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다각적 교훈
자본주의의 가치를 중시하는 야만적 문명에서는 소유권이 생존권보다 더 중요하다. 인간의 존엄성은 이해타산에 따라 결정되고, 실패자들은 시장의 법칙을 고집하는 자들의 용어를 빌자면, ‘진보’에 드는 ‘사회비용’에 불과하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이 ‘진보’는 악몽의 실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 언제나 더 많이 일하기 위해 살아간다.
필수적인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분의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이 약속을 지키고 테크노크라트들이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며 소외계층이라는 허깨비가 사라진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되면 제3세계는 제1세계가 되고, 부유하고 교양이 넘치고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다. 단, 제3세계가 올바르게 처신하고, 군말이나 불평 없이 제1세계의 명령을 이행한다면 말이다. 운명은 번영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굶주려 죽은 사람들의 덕행은 TV를 통해 방영되는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다. 발전과정 중에 있는 저개발국과, 뒤늦게 현대화에 합류한 나라들의 번쩍이는 거대한 광고판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우리도 당신들처럼 될 수 있다.” 그러나 투우사 페드로 엘 갈로의 적절한 표현을 빌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더 나아가 불가능하다.”
만약 가난한 나라들이 부유한 나라들만큼 생산하고 낭비한다면 이 지구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전 세계의 모든 자원을 극소수 국가들이 모두 써서 없애버리고 있다. 전 인류의 6%에 불과한 슈퍼리치가 총 가용 에너지의 1/3을, 전체 천연자원의 1/3을 독식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이 낭비사회의 범죄요, 광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통계자료들을 보면 북미인 한 명이 아이티인 50명에 맞먹는 만큼 소비를 한다. 이런 평균적 수치들이 할렘 거주자나 베이비독 뒤발리에(1) 치하 아이티인의 처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이런 의문을 가져본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아이티인 50명이 갑자기 북미인 50명만큼 소비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남미의 엄청난 인구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탐욕스럽게 소비하는 북미 인구와 함께 이 세계를 집어삼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동차, 냉장고, TV, 원자력발전소, 발전소들이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늘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석유는 10년 안에 다 타 없어질 것이다.
생산성과 함께 증가한 스트레스
벼랑 끝을 걷듯 불안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이 세상은 불공정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소수가 흥청망청 소비를 하려면 필연적으로 다수가 가난해지며, 소수가 점점 더 많이 소비를 하려면 다수가 점점 덜 소비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가 자기 보금자리를 차지하려면 사회체제는 더 많은 전쟁무기를 갖춰야 한다. 가난과 싸울 능력이 없는 사람이 가난과 사투를 벌이고, 지배층의 문화와 군사 문화는 권력이 자행하는 폭력을 축복한다.
낭비라는 특권을 토대로 형성된 ‘아메리칸 라이프스타일’은 미국에 종속된 나라들의 소수 지배층만이 누릴 수 있다. 이런 생활방식의 일반화는 인류의 집단자살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방식이 널리 퍼져서는 안 된다. 그래도 이런 삶의 방식을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존 레논은 “인생이란 당신이 다른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한 틈에 슬그머니 일어나는 일”이라고 노래했다. 수단과 목적을 착각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 ‘일하기 위해 산다’. 어떤 이들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없기에, 또 어떤 이들은 낭비하기 위해 주야장천 일한다.
사회체제는 ‘존재하는 것, 그것은 곧 소유하는 것’이라 말한다. 함정은, 가장 많이 욕망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소유한다는 점에 있다. 말하자면 결국 사람이 물건에 소유 당하고 물건의 명령에 따라 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모델로 자리매김한 삶의 모델은, 시간을 언제나 보다 희귀하고 비싼 경제적 자원으로 바꿔놓았다. 시간이 물건처럼 판매되고 임대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시간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시간은 이제 경제적인 자원이 됐다. 시간은 판매되고 임대된다.
빈둥거리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휴가조차도 하나의 활동이 돼야 한다.
자동차, TV, 비디오, 개인 컴퓨터, 휴대전화 그리고 행복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여러 사물들은 ‘시간을 벌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시간을 가로챘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도시공간뿐 아니라 인간의 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이론상으로 자동차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사용하지만 실은 시간을 잡아먹고 있다. 우리는 일하는 시간 대부분을 일터로 이동하는 데 쓰고 있는 데다가, 현대의 바빌론을 방불케 하는 복잡한 도시의 교통 혼잡 때문에 늘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소비하는 소비사회
앞으로 다가올 2000년의 미래를 미리 추억해본다. 사람들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새들은 노래 대신 기침을 내뱉으며, 나무들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요즘 멕시코의 간판에는 ‘벽을 두드리지 마시오’나 ‘문을 쾅 닫지 마시오’라고 쓴 문구가 보인다. ‘숨 쉬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라는 문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공공보건과 관련한 이런 권고사항은 얼마나 더 있어야 나타날까?
자동차는 날마다 1만 1,000톤의 매연과 유해가스를 공기 중에 펑펑 쏟아낸다. 공기 속에는 더럽기 짝이 없는 부유물들이 섞여 있고, 아기들은 혈액 속에 납 성분을 갖고 태어난다. 1940년대에 ‘공기가 가장 맑은 곳’으로 유명했던 도시에서는 이제 죽은 새들이 비처럼 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또한 일산화탄소, 이산화황, 질소산화물의 화합물은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한계치의 3배에 도달했다. 도시인들은 과연 어디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1989년 6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와 상파울루는 비나 바람이 없는 날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도시를 두고 순위를 다퉜다. 산티아고 한복판에 자리한 산크리스토발 언덕은 스모그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칠레의 새 민주 정부는 날마다 800톤의 가스가 도시의 공기 중으로 섞여 들어가자 몇 가지 피상적인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자 자동차회사들과 기업들이 이런 제한 조치들은 기업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며 소유권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는 다른 행동의 자유를 경시했다. 돈 있는 자들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독재치하에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고, 칠레 전역을 오염시키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오염권은 외국인 투자자들을 근본적으로 매료했고, 턱없이 낮은 임금을 지불해도 될 권리만큼이나 중요해졌다. 피노체트 장군은 국민들이 지독한 공기를 마셔야 할 권리를, 끝까지 막지 않았다.
사람을 소비하는 소비사회는 사람들이 소비를 하도록 강요한다. 한편 TV는 지식인이건 문맹이건 폭력을 학습시킨다. 가진 게 없는 자들은 모든 것을 가진 자들과 한참 떨어져 살 수는 있다. 그러나 TV의 작은 화면을 통해 모든 걸 가진 자들의 삶을 엿보게 된다. TV는 소비축제의 외설적인 타락을 보여주는 동시에, 총질로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을 교육한다.
현실은 TV를 모방하고, 화면 속의 폭력은 여러 경로를 통해 거리의 폭력으로 이어진다. 거리의 아이들은 범죄행위라는 자기 나름의 주도권을 행사하는데, 범죄행위는 그들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에게 부여된 인권이란 도둑질하고 죽을 권리에 불과하다. 자신들의 운명으로부터 버림받은 이 작은 야수들은 사냥에 나설 것이다. 거리의 첫 번째 모퉁이에서 그들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일격을 가한 뒤 도망친다. 그들의 삶은 배고픔과 추위, 외로움을 달래는 약물이나 속임수에 물어뜯긴 채 일찍 마감된다. 또한 갑자기 총알 한 방이 날아들어 삶이 끝장나는 일도 있다.
온정주의를 벗어던지고 경찰국가를 앞세우는 국가는 이제 더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국가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과거 시대, 즉 교육과 노동이라는 미덕에서 벗어난 이들을 길들이기 위한 수사학이 판치는 시대에 매여 있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시대에 잉여인간들은 굶주림과 총탄에 의해 제거된다. 거리의 아이들, 소외된 노동계층의 아이들은 이 ‘사회에서 쓸모가’ 없고 또 그럴 수도 없다. 교육은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억압은 교육을 돈 주고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행해진다.
내 것을 훔쳤으면 쏴 죽여도 된다?
법에 의한 사형이 사라진 나라들에도 실제로는 날마다 사형이 집행되고 있다. 소유권을 지킨다는 구실만 있으면 가능하다. 오피니언리더들은 연일 범죄를 옹호하는 여론을 만들어낸다. 199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한 엔지니어가 자기 차에서 카스테레오를 훔쳐 달아난 젊은 두 도둑들을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러자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아르헨티나의 기자 베르나르도 노이슈타트가 TV에 출연해 말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 야만적 자본주의 문명에서는 소유권이 생존권보다 훨씬 중요하다. 사람의 가치는 물건의 가치만 못하다. 면책법은 이런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미의 세 나라에서 군사 독재정권이 저지른 국가의 폭력적 만행을 사면하는 이 법령은 범죄와 고문은 눈감아줬지만, 소유권의 침해는 용서하지 않았다.(3)
오늘날의 전쟁들, 컴퓨터를 이용한 전자전(電子戰)은 비디오게임 같은 화면 위에서 벌어진다. 희생자들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실험실의 경제는 이제 굶주린 사람들과 폐허가 된 땅은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 무전으로 명령을 받는 군대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람을 죽인다. 전 세계의 테크노크라트 집단은 제3세계에서 자기들이 세운 발전계획과 수정계획들을 강행하면서, 자신들과 무관하고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을 살상한다.
25년도 더 전에, 라틴아메리카는 돈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막기 위해 쌓아올린 허술한 방어물들을 무너뜨리려고 애썼다. 채권은행들은 확실한 착취를 보장하는 군부와 함께 이런 방어물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그리고 권력을 쥔 군부나 정치인들은 그 방어물들을 내부에서 폭파해 무너뜨리도록 도왔다. 국가가 여러 세대에 걸쳐 세운 방어벽들은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무너졌다.
오늘날 국가는 국가 공기업을 아무런 대가 없이, 혹은 그냥 주느니만 못하게 팔아넘긴다. 파는 사람이 돈을 내는 꼴이니 말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나라들은 ‘가격형성 요인’이라 불리는 요건들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죄다 국제적 독점기업들에 내주고 자유시장경제로 전향했다. 전 세계의 테크노크라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해결책을 가르쳐주면서, 자유시장은 부를 가져다주는 부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유시장이 좋다고 권유하는 부유한 나라들은 왜 정작 자유시장을 만들지 않을까? 약자들을 능멸하는 자유시장은 가장 큰 성공을 거머쥔 강자들의 수출품이기 때문이다. 자유시장은 가난한 나라들을 이용해 만들어진다. 부자 나라는 절대 자유시장을 만들지 않는다. 권력자들의 횡포를 지원하는 자유시장에서 공급과 수요의 미심쩍은 결합은 가난한 자들을 공격하고 투기의 경제를 조성한다. 생산은 저하되고 노동은 멸시당하며 소비는 신성시된다. 우리는 환 환산표를 극장의 스크린처럼 바라보며, 달러가 사람이라도 되는 듯 이야기한다.
비극은 마치 우스꽝스러운 소극처럼 되풀이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시대부터 라틴아메리카는 외래 자본주의의 발전을 자신의 비극인 양 겪어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소극의 모양새를 띠고 다시 시작된다. 이것은 난쟁이가 어린아이인 척하는 것과 같은 발전이 내는 시늉일 뿐이다.
요컨대 인간의 존엄성은 비용과 이익의 계산에 달려 있고, 가난한 자들의 희생은 ‘진보’의 ‘사회적 비용’에 불과하다.
글·에두아르도 갈레아노 Eduardo Galeano
우루과이의 작가로 2015년에 작고했다. 프랑스어로 쓴 마지막 작품으로 『역사의 추격자(Le Chasseur d’histoire)』 (Lux, Motréal, Canada, 2017)가 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1년 10월호에 실린 것이다.
번역·조민영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석사 졸업.
(1) 아이티의 전직 대통령 장클로드 뒤발리에의 별칭. ‘파파독’이라 불린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뒤를 이어 1971~1986년 아이티를 통치했다.
(2) 지난해 일본은 법정 노동시간을 주 40시간으로 단축했으나, 임금노동자들의 초과근무시간은 최고 월 100시간까지 늘었다.
(3) 칠레는 1978년에 법령 제2191호를, 우루과이는 1986년에 법령 제15.848호를, 아르헨티나는 1987년에 법령 제 23.521호를 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