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건한 공론장의 성채를 향해
2018-09-28 조해람 | 이달의 ‘칼럼’ 가작
“댓글 그런 것을 잘 해야 한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직접 한 말이다. 지난 17일 한겨레신문 단독보도에 의하면,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의 댓글조작 지시가 담긴 육성파일을 여럿 확보했다고 한다. 현직 대통령이 회의에서 직접적으로 여론조작을 지시한 것도 경악스러운데, 그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니 그저 헛웃음만 나온다. ‘드루킹’ 일당의 댓글조작 사건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실형 확정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몇 달 사이 댓글조작과 관련된 뉴스를 쉴 틈도 없이 접하고 있는 국민들의 심경은 참담하다. 게다가 ‘십알단 사건’ 등을 생각해보면 최근 몇 달의 문제도 아니다. 2018년 대한민국, 국가기관의 댓글조작 사건은 더 이상 어제오늘 일이 아니게 됐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강국인 한국에서 왜 이렇게 후진적인 일이 자꾸만 벌어질까? ‘원인’만 보면 생각보다 단순하다.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여론 장악에 유혹을 느낀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그런 발상을 실행에 옮기는 정치인이 한국에 유독 많았던 탓이고, 한국의 인터넷 민주주의가 그런 시도를 막아낼 만큼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나 ‘대책’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구태 정치인을 심판하거나 인터넷 댓글 규칙을 수정하는 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댓글조작이 문제가 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는 게 그 증거다. 댓글을 조작하려는 정치인들은 계속 등장할 것이고, 너무 심한 댓글규제는 인터넷 민주주의의 순기능을 해칠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의 공작으로부터 우리의 인터넷 공간을 지켜낼 것인가? 지켜내기 위해서는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인터넷이 차지하는 ‘공론장’으로서의 성격을 들여다봐야 한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자유로운 시민들이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공동선을 향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공간’으로 정의했다. 핵심은 ‘합리적인 토론’이다. 공론장의 참여자들이 사실의 왜곡과 비이성적 선동을 걷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언론의 상업화와 사회의 파편화는 공론장의 그런 능력을 계속 방해한다. 하버마스는 합리적인 토론을 상실한 공론장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비판적 토론과 사회적 합의 추구라는 본래의 기능을 잃고 종국에는 민주주의에 심각한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인터넷 공론장은 하버마스의 경고를 그대로 따라가는 모양새다. 연일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SNS는 ‘취향분석’이란 이름으로 특정 성향의 정보만 전달하며 사용자의 시야를 좁힌다. 그런 부정적인 여론 형성 과정의 중심에 댓글이 있다. 사람들은 의사결정의 정보가 부족할 때 기존 의사결정의 영향을 받는데, 그때 댓글창은 가장 편리한 참조준거가 된다. 문제는 정보화 시대의 네티즌들이 끈덕진 의심보다는 편리한 추종을 으레 택한다는 데 있다. ‘쏠림 현상’이 점점 커지며 반지성주의와 확증편향이 득세한다. 잘못된 정보는 초고속 인터넷을 타고 빠르게 확산된다. 이렇듯 지금 한국 인터넷 공론장은 특정 여론을 만들기가 너무 쉽다. 여론조작을 꿈꾸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탐나는 먹잇감’이나 다름없다. 사람으로 치자면 면역체계가 취약해 댓글공작이라는 바이러스에 자꾸 감염되는 것이다.
때문에 댓글조작에 대응할 수 있는 여러 즉각적인 방법들과 함께, 건강한 공론장을 만들어 병의 침투를 애초부터 차단하는 근본적인 대책도 중요하게 고려돼야 한다. 사람의 몸처럼 ‘약 처방’과 ‘체질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는 말이다. 댓글공작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댓글창 규칙을 수정하는 것이 이미 걸린 병을 치료하는 ‘약 처방’이라면, 합리적인 토론문화와 건전한 비판 정신을 뿌리내리는 것은 앞으로의 감염을 예방하는 ‘체질 개선’이다. 이 두 가지 대책이 정치의 영역과 일상의 영역에서 함께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우선 정치는 공론장을 오염시키는 댓글공작 세력에게 철저한 심판을 내리고, 건전한 공론장의 건설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가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계속 감시하고, 참여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망설임 없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의 소임과 더불어 일상 차원에서의 노력도 중요하다.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조금씩 실천하자. 잘못된 정보와 비이성적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우리 안의 ‘팔랑귀’를 몰아내고, ‘일차원적 인간’에 안주하는 태도를 벗어던지는 것이다. 불법적인 댓글공작은 꿈도 꿀 수 없는 굳건한 성채를 쌓자. 공론장을 침탈하려는 세력이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비판적 지성의 튼튼한 성채를 우리의 공론장에 높이 둘러야 한다. 우리 스스로 합리적인 민주시민의 자세를 갖출 때야 병든 공론장은 제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우리의 공론 환경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인터넷 댓글창 밖의 세상도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가 될 테다. 그러므로 조금 번거롭더라도 그렇게 우리 자신을 밀고 나가자. 어렵더라도 어느 사상가의 말처럼 ‘의지로 낙관하자.’ 해야 하고, 할 수 있다.
글·조해람
어쨌거나 글쟁이로 살고 싶은 대학생입니다. 읽는 이의 마음에 불씨를 지피는 글을 꿈꿉니다. '더 나은 세상'의 가능성을 악착같이 믿고 있습니다. 비틀즈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