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돈, 가깝고도 먼

2018-09-28     김지연 | 예술 칼럼니스트

재능 있는 예술가의 뛰어난 작품 앞에 서면,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상과 비평만 꺼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작품의 가격이나 작가의 연간 수입처럼 단순하고 현실적인 궁금증이 그사이를 비집고 나올 때도 많다. 예술 앞에서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너무 속물 같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작품도 거래의 대상이고, 예술가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소득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실제로, 예술과 돈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우리에게 남겨진 수많은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왕족과 귀족, 종교단체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것들이었다. 그 예술가가 더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주문자가 가지고 있었을지는 몰라도, 처음부터 대가를 받기로 하고 주문 제작된 상품이었다는 뜻이다. 예술가는 작품값으로 재료 구매비와 자신의 인건비를 충당할 수 있었고, 고정고객이 생긴 예술가는 더 많은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고객들은 작품을 구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는데,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의 예술후원이 대표적인 예다.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부유한 상인 계층들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왕족들처럼 초상화를 주문했고, 교회의 건축과 장식에 필요한 기금을 선뜻 내놓았다. 르네상스 미술의 태동이 돈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풍요로운 예술세계의 탄생에 풍부한 자금이 일조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후원자들은 모두 예술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었을까? 사람 나름이었겠지만, 대부분은 그리 순수하지 않았다. 당시의 교리에 의하면, 이윤을 추구하거나 이자소득을 얻는 것은 파문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래서 상업이나 금융업에 종사하던 상인들은 교회의 건축과 미술장식 등을 후원했고, 이로써 그들의 이윤추구는 교회를 위한 ‘선한 행위’가 됐다. 또한 후원자는 교회에 가족 예배실이나 묘를 안치할 수 있는 특권을 얻어 일종의 신분상승 효과를 누릴 수도 있었다. 그들은 예술가에게 작품을 주문할 때도 자신과 가문의 이미지를 미화하기 위한 그림을 부탁하곤 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후원가로 가장 잘 알려진 메디치 가문 역시, 화가에게 종교나 역사의 한 장면을 주문하며 메디치 가문의 인물을 주요 등장인물 자리에 그려 넣도록 하는 방식으로 예술을 이미지 메이킹에 이용했다. 
 
화가 베네초 고졸리가 5년에 걸쳐 완성한 메디치 예배당의 벽화 <동방박사의 행렬>에는 메디치 가문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림의 주문자인 피에로 메디치는 메디치 가문을 세운 아버지 코시모와 장차 피렌체를 통치하게 될 자신의 아들 로렌초를 그려 달라고 주문한다. 그림의 우측에 화려한 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정면을 응시하는 앳된 동방박사는 로렌초 메디치이며, 흰 말과 갈색 당나귀를 타고 그 뒤를 따르는 나이 지긋한 동방박사 두 명은 차례로 피에로 메디치와 그의 아버지 코시모 메디치다. 가로 5m, 세로 4m에 이르는 이 거대한 벽화는 사실적인 디테일과 풍부한 색채로 눈길을 끌었으며, 장대하고 화려한 작품은 가문의 이미지를 대변했다. 메디치 가문의 사례처럼 많은 이들이 가문의 이미지를 미화하기 위해 예술작품을 활용했고, 그림은 문자보다 효과적으로 대중에게 전달됐다. 
 
이렇게 다양한 속내를 가진 후원자들에 의해, 예술가들은 창작의 꽃을 피웠다. 예술가는 후원자의 요구와 소신을 지킨 작품 활동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고, 어느 쪽으로 몸을 기울일지는 예술가 개인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예술가가 돈을 좇았다는 사실만으로 작품의 예술성을 폄훼할 수는 없다. 당시에 주문 제작된 많은 작품들이 오늘날까지 걸작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또한 후원자의 요구를 착실하게 들어주며 부를 축적한 화가들 중에는, “돈은 내가 이룬 많은 업적의 동기다”라고 대놓고 선언한 미켈란젤로, 화실에 보조 화가들을 두고 그들에게 대신 작업하게 하며, 고가의 그림들만 직접 그렸던 루벤스 같은 거장들도 있었다. 
 
아트마켓, 
각자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각축장
 
예술과 돈의 관계는 근현대에 이르러 더욱 긴밀해졌다. 예술의 자본적 가치가 중요시되면서, 예술을 후원하고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 투자의 한 방식이 됐기 때문이다. 수많은 예술후원 행사와 유명 갤러리의 전시 오프닝에는 더 많은 고객들이 나타났고, 기업이 작품을 구입하고 미술관을 건립하는 등 거대자본의 후원도 등장했다. 또 서구에서 시작된 경매나 아트페어는 아시아 지역으로 발을 넓혔고, 미국이나 유럽의 대형 갤러리와 옥션은 전 세계에 지점을 냈다. 
 
갤러리들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특정 작가를 키우고 밀어주기 시작했다. 아트마켓은 수많은 갤러리와 옥션, 예술가와 컬렉터, 딜러 등이 얽힌 복잡한 세계이자, 모두가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싸우는 각축장이다. 하지만 시스템의 도움이든 본인의 실력이든, 이곳에서 스타가 돼 주목받기만 한다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시대와 배경이 달라졌을 뿐, 르네상스 시대와 달라진 것은 없다. 예술가들은 투자와 후원, 영합과 소신의 애매한 경계선에서 위험하게 줄타기하며 스스로 실속을 챙겨야만 한다. 
 
미국의 팝아트 작가 앤디 워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 일종의 대량 생산품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이용했다. 그는 ‘앤디워홀 팩토리’에서 직원들을 두고 작품을 반복적으로 ‘생산’했고, 본인의 작품이라는 뜻으로 마지막에 서명을 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은 불티나게 팔렸고, 대량생산체제와 미국 문화를 꼬집고,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린 작품으로서 지금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앤디 워홀처럼 성공하면, 한 명의 스타가 돼 경제적 부와 예술적 소신 모두 성공적으로 거머쥘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고객의 입맛에 맞는 작품만 생산해낸다는 비난을 받거나, 반대로 스타성과 사교성이 부족해 지원을 받지 못하고 허덕일 수도 있다. 자본과 권력, 그리고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그곳에서 이미 스타가 됐거나, 가까스로 이름을 알리고 자리 잡은 이들은 조금의 틈도 내주지 않으려 한다. 
 
새롭게 예술계에 진출한 청년 작가들은 어려움을 토로한다. 자본과 인맥으로 촘촘히 구성된 예술계의 카르텔 덕분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 경제적 성공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지만,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먼저 삶을 유지해야 한다. 직업이 예술가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예술가도 월세 등 생활비가 필요하고, 가끔은 가족과 외식도 하고 여가도 보내고 싶다. 게다가 작업을 하는 데는 꽤 많은 비용이 든다. 물감이나 캔버스 같은 단순한 재료구입, 대형 조형물이나 설치작업에 드는 재료비와 인건비, 영상제작에 필요한 장비, 작업실 임대료, 전시장 임대료나 홍보물 인쇄비 등, 비용 구조만 본다면 웬만한 자영업자 수준이다.
 
이를 유지하려면 작품을 판매하거나, 국공립미술관의 단체전에 참여해 아티스트 피(Artist Fee)를 받거나, 지원금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운이 좋아 청년작가 지원금으로 전시를 열고, 자본력 있는 갤러리의 선택을 받아 전시와 아트페어 출품을 거듭하며 이름을 알릴 수 있다면 모를까, 대부분의 작가는 각자도생한다. 작업과 전혀 무관한 일을, 그것도 비정규직으로 생계와 작업을 감당하는데, 그나마 예술계 언저리에서 일자리를 구해 작업과 멀어지지 않을 수 있다면 다행이라 여기기도 한다. 
 
예술가는 가난해야 한다?
 
예술가는 가난해야 한다는, 대중문화와 미디어의 환상이 만들어낸 편견이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할 때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편견과 예술 작업을 정당한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더불어 만연하면서, 예술가가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이 터부시되고, 그 때문에 재능 있고 성실한 예술가들이 노동에 상응하는 적정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예술가가 모두 반 고흐처럼 가난에 허덕인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나 도나텔로, 티치아노는 물론, 르누아르, 드가, 카유보트 등 우리가 잘 아는 인상주의 예술가들 역시 꽤 부유했다. 피카소와 마티스 같은 화가들이 생전에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누렸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예술가에게도 돈은 꼭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거대자본의 도움이나 간섭 없이도 어떻게 예술을 할 수 있을까,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고민 끝에 젊은 예술가들은 색다른 시도를 해 본다. 전속 갤러리가 비용을 지불하고 공간을 마련해야 참여할 수 있는 기존의 아트페어는 아무래도 진입이 어려우니, 스스로 소규모 미술 장터를 만들어 작품을 팔고, 도시의 낡고 공간을 빌려 직접 전시공간을 만들고 실험적인 전시를 기획한다. 
 
2015년 세종문화회관 지하에서 열린 <굿-즈>전은 그 시작이었다. 신진작가의 작품이 도무지 팔리지 않으니, 차라리 작품에서 파생된 상품, 즉 ‘굿즈(Goods)’를 대량생산해 저렴한 가격에 팔아보자는 것이었다. 작품 이미지를 담은 아트상품, 실제 작품을 조각낸 것, 작품과 똑같은 조형물을 만들 수 있는 안내서, 즉석 퍼포먼스나 초상화 등이 나왔다. 소소한 아트상품 장터 같아 보이지만, 사실 이 행사를 기획한 작가들은 청년들이 설 자리가 없는 미술계의 상황에 절망적이었다. 그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이 행사를 기획했던 것이다. 그들은 제2회 <굿-즈>를 여는 날이 없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다행히도 두 번째 <굿-즈>는 열리지 않았지만, 이후 비슷한 행사들이 줄을 이었다. <대망명>, <유니온 아트페어>, <연희 아트페어> 등 작가들이 직접 작품을 내걸고 판매하는 소규모 장터들이 열렸다. 미술 행사는 아니지만, 독립출판사와 작가, 디자이너들이 직접 만든 서적과 인쇄물을 들고 참가하는 <언리미티드 에디션>, 그리고 공예작가나 디자이너가 만든 상품을 가지고 출점하는 <예술시장 소소>는 몇 년째 성황을 이루고 있다. 작가와 기획자들이 힘을 모아 만든 독립전시공간인 합정역 인근의 <합정지구>, 영등포의 <위켄드>, 은평구의 <황금향>과 <스페이스55>, 인천의 <예술반점 길림성> 등은 일반인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유롭고 실험적인 전시로 미술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고 있다. 
 
일부 작가는 ‘텀블벅’과 같은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자금을 모아 전시를 하고 도록을 출판하기도 한다.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참가했던 이완 작가는, 한국관 전시에 설치할 작품 <고유시>의 제작에 필요한 지향성 스피커 8대와 방음 장치, 작품 운송비 등을 위해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으로 후원금을 모으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시장의 평가, 작품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거대자본이나 권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혹은 운동이다. 그리고 작가들은 이런 시도들을 통해 기성체제에 저항하는 동시에 작품을 알리고 예술가로서 한 계단 올라서는 발판을 마련한다. 모순적이게도, 유명해진 후에는 큰 갤러리나 미술관에서만 전시를 하고 높은 가격에 작품을 팔기 원하는 작가도 있고, 이것을 문제 삼으며, “젊은 작가들이 쉽게 돈을 벌고 ‘뜨고 싶어서’ 질 낮은 행사를 우후죽순으로 연다”고 비판하는 기성세대도 존재한다.
 
누가 뭐라고 하건, 예술과 자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어느 쪽이든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에, 예술과 돈의 교집합 지대에 위치하고 싶은 것이 많은 예술가의 소망일 테다. 예술가로서 반짝이는 성과와 직업인으로서 풍족한 대가를 동시에 거머쥐는 것, 모두의 꿈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꿈이다. 예술계도 다른 업계와 마찬가지다. 돈과 성공은 이너서클 안에서 흐른다. 경계선 안과 밖의 차이는 극명하다. 한 예술가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와 그의 예술의 가치는 전혀 상관없지만, 본인의 삶에는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예술가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예술가는 적절한 예술 활동의 대가와 후원을 받으며 소신 있는 작품세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예술의 소비자는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는 데에 익숙하고, 사회나 기업은 사심 없이 예술가를 후원할 수 있다면 매우 이상적인 구조일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경계선은 너무 미묘해서 명확하게 규정짓기 어렵다. 작품 활동으로 돈을 벌어, 죽지 않고 살아남으며 다시 예술을 지속하고, 한편으로는 그 노예가 되지 않는 것. 과거나 지금이나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잘 해내는 것이 예술가들의 영원한 과제가 아닐까.  
 
 
글·김지연
문화와 예술에 관한 글을 쓰고 전시를 만든다. 홍익대 예술학과와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술전문지 <그래비티 이펙트>의 미술비평 공모에서 입상했다. <샤갈·달리·뷔페>전과 <그대 나의 뮤즈>전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