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는 구세주인가?

2018-09-28     장바티스트 말레 | 기자
정치가 큰 희망을 주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오래된 생각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스스로를 바꾸면 된다’, ‘현대성으로 인해 허물어진,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하면 된다’는 등의 생각이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아르데슈의 농부 피에르 라비는 “각자, 자기 몫을 하라”고 촉구하며 ‘의식의 반란’을 전파한다. 이 메시지는 현재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몽펠리에 컨벤션센터의 대강당 무대 위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위로 1천여 명의 관객들이 시선을 고정하고 있고, 무대 가장자리를 따라 한 남자가 몸을 숨기고 있다. 심각한 분위기의 배경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스크린에는 교통혼잡, 농약살포, 오염된 해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공장, 인산인해를 이룬 대형마트, 죽어가는 북극곰의 이미지가 연속해서 나오고, 이어서 “이제 우리의 의식을 깨워야 할 때가 아닐까요?”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영상이 끝나자 사회자는 모두가 고대하던 강연자를 소개한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분은 이 시대의 참 농부입니다.”
조명 속에서 짧은 턱수염과 체크무늬 셔츠, 코듀로이 바지 차림에 멜빵을 멘 강연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2018년 6월 17일에 열린 ‘인간과 지구의 건강을 위한 희망’의 날에 주인공 피에르 라비는 이렇게 운을 뗐다. “나는 여기에 고전적 의미의 강연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나는 나의 특이한 삶을 통해 여러분과 경험을 나누러 왔습니다.” 
피에르 라비의 저서는 30권이 넘으며 누적 판매량도 116만 부에 달한다. 따라서 도서관에서 유기농제품 판매점에 이르기까지 이 자연의 전도사가 보내는 다정한 눈길을 피하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1) 사계절 내내 샌들을 신고 다니는 라비는 신의 계시를 받은 고행자의 분위기를 풍긴다. 라비는 강연에서 “문제의 근원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 세상도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연이 시작되고 1시간쯤 지나자 그는 성공을 일궈낸 벌새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날 숲에 불이 났는데, 공포에 휩싸인 동물들은 이 재난을 두 손 놓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때 벌새는 부지런히 작은 부리로 물을 길어 나르며 불을 끄려고 애썼다. 그러자 아르마딜로가 말했다. “벌새야, 너 제정신이니? 네 작은 부리로 아무리 물을 길어 날아봤자 불을 끌 수 없어!” 그러자 이 작은 날짐승이 대꾸했다. “나도 알아. 난 그저 내 몫을 하는 것뿐이야.” 이렇게 라비는 각자가 벌새를 본받아 ‘자기 몫을 하라’고 권유한다. 
그러자 강당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기립해 긴 박수로 그의 이야기에 경의를 표했다. 한 여성 청중은 “피에르 라비의 강연을 한 10번쯤 들었을 거예요. 그는 늘 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전혀 싫증 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 사람이 저기 있다니 꿈만 같아요! 피에르는 절대 실망시키지 않거든요”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이런 열정적인 분위기는 강당 밖의 홀에까지 번져서, 이때다 싶어 장사치들은 ‘소용돌이 공법’의 정수기나, ‘DNA를 보호하고 회복시키는’ 캡슐(치료에는 3~6개월이 걸린다), 8,000유로짜리 ‘스칼라 파(波) 의료기기’의 최신 모델을 진열대에 늘어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피에르 라비는 파리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다. 프랑스의 총리 에두아르 필리프는 ‘낭비 줄이기 프로젝트’(2018년 4월 23일)를 발표하면서 피에르 라비를 언급했다. 라비의 저서들을 출간한 편집인이자 현 문화부 장관인 프랑수아즈 니셍은 “라비는 내 삶에 진정한 한 줄기 빛으로 다가왔다”(2)고 고백했다. 한편 에너지환경부 장관인 니콜라 윌로는 “피에르 덕분에 나는 성숙하고 분명한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는 내 생각을 깨우치고 길러줬다. 어떤 면에서 그는 계시자였다”고 덧붙였다.(3)
피에르 라비는 반세기 넘게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등장하는 단어 하나하나마다 다듬고 또 다듬어왔다. 그 자전적 이야기는 대량 소비제품이 된 동시에, 그가 1960년대에 행한 개인적 선택을 상세히 밝힌 선언문의 역할을 한다. 그는 소박함, 겸손, 성실, 미덕의 가치를 존중하는 뜻에서 ‘땅으로 돌아가기’를 택한 것이다. 자신의 품성을 중점적으로 다룬 저작들과, 온통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들로 채워진 100여 건의 강연 및 대담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독특한 결론에 다다른다. 끊임없이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 사내는, 그의 추종자들이나 언론인들의 눈에 겸손의 의미를 구현한 인물로 보인다는 점이다. 
2017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수훈을 계기로 한층 더 지위가 향상돼, 이 ‘세속성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공원, 주민 센터와 마을이 생겨났다. 『소박한 행복을 향해』(악트쉬드, 2017)의 저자인 그는 언론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라디오 네트워크 <프랑스 앵테르>는 아침 정보 프로그램을 그의 농장에서 진행하는 생방송으로 특별 편성했으며(2004년 3월 13일), <프랑스2> 채널은 2017년 10월 7일 점심시간에 ‘혁명을 제안하는’ 이 ‘농부이자 사상가이며 작가이자 철학자이자 시인’을 예찬하는 방송을 35분간 내보냈다.  

전통, 진정성, 영성

피에르 라비라는 아이콘은 신화적 인물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어냈다. 그는 농부 할아버지, 자본주의에 의해 풍비박산된 시골 마을에서 뿌리박고 사는 나이 지긋한 현자의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조상의 지혜’는 대체불가한 가치를 드러냈다. 환경파괴라는 재난과 끊임없이 소비를 조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보다 근검절약하는 삶에 호소하고 생산중심적인 농업을 비판하는 그의 태도가, 통제 불가능한 집단감성에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현대성을 비판하는 ‘벌새’의 역할을 하는 이 계시자는 ‘의식의 반란’, 정신의 쇄신, 자연 및 우주와의 조화, 그리고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지역 특성을 살린 친환경 농법을 권장한다. 이 ‘착한’ 계시자에게 매료된 언론이 그의 많은 아이디어들을 소개했지만, 무엇보다 ‘벌새운동(Colibris Movement)’을 통해 라비의 아이디어들은 전파됐다. 벌새운동은 2006~2007년에 라비가 창시했고 2013년까지는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시릴 디옹이 주도했다. 악트 쉬드 출판사의 전집 시리즈 책임자인 시릴 디옹은 2012년에 벌새운동의 자매지인 <카이젠(Kaizen)>을 창간했으며, 2015년에는 여배우 멜라니 로랑과 촬영한 영화 <내일(Demain)>에서 벌새운동의 신념을 연출해 100만 관객 이상의 흥행을 기록했다. 라비라는 인물과 그의 강연이 얻은 성공은 서구사회의 근본적 경향을 반영하고 드러낸다. 즉 서구사회는 자본주의가 파괴적이고 영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지난 세기 노동운동을 조직한 합리주의와 정치적 근대성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구의 일부는 전통과 진정성, 영적인 것의 추구, 자연과의 진실한 관계로 만들어진 ‘제3의 길’에 희망을 두고 있다. 
피에르 라비는 200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당시 후보자 홍보물에서 이렇게 밝혔다. “40년 전에 시작된 나의 반란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의례적인 의미에서 정치로 들어서지 않았다. 내 첫 번째 목표는 (가족을 포함해) 먼저 나 스스로가 생태학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대통령 후보 등록에는 500인의 추천이 필요한데, 라비를 추천한 것은 184명뿐이었다.) 홍보물을 보면, ‘사막화를 막는 데 앞장선 식량안보 국제 전문가’로 소개된 이 대통령 후보자는 찬란한 빛이 스치고 간 듯한 표정으로 밀밭에 서 있다. 북아프리카에서 세벤(프랑스 남동부의 산악지대-역주)을 거쳐 부르키나파소에 이르기까지 라비가 걸어온 여정을 돌아보면, 정치와는 무관한 생태학이 겪은 역경과 성공이 여실히 드러난다. 
1938년 5월 29일 알제리의 케낫사(사우라 지역)에서 태어난 라바 라비는 4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식민지에 정착한 프랑스인 부부에게 입양됐다. 양어머니는 교사, 양아버지는 엔지니어였다. 라비의 양부모는 그에게 서구식, 부르주아식, 가톨릭식 교육을 받게 한다. 오랑에서 보낸 청소년기 내내 그는 “오페라 <마술피리>와 <오셀로>, 혹은 유명한 독창곡을 열심히 들었다.”(4) 그는 프랑스 문학과 프랑스 의상들도 사랑했는데,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재단된 의상들을 보며 ‘멋스러운’ 몸가짐을 터득했다.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17세에 피에르(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나는 죄책감이 들었다. 내 (이슬람) 조상들을 부인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을 그들에게 전파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제리 전쟁 동안에는 “자동차 창문으로 작은 깃발을 흔들며 ‘프랑스령 알제리’라는 표지판이 나붙은 마을을 줄지어 행진했다”고 말했다. 
1950년대 말 파리로 건너간 라비는 퓌토(오드센)의 한 농기계 제조업체에서 창고 담당자로 일했다. 젊은 시절 이야기를 다룬 『사막의 아이 피에르 라비(Pierre Rabhi, l’enfant du désert)』(플륌 드 카로트 출판사, 2017, 2만 1천 부 판매)에는 라비가 공장 노동자였다고 언급되는데, 그는 이후 대담에서 당시 창고 담당자로 일했다고 밝혔다. 1960년, 청년 라비는 이 업체에서 미래의 아내를 만났다. 같은 해 그는 장차 그의 삶을 바꿔놓을 편지 한 통을 의사 피에르 리샤르에게 보냈다. 편지에서 라비는 “선생님, 달메 신부님을 통해 선생님의 주소를 알게 됐습니다. 신부님은 선생님이 자연보호에 관심이 있어서 현재 바누아즈 공원 조성계획에 참여 중이고, 세벤에서도 공원 조성계획을 위해 애쓰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문제들에 관심이 많고, 선생님이 보호하는 자연을 되돌려놓는 일에 적극적으로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전쟁이 나기 전, 의대생이었던 피에르 리샤르는 1940년에 몽에구알의 빌마뉴(가르 주) 부근에 있는 청년 보조대(Chantier de jeuness, 1940~1944년에 존재했던 프랑스의 군대식 청년 양성 조직-역주)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5) 위생학자이자 국가주의자로서의 경험과 군대생활의 체험은 이후 그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945년 12월, 그는 ‘명백하게 편향된’ 의학 논문을 발표했는데, 거기서 “인간의 건강은 불안하다. 농부의 건강은 특히 더 불안해서 나라와 국민의 건강도 불안해진다. 그렇게 되면 몸과 정신, 물질적 행복, 영혼의 총체적인 건강도 불안해진다”(6)라고 썼다. 14년 뒤인 1959년에, 리샤르 박사는 <백야(Nuit blanche)>라는 제목의 농촌주의 선전영화에서 시골 의사 역을 맡았다. 그는 영화에서 도시화, 중앙집권국가, 자동화된 생산 방식, 농부들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공기업의 인재 채용정책을 비난했다. 
피에르 라비는 1961년 4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기념사진에서 리샤르 박사는 라비의 신부인 미셸 라비에게, 라비는 시골의사의 아내에게 팔을 내밀고 있다. 라비는 자서전에서 “피에르와 안-마리 리샤르는 마술사가 우리에게 점지해준 부모였다”고 썼다.(7) 그리고 “내가 아르데슈에 도착했을 때 나를 보살펴준 것은 바로 그였다.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고 덧붙였다. 

구세주 같은 사람

얼마 뒤 초보 농부 라비는 아르데슈의 작가 귀스타브 티봉을 만난다. 1942년 6월 <악시옹 프랑세즈>에서 샤를 모라스는 티봉을 일컬어 “가장 명석하고 가장 참신하며, 가장 기발하고 누구나 우러러보는, 우리의 젊은 태양들 중에서 진심 어린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며 열렬히 환호했다. 티봉은 비시정부의 농촌주의 이념에 있어 지적 바탕을 다진 인물이었으며, 티봉의 딸은 “우리 아버지가 페탱파였던 게 아니라, 페탱이 티봉파였다”고 주장했다.(8) 티봉의 추종자들은 그가 1941년에 철학자 시몬 베유를 받아줬다는 사실을 빼놓지 않고 언급한다. 하지만 티봉은 왕정주의자이자 완고한 가톨릭교도였고, 뼛속까지 드골의 반대파였으며, 더 나중에는 프랑스령 알제리를 지지하며 극우파와 같은 노선을 걸었다. 
귀농 청년 라비와 보수주의 사상가 티봉의 관계는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라비는 “당시 나는 그런 기독교 철학자를 만났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고, 그래서 그가 하는 말에 동조했다”고 기술했다.(9) 프랑스의 출판 동향을 고려할 때, 자연의 영향을 받아 영적인 탐색을 추구하는 심지가 깊은 농부 작가의 수호자라는 점에서는 티봉이 라비보다 한 수 위였다.(10) 티봉의 비서였던 프랑수아즈 쇼뱅은 티봉이 살았던 생 마르셀 다르데슈 마을에서의 일을 이렇게 기억한다. “피에르 라비는 귀스타브 티봉에게 많은 것을 빚졌다. 그가 이곳에 왔을 때 라비의 태도는 마치 제자가 스승을 방문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60년이 흐른 후, 이제 스승이 된 제자는 ‘땅으로 돌아가기’를 거론하면서, “나는 1958년에 68혁명을 했다!”고 농담하듯 말한다.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지적 풍경에 별로 끌리지 않았다. 그에게 『생태학과 정치』(1975), 『생태학과 자유』(1977)를 쓴 철학자 앙드레 고르스의 업적을 이야기하면 그는 이렇게 성을 내곤 했다. “나는 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몹시 싫었다. 1960년대에는, ‘왜 우리가 땅에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버려둔 채, 오로지 사회 메커니즘부터 운운하는 자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하지만 나는 현실이 물질적인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고 느꼈다. 현실엔 뭔가 다른 게 있었다.” 또한 그는 “나는 현대성에 굉장히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는 말도 서슴없이 털어놨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5월 혁명 이후 절대적 자유를 부르짖은 귀농주의와 결별했다. 그는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Semeur d’espoirs)』(악트 쉬드, 2013)에서 “‘동성애’ 가정의 합법화는 인류의 미래를 위협한다. 이런 관계엔 당연히 생산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썼다. 남녀관계를 두고 그는 “무조건적인 평등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오히려 상보적인 관계를 지지하는 쪽이다. 여자는 여자답고 남자는 남자답고, 사랑이 그 둘을 결합하는 관계 말이다”라는 견해를 밝혔다.(11)
라비는 비시와 아르데슈 출신의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 외에도 자신에게 지적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인지학협회를 창시한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를 꼽았다.(12) 라비는 이런 일화를 들려줬다. “어느 날 리샤르 박사가 우리 집에 와서는 슈타이너의 독일인 제자인 에렌프리트 파이퍼(Ehrenfried Pfeiffer)의 『대지의 풍요로움』이라는 책을 내밀었다. 나는 슈타이너의 사상과 인지학(Anthroposophie)의 원칙들, 특히 생명역동(Biodynamic) 농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내가 농사를 지어야 했을 때, 루돌프 슈타이너가 했던 제안들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스위스에서 생명역동 농법에 필요한 물건들을 주문해 직접 그 농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라비는 1년 동안 농촌 가정교육 기관(Maison familiale rurale, 농촌의 가정을 중심으로 청년이나 성인들의 사회 편입 및 구직을 돕기 위해 교육 및 연수를 시행하는 기관-역주)에서 연수를 받은 뒤 아르데슈로 갔다. 그곳에서 석공이나 농사꾼으로 일했고, 시를 쓰거나 소설의 초안을 잡거나 조각에 몰두했다. 생명역동 농법의 발견으로 잔뜩 고무된 라비는 1970년대까지 이 농법을 주제로 왕성한 강연과 교육 활동을 펼쳤다. 당시 그의 마음속에는 앞으로 쭉 그와 함께할 확신이 자리 잡았는데, 이는 영성과 신성함을 중시하는 태도야말로 지속 가능한 농업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믿음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한 통의 편지와 눈부신 인물과의 만남이 그의 인생사에 한 획을 긋는다. 
기업가 모리스 프로인트는 전세 비행기 회사 ‘포인트 에어(Point Air)’의 설립자다. 또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투사로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로, 1983년 12월에 부르키나파소 북단에 자리한 고롬고롬(Gorom-Gorom)에서 관광 야영장을 개장했다. “마당을 둘러싼 울타리 벽이 마치 전통마을을 재현해놓은 듯한”(13) 모습이었기 때문에, 프로인트는 이 마을이 ‘연대 여행(tourism solidaire, 공정여행이나 책임여행처럼 관광지의 자연과 문화를 훼손하지 않고 지역의 발전과 문화를 존중하는 여행-역주)’의 장소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몇 주 뒤, 그는 “해외 협력 파견원들과 대사관 직원들이 이 평화로운 안식처에 휴식을 취하러 온다는” 이유로 ‘전통’ 식당이 이들에게 푸아그라와 샴페인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때마침 라비로부터 아르데슈에 있는 그의 거처에 방문해 달라는 편지가 도착했다. 처음에 프로인트는 라비를 끈질기게 매달리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 고집에 못 이겨 농장을 방문했다. 프로인트는 “그와 말 한마디 나누기도 전에 나는 그의 눈빛에 빠져들었고, 곧 피에르 라비가 구세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의 연구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피에르 라비는 사하라 사막 남쪽 사헬(Sahel)의 자연조건에 맞춘 (…) 유기농 비료 농법을 개발했다. 그는 나뭇가지, 새의 깃털, 낙타 배설물, 조(곡식)의 줄기 등을 그러모았다. 그러고는 이 쓰레기들을 거둬들여 퇴비로 만들고 그것을 땅에 뿌렸다”며 감탄을 자아냈다. 프로인트는 라비를 곧장 호텔 야영지의 부속건물인 고롬고롬 II의 지도자 자리에 앉혔는데, 독학으로 농법을 공부한 라비는 이곳에서 사헬의 농부들에게 생명역동 농법을 가르쳤다. 
1986년 5월 6일, 공영방송 <안테나2>가 최초로 피에르 라비를 집중 조명한 텔레비전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방영했다.(14) 배경으로 사이키델릭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고롬고롬에서 라비는 이렇게 설명했다. “근본적으로 나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물질적인 계획에만 몰두하죠. 그러면서 인간성을 향상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중요한 건 의식입니다. 의식이 실현하는 것이죠.” 그러고 나서 화면에는 일하는 농부, 전통 의상을 입고 얼굴에는 숭고함이 서린 사람들이 클로즈업된다. 이처럼 이 프로그램은 서정성에 취해 있었다. 라비는 “남(상류층)과 북(빈곤층)이 아직도 나를 두고 다투고 있는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방송에서는 농법의 기술적 정확성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농장이지만…

방송이 나가고 몇 달 뒤인 1986년 말에, 프로인트가 설립한 르푸앵 뮐루즈(Le Point Mulhouse) 협회는 사헬 지역의 농업 문제 전문가인 농학자 르네 뒤몽에게 라비가 이끄는 센터를 감정평가해달라고 의뢰했다.(15) 197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이 생태주의자는 뒤몽이 밝혀낸 사실들에 아연실색했다. 뒤몽은 라비의 퇴비 농법은 인정했지만, 과학지식의 부족함을 폭로하고 전체적인 접근 방식을 규탄했던 것이다. “피에르 라비는 퇴비를 일종의 ‘마법 물약’으로 소개하고, 화학비료는 물론 두엄과 액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천체의 진동과 달의 상(相)이 농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파스퇴르를 철저히 비난하고 슈타이너의 반과학적 논문을 선전했다.”
뒤몽은 이 비교(祕敎)적인 가설들이 농민들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봤다. “그런데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의 입장에서 오해를 살 만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우리는 르푸앵 뮐루즈 지도부와 부르키나파소 당국에 우리의 생각을 알리러 갔다.”(16) 
라비는 “르네 뒤몽이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 토마 상카라에게 내가 마술사라고 알리러 갔다”며 웃어넘겼다. 뒤몽은 대통령에게 가능한 한 빨리 이런 교육을 중단하라고까지 조언했다. 그러나 라비가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프로인트의 지지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조언은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1987년 10월 15일 상카라가 암살당하면서 프로인트는 든든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게 라비와 프로인트는 서둘러 부르키나파소를 떠났다. 
이 일화는 종종 농업문제의 ‘국제 전문가’로 소개되는 인물의 중요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즉 라비는 『농업 생태학으로 정원 가꾸기(Manuel des jardins agroécologiques)』(악트 쉬드, 2012)의 서문을 집필한 적은 있지만, 농학 관련 저서나 과학 논문을 출간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라비는 그의 거처 라블라셰르의 베란다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이성의 긍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소위 ‘계몽주의’라고 불리는 합리성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계몽주의는 다시 반계몽주의를, 현대적 반계몽주의를 낳았다. 계몽주의는 ‘반계몽주의’ 이전의 이념이다. 내가 권고하는 의식의 반란, 이것은 현재의 패러다임에 맞서는 것이다.”
라비는 예술가가 작품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양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연과 흙을 일구는 노동에서부터, 현대성에 맞서기 위해 농민들을 소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그러나 그는 ‘재정 남용’, ‘살아 있는 것의 상품화’, 권력자들이 거머쥔 부, 혹은 기술과학이 낳은 재해를 규탄했지만, 과거 삶으로의 회귀와 개개인의 금욕 같은 소극적인 해결책만을 권장할 뿐, 권력 구조 자체에 책임을 묻는 데는 소홀했다. 
라비는 “부자이건 가난하건 우리는 전적으로 자연에 의존한다. 자연이라는 준거는 생명을 통제한다. 자연은 정확한 리듬을 지켜주는 수호자다”라고 말했다.(17) 『대지에의 호소(Le Recours à la terre)』(테르 뒤 시엘 출판사, 1995)에서 그는 ‘빈곤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가난함을 예찬했는데, 1990년대에는 교육 활동을 하면서 가난함을 ‘행복의 가치’로 설명했다. 몇 년 뒤 이 편향된 신념은 ‘소박한 행복’(18)을 찬양함으로써 의미론적 변화를 겪는데, 이는 사회보장제도조차 비난받아 마땅한 사치로 보는 그의 관점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라비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구제의 혜택을 누린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다 보면 더 많은 부를 창출해야만 한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오래 견뎌낼 수 있을까?”라고 설명한다. 사회관계에 대한 이런 발상은 아마도 이 수수한 턱수염 노인이 창안하고 설립한 조직들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또 그가 다국적기업과 그 경영자들에게 왜 관용적이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피에르 라비의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1994년에 설립된 ‘지구와 휴머니즘(Terre et Humanisme)’ 협회는 예산의 1/3을 신용협동조합의 금융상품 ‘행동하라(Agir)’에서 출연한 기부금(연간 45만 유로)으로 충당했다. 이 협회는 라비가 말리, 세네갈, 토고에서 했던 농업 교육을 활성화해 부르키나파소에서 시작한 사업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프랑스에서는 라블라셰르의 ‘마 드 보리외(Mas de Beaulieu)’에서 생명역동 농법으로 1헥타르 남짓한 작은 땅을 일구는 교육을 실시했다. 2004~2016년에는 ‘볼롱테르(VolonTerre)’라 불리는 자원봉사자 2,350명의 발길이 이어졌는데, 이들은 이곳에서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 텐트에서 숙식을 제공받았다.
2001년, 기업가 미셸 발랑탱(2012년에 고인이 됨)이 사비 450만 유로를 털어, 라비와 함께 아마냉(라 로슈 쉬르 그란, 드롬 주)에 55헥타르 규모의 농촌관광 기반시설을 구축했다. 이곳에서는 기업 세미나를 열거나, 채소재배를 배우려는 이들과 관광객들을 받아들였다. 과일과 채소 재배는 두 명의 파트타임(28시간) 직원이 담당하는데, 시민 서비스 자원봉사자들이나 우퍼(woofers, 세계 친환경 농장이라는 뜻의 ‘World-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를 줄인 WWOOF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들이 이 일에 지원했다. 아마냉 집행부는 “우퍼들은 이곳에서 하루 5시간씩 일하는 대가로 숙식을 제공받는다. 우리는 사회분담금을 내지 않지만, 그건 합법이다”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명상을 끝낸 아마냉의 자원봉사자 넷 중 하나가 이곳의 유기농 식사에 대해 극찬을 늘어놓으며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하루에 5시간 이상 일한다. 그러나 숙소는 굉장히 편안하다. 여기서 지내다 보면 삶의 본질을 체험할 수 있다.” 엄청난 부지 규모와 넉넉한 일손에도 불구하고 아마냉은 자급자족으로 소비 식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채소의 20%는 외부에서 구매한다고 한다. ‘지구와 휴머니즘’ 협회가 관리하는 마 드 보리외와 아마냉에서 자원봉사로 일했던 아리안 레스페는 이렇게 증언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용당했다고 불평하며 문을 쾅 닫고 이곳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피에르 라비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시스템에서 탈피해 인간적 교감을 되찾는 것, 그것은 급여와는 다른 무언가를 위해 일하고 베풀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언자 농부 라비가 이 무상계약에서 얻는 금전적 이익은 없다. 그러나 속임수에 불과한 이 포템킨 농장(원래 표현은 ‘Potemkin village’이며, 어떤 정권이 그 나라 안팎의 사람들 모두를 속이기 위해서 만든 기만적인 가짜 구조물을 말한다-역주)에서 대단한 경험도 농학지식도 없이 삽질을 하고 있는 초보 농사꾼들은 TV에서 라비식 모델이 경제적이고, 친환경적이라는 선전용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농장들은 교육비를 청구해 상당한 수익을 올린다. 벌새운동은 농장의 개발 및 감독에는 관여하지 않지만, 현재 벌새운동 대표인 마티외 라본은 ‘임브레이싱 더 월드(Embracing The World)’가 추진하는 환경 프로젝트의 유럽 네트워크 그린프렌즈(GreenFriends)를 통괄하고 있다. ‘임브레이싱 더 월드’는 암마(Amma)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인도의 영적 지도자 마타 암리타난다마이(Mata Amritanandamayi)가 설립한 단체다.(19) 이 단체의 임무는 암마가 프랑스에 왔을 때 머무는 플레시 농장(퐁구앵, 외르 에 루아 도)과 루 파라두(투르브, 바르 도)에서 아직 ‘부족한 모델들’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플레시 농장(6헥타르)에 위치한 ‘임브레이싱 더 월드’ 협회는 2017년 연차 결산 보고서에서 전체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으로 총 843,710유로의 수입을 올렸다고 밝혔다.(20) 루 파라두(3헥타르)를 관리하는 MAM 협회는 16,346시간의 ‘세바(Seva)’를 행했다.(21)  협회 사이트에 따르면 세바란 “암마가 특별히 조언하는 영적 훈련법의 하나로, 의식적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는 노동을 말하며, 행동하는 명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부엌일, 정원일, 집안일, 노동, 재봉일 등 일의 종류는 다양하다.” 암마와 벌새운동 네트워크는 암마가 매년 프랑스를 방문하거나, ‘임브레이싱 더 월드’ 농장에서 만남으로써 정기적으로 교류한다. 또는 벌새운동이 발행하는 간행물을 통해 교류하기도 하는데, 2015년 3월 <카이젠>에는 암마의 기사가 ‘한’ 면을 장식했다. 

‘벌새’ 고용주들의 열정

2009년은 라비가 프랑스 산업연맹(Medef)의 하계대학에 참여한 해로, 이때부터 벌새운동의 창시자는 베올리아, HSBC, 제너럴 일렉트릭, 클라란스, 이브 로셰, 벨레다 같은 대기업 지도자들과 함께 이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나기 시작했다. 벌새운동 협회의 2009년 활동 보고서를 보면 ‘벌새 기업가 연구소’의 개설 문제가 언급돼 있다. 이 연구소는 “가치와 협동을 추구하는 기업가들을 동원하고 연결하는” 임무를 맡는다. “우리는 기업체 대표, 협회, 주부, 농민, 선출직 공무원, 예술가들을 한데 모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혼자서는 상상도 못 했을 해결책을 찾기 위해 조직된다.”  
이런 상상을 활성화하고자 라비는 최근 몇 년간 억만장자 자크-앙투안 그랑종, 다논 엠마뉘엘 파베르 그룹의 CEO는 물론, 맥도날드의 프랑스 지사장이자 다국적기업 관리팀의 멤버인 장피에르 프티를 농장에 초대했다. 케이블 제조업체 넥상 유럽(Nexans Europe, 직원 수 2만 6,000명)의 CEO인 크리스토퍼 게랭은 “나는 피에르 라비를 무척 좋아한다. (…) 그의 강연이라면 빼놓지 않고 참석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2년 만에 유럽 공장들의 실질적 수익성을 3배 증가시켰다”(<르 피가로>, 2018년 6월 4일 자)고 자랑을 늘어놨다. 라비는 에마뉘엘 마크롱의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그와 점심식사를 하기도 했다. 라비는 “마크롱, 이 불쌍한 사내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러나 그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의도는 좋지만 복잡한 시스템 때문에 그의 손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2018년 5월 8일 시즈 앤드 칩스(Seeds & Chips)가 밀라노에서 개최한 농산물 가공 관련 콘퍼런스에서, 까르푸 이탈리아의 운영담당 이사인 스테판 쿰은 기자들과 기업가들 앞에서 발언을 했다. 까르푸의 CEO 알렉상드르 봉파르가 20억의 비용 절감, 273개의 매장 폐쇄, 2,700명의 노동자 해고를 발표한 지 겨우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까르푸의 이탈리아 담당자가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자, 화면에 ‘전 세계적 휴머니즘’의 도래에 호소하는 인용문과 편안한 미소를 띤 얼굴이 등장했다. 이 ‘벌새’ 고용주는 “나는 6년 전부터 피에르 라비의 책을 읽어왔다. 변화를 일궈내려면 각자가 ‘자기 몫을 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것은 까르푸의 의지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통 큰 분배와 환경적 배려, 거대한 자산과 금욕주의적 영성을 조화시키는 것. 
소박한 행복이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유연한 개념인 것 같다.  



글·장바티스트 말레 Jean-Baptiste Malet
기자. 저서로 『L’Empire de l’or rouge. Enquête mondiale sur la tomate d’industrie(붉은 황금의 제국. 전 세계 토마토 산업 조사 보고서)』(Fayard, 파리, 2017)가 있다.

번역·조민영
서울대 불문학과 석사 졸업.

(1) Résultats GfK(GfK의 조사 보고서), 2018년 6월.
(2) 프랑수아즈 니셍과의 대담, <Kaizen>, 권외 특별기념판, ‘Pierre Rabhi, la terre au cœur(피에르 라비, 마음의 대지)’, Paris, 2018년 3월.
(3) 니콜라 윌로와의 대담, <Kaizen>, 권외 특별기념판, ‘Pierre Rabhi, la terre au cœur(피에르 라비, 마음의 대지)’ op. cit.
(4) Pierre Rabhi, 『Du Sahara aux Cévennes ou La Reconquête du songe(사하라에서 세벤까지, 혹은 되찾은 꿈)』, Éditions de Candide, Lavilledieu, 1983 (개정판, Albin Michel, Paris, 1995). 인용한 세 문장은 이 책에서 발췌함.
(5) Karine-Larissa Basset(카린-라리사 바세), ‘Richard Pierre(1918-1968)’, http://ahpne.fr
(6) Pierre Richard, ‘Considérations sur le rôle social du médecin de campagne(시골 의사의 사회적 역할에 관한 고찰)’, 1945년 12월 13일에 발표한 의학박사 학위논문, G. Subervie 인쇄소, Rodez, 1947년.
(7) Pierre Rabhi, 『Du Sahara aux Cévennes』, op. cit.
(8) Correspondance de l’auteur avec Philippe Barthelet, coordinateur de Gustave Thibon(귀스티브 티봉의 코디네이터 필리프 바르틀레와 주고받은 서신), L’Âge d’homme, coll. 『Les dossiers H』, Lausanne, 2012년.
(9) 피에르 라비와의 대담, 『Ultreïa!』, n°1, Éditions Hozhoni, La Chapelle-sous-Aubenas, 2014년 가을.
(10) Evelyne Pieiller, ‘Le terroir ne ment pas 대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8년 6월호‧한국어판 2018년 8월호.
(11) ‘Pierre Rabhi: “Le féminin est au cœur du changement”(피에르 라비: “여성은 변화의 중심에 있다”’, 「Kaizen」, 2018년 5월 28일, www.kaizen-magazine.com
(12) Jean-Baptiste Malet, ‘L’anthroposophie, discrète multinationale de l’ésotérisme(인지학, 비교(祕敎)의 다국적 비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8년 7월호 참조.
(13) Maurice Freund, 『Charters interdits. Quinze ans d’aventures pour la liberté du ciel(금지된 전세기. 하늘의 자유를 위한 15년의 모험)』, Bueb & Reumaux, Strasbourg, 1987년. 
(14) ‘Aujourd’hui La Vie: la Vie à vif(오늘날의 삶: 활기찬 삶)’, 아프리카 특별 방송, 안테나2, 1986년 5월 6일. 
(15) René Dumont, ‘L’agriculture voltaïque dans le piège de la dépendance(의존의 덫에 걸린 볼타전지 농법)’, 「Le Monde diplomatique」, 1978년 3월호 참조.
(16) René Dumont, 『Un monde intolérable. Le libéralisme en question(참을 수 없는 세상. 문제의 자유주의)』, Seuil, coll. 『L’histoire immédiate』, Paris, 1988년.
(17) Pierre Rabhi et Juliette Duquesne(쥘리에트 뒤켄), 『Les Excès de la finance ou l’art de la prédation légalisée(재정남용 혹은 합법화된 포식)』, Presses du Châtelet, coll. 『Carnets d’alerte』, Paris, 2017년.
(18) Pierre Rabhi, 『Vers la sobriété heureuse(소박한 행복을 향해, 국내서 제목은 ‘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 Actes Sud, Arles, 2010년, 다양한 판형으로 40만 부 이상 판매됨. 
(19) Jean-Baptiste Malet, ‘Amma, l’empire du câlin(암마, 포옹의 제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11월호 참조.
(20) ‘Rapport du commissaire aux comptes sur les comptes annuels - exercice clos le 31 décembre 2017(회계감사원의 재무재표 보고서-결산 연도 2017년 12월 31일)’, Association Embracing the World - PKF Audit Conseil, 2018년 6월 22일, www.journal-officiel.gouv.fr
(21)  ‘Rapport du commissaire aux comptes sur les comptes annuels - exercice clos le 31 décembre 2017(회계감사원의 재무재표 보고서-결산 연도 2017년 12월 31일)’, Association MAM - PKF Audit Conseil, 2018년 5월 16일, www.journal-officiel.gouv.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