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집단 폐쇄회로 아닌 인류애'노블레스 오블리주'
21세기 스노비즘의 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 -체 게바라-
라르드 포(피부예술)', 카페, 아베크(함께)족, 미장 센(연출), 바게트, 크롸상, 레스토랑, 시네마, 모드, 카페오레 등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프랑스 단어들이다. 레슬링 경기 TV시청 때마다 듣게 되는 '빠떼루1)도 실은 프랑스어지만, 의외로 그 사실을 아는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직도 프랑스 카르티에(Cartier)시계를 '칼채', 즉 일본 식으로 부르듯, 일각에선 안타깝게도 본토 발음이 아닌 일본 식 발음을 차용해 쓰고 있기 때문이다. 천만 다행인 것은 발음은 왜곡됐지만 그 의미가 훼손되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 '자르뎅'이나 '가든'(정원), '부티크'(상점)등은 '스노브'(snob)한 측면만을 부각시킨 대표적인 사례들로 꼽힌다. 본래의 뜻은 온데 간데 없고 부르주아적 이미지만 강조된 상품 트렌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프랑스어 '자르뎅'이나 영어 '가든'은 모두 정원이란 본래의 뜻과는 무관하게 카페 체인점과 고깃집으로 둔갑했다. 심지어 프랑스 현지에선 그 흔한 동네 구멍가게에도 '부티크'란 간판을 내걸지만, 한국에선 저명한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의상실의 전유물쯤으로 이미지가 굳어졌다.
'스노브'에 대한 오해 '진보성 망각'
물론 사람이나 사물이 '스노브'하다는 것을 꼭 속물적인 것과 등가로 칠 필요는 없다. 언어는 얼마든지 시대에 맞춰 생성되고 소멸되는 생물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어느 집단이 특정 외국어를 차용해서 트렌드에 맞게 신조어를 파생시키고 대중화한다고 해서 비난하거나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의도가 단순히 상품의 고급스런 이미지나 상품 개발자의 부르주아적인 속성만을 대중들에게 홍보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에 국한된 것이라면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스노브'(Snob)의 원래 영어 뜻은 구두 수선공(Shoe-repairer)이다. 누가 '스노브'하단 말은 라틴어에서 '귀족 타이틀이 없는 사람'을 일컬을 때 붙여 쓰던 '시네 노비리타테'(sine=without와 nobilitate=nobility)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요컨대 자칫 '스노브'를 동원한 상업적인 귀족 마케팅이 귀족이 아닌, 지체 낮은 평민들만 잔뜩 양산해 내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한편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는 <스노브 독본(讀本>(1848)이란 책에서 "옛날에는 신분이 낮은 자를 가리켰으나, 19세기 영국에서 신사인 체하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을 속물들"이라 했다. 야후 백과사전에서도 "고상한 체하는 속물 근성, 또는 출신이나 학식을 공개적으로 자랑하는 일"을 '스노브'라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어떤 사람이 '스노브' 하단 말은 그 사람의 긍정적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 많이 떠올리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스노브'가 지닌 이기와 사회적인 진보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게 설령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해도, 새로운 유행과 풍습을 둔 신조어를 만들어내는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선적 품격의 도구로 쓰이기도
월터 스코트(1771-1832)가 쓴 기사도 소설 <아이반호>(1819)에 재미있는 풍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포크'로 말하자면 훌륭한 프랑스어야. 즉 돼지란 놈은 살아있을 적에는 색슨족의 이름 '피그'로 통용되지만 성(城)안의 고대 광실로 옮겨져 높은 양반들이 먹게 되는 날엔 노르만족의 언어인 '포크'로 불리는 거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에서 살던 노르만족이 영국에 건너가 색슨족을 정복하고 그들을 하인으로 거느리던 시절을 묘사한 장면이다. 색슨족이 가축을 기르는 동안 사육장의 가축들은 모두 색슨족 언어인 영어로 불리지만, 그걸 잡아 식탁에 올렸을 때는 주인인 노르만족의 언어, 즉 프랑스어로 불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내용이다.
이를테면 돼지 '피그'는 '포크'(porc)로, 소는 '옥스'나 '카우'에서 프랑스어 소를 지칭하는 뵈프(boeuf)를 흉내 낸 '비프'로, 양은 '시프'에서 프랑스어 무통(mouton)을 영어식으로 발음한 '머튼'으로, 송아지 '카프'는 프랑스어 보(veau)에서 유래한 '빌'로 바꿔 사용한 것이다. 이들은 몸종들의 언어로 된 음식물이 자신들의 고귀한 옥체를 작동시키는 신성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 쯤으로 여겼다. 정신뿐만 아니라 식생활 문화까지도 지배하겠다는 '스노브'한 노르만 민족의 치졸한 도도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암울했던 과거 신분 제도의 그늘에서 현대인들은 여전히 못 벗어나고 있다. '비프'나 '포크'같은 당시 파생된 신조어들이 새로운 대중음식 문화 코드로 세계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격조 높은 프랑스 식탁 에티켓으로 어느 덧 둔갑했기 때문이다. 교묘히 스노비즘을 자극하는 장사치들의 농간에 현대인들은 맥없이 무장 해제 당하기 일쑤다. 프랑스의 일반 상점 '부티크'를 '디자이너 숍'으로, 영어 '가든'을 '고깃집'으로 둔갑시켜도 사람들에게 먹히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로아는 "어떤 것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좋아하는 척 하는 태도"를 스노비즘이라 규정했다. 그래야 주변으로부터 칭찬받고 거들먹거릴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된 천박한 태도를 꼬집은 것이다. 단어가 왜 생성 되었는지 그 기원이나 원인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단순히 소 혹은 돼지를 영국의 이미지 2)가 아닌 프랑스의 '스노브'한 이미지 3)로 배우고 설파하는데 신경을 쓸 뿐이다. '스노브'해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매우 강한 자생력을 지녔다는 방증이다.
설상가상 그 전염성도 매우 높다. 집단적이기 때문이다. 선진국과 후진국, 대도시와 소도시, 전문인과 비전문인은 물론, 부르주아에서 소시민까지 그 누구라도 스노비즘을 설파하는 주체가 된다. 혹은 그 영향권 안에 있는 객체로서 스노비즘 이미지에 알게 모르게 전염되고 전염시킨다. 계층 간의 문화와 언어를 향유하는 폭이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문화와 언어를 방어하기 위한 기제로, 혹은 그 반대로 자신들이 속하지 못한 집단의 문화권을 질시하거나 혹은 따라 잡기 위해 노력하며 자연스럽게 '스노브'해지는 것이다.
대중과 소통'고급 스노비즘' 필요
그 대표적인 사례가 언론매체 등에 영화인들이 연출을 '미장센'으로 부른다든지, 요리사들이 최고 요리사를 코르동 블뤼(Cordon Bleu)라 칭하고, 담배를 이성을 뜻하는 레종(Raison)으로 부르거나, 디자이너들이 패션쇼 무대에서 기성복을 프레타 포르테(Pr맯t-맜-Porter), 고급 옷을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라 칭하는 경우다. 이들도 알고 보면 전문성을 띤 집단이, 자신들만의 문화를 대중들과 공유하며 폐쇄적일 수도 있는 부정적 스노비즘을 긍정적이고 고급스런 스노비즘으로 전환시키려는 이벤트의 일종이다. 하지만, 어떤 특정 계층이 자신들이 향유하는 문화를 독점하고 정보 공유를 배제한 채, 자신들의 고급스러운 트렌드만 강조하려 든다면 그것은 '스노브'의 본래 뜻인 구두 수선공이 마치 백작 흉내를 내는 꼴이 아닐까 한다.
이와는 달리, 야구 용어로 활용되는 '랑데부(Rendez-vous)홈런'이나 '시네마'같은 외래어가 본래의 뜻을 고스란히 지닌 채 대중 언어로 정착돼 있다. 이는 대중과 항상 소통해 왔기 때문이다.
흔히 언어와 문화는 서로 뒤섞여 흐르면서 어우러져 소통의 도구로 재탄생하게 된다. 최신 유행하는 지식, 문화, 상품, 음식, 패션 기타 등등이 '스노브'의 대상이지만, '스노브'하다는 말을 꼭 '속물적이다'고만 내칠 수 없는 것도 그래서다. 그 스노비즘의 한복판에, 그리고 가장 열려진 사고로 세상을 보는 창이 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있다. 세계적인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가 이 잡지를 가리켜 '세상을 보는 창'으로 명명한 것은, 세상 속 평범한 '구두 수선공'들의 팍팍하고 거친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현대의 이기와 옹졸함을 질타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의 장이 되어 주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새로운 문화 트렌드가 생길 때마다 천박한 스노비즘의 단계를 필연적으로 거치게 된다. 현대인의 필수품이자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 인터넷이 세계 문화를 하나로 묶어내는 작금에는 더욱 그렇다. 세계의 이미지를 실 시각으로 편견 없이 접할 수는 있지만. 정제되지 않은 정보에 현혹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이버 세계의 특성상 시간적 간극을 두고, 모든 문화가 서로를 모방하거나 배척하며 '포스트 모던'해지기도 하고,'스노브'한 문화가 창출되기도 한다. 가령 패션, 그림, 음악 등에서 톡톡 튀는 선구자들이 아방 가르드(전위예술(Avant-garde)란 평을 듣는다. 이는 독창성과 실험성을 갖춘 유례가 없는 이들이 창출해 내는 생소한 멋에서'스노브'한 이미지가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진정한 스노비스트의 선구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벨기에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그 좋은 사례다. 파이프를 그려 놓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말하는 생소함에 대중들이 호응한다. 대중들은 작가의 톡톡 튀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에 기꺼이 눈과 귀를 세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지향성도 그래야 한다. 글쓰기의 방식과 문체에 생소해 하는 대중들 곁으로 바짝 다가가 긍정적인 스노비즘을 설파해야 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지방색, 출신, 학벌, 재산, 학식을 공개적으로 자랑하는 극히 사적이고 유아적인 속물 근성이나 부각시키는 저급한 집단의 정신적 만족감을 표출하는 배출구가 아니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Paul Val맯ry)의 지적처럼, "지금까지 저급하게 '스노브'한 사람은 지루할 때 지루하단 말을 하지 못하며, 즐거울 때 즐겁다고 실토하지 못하는" 가식적인 부류들이었다. '에르메스''로렉스' '불가리' '카르티에'등을 능가한다던 가짜 명품 시계, '빈센트 앤 코'사건에 휘말렸던 일부 연예인들이나, 공주 행세하려다 '된장녀'로 취급당한 일부 여대생들의 눈먼 명품 취향이 이와 다르지 않다. 이제 '스노브'하단 말이 더 이상 신상품 마케팅이나,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속물 근성의 표상처럼 쓰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21세기 스노비즘은 폭넓은 도전 의식과 창조적인 마인드로 무장된 진취적인 패러다임을 지향해야 한다. 바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그러한 임무를 띤 '세계의 창'이다. 이 매체는 세계 최고 엘리트 집단을 타깃으로 한 '지식 스노비즘'의 전도사지만, 대중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보편적인 세상의 상식을 설파한다. 획득한 지식을 폐쇄적인 회로 속에 쌓아 놓고 공유를 꺼리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대중들에게 돌려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향하는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결코 주식이나 부동산 소식 등 물질적으로 유용한 정보를 내세워 요령 좋고 수단 좋은 사람들의 환심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우리가 오래전부터 던져온 '난 누굴 위해 살고 있고, 도대체 난 누구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스스로 답을 구할 수 있도록 드넓은 세상의 창(窓)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참에 우리 사회에서 소수 집단에서만 통용되는 숱한 스노비즘을 풍기는 외래어들도 그 허울을 벗고 대중의 창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모두 스노비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불태우자'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토로 삼으면 어떨까.
chosub@ilemonde.com
1) 빠르 테르<바닥(Par terre)>, 즉 벌칙으로 매트에 패시브 자세를 취하란 뜻
2) 살아있는 가축이미지
3) 음식으로 가공된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