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라는 왜 파리의 가정부가 됐나
[Spécial] ‘빈부’라는 초현실주의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낀 인구 400만 명의 몰도바 공화국은 1991년 독립 이래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남아 있다. 몰도바 북서부 마을 코르제우티의 전체 주민은 8천 명인데, 이 중 3분의 2가 모스크바나 서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낙원을 꿈꾸며 프랑스로 넘어왔다. 합법적인 서류를 구비해 이주하기도 하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기도 한다.
애초 몰도바로 못 돌아갈 여행
이 주머니는 미니버스에 실려 동쪽으로 2500km를 달리고 국경 5개를 건너 48시간도 채 되지 않아 코르제우티에 도달한다. 인터넷과 전화, 그리고 이고르는 스텔라와 마을에 남은 그녀의 가족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스텔라는 9년 전 프랑스에서 일을 하러 유효기간 7일짜리 비자를 받아 고향 마을을 떠났다. 유럽연합 체류증이 없던 그녀는 결국 돌아가지 못하는 여행이 되었다.
옛 소련 해체와 함께 탄생한 몰도바는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 서쪽으로는 루마니아 사이에 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스텔라는 “고향 마을 코르제우티 주민 8천 명 중 3분의 1이 파리에 있고, 또 다른 3분의 1이 길거리에 있다”고 말한다. 사실 정확한 통계는 불가능하다. 스텔라처럼 많은 사람들이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이다.
이고르는 코르제우티와 파리 근교의 일드프랑스를 이어주는 정기 운항 미니버스 운전기사 10명 중 1명이다. 그는 파리 지역에 잠정적으로 거주하는 자신의 고객을 3천 명 정도로 추산한다. 한 달에 한 번, 비공식 집배원이 되는 그는 각 가정을 돌면서 몰도바에서 오는 소포를 배달하고, 몰도바로 가는 우편물과 현금, 식료품이 가득한 장바구니를 나른다. 1kg에 1.5유로라는 저렴한 운송료가 그의 경쟁력이다. 이고르는 “어떤 때는 차 트렁크가 20명 고객의 짐들로 찬다. 예전에는 80명의 짐을 싣기도 했다. 어쨌든 몰도바로 돌아올 때는 언제나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승객을 싣는 경우도 있다. 그는 “이번에는 4명을 데리고 갔다가 2명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1인당 100유로를 받는다. 그는 흔히 ‘국경 탈출 안내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아니다. 그가 프랑스로 데려오는 몰도바인은 적법한 절차를 밟은, 다시 말해 루마니아 여권이나 관광비자를 소지한 사람들이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 루마니아 영토이던 몰도바는 1944년 옛 소련의 영토로 합병됐다. 1991년 독립하면서 반 이상의 몰도바 주민이 루마니아 국적을 요구했다. 2007년 루마니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했을 때, 이고르와 ‘동료’ 운전기사들은 루마니아 여권을 소지하고 있어 ‘셴젠 지역’(Espace Schengen·국경 통행에 제약이 없는 지역-역자)을 돌아다니기 위한 비자를 발급받을 필요가 없다. 수도 키시너우의 루마니아 영사관에는 루마니아 국적 취득 요청이 2007년 이래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다만 이 절차를 밟는 데 몇 년씩 걸리고, 스텔라처럼 기다리다 못해 서류 제출을 포기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 스텔라는 2001년 전문 브로커에게 1천 유로를 내고 관광 체류 명목의 비자를 발급받았다. 요즘 이 서류는 2천~5천 유로에 거래된다.
고향 사람 3분의 1 파리 체류
많은 몰도바 사람들이 서방으로 떠나기 위해 빚을 진다. 돈으로 산 방문 비자의 체류 허가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국경을 건너는 일이다. 프랑스어와 영어 자격증을 소지한 스텔라는 9년 동안 가사도우미, 아이보기, 숙제봐주기 등 노동부에 신고되지 않은 잡일을 전전해왔다. “더 나은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고용주를 찾을 수 있다.”
키시너우 국제정치대학의 발레리우 모스네아가 교수에 따르면 “몰도바 국민 3명 중 1명이 서유럽뿐 아니라 러시아,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또는 터키까지 이주한다”고 말한다. 모스네아가 교수는 “1980년대 말 국경 개방 당시 사람들은 급여가 더 나은 서유럽으로 물밀듯이 몰려갔고, 그런 경향은 1998년 러시아 경제위기와 함께 가속화됐다”고 설명한다. 많은 어려움이 있음에도 타지로 떠난 사람들이 코르제우티에 송금하는 돈은 경제위기 속에서도 조금밖에 줄지 않았고, 그만큼 이주는 더욱 줄어들지 않았다. 국제이주기구(OIM)(2)에 따르면, 이주민이 고향에 보내는 외화는 몰도바 가구 소득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다.
빅토르 안드로니크 코르제우티 시장은 마을 주민들의 프랑스 이주를 ‘긍정적으로까지’ 생각하고 있다. 몰도바 기업의 중간간부급 월급이 200유로를 간신히 넘는다. 이 지역 ‘산업의 꽃’은 오이 피클 통조림 생산이다. 이곳의 소득은 대부분 몰도바 시장에 내다파는 감자에서 나온다. 옛 집단농장의 검은 흙은 비옥하지만 거의 기계화되지 못했다. 이 지방에 남아 있는 많은 노동력을 끌어들이기에는 이 분야의 수익성이 극히 낮다.
코르제우티의 번영은 무엇보다 외국에서 보내오는 돈 덕분이다. 나무로 지은 초라한 전통 가옥은 시멘트 블록과 함석지붕의 새 집으로 바뀐다. 흙길 위를 달리는 신형 사륜구동차들이 말수레와 구형 러시아산 소형차인 ‘라다’를 추월한다. 수도에서나 여기에서나 새로운 소비 모델이 힘을 과시하고 있다. 모스네아가 시장은 “사람들을 떠나도록 부추기는 게가난만은 아니다. 몰도바 사람들은 그저 자동차, 아파트 또는 주택을 가지고 싶고,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키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자동차, 아파트, 자녀 교육을 위해
코르제우티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부의 표시는 모두 프랑스에 부자 부모를 둔 것으로 설명된다. 그렇지 않으면 의심의 대상이 된다. 공산주의 시절 유력 인사의 지위를 누리면서 쌓아놓은 자산이 있거나, 아니면 담배 밀무역을 한다고 수군거린다. 비록 불법이지만 이주는 정직하게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코르제우티는 파리와 파리 근교에 집착한다. 프랑스에서, 남자는 대개 공사장 인부로 일하고 여자는 가정부로 일한다. 이들은 더 이상 자기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프랑스에서의 삶은 상황에 대처하는 요령과 경찰에 발각되지 않으리라는 희망과 함께 이어진다.
22살의 코르제우티 출신 슬라비크는 가짜 루마니아 여권으로 프랑스에 왔다. 파리에서 공사장 인부로 2년을 살다 경찰 검문에 걸려 추방됐다. 몰도바로 돌아간 뒤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다. 그는 철제 현관문 사진 카탈로그를 들고 도처를 돌아다니며 프랑스에서 자신을 고용했던 예전 고용주를 위해 코르제우티 장인들에게 방문판매를 한다. 그가 ‘여사장님’ 카트린에게 해주는 작은 서비스다. 카트린은 자기 회사에서 만드는 제품 일부를 외국에서 만들려고 한다. 그녀는 슬라비크에게 고용계약서와 취업비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슬라비크는 그 약속을 믿고 있다. 카트린은 벌써 슬라비크의 매형과 다른 몰도바 출신 2명을 합법화해준 적이 있다.
“슬라비크의 경우는 더 어렵다”면서 그녀는 한숨을 내쉰다. 카트린은 실무 경험이 풍부하다. 파리 근교에 있는 그녀의 작은 업체는 13명을 고용하고 있는데, 그중 외국인 노동자 6명이 그녀 덕택에 체류증을 얻었다. 슬라비크 이전에 그녀는 코르제우티 출신의 안드레이(30)를 고용했다. 슬라비크의 매형이기도 한 안드레이는 하청업체 작업장에서 일하다 그녀의 눈에 들었다. 안드레이가 몰도바 출신 불법체류자라고 털어놓자 그녀는 해결책을 찾아주었다.
해결책은 언제나 똑같다. 너무 정확하게 명시돼서 어느 누구도 그 기준에 부합할 수 없는 일자리 프로필을 적어 고용국(Pô?le Emploi)에 구인 공고를 낸다. 그녀는 “두 달 안에 사람을 구하지 못해 그 일자리에 맞는 사람을 유럽연합 밖에서 구한다고 주장하면 고용국이 반대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그 일자리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규정한 30개 직업 목록에 포함돼야 한다. 그렇게 되면 카트린은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고용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게 된다. 노련한 카트린은 “예전에 이곳에 왔던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만일 검문을 받으면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안드레이는 고용계약서를 들고 몰도바 주재 프랑스 영사관에 찾아가 비자를 얻고 파리로 돌아와 임시 체류증을 얻었다. 이 절차가 끝나는 데 몇 달씩 걸리고,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프랑스 여사장도 그들이 필요하다
그녀는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을 스스로 나서서 할까? “나는 테레사 수녀가 아니다. 나는 단지 게으름뱅이가 아닌 작업팀을 원할 뿐이다. 그들은 작업장의 작업 리듬과 어려움을 설명할 때 ‘주 35시간 근무제’를 들먹이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절대 그들을 협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주고받기다. 나는 서류 절차를 처리할 줄 알고, 그들에게 거주지를 찾아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열심히 일한다. 내가 고용안정청(ANPE)에 구인 광고를 내면 똑같은 월급에 그렇게 성실한 사람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슬라비크가 경찰에 체포됐을 때 카트린은 이미 그의 신분을 합법화하기 위한 서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줄 마지막 월급으로 그가 몰도바로 돌아갈 표를 구했고, 이후 네 번이나 당국에 시도했지만 아직까지 슬라비크는 취업비자를 얻지 못했다. 비자가 있든 없든 슬라비크는 프랑스로 돌아올 것이다. 처음처럼 그는 다른 사람의 신분증을 가지고 일할 것이다. 카트린은 다시 그를 고용할 준비가 돼 있다. 그녀가 알아본 바로는, 프랑스에서 신분증이나 체류증은 200~300유로를 주고 은밀하게 구할 수 있다. 그녀는 “둘러보기만 하면 모든 사람, 심지어 경찰까지도 이런 행태를 알고 있다”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파리 근교의 집에서 스텔라는 운전기사 이고르가 자루를 나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다음달에는 이고르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녀는 얼마 전 임시 체류증을 받았고, 고향 마을로 어머니와 언니, 동생들을 보러 갔다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유배는 거의 10년간 계속됐다. 물론 고향이 그리웠지만 프랑스에서의 삶은 그녀가 원한 것이다. 저 건너 몰도바에서, 프랑스 팝송 디스크를 반복해서 듣고 있는 슬라비크가 원한 만큼이나 스텔라 자신이 원한것이다. 슬라비크의 자동응답전화기에는 프랑스어로 안내 메시지가 녹음돼 있다.
글•조에 라마주 Zoé Lamazou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화사>(2006),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각주>
(1) 기사에 나오는 이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가명을 사용했다.
(2) OIM, ‘노동자 이주와 몰도바로의 송금액: 붐은 끝났는가?’, 2009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