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야 할 남과 북

다시 되새기는 영화 <공작>의 메시지

2018-09-28     지승학 | 영화평론가

윤종빈 감독의 <공작>이 지닌 쟁점은, 1990년대 북한과 남한의 실무자들이 실상 끊임없이 교류하고 정치적 난제 해결에 어떤 식으로든 공감하고 있었으나, 그 간극이 너무 컸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보다가 2018년 판문점에서 있었던 남북정상회담과 9.19 평양공동선언 등을 떠올려보면, 겉보기에는 상극이었던 남북이 어떻게 그토록 급격하게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지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동시에 발동되는 남북 관계의 특수성

불거지는 쟁점은 명확하다. 건널 수 없는 지리적 경계에 놓인 두 존재가 서로를 인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사실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 것. 한 민족 한 핏줄이라며 빤한 국가주의적 정신을 강조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특수성’. 특정한 상황에서 발현되는 균형의 특수성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핵심은 이렇다. 대개는 먼저 관계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고, 그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남북관계의 경우에는 힘의 균형을 위한 정역학(靜力學)적 개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을 우위에 놓을 수 없는 정역학적 관계성. 영화 <공작>에서의 두 인물의 구조는 사실상 이 관계성을 따른다. 
박석영(흑금성: 황정민)이 리명운(이성민)을 만나게 되는 과정이 꼭 그렇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관계의 순수한 정역학적 의미(힘의 균형)를 인간적 의미에 견줘서 보려면, 몇 가지 상황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어떤 조건 속에서 바로 이 관계의 균형이 발휘되는가. 또한 어떤 상황이 주어질 때 관계의 이 균형이 완성되는가. 
이 중 쟁점이 될 만한 것은 완성 운운하는 후자다. 관계의 정역학적 특수성은 민감한 지점을 잘못 건드리면 제자리를 맴돌 뿐 균형의 완성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을 인정하기로 한 것은 당신이 그럴 만해서다.’ 리명운이 마음속으로 박석영에게 말했을 듯한 이 중후한 음성의 질문이 피해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서로 통했다는 것, 그것은 내가 인정해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당신이 하는 인정을 받아들이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중요성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면 ‘어떻게 관계의 정역학적 특성은 동시에 발생하는가?’로 어렵지 않게 넘어간다.
정치적 셈법에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을 법한, 관계의 이 ‘균형’은 인정하고 인정받는 문제의 해석을 서로 동시에 겨냥하는 무조건적인 신뢰의 문제로 돌려세운다. 영화 <공작>은 이 균형을 브로맨스와 같은 관계로 보려는 듯하다. 영화에서만큼은 늘 매력적인 관계로 설정되는 브로맨스. 더군다나 바로 이 관점으로 보면, 서로 동시에 발동되는 신뢰가 자신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져 균형이 깨질 경우 이를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없도록 한다. 
박석영은 바로 이 파국을 피하기 위해, 리명운이 보내오는 과분한 신뢰에 조건을 부여해 억지로 균형을 맞추고자 한다. 그는 우선 자본주의적 셈법을 앞세워 그것을 받아들인다. 롤렉스 짝퉁 시계로 시작해 리명운이 따라준 ‘뱀소주’ 한 잔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는 바로 두 사람의 관계의 균형을 이루는 조건으로 이 모두를 기록한다. 
이후 연쇄적으로 ‘뱀소주’에서 ‘합작광고’로 이어지는 영화 속 이야기는 복잡하긴 하지만, 관계의 정역학이 성숙되는 과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나는 영화 <공작>이 바로 이런 관계의 균형을 숨겨진 맥락으로 깔아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석영과 리명운의 관계가 뻔하지만 시대를 압도하는 관계가 된 데는 바로 이런 신뢰관계의 균형이 첨예하게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하나’라는 단어가 가진 두 개 의미

역사적으로 우리는 관계 속에서 어느 한쪽의 인정을 요구하느라 균형을 흔들어 놓기 일쑤였다. 이제 이를 피하려면, 다른 힘이 필요하다. 그것은 일종의 ‘넌 그럴 만해’라는 선(先)-인정. 한 발 앞서는 그 인정을 위한 상당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말, 즉 ‘넌 그럴 만해’라는 말은 결국 “넌 이제 ‘나의 인정’을 받을 만해”라는 말로써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는 ‘나’를 향한 질문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너’와 ‘나’는 박석영과 리명운이 번갈아 위치할 수 있는 공간과 같아서, 어쩌면 ‘남’과 ‘북’의 위치마저 번갈아 채워 넣을 수 있는 ‘비-주체’의 공간이 된다. 
영화 <공작>은 서로를 인정해야 하는 균형을 위해서라도 ‘나’와 ‘너’, ‘남’과 ‘북’이라는 바로 이 의미의 공간을 비워둬야 함을 감지한다. 그런 점에서 ‘넌 그럴 만해’의 의미는 강력하다. 그래서 <공작>에서 만큼은 이 질문의 답을 ‘나’로 직행시키지 않고 ‘남’과 ‘북’을 뒤섞은 ‘조국’의 의미와 뭉쳐서 응답하게 한다. 그 결과 도출되는 말, 그것은 “나에게도 조국은 하납니다”라는 대사다. 박석영의 이 결정적 응답은 그가 기존에 알던 국가에 보여야 할 충성에 대한 맹세를 오히려 무색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 말은 위험에 처할 경우 자신을 버릴 것이 확실한 국가에 억지충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리명운과 맺은 관계의 균형에 의해 깨닫게 된 ‘하나’의 진정한 의미를 내뱉은 말이라고 보는 편이 훨씬 정확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박석영과 리명운에게 ‘남북’ 합작이라는 말과 ‘북남’ 합작이라는 ‘남’과 ‘북’의 미묘한 위치 차이는 남과 북으로 나뉜 개별적 조국이 ‘하나가 된(동시성과 균형의 또 다른 맥락)’ 조국임을 오히려 강하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박석영이 충성을 맹세한 하나 된 조국이란 그가 몸담았던 1990년대의 반쪽 조국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가 될 조국인 것이다. 그렇게 리명운과 박석영은 서로를 통해 ‘하나’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된다. 
솔직히 흑금성이라 불리던 박석영이 영화 초반 조국을 향해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했다. 영화 초반의 설명만으로는 그의 마음을 확정 짓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가 경험하게 된 독특한 상황, 즉 충성(대북첩보)과 사회적 일탈(도박과 술을 통한 신분세탁)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애매함은, 영화 초반에 그가 처음 리명운을 만나는 장면 속에서는 국가에 충성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리명운을 만나게 되면서 일탈의 기운(대북사업과정 중의 불법)이 다시금 번지기도 하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또다시 애매한 상황이 고개를 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꽤 결정적이어서 ‘충성’이 ‘저항’으로 변하게 되는 극적인 심경의 변화에서 큰 몫을 담당한다. 
이와 유사한 심경의 변화를 겪는 인물은 바로 리명운과 김명수(김홍파)다. 특히 김명수는 이 심경의 변화로 인해 숙청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영화를 자세히 보면 김명수의 숙청과 정무택(주지훈)의 숙청 묘사가 극단적으로 구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영화에서는 김명수의 숙청모습은 보여주지 않는 데 반해, 정무택의 숙청은 그의 수하 부하들과 함께 묘사된다). 짐작건대 김명수의 숙청과 정무택의 숙청을 구분 지은 것은 바로 박석영과 같은 심경의 변화를 겪은 인물, 다시 말해 하나 된 조국에 공감하는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정무택)을 구별해야 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이유 때문이라도 실존 인물이기도 한 박석영은 물론 북한의 리명운과 김명수를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은 모두 이념의 대립 없는 하나 된 조국을 진정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리명운과 박석영은 서로를 통해 이제 하나 된 조국이 무엇인지 직시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됐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둘은 40년 만에 최초로 합작하는 민족의 과업을 위해 헌신하고자 의지를 모은다. 둘 사이에 생겨나기 시작한 이 의지는 서로의 조국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일이 전개될 때조차, 예컨대 지켜야 할 선을 넘게 됐을 바로 그 순간에 오히려 가장 강력하게 빛을 발한다(‘호연지기’란 바로 이런 의지를 깔고 있는 복선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처음에 박석영은 “아주 외롭고 고독한 싸움이 될 거야”라던 그의 상사 최학성(조진웅)의 이 말 때문에라도 그 누구도 의심 없이 마주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요점은 이 영화에서 리명운과 박석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신뢰 구축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 두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의 특수한 균형은 서로가 원하는 점을 각자의 조국 속에서 발견하는 한에서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계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이 실패는 비난하기 어렵고, 그 실패가 오히려 이 영화의 가치라는 것이다. 그래,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서로를 비난하지 못한다. 바로 이 점을 건드리고 있는 영화 <공작>은 그래서 매력적이다. 

10년의 배려, 그 섬세한 무심함

일각에서는 박석영이라는 캐릭터를 분단국가의 이념대립 때문에, 다시 말해 오히려 너무도 명확한 정치적 논리가 통용되던 시대 탓에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영화 <공작>은 이념대립을 다룬 많은 영화의 논리가 적용됐어야 마땅했다. 그리고 이 이념 대립을 위해서 박석영을 <미션 임파서블>의 에단 헌트(톰 크루즈)처럼 등장시키거나, 캡틴 아메리카와 같은 영웅으로 만들어야 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분단의 현실이 이념대립으로 이어지면 그 논리에서만큼은 어느 한 편을 압도할 힘을 강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힘을 ‘순수의 유지’를 위한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순수를 오염시키는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명목하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도 얻게 된다. 결국 이는 무지막지한 폭력으로 변질되기 일쑤여서 항상 위험하다. 자비 역시 없다. 선과 악의 구조가 슬며시 자리를 잡기라도 한다면 그 대립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공작>은 그 결이 상당히 다르다. 오히려 이 특수한 분단의 상황을 이념대립이 아니라 하나 됨을 더욱 또렷하게 만드는 것으로 바꿔 놓았다고 해야 할까. 이는 최근 북한을 다룬 영화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공조>가 그랬고 <강철비>가 그랬다. 마치 서로의 모자람을 이해한다는 식의 모습, 너에겐 ‘없고’ 나에겐 ‘있다’는 식의 이해가 아닌, 너에게도 ‘없고’ 나에게도 ‘없다’는 식의 이해의 진보. 바로 이 방식은 그들의 관계균형을 더욱더 세련되게 보여준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남북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에 많은 변화가 온 것만은 분명하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결핍의 균등함’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아무튼 남과 북 사이에서 무엇이 많고 무엇이 적은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따지기보다 둘 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변한 것은 그 무엇이 됐든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급진적 방식의 초기 모습은 ‘배려’로 나타난다. 서로의 부족함을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배려’. 영화 <공작>은 바로 이 배려의 모습을 브로맨스를 통해 담은 영화로 접근하고자 했던 것이다. 리명운은 박석영에게 사업의 독점권을 준다고 접근해 자본가로서의 그의 행보를 배려한다. 박석영 역시 리명운의 정치적 행보에 도움을 주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리명운은 박석영에게 백지수표와 같은 통행증을 실제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건넨다. 그렇게 이 영화는 1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마지막 장면에 이르도록 만든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 10년의 시간스킵(‘10년 후’라는 자막처리)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배려의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하고 궁금해하던 순간 이 장면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공작>에서의 시간스킵을 이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지워진 영화 속 10년간의 시간스킵은 단절이 아닌, 서로가 그저 자신이 할 바를 묵묵히 할 수 있게 배려한 시기의 은유일지 모른다는 생각. 그러기 위해서는 너도 없고 나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배려를 넘어서서 오히려 ‘없음’을 모른 척 해버리는 ‘무심함’의 단계로 나아가야 했던 것은 아닐까. 
혹시 윤종빈 감독이 과감하게 넘겨버린 10년의 세월이 바로 그런 배려의 다음 단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무심함’은 바로 새로운 남북관계의 출현과 공존의 실천을 알리는 가장 강력한 은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는 결국 배려를 세심하게 계산한 ‘관계의 균형’을 재해석 한 부분으로서 ‘무심함’의 새로운 접근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기 위해 9·19 평양 능라도 경기장에서의 문재인 대통령 연설 중 한 문장을 다시 옮긴다.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15만 평양시민을 향해 한 이 말은 남북 간 서로의 발목을 묶어 놓았던 쇠사슬이 사실은 대립의 원인이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한 조건이었다는, 새로운 공존의 의미를 강력하게 알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온 그간의 세월은 ‘대립의 70년’이 아니라 ‘번영의 준비를 위한 70년’의 삶이지 않았을까. 바꿔 말하면 이 말은 우리라는 의미를 ‘남’으로만, ‘북’으로만 제한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임을 잊은 채 살아가는 ‘반쪽의 우리’라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말과 같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공존하는 방법을 절실히 찾아 나설 때만 하나가 될 수 있는, 진정 함께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총풍, 북풍 운운하며 국민들을 좌절에 빠뜨렸던 정치권의 그 실패 지점에서 국민은 기어이 성공할 수 있었고, 이를 영화 <공작>은 새로운 관계설정을 통해 보여주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배려를 넘은 ‘세심한 무심함’은 남과 북을 하나로 이끄는 평화와 공존의 새로운 동력이 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이것의 ‘관계의 패러다임 변화’로서 <공작>은 무심함의 새로운 의미를 예견한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짐작해 본다. 
어쨌든 결국 감사하게도 영화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사회에 결정적이면서도 성공적으로 메시지를 던진 사례를, 나는 또 하나 이렇게 발견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