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은 시장주의를 섬긴다

[Hoizon]

2010-08-06     세르주 라투슈

은행가와 회계사의 신성한 사도 마태오는 ‘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누구도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오 복음 6장 24절) 그로부터 2천 년 뒤, 교황청의 우두머리가 된 베네딕트 16세는 가톨릭 교회와 시장경제의 화해를 선언했다.

 

서구 정부들의 ‘정치적 모순어법’은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1) 모순어법(Oxymoron)이란 서로 반대되는 두 단어를 결합하는 수사법을 말한다. 시인은 모순어법을 통해 형용 불가능한 정서를 말로 표현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관료의 모순어법은 때로 터무니없는 것을 믿게 하는 효과가 있다. 바티칸의 관료들은 이 분야의 선구자다. 사랑의 이름으로 이단자를 산 채로 불태우고 십자군 원정과 온갖 ‘신성한 전쟁’을 일으키던 때부터 현재까지 교회의 모순어법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교황 베네딕트 16세의 회칙(교황이 시사 문제 따위에 대해 입장을 밝혀 전세계의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에 포함된 경제 관련 담화가 그 좋은 예다.(2)

성장주의에 경도된 교황 회칙


일부 신학자들이 성장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의 일시적인 일탈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이미 부패 요소가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티칸의 독트린은 다른 관점을 채택한다. 자본주의, 이윤, 세계화, 자원 개발, 자본 수출, 금융뿐 아니라 성장과 발전 자체는 전혀 비판 대상이 아니다. 단지 ‘과잉’이 문제라는 식이다. 경제주의가 복음주의보다 우선시된다. 근대의 놀라운 발명품인 ‘경제학’이 중심에 놓이고 그에 대한 질문 가능성은 배제된다. “경제 영역은 윤리적으로 중립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 자체로 비인간적이거나 반사회적이지 않다.”(57쪽) 노동의 상품화에 대한 고발이나 비판은 찾아볼 수 없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모든 노동자는 창조자”(65쪽)라고 가르쳤다. 과연 슈퍼마켓 계산대 점원에게도 이 말을 적용할 수 있을까? 이 말은 본의 아니게 음울한 농담이 돼버린 스탈린의 말을 연상시킨다. “사회주의 사회가 되면 노동도 쉬워진다.”

베네딕트 교황의 회칙은 놀랄 만큼 성장주의에 경도돼 있다. 127쪽 분량에 ‘발전’이라는 단어가 258번이나 등장한다. 물론 휴머니즘에 기대어 발전을 말하려 했을 것이다. ‘각자의’ ‘개인적인’ ‘인간적인’ ‘전인적인’ ‘진실로 인간적인’ ‘실질적인’ ‘인류 전체와 각 개인을 위한’ 등의 수식어가 발전이라는 단어와 결합돼 있다. 심지어 ‘진정한 전인적 발전’(110쪽)이라는 말까지 등장한다. 여기서 발전은 ‘사회적 안녕’과 동의어로서 “인류에게 고통을 주는 중대한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7쪽)으로 제시된다.

교황청 사회과학아카데미 회원인 영국의 대학교수 마거릿 아처는 “‘전인적 발전’은 교황 회칙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이 새로운 개념은 ‘인간 존엄성’이라는 전통적 개념의 확장으로서 회칙 안에 최소 22번이나 등장한다.”(3) 

이제 발전은 인간의 ‘소명’이 되었다. “복음은 발전에서 근본적인 요소다.” 복음은 인간을 더욱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1967년 발표된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은 “헐벗은 사람이 풍요를 누리는 사람에게 절박한 호소를 보내고 있다”(24쪽)고 말한다. 베네딕트 교황은 그의 선임자가 한 다음 말에서 힌트를 얻은 게 아닐까. “발전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이다.”

그러나 발전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이 아니라 전쟁의 명분일 뿐이다. 고갈돼가는 석유와 자연자원을 둘러싸고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체제는 그 맹아적 형태에서부터 이미 폭력적이었다. 자연을 파괴하고 자급경제를 소멸시키는 전쟁, 그리고 이반 일리치가 명명한 ‘토착경제’를 파괴하는 전쟁이 계속돼왔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군산복합체를 비판하기 훨씬 전부터 전쟁산업은 성장을 강요하는 일반 산업으로 변모했으며, 역으로 다시 전쟁산업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탈성장을 통해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사회 구성원 각자의 탐욕을 부추기는 대신 공동 이익이라는 지평 속에서 자신의 불완전함과 모순을 해결해나가는 사회를 건설해나가자는 것이다.

“성장 없는 사회는 신앙이 없는 것”


베네딕트 교황은 이와는 다른 길을 추구한다. “성장 없는 사회라는 개념은 인간과 신에 대한 믿음을 결여하고 있다.”(20쪽) 그의 다음 말은 온갖 상투어의 전시장이나 다름없다. “경제 발전 덕분에 수십억 명이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상당수 국가가 국제 정치 무대에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30쪽) 이 피상적인 주장은 교황의 측근인 경제학자 스테파니 자마그니에게서 빌려온 듯싶다. 자마그니는 리뷰 <운 몬도 포시빌레>와의 인터뷰에서 “인구증가율을 감안하더라도 절대 빈곤율은 1978년 62%에서 1998년 29%로 감소했다”(4)고 말했다.

기독교적 자비에 입각한다면, 차라리 자크 디우프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사무총장이 2008년 9월에 발표한 내용을 인용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그는 만성적인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가 2003~2005년 8억4800만 명에서 2007년 9억2300만 명으로 오히려 증가했다고 말했다. 영국의 비정부기구(NGO) ‘뉴이코노믹파운데이션’(New Economic Foundation)이 고안한 ‘지구행복지수’(Happy Planet Index)를 보면 기존의 1인당 국민소득이나 인간개발지수(HDI)에 따른 국가 순위는 완전히 뒤바뀐다.

교황청의 입장은 세계무역기구(WTO),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의 입장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전 IMF 총재 미셸 캉드쉬는 실제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자문위원을 지낸 적도 있다. 미셸 알베르, 장부아소나와 함께 쓴 <금세기 우리들의 신앙>에서 캉드쉬는 세계화를 “좀더 박애적인, 통일된 세계의 완성”이라고 보았으며, 심지어 세계화가 “종교 중립적 형태로 이뤄지는 세계의 기독교화”(5)라고까지 주장했다.

”세계화는 종교 중립적 기독교화”

세계화야말로 “뒤처진 발전을 만회할 수 있는 근본적 추동력”(50쪽)이라는 것이다. 캉드쉬는 또한 “특정 자본이 국외에 투자됐을 때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이유가 없다”(64쪽)고 말한다. 공장의 해외 이전을 주장하는 이들에겐 반가운 말이 아닐 수 없다! “투자와 교육이 병행된다면 공장 해외 이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가의 국민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64쪽)는 것이다.

WTO의 독트린에 입각해 부자 나라들의 보호무역주의도 비판받는다. 보호무역 때문에 가난한 나라는 수출의 길이 막히고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다는 것이다. “개발도상국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점진적으로 세계시장에 자국의 상품을 진출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세계경제 무대에 온전한 주체로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98쪽)

가난한 나라에 강요되는 자유무역 원칙의 불공평하고 비도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저 빈국이 세계경제에 적응하게 돕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빈국이 상품의 품질을 높이고 수요에 발맞추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98쪽) 관광산업도 “경제성장과 문화적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102쪽) ‘섹스관광’을 제외한다면, 단체관광은 성 바오로와 사도들이 먼 나라를 떠도는 모습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회칙은 “시장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진정한 인간관계를 파괴할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사회를 시장에서 보호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회칙은 환경 파괴와 관련해서는 간단히 언급만 하고 지나간다. “책임 있는 거버넌스를 통해 자연을 보존하고 이용하며, 선진 기술이 접목된 새로운 경작법을 개발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정당한 방식으로 자연을 향유하고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을 것이다.”(84쪽) 이게 결론이다. 신과 기술이 우리를 축복하기를.

그러므로 자본주의 경제의 내적 동인에 의해 재앙이 초래되는 과정은 비판받지 않는다. 책임을 물을 수는 있지만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윤은 ‘좋은 동기’에 의해 정당화된다. 경제 논리와 기독교 윤리 사이의 해결 불가능한 모순은 과거의 최고 종교재판관들이 고문에 대해 한 말 속에서 적절한 해답을 찾는다. “고문은 증오심 없이 이뤄져야 한다!” 증오심을 버려야 할 뿐 아니라 사랑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이제 세계는 신의 자비 속에서 ‘경제주의화’한다. 신과 맘몬(부와 물욕의 신)은 극적으로 화해한다.

증오 없는 고문과 착한 기업, 닮은꼴


‘다양한 이해관계의 화합’이라는 신화는 매우 구체적이고 길게 서술된다. “경제학과 도덕적 가치는 하나로 수렴한다. 인간적 비용은 항상 경제적 비용이기도 하다.”(48쪽) 구원의 길이 열렸다! 이제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공상적인 개량주의(Buonismo)와 온갖 착한 감정을 성수(聖水)로 축복할지어다. “경제학이 현실 속에 올바르게 적용되려면 윤리학이 필요하다.”(75쪽) 얼마나 다행인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촉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경제적 계산이라는 차가운 영역이 ‘기부’라는 속죄를 통해 조금 더 따뜻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5쪽) “박애의 표현으로서 무상 기부라는 원칙은 일반적인 경제활동 속에 포함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58쪽) 회칙은 연대 경제, 비영리 부문, 사회 경제, 시민 경제 등을 언급하며 열렬히 칭송한다. “이 다양한 형식의 경제제도의 복수성 자체가 시장을 좀더 시민적이면서 동시에 경쟁적으로 만들어줄 것이다.”(78쪽) 여전히 ‘착한 행동’ ‘착한 기업’이라는 신화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연합의 격려 속에서 경쟁주의가 이미 사회적이고 상호부조적 경제의 잔여물을 제거하고 공공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세계경제의 불의와 비도덕성에 대한 비판은 결국 런던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이나 금융과 신자유주의의 ‘과잉’을 비판하면서 도덕적 자본주의를 역설하는 사르코지 대통령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지나치게 높은 임원 보너스나 은행의 폭리를 비난하기는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최고 종교재판관이 그리스도에게 한 말이 옳았는지 모른다. “가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

글•세르주 라투슈 Serge Latouche
탈성장 이론가. 저서로 디디에 아르파제와 함께 저술한 <탈성장의 시대>(Tierry Magnier·파리·2010)가 있다.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Bertrand Méheust, <모순어법의 정치>, La Découverte, 파리, 2009.
(2) 여기에 인용된 교황 회칙은 모두 이탈리아 판본을 참고했다. Benedetto XVI, Caritas in Veritate, Libreria Editrice Vatican, 로마, 2009. (번역은 본지가 했다.)
(3) Margaret Archer, <L’enciclica di Benedetto provoca la teoria sociale>, Vita e Pensiero, n°5, 밀라노, 2009년 9~10월.
(4) ‘Caritas in Vertitate e nuovo ordine economico’, <Un Mondo Possibile>, Trévis, n°22, 2009년 9월, p.6.
(5) 미셸 알베르, 장부아소나, 미셸 캉드쉬, <금세기 우리들의 신앙>, Aréa, 파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