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시작된 북한 자본주의

2018-09-28     김진호 | 국제전문기자

‘평양이 곧 북한이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북한 체제의 정점인 조선노동당 당사가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모든 변화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뇌가 지시하는 명령신호가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역풍이 불 수도 있고 변화 자체가 옆걸음질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평양은 북한의 현재이자, 미래라고 할 수 있다. 구성원도 다르다. 평양 시내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북한 사회에서는 일종의 특권이다. 거주지가 평양에서 지방으로 바뀐다면 이주하는 게 아니라 축출당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평양이 북한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볼 리트머스 시험지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지난 8월 10일부터 9박10일 동안 평양을 다녀왔다. 방문지역이 대부분 평양에 한정된 데다가 북측이 보여주고 싶은 곳만 보고 왔다.평양의 정체, 북한의 정체는 많은 부분 괄호 속에 놓여 있다.평양의 면모는 지난 9월 18~20일 남북정상회담 차 방북했던 남측 대표단의 견문록으로 보완됐다. 또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 각계각층 방북단의 증언으로 빈 괄호를 메워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남측 사회가 함께 써나가야 할 긴 보고서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정상회담 방북단이 2박 3일의 짧은 기간 동안 평양과 백두산을 둘러보았다면, 그나마 제4회 아리 스포츠컵 국제유소년축구대회를 계기로 방북한 남측 대표단은 상대적으로 평양을 찬찬히 뜯어볼 기회를 가졌다. 

평양으로 가는 길

“선생, 카메라 좀 봅시다.” 남측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CIQ)를 지나 채 10분이 되지 않아 도착한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하면서 큼직한 카메라를 가슴에 매고 있었던 게 실수였다. 군복차림의 북측 인사들은 “비무장 지대에서 사진 찍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라면서 카메라에 찍힌 사진들을 지웠다. 다만, 정확히 군사분계선 남측에서 찍은 사진들은 그대로 놔뒀다. 분단은 카메라에 담긴 사진에서조차 선이 분명했다. 방북단 일행은 기자를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순서가 달랐을 뿐 그들의 카메라 역시 검색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방북 일정 내내 ‘사진 통제’가 과거에 비해 심했다. 그중 가장 아쉬움을 남긴 것은 북측 버스 편으로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마주한 망외의 절경을 놓친 것이었다.
끝내 손에 쥐지 못한 두 컷은 자다가도 이미지가 떠오를 정도로 아쉬웠다. 한 컷은 왼쪽의 송악산에서 맨 오른쪽의 천마산까지 병풍처럼 늘어선 산의 품에 포실하게 안긴 개성의 전경이었다. 그 앞에 생뚱맞게 높은(160m) 철탑 위에 인공기가 펄럭이는 기정동 마을이 붙어 있었다. 카메라에 담았지만 북측 CIQ에서 삭제됐다. 또 한 컷은 아예 찍지도 못했다. 역시 산 밑에 안겨있는 황해북도 금천군 시가지와 그 앞을 흐르는 예성강의 풍광이었다. 때마침 도로가 야트막한 구릉 지역을 올라가던 각도여서 구도도 좋았다. 옆자리 북측 보장성원(안내원)의 제지로 촬영의 골든타임을 보낸 뒤 막무가내로 셔터를 눌렀지만, 평범한 컷에 그쳤다. 때론 긴장감이 돌 정도로 끊임없이 북측 보장성원들과 실랑이하면서 악착같이 카메라를 들이대려 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방북기에 반드시 필요한 사진을 얻으려는 직업적인 본능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직업과 상관없는 생각이었다. 북녘을 고향으로 둔 분들에게 고향 풍경 한 장이라도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귀로에 들른 황해북도 서흥군의 은정휴게소 마당에서 평범한 옥수수 밭에 카메라를 들이대자 30대 초반의 보장성원은 “어디 뭐 찍을 게 있습니까”라며 의아해했다. “서흥군이 고향인 분들은 우리가 보는 이 풍경 자체가 얼마나 사무치겠느냐”라고 답했다. 그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사진을 통한 교감 또는 갈등은 방북 기간 내내 반복됐다. 
북한을 10여 차례 다녀왔고 평양만 4번째였지만 이번엔 감회가 달랐다. 마지막으로 평양을 만난 게 2005년 6월이었으니 꼬박 13년 만의 재회였기 때문이다. 과거 개성공단 또는 개성 시내까지 버스로 갔던 적은 있지만 평양까지 육로로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왕복 4차선에 갓길이 딸린 개성~평양 고속도로는 곧게 뻗은 길이었다. 남측 고속도로처럼 좌우 굴곡이 없었다. 아스콘 포장이 거칠어서 노면이 매끄럽지 않았지만 패인 정도가 기껏 몇㎝ 정도에 지나지 않아 스포츠유틸리티차량으로 내달리면 얼추 1시간 반 만에 평양에 도착한다는 게 보장성원들의 전언이었다. 
 
오후 5시 20분쯤 개성 외곽을 지나 고속도로에 올랐다. 버스는 시속 70㎞ 안팎의 느린 속도로 달렸지만 그 느림이 고마웠다. 개성을 떠나면서 목가적인 풍경이 이어졌다. 마침 짙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 있는 맑은 날씨가 풍경의 선명도를 더했다. 과거 북측 인사들이 남측을 방문하면 가장 부러워했던 것은 서울의 고층빌딩이나 잘 정비된 도로가 아니었다. 푸른 산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북측의 산들은 대부분 헐벗었다. 하지만 고속도로 양편에 펼쳐진 풍경은 온통 초록이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전국적으로 펼친 산림복구전투가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 같았다. 옆자리의 보장성원은 “지역마다 양묘장을 만들어 ‘자연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단 말입니다”라고 전했다. 
금천굴, 옥천군, 룡궁굴, 주포굴, 상봉굴, 정방굴 등 18개의 굴(터널)은 모두 쌍굴이었다. 조림을 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능선도 보였다. 도로 양편의 들판에는 주로 옥수수밭이 많았다. 북측 보장성원들은 남측 방문객, 특히 기자들을 접할 때 한두 가지 정치적 메시지를 집요하게 전하려고 한다. 이번에는 주제가 4·27 판문점 공동선언 내용을 남측이 잘 이행하지 않고 있다. 미국 눈치만 보고 그래서 되겠나. 북남이 주도적으로 풀어나가야 하지 않겠나 등이었다. 대부분 30대 초중반의 보장성원들 중에는 김일성대학 출신이 많았다. 깔끔한 인상의 보장성원들은 버스 안에서부터 정치적 메시지로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가급적 무시했다. 창밖의 풍경을 보는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동굴을 지나자 ‘평양 53㎞’ 표지판이 보였다. 
개성~평양 고속도로는 개성 동남쪽에서 시작해 황해북도 금천~평산~서흥~봉산~사리원~황주군 외곽을 거쳐 평양시 강남군~낙랑구역으로 이어진다. 18개의 굴(터널)을 지난다. 총연장이 167㎞(출처: 민족문화백과사전)이다. 하지만 임진각에서 평양까지 153㎞라는 표지판이 있는 것을 보면 실제 평양 초입까지의 직선거리는 고작 140㎞ 안팎일 것 같다.
고속도로는 3~4도의 완만한 경사가 자주 있었다. 오르고 내리는 그 경사각이 오히려 풍광을 보는 재미를 더했다. 남과 북은 이날, 각각 축구공을 둘러메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 참가하는 북측 대표단이 이날 오전 서해 육로로 내려왔고, 오후엔 남측 방북단이 같은 길로 올라갔다. 검은 연기를 내뿜는 황해제철의 높은 굴뚝이 멀리 보이는 사리원시 외곽을 지날 무렵부터 황주평야가 펼쳐졌다. 논과 밭이 섞여 있었다. 드문드문 풀을 뜯는 소, 자전거를 타고 농로를 지나는 주민들이 보였다. 낮은 구릉지역과 평지가 섞인 황주평야는 남녘에선 보기 드문 경치였다. 일행 중 한 명은 “대규모 목축사업을 벌일 지형”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20㎞, 10㎞, 5㎞…. 평양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붉은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였다. 차창 밖으로 평양화력발전소 굴뚝이 보였다. 
개성~평양 고속도로는 평양의 남측 관문인 낙랑구역에 도착하면서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밑을 지나게 된다. 한복 차림의 남과 북의 여성이 도로 위로 양손을 맞잡아 달덩어리 같은 한반도를 맞들고 있는 형상이다. 아쉽게도 해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숙소인 양각도 호텔에 도착한 것은 오후 8시쯤. “반갑습니다.” 직원 20여 명이 도열해 박수로 맞아주었다. 호텔 로비에는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 관광객들로 붐볐다. 

옷을 갈아입은 평양

다음날부터 접한 평양은 무엇보다 스카이라인이 달라졌다. 50~70층 높이의 고층살림집(아파트)이나 일반건물이 들어섰다. 거리의 시민들도 옷을 갈아입었다. 남루한 옷을 벗어 던지고 깔끔한 옷을 입었다. 뜨거운 늦여름 햇살을 가리기 위해 여성들은 양산을 많이 사용했다. 신발과 핸드백, 자전거도 달라졌다. 술과 담배, 각종 식료품, 공산품도 달라졌다. 특히 달라진 것은 야경이었다. 과거 양각도 호텔이나 고려호텔 스카이라운지의 회전식당에서는 바라볼 야경이 없었다. 암흑천지였다. 2003년 처음 평양을 방문하고 ‘박물관 도시’라는 인상을 받은 까닭이다. 관람객들이 모두 떠난 밤이 되면 정적이 감도는 박물관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평양의 밤은 밝다. 전력사정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덕에 양각도 호텔 회전식당에서 내려다본 시내가 환했다. 주체사상탑 앞 대동강 위에는 불 밝힌 유람선이 떠다니고 대동교 난간은 불장식(네온사인)으로 장식됐다. 일반 아파트들은 물론 거리의 매대도 불을 켜고 손님을 받고 있었다. 평양화력과 동평양 화력발전소가 정상가동 되는 데다가 많은 건물들에 설치된 소형 태양광전지 덕분이라는 안내원들의 설명이다.  
북측은 허투루 참관장소를 정하지 않는다. 반드시 이유와 의도가 있다. 이번에는 정치적 색채가 짙은 곳이 획기적으로 줄었다. 김일성주석의 만경대 고향집이 사실상 유일했다. 개선문은 축구대회가 벌어진 김일성경기장 바로 앞이었기에 들른 정도였다. 평양 교원대학과 류경어린이종합병원,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등 ‘교육’과 ‘보건’ ‘어린이’를 주제로 한 장소가 많았다. 평양교원대학 방문길에 “여기가 무슨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 그게 아이들이니까 보여드린 거다”라며 의미를 부여한 북측 인사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의 종합공연에도 10여 년 전만 해도 넘쳤던 ‘민족’과 ‘통일’이 사라졌다. 과거 수많은 남측 방문객들의 눈시울을 젖게 했던 강렬한 인상의 프로파간다가 줄어든 것이다. 북측 사회 특성상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은 위원장으로 내려오는 ‘최고 존엄’에 대한 경배는 남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이념적 색채를 엷게 하고, 아이들의 장기자랑 요소를 짙게 배치했다. 평양교원대학 출신으로 6세~16세 예체능계 수재들을 양성하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 공연에 참가했던 30대 여성 보장성원과의 대화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만경대학생소년 궁전 공연을 보고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공연 어떻게 보셨습니까”라고 물어왔다. 머뭇거리던 기자는 “예전에 비해 훨씬 아이들 공연다워진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이를 곡해했는지 “말에 뼈가 있단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과거 같은 공연을 보고 느꼈던 선전적 요소가 줄어들었다”고 자세히 설명을 하자 공감을 표했다. 
평양은 대동강과 보통강 양안의 평평한 땅에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담은 모뉴먼트로 가득 찬 도시다. 김일성광장, 주체사상탑, 개선문, 인민대학습당, 인민문화궁전이 의도적으로 배치됐다. 개인적으론 평양과 가장 비슷한 계획도시로 워싱턴을 꼽고 싶다. 포토맥 강변에서 야트막한 경사로 올라가면서 넓게 펼쳐진 땅에 역시 역사적, 정치적 모뉴먼트가 많기 때문이다. 평양의 건설자들이 워싱턴을 의식하기도 했다. 미국인들이 ‘철골 없이 지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말하는 워싱턴모뉴먼트(높이 169.3m)를 벤치마킹한 주체사상탑(170m)이 그렇다. 과거 주체사상탑을 참관했을 때 북측 안내원은 탑의 높이가 워싱턴모뉴먼트 보다 높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엔 체류기간이 길었음에도 주체사상탑을 참관지에서 제외했다.
나머지 참관지도 능라곱등어(돌고래)관, 문수물놀이장 등 위민·위락·의료 시설에 집중됐다. 식사는 옥류관 냉면으로 시작해 평양단고기집, 대동강수산물식당, 김일성 광장 앞의 선상레스토랑 무지개식당 등에서 했다. 양식 철갑상어는 식당마다 주요 메뉴였을 뿐 아니라, 양각도 호텔 1층 은정찻집은 물론 가는 곳마다 수족관에 관상용으로 길렀다. 옥류관 냉면과 단고기에 이은 평양 3대 음식의 하나로 꼽아도 무방할 것 같았다. 
전력사정이 좋아지고 의·식·주가 대폭 개선된 평양은 예전에 없었던 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시민들의 표정에도 미래에 대한 낙관이 읽혔다. 개성~평양 고속도로변 산림녹화에서부터 하다못해 대동교의 불장식까지 크고 작은 변화는 모두 ‘최고 존엄’으로부터 시작된다. 김 위원장이 집권한 2012년부터 경작물 일부를 개인이 처분할 수 있도록 허용한 포전제로 식량사정이 좋아지고, 사회주의 기업 책임관리제로 수입이 늘었다. 물론 중국과의 교역이 윤활유가 된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강조해온 경공업 분야의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 분명했다. 참여정부 당시인 2000년대 초만 해도 북측이 그토록 확보하고 싶어 했던 경공업분야의 자급능력을 남측의 도움 없이 이룩한 것이다. 상점마다 진열된 상품들은 대부분 북한산(Made in DPRK)이었다. 북한이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2012년 봄 두 차례 걸쳐 공표한 ‘김정은 동지 로작’에 예고된 변화들이다.
여기에 수십 년 동안 인민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했던 ‘숙원’사업도 성공했다. 6차 핵실험에서의 열화우라늄탄(수소폭탄) 개발 성공과 대륙간탄도로켓(ICBM) 시험발사 성공 뒤 지난해 11월 대내외에 선포한 핵 무력의 완성이 그것이다. 지난 4월 조선노동당 전원회의에서는 핵과 경제의 병진정책의 성공을 선언하고 경제발전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힘을 갖춘 뒤 협상에 나온 셈이다. 그 끝에 미국이 다가왔다. 많은 평양 시민들에게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세계 최강대국 대통령(도널드 트럼프)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며, 이는 승리와 성공의 표상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아래 신음하고 있어야 할 평양이 활기를 띠는 배경이다. “우리가 잘살게 되면 남측이 좋아할까요?”라고 물어온 50대 여성의 질문은 경제발전과 번영을 기정사실화 한 것이었다. 

손님은 왕이다, 이미 확산된 자본주의 요소

10여 년 전 평양을 방문할 때는 아침마다 호텔 숙소를 나서면서 미화 1달러를 침대 위에 놓고 나왔지만 한 번도 가져간 적이 없었다. 저녁에 돌아와 보면 눈에 잘 띄는 곳에 반듯하게 옮겨져 있었다. 이번에는 침대 위에 놓았던 1달러를 청소하는 분들이 가져갔다. 한번은 세면대 옆에 벗어놓았던 양말 3켤레를 깨끗하게 빨아 걸어놓았다. 3달러와 함께 감사를 표한 쪽지를 남기자 역시 가져갔다. 호텔 상점마다 경화를 벌기 위해 노력을 다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양각도 호텔 1층의 은정찻집의 폐점시간을 물으니 “24시간 영업”이라고 했다. 새벽 2시 30분에 로비에 내려가 보니 불이 꺼져 있었다. 하지만 로비에 서 있던 중년의 벨보이가 다가오더니 “선생님 뭐 드시겠습니까”라고 물어왔다. 봉사원들이 호텔 내 숙소에 잠을 자다가도 손님이 나오면 즉시 다가오는 것임을 알게 됐다. 찻집에선 온커피 1잔에 ‘네 딸라’를 받았고, 에스프레소는 5달러를 받았다. 
평양은 공식적으로 장마당을 부인하면서도 자본주의 요소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점과 이발소, 사우나, 식당 등 호텔 내 다른 상점 봉사원들도 손님이 있을 때는 자정 무렵까지 근무하다가 다음 날 아침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럼에도 서비스는 친절했고 활기가 넘쳤다. 역시 김 위원장이 주도하는 변화다. 화장품공장에서 수산물 생산시설까지 김 위원장이 현지시찰 때마다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반미투쟁이나 주체사상 강조, 정신무장이 아니다. 여느 자본주의 국가의 최고경영자(CEO)처럼 생산성과 품질의 향상이 핵심 메시지다. 자본주의 요소를 적극 받아들이면서도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 ‘김정은의 북한’이 보여주는 이중성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김 위원장이 올 들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필두로 각각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북·중 정상회담, 한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을 하면서 비핵화를 다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변화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김정은이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국내 전문가들의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 대목이다. 혁명은 배가 고프다고 일어나지 않는다. 생활의 편의가 줄어들게 된다면 일어날 수 있다. 북한이 지난해의 대치국면을 올해 대화국면으로 전환한 것은 큰 틀에서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구축하면서 한편으로 경제발전과 번영을 누리겠다는 포석이라는 해석이다. 
10여 년 전 방북을 할 때마다 북한 사회가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방향성이 읽혔다. 바로 교육과 과학기술이다. 과학자들은 미래과학자거리나 여명거리 등 김 위원장 집권 뒤 최근 현대적으로 변모시킨 거리의 주인공들이다. 자본주의 국가라면 연봉을 많이 주는 것으로 대우하겠지만 북한 사회 특성상 돈이 아닌 명예와 편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보상했다. 과학자는 가장 좋은 살림집을 배정받고 사회적인 존경을 받는다. 대동강수산물식당 3층에는 ‘과학자 식사실’이 따로 있었다. 과학자들에게 예약 편의는 물론 가장 좋은 방을 배정한다는 설명이었다. 북한의 과학기술이라면 고개를 갸웃할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전 세계 10여 개 국가밖에 보유하지 못한 스페이스클럽에 가입했다. 바로 로켓을 대기권에 쏘아 올리는 기술을 갖춘 것이다. 2016년 서해상에서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 잔해물을 수거한 우리 과학자들은 “동네 철공소에서 만든 수준이지만, 필요한 기능을 다 갖췄다”고 평가한 바 있다. ICBM을 제작할 기술을 갖춘 과학기술 인력이 경제성이 높은 다른 분야 연구, 개발에 착수한다면 급속한 발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과학기술의 정점이 ICBM이었지만, 이미 확보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12일 한국정보화진흥원(NIA)이 개최한 ‘남북 ICT협력추진정책 세미나’에서 나온 말들도 이를 뒷받침한다. “북한은 과학자의 실패를 용인한다. 경제 강국 노선을 뒷받침하는 게 과학기술강국 노선이다” “학생들의 장래희망 1위는 압도적으로 과학기술자다” “김정은 위원장은 ICT강국으로 ‘단번 도약’ 정책을 추진한다” 등의 말이 쏟아졌다. 이번 방북길에 어렴풋하게 갖게 된 생각들을 확인해주는 말들이다. 첨단기술은 후발주자일수록 앞서나간다. 군사적으로 비대칭전략은 산업에서도 적용된다. 신용카드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중국은 뒤늦게나마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우회했다. 곧바로 핀테크와 QR코드 결제시스템을 선택해 신용카드 사회를 간단하게 앞질렀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향후 국가적 역량을 과학기술을 통한 성장에 쏟아붓는다면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렇다고 백두혈통이 통치하는 주체사상의 나라의 정체성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조국통일” 압도한 “평화번영”

중국은 꼬박 40년 전 개혁·개방을 선포하고 고속성장가도를 달려왔지만 여전히 중공당이 통치하는 닫힌 사회다. 방북기간 북측이 철저하게 사진통제를 한 연유는 부끄러운 장면을 노출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그다지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건만 꺼렸던 것이다. 한번은 저녁 무렵 보장성원 10여 명이 웅성거려서 이유를 알아보니, 그날 평양 시내를 버스로 이동하면서 방북단의 누군가 공사장에서 웃통을 벗고 일하는 보안원들의 사진을 남측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게 화근이었다. 개방에 대한 북한의 생각을 엿보게 했다. 
중국처럼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고, 국제 금융기관에 접근하기 위해 경제적 개방은 하겠지만 사회적 개방은 철저히 막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했다. 평양에 도착한 다음 날 인터넷을 통한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등 SNS 접속이 가능했다. ‘여기는 평양’이라면서 평양 사진 몇 개를 올리고, 실시간으로 날씨와 인상을 전하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대부분 평양 한복판에서 SNS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하지만 이 역시 북측이 SNS를 막을 방도를 찾을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누릴 자유일 것 같다. 
북한의 변화가 낳은 부산물의 하나는 통일의 지연일지도 모른다. 북측이 설계한 이번 방북단 참관일정의 강조점에서 ‘민족’과 ‘통일’은 희박해졌다. 한 전문가는 “북측은 남측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자기식의 발전모델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비핵화와 체제보장 문제가 해결의 가닥을 잡으면 남측을 넘어 세계와 직거래를 하겠다는 의도를 담은 말이다. 남측도 마찬가지다.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문’이나 ‘9월 평양공동선언문’에서 ‘통일’이 배제됐다. 
판문점 선언은 제목 외 본문에서 “양 정상은…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향한 좋은 흐름을 더욱 확대해 나가기 위하여 함께 노력하기로 하였다”는 마지막 단락에 한 번만 등장한다. 평양 공동선언문에는 아예 사라졌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참여정부를 이어받아 ‘평화·번영’이 핵심이다. 북측도 이를 수용했다. 지난 9월 18~20일 방북했던 문재인 대통령 일행을 환영했던 평양 시민들과 삼지연 주민들은 “조국통일”보다 “평화번영”을 더 자주 외쳤다.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함께 또 따로 평화와 번영을 도모하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로 가는 출발점에 선 것인지도 모른다. 
평양이 지난 몇 년 동안 이룩해온 변화와 발전은 물론 미국과의 비핵화 및 평화체제 협상에 따라 행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북도, 남도 승부수를 던졌지만 ‘트럼프의 미국’이 적극 화답할 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과의 대북정책 공조에서 발을 빼려는 중국의 입장 역시 변수다. 하지만 평양이 이미 불가역적인 변화의 천리마에 올라탄 것은 분명한 듯하다.  

글/사진·김진호
대학에서 프랑스학을 공부한 뒤 파리8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경향신문>의 국제부장을 거쳐 국제 및 남북관계 전문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