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뮌헨 협정의 이면

2018-09-28     가브리엘 고로데츠키 | 역사학자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인 프랑스와 영국은 뮌헨 협정을 체결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를 사실상 독일 나치 세력에게 넘겨주었다. 그 뒤로 수십 년이 흐르면서 뮌헨 협정은 두 전체주의 국가 간에 체결된 독소불가침조약에 가려져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소련을 고립시키는 데 혈안이 되었던 프랑스와 영국을 주축으로 탄생한 뮌헨 협정이야말로, 결과적으로 소련이 독일과 손을 잡도록 만듦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앞당겼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839년 아스톨프 드 퀴스틴 후작은 가족들이 모두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자, 당시 독재체제 하에 있던 소련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퀴스틴 후작은 “소련인들은 유럽인 흉내를 내는 중국인”이라고 진저리치면서 파리로 되돌아왔다. 그로부터 1세기 후, 영국의 작가이자 유명 외교관이었던 해럴드 니컬슨은 런던주재 소련 대사의 우아한 저택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면서 중얼거렸다. “무언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야. 유럽인인 것처럼 행동하는데 결국은 동양인이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나, 당시 서구와 러시아(소련)의 관계는 뿌리 깊은 선입관과 편견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고, 이는 양측 간의 불신을 키워 종국에는 소련이 고립되고 유럽에서 제외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제국주의적 경쟁구도로 상황이 더욱 악화되자,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38년 9월 30일,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해 아돌프 히틀러를 달래보자는 취지의 뮌헨회담이 개최됐다(영국과 프랑스는 뮌헨 회담을 열어 히틀러의 요구대로 독일이 주데텐란트(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 거주자 지역)를 합병하도록 승인했다-역주). 그리고 이 뮌헨회담의 여파로 독일과 소련의 외무부 장관인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체결한 독소불가침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1)
그 후 40년간 역사의 수정과 왜곡이 이뤄지면서, 영국의 입맛에 맞춰 ‘죄인들’의 죄는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유럽국가의 오랜 반러 감정과 이데올로기적 편견 문제는 과소평가됐으며, 영국과 프랑스 정책에 대한 ‘객관성’은 과대평가됐다.(2) 놀라운 사실은,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과 협력해 실현가능한 다른 해결책을 검토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뮌헨 협정이 체결되고 한 달 후, 독일 유화정책을 주장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조지 6세 국왕에게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는 일단 프랑스나 소련이 서로 간에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했다. 체임벌린 총리는 소련과는 계속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독일과 맞서기 위해서는 소련을 포함한 모든 국가들과 대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 윈스턴 처칠에게 끝까지 반대할 것”이라고 썼다. “다행히도 나는 천성적으로 고집이 세고 한번 정한 결정은 잘 바꾸지 않아.”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데올로기 신봉자였지만,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힘의 관계와 영향력의 범위를 고려한 대단히 실용적이고 이성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뮌헨회담에 대한 (서구의) 역사적 해석은, 이전 5년간 히틀러의 공격적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소련이 기울인 각고의 외교적 노력에 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1932년 가을, 막심 리트비노프 외교부 장관은 스탈린에게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이 임박했다”고 경고하면서, 나치의 급부상에 대처하려면 소련, 영국, 프랑스의 관계에 있어서 극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1934년, 루이 바르투 프랑스 외교부 장관은 이 같은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소련을 국제연맹(LN, League of Nations)에 받아들였다. 1935년 5월, 프랑스는 소련과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고, 뒤이어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도 같은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두 조약은 이름만 같았고 내용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상호원조조약은 실상 효력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이었던 에드바르트 베네시는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상호원조조약에 ‘프랑스가 행동할 경우에 소련도 행동에 나선다’는 조항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나서지 않는 이상, 소련과의 조약은 무용지물이었다.) 1938년 뮌헨 협정 체결 직전 체코슬로바키아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소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에는 선택의 길이 없었다. 프랑스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홀로 버림받아 독일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소련의 밀월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1934년 10월 9일, 프랑스의 바르투 외교부 장관과 유고슬라비아 국왕인 알렉산더 1세가 마르세유에서 동시에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르투 장관의 후임인 피에르 라발은 4년의 임기 동안 소련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1930년대는 온갖 사회적 갈등이 폭발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소련은 프랑스의 엘리트층이 우경화하거나 파시즘에 동조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게다가 런던주재 소련대사였던 이반 마이스키는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영국의 행보를 맹비난했지만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해 실망감만 안겼다. 결국 ‘소련의 희생 위에서’ 프랑스, 독일, 영국 3자 협정의 밑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소련은 프랑스와의 협정을 구체화하기 위해 2년 가까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는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스탈린은 분위기 전환을 꾀하면서, 영국의 유화정책에 대비해 독일 측에 성급하고 은밀하게 외교적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1937년 5월, 체임벌린이 영국 총리가 되던 해, 소련에서는 대공포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소련의 외교정책은 안정적으로 유지됐고, 1937년 7월 마이스키는, 소련은 국제적 위기 상황을 이용해 유럽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 ‘공산주의 체제’를 강요할 이데올로기적 욕심이 없다며 체임벌린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마이스키의 설득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소련과의 회담이 끝난 후 체임벌린 총리는 “소련이 은근한 방식과 교묘한 술책으로 우리를 사주해 독일과의 전쟁에 끌어들이려 한다”고 확신했다. 
당시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전쟁이란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는 방편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성적인 경고의 목소리는 듣지 않은 채, 체임벌린은 마음대로 행동했다. “솔직히 나는 소련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어.”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만약 소련이 정말로 공격에 나선다 해도, 나는 그들이 제대로 공격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히틀러와의 관계를 언급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어조였다.
1937년 말, 앤서니 이든이 외교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 후임인 에드워드 프레데릭 린들리 우드(핼리팩스 경)가 아마추어적인 모습을 보이자, 체임벌린은 외교부에 발길을 끊고 주변 측근들의 조언에 의지했다. 한편, 1938년 3월 12일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데 대해 영국이 신중한 반응을 보이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소련의 고민은 더욱더 깊어졌다. ‘극도로 비관주의자’인 마이스키는, 오로지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체임벌린이 국제연맹을 저버리고 1933년 ‘소련을 제외’하고 열렸던 4자 회담을 재개하려 할까봐 전전긍긍했다.(3)
제네바에서는 리트비노프(소련 외교관)가 국제연맹 회원국들을 중심으로 반나치 동맹을 결성할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1938년 4월, 리트비노프는 레옹 블룸 프랑스 총리를 만났지만, 그는 자신의 미래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리트비노프는 블룸이 “피로해 보이고 만사에 체념한 듯했다”고 스탈린에게 전보를 쳤다. 프랑스와 소련 간 군사적 협의의 경우 프랑스가 계속 결정을 미루고 있었는데, 블룸은 장군들과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이를 ‘사보타주’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우파 정당과의 연정이 시작되면서 블룸의 후임으로 총리직에 올랐다. 
 
역사적 순간, 
그들은 책임감을 발휘할 것인가?
 
4월 28일과 29일 양일간 런던에서 열린 영-프 정상회담은 참여국들의 주도권 경쟁이 극명하게 드러난 자리였다. 달라디에는 필요할 경우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반 히틀러 세력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영국의 외교부 차관인 알렉산더 캐도건은 이에 대해 “매우 아름답기는 하지만 끔찍하게 어리석은 행동”이라면서 사석에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영국 국왕이 파리를 방문했을 당시 핼리팩스 경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를 가상국가처럼 소개하며,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도 없고, 외부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국가라고 프랑스 측에 설명했다. 
마이스키는 서구 국가들이 기본적으로 소련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데에 대한 반발로 소련 내에서 ‘고립을 자청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독일이 수데텐 지역을 점령할 경우 프랑스와 영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도우러 오면 “소련도 합류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동시에 리트비노프는 씁쓸한 현실을 지적했다. “만일 서구 국가들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소련의 지원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그들에게 굳이 소련이 나서기는 어렵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들은 소련을 무시하고 있으며,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마다 그들끼리만 결정을 내린다”고 한탄했다.
프랑스의 신임 외교부 장관인 조르주 보네는 소련의 유일한 소망이 “모든 것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일단 전쟁을 일으킨 뒤 먹잇감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38년 9월 2일 국제연맹의 이사회를 준비하면서 리트비노프는 모스크바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장 파야르를 불렀다. 소련의 입장에 대한 불확실성을 없애주고자, 리트비노프는 만약 프랑스가 의무를 이행하기만 한다면 “소련도 체코-소련 협정에 따라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보네에게 전달해 줄 것을 파야르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소련,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의 참모들이 모여 군사적 협상을 진행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위기를 국제연맹 총회의 의제로 상정하자고 제안했다. 마이스키는 이런 대화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역사학자들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다른 국가들이 의무를 이행할 준비가 돼 있을 경우 우리도 체코슬로바키아에 군사적 지원을 할 의향이 있다. 지금과 같이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그들은 과연 책임감 있는 행동에 나설 것인가?”
외교부 내부적으로 자신의 장관 취임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파야르는 이런 마이스키의 메시지를 축소 해석해, 소련은 자신의 의무를 이행할 생각이 없다는 식으로 거짓 보고했다. 9월 4일, 프랑스에서 아무 답변을 듣지 못해 화가 난 마이스키는 처칠을 찾아갔다. 그는 리트비노프가 파야르에게 보낸 메시지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고는, 처칠에게 이 정보를 핼리팩스 경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에 대한 답변은 9월 7일에 도착했는데, 영국 내각이 <The Times>에 실은 발롱데세(Ballon d'essai, 여론 동향 살피기)가 그것이었다. 이 기사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수데텐 지역을 독일에 넘겨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가 단일민족 국가가 됨으로써 얻는 이익이 독일과의 접경 지역인 수데텐을 잃는 데 따른 손해보다 클 것”이라고 단언했다. 9월 8일 핼리팩스 경은 마이스키를 불러, 매우 유감이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위기를 고려해 마이스키는 더 이상 제네바에 머물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핼리팩스 경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히틀러를 자극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위기를 모른척함으로써 도덕적 지탄을 받은 국제연맹의 회기 중에, 체임벌린은 9월 14일 저녁, 히틀러를 만나러 베르히테스가덴에 갈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이 바로 뮌헨회담이었다. 리트비노프는 다시 한번 소련의 참전 의지를 강조하면서 열정적인 연설을 선보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당혹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리트비노프는 “만약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에 항복한다면 막대한 대가와 처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마치 앞날을 예견하는 듯한 경고를 하며 연설을 마쳤다. 리트비노프는 또한 프랑스, 영국, 소련 군사 전문가들의 긴급회의 개최를 제안했지만, 영국 외교부는 이것이 “독일을 자극할 것이 분명”하므로 “효용성이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소련에서는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붉은 군대가 집결해 키예프와 벨라루스의 특별 군관구에서 대규모 훈련을 벌였다. 보병대 60개, 기병대 16개, 전차 6대, 공군연대 17개가 소련의 서쪽 국경을 따라 배치됐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인접국이 아니기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이동하려면 루마니아나 폴란드를 관통해야 했다. 루마니아 정부는 자국 영토의 상공을 지나도 된다는 무언의 합의를 해줬다. 그러나 프랑스는 루마니아보다 폴란드를 거치는 것이 훨씬 더 빠른 길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붉은 군대가 폴란드를 통과할 수 있도록 오랜 동맹인 폴란드를 설득해주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태에 대한 체임벌린의 입장은 1938년 9월 27일 BBC 방송에서 한 연설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방청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전혀 모르는 먼 나라 사람들 간의 갈등 때문에 우리가 방독면을 써야 한다는 것은 정말로 끔찍하고, 비현실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뮌헨회담 초청에 긍정적으로 응하겠다는 의향을 의회 측에 전달했다. 
체임벌린이 독일로 향하는 동안 핼리팩스 경은 마이스키를 불러 “뮌헨회담 초청장을 소련에는 미처 보내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를 구하면서, “첫 번째 이유는 워낙 시급한 상황이라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는 히틀러가 어떻게 답할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뮌헨회담 참여국 구성을 둘러싼 논쟁으로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글·가브리엘 고로데츠키 Gabriel Gorodetsky
역사학자, 옥스퍼드 대학교 올소울스 칼리지 명예교수, 이반 마이스키의 수기 『Les Belles Lettres』(Paris, 2017)를 편찬함.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졸업.
 
(1) Gabriel Gorodetsky, ‘Les dessous du pacte germano-soviétique(독소불가침조약의 내막)’,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7년 7월호.
(2) 『Gulty Men(죄인들)』은 1940년 7월 런던에서 Cato라는 필명으로 출판된 책의 제목이다. 이 책은 15명의 영국 지도자들을 비판했는데, 네빌 체임벌린 총리의 죄목은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지나친 배려와 군사력 약화였다.(-편집자주)
(3)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이 1933년 6월 7일 로마에서 조인한 협정(-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