions renifleurs et ses ramifications proches ou lointaines(해저 유전 탐사기 스캔들과 그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조직들)』, Fayard, Paris, 1984, 1981년 1월 21일 감사원 기밀 보고서 내용 참조
(2) 1966년 프랑스 정부에 의해 설립된 정유 회사로, 수많은 국영사업들을 담당하다가 1994년에 민영화됐으며, 아프리카에서의 정경유착 사실이 밝혀진 뒤 2000년 토탈(Total) 사에 합병됐다. (참조: Alain Deneaunlt, ‘Total, un gouvernement bis 프랑스의 유사정부로서의 토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8월호) 
(3) 에콜데민을 졸업하고 저항운동에 참여한 이력이 있는 고위 관료로, 제5공화국 시절 정보(첩보), 석유, 핵에너지와 관련된 모든 사안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참조: 니콜라 랑베르(Nicolas Lamber)의 3부작, 『Bleu-Blanc-Rouge. L’a-démocratie(청-백-적, 부제: 민주주의)』comprenant Elf, la pompe Afrique, Avenir radieux, une fission française et Le Maniement des larmes(엘프, 아프리카의 펌프, 눈부신 미래, 프랑스의 분열, 눈물의 조작), L’Échappée, Paris,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