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되는 두 갈래 길

2018-10-31     이 호 | 영화해석학자

김지운 감독의 <인랑>(2018)은 오키우라 히로유키(沖浦啓之) 감독의 애니메이션 <인랑>(1998)과 함께 패키지로 배달됐다. 정확히 20년의 시차(時差)를 두고 개봉된 한국의 <인랑>은 어쩔 수 없이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한국 <인랑>은 애니메이션 원작에 존경을 표하기라도 하듯 제목과 스토리는 물론 전반적으로 원작을 따르고 있다(히로유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인랑>의 원작이 <공각기동대>(1995)를 만든 오시이 마모루(押井守)의 <케르베로스 사가>와 <견랑전설>이라는 것도 잊지 말자). 한국 영화 <인랑>이 일본 애니메 <인랑>과 다른 점은 우선 영화 초반부의 상황 설정이다.

일본 <인랑>이 1960년대 말 일본 전공투 운동의 실패를 떠올리게 하며 현실 사회주의의 패배와 심화될 자본주의의 독주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도록 만들어 준다면, 한국 <인랑>은 근미래 통일한국 프로젝트라는 가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사회혼란이 가중돼 ‘특기대’라는 경찰조직이 생겨나는 것이며, ‘섹트’라 불리는 무장반군이 등장할 수 있는 구실만 돼주면 되니까!

먼저 이 시점에서 시차문제를 생각해보는 것이 흥미로울 수 있다. 일본 인랑은 일본 전공투 운동으로부터 대략 30년 후에 만들어졌다. 한국 <인랑>은 1980년대 말 민주화운동으로부터 30년쯤 후에 만들어진다. 그리고 두 영화는 20년의 시차를 가진다. 이쯤 되면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 있다. 이 영화들의 시차를 계산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우리들이 살아온 근과거의 시대와 오늘의 이 시대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들이 연상시키는 시간대는 그것을 보는 오늘의 시간대 사이의 간격들을 상기시킨다. 먼 별빛이 시차를 두고 우리 시선에 도착하듯, 실제로 그 빛이 방사된 시간을 계산하면서 다소 허탈해지고 허무해지듯 말이다. 하지만 그 시간대역을 검토하는 일은 아마도 이 두 영화의 대차대조를 기입하는 것으로 도달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지면이 한정돼 있으므로 짧게 핵심만 말하자. 앞서 서술했듯 두 작품은 대체로 비슷하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결말이다. 일본 <인랑>에서는 ‘후세 카즈키’가 특기대 내의 비밀조직 ‘인랑’의 일원이었다는 점이 밝혀지고, 같은 수도경(首都警) 내의 경쟁조직인 공안부를 일소한다. 이 결말에서 후세 가즈키는 섹트의 조직원이었으나 체포돼 공안부가 특기대를 해체하는 구실을 만들어내려고 자신에게 접근했던 여성을 쏴 죽인다.

두 사람 사이에 연애감정의 조짐이 있었기에, 여자를 근접거리에서 쏘아 죽이는 결말에만 집중하면 이 애니메이션의 주제는 자칫 인간성(사랑)조차 말살하고 조직에 충실한 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돼 버린다. 조금은 흔들렸지만, 그래도 특기대 내 경탄할 만한 비밀조직 ‘인랑’의 명령에 충실하게 복종한다는 이야기인바, 그들은 “인간의 탈을 쓴 늑대”다. 하지만 설마 그렇게 간단할 리가!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애니메이션 <인랑>을 피상적으로 수용하고 말았을 공산이 증가한다. 이유인즉 이렇다. 지상에서는 경찰과 시위대가 ‘집회-통제’의 놀이를 하고 있는 그 순간, 지하수로에서 특기대와 섹트가 총격전(합법적 살인)을 벌이고 있다. 섹트조직의 사제폭탄 운반책인 소녀(일명 단발머리)는 후세 카즈키와 조우한다. 그 무지막지한 자동연발 총구 앞에서, 후세의 “꼼짝마”라는 명령 앞에서, 고개를 가로저으며(일종의 분명한 ‘아니오!’) 자폭한 소녀 아가와 나나미의 장면을 해석할 길이 없어진다.

이후 후세는 그 순간을 여러 번 떠올리며 소녀의 표정과 자폭 행위의 이유를 파악하려 한다. 영화 내내 그 소녀가 후세에게 던진 ‘왜?’에 대한 질문에 후세는 정말로 여자 아마미야 케이를 쏘아죽임으로써 대답하고 만 것일까? 소녀의 ‘아니오!’라는 행위에 후세의 대답은 “예!”인 걸까?

 

자신의 동물적 조건을 발견하는 것

한국 영화 <인랑>은 완전히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스펙터클한 연출과 두뇌싸움 끝에 공안부를 분쇄한 ‘인랑’의 임준경(강동원)은 장진태(정우성)와 여자 이윤희(한효주)의 처리문제를 두고 원작 스토리처럼 대립한다. 그러나 원작에 없는 두 사람의 격렬한 몸싸움 끝에 임준경은 과천 사태(여고생들을 적으로 착각해 무차별 사살한 과거 특기대의 전력)의 죄책감을 털어놓으며 “난 여태껏 당신의 명령에 따라왔고 조직의 명령대로 살았습니다. 이젠 제 생각대로 살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곳(특기대)을 떠난다.

임준경의 행위는 조직과 이데올로기가 시키는 대로가 아닌 자기 생각(자율성)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여자 이윤희를 놓아주면서 “그 여자는 무기도 없고 적도 아니다”라는 이유로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윤희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없지 않다. 다시 말해서 임준경은 조직의 명령대로가 아닌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자기의 생각을 행동으로 표출함으로써 개인성을 확보한다. 쉽게 말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영화 내내 인간의 탈을 쓴 늑대라는 인랑의 특출난 조직원으로 무정한 사격과 살벌한 사살을 감행하던 그가 말이다.

그가 확보한 인간성이란 과거의 잘못으로 괴로워할 줄 아는 양심, 잠시나마 사랑을 느꼈던 여자를 살려주는 것, 무기도 없고 적도 아닌 사람은 죽이지 않는 일이다. 조직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더 근원적이고 폭넓은 시각에서 휴머니티를 가지고 행동하기. 그렇게 우리의 인랑은 따뜻한 인간이 되었다. (윤리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그르지 않은 결론이지만, 영화적으로는 감동적이지 않다. 이윤희와 그의 동생이 기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장면은 클리셰 그 자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무사유적으로 조직의 명령을 따르지 말고 따스한 인간성을 보유하며 너 자신이 되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이 진짜 사람이고 인간이라고 말이다.

일본 <인랑>은 어떤가. 이 작품은 결말에서 풍부한 모호성을 내장하고 있다. 자폭한 소녀의 잔상, 자기가 속이고 있고 죽이게 될 여자에 대한 심리적 갈등을 안고 있는 후세는 여자를 죽이라는 특기대 훈련소장 ‘한다’의 명령에 주저하지만 끝내 그 여자를 죽인다. 거기에는 한국 <인랑>에 없는 한 발의 총성이 있다(정확히 말해 한국 <인랑>에도 총성이 한발 울리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울림’일 뿐이다). 그리하여 비극적인 결말로 영화적 여운을 주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해석의 여지도 있다. 짐승(늑대)으로 살기를 선택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닌 결말. 사람의 외양을 쓰고 짐승의 일을 지속함으로써 겨우 인간이 될 여지를 마련할 수 있다는 그로테스크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납득하려면 ‘아갈마(Agalma)’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터인데, 아갈마란 간략히 “네 안의 너보다 소중한 그 무엇(존재의 내밀한 핵심)”이라는 정신분석의 가르침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보다 소중한 그 무엇,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그 무엇 말이다. 마치 특기대 내의 은밀한 핵심이 ‘인랑’이라는 비밀조직이고, 시위대의 핵심이 ‘섹트’인 것처럼. 이 지점에서 한국 <인랑>에서는 부각되지 못한 일본 <인랑>의 배경 속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이 중요하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 같지 않고 유령들(혹은 인간이라는 동물들)처럼 보인다. 자칫 생활고 때문인 것으로 오인할 수 있지만, 번화가의 사람들 역시 핏기없고 그림자들처럼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 만한 가치나 이념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저 현실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생활은 있으되 생존이 없는 모습, 자기 목숨을 걸만한 가치와 대의명분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일본 인랑은 인간과 짐승의 경계를 구분 짓는 듯하다. 그저 목적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고, 대의명분에 헌신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직원 후세는 조직원 자폭소녀 앞에서 질문을 한다/받는다. “왜?” 아마도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질문에는 언설로 대답할 수 없다. 그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납득되기도 어려우며, 혹은 무가치하고 무모한 선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것 때문에 그 자신일 수 있는 그런 이유들….

이야기의 전개가 이렇다면 결국 후세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소녀를 죽이고,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 아니라 짐승의 행위를 하면서 ‘인간-되기’를 선택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짐승처럼 사람을 죽여야만 겨우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요상한 논리가 성립한다. 이 부분은 조심하자. 그렇지 않으면 히틀러만이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일본의 작가 사카구치 안고는 그의 소설 『백치』에서 ‘돼지-인간’에 대해 고찰한 바 있는데, 돼지가 되지 않고서는 인간일 수 없는 이상한 역설을 펼친다. 그것은 이렇게 해설되고 있다. 타락할 길을 따라 끝까지 떨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구원돼야 하는(…)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그로테스크한 타락의 끝에 다다르는 지점에서 비로소 만날 수 있는 무언가(…) 스스로 ‘인간’이라고 착각하여 살아가는 진짜 ‘돼지’로 전락할 터였기 때문이다.”(김항, 『말하는 입과 먹는 입』, 203~208) 아즈마 히로키 역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1989년 이후 동물화할 수밖에 없는 배치들에 대해 고찰한 바 있다.

자, 여기서 조엘 오스틴 목사의 주장처럼 “긍정의 힘”을 발휘해 보자. 동물화를 권하는 사회 속에서 이것은 희망적인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조건은 짐승이라는 것 말이다. 인간이 되기 위한 토대가 바로 그의 짐승성에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자신을 이미 충분히 인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궤변 따위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그녀는 인간적으로 분노할 것이며, 이성적 논변을 동원해 이 논리를 PC적으로 훼파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니라 짐승 혹은 ‘동물화’를 권하는 사회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동물보다 결코 낫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도 있으리라. 자신이 속해 있는 동물적 조건(벌거벗은 생명)이야말로 겨우 인간이 될 수 있는 조건일 테니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인간성의 발현으로서 (반려-)동물의 삶을 걱정하며 건강과 재산의 안전을 염려하는 이 시대에 인간이 되는 길은, 어쩌면 자신의 동물적 조건을 충분히 발견하는 길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글·이 호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한국문인 인장박물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