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사진 속에 노동자는 없다

2018-10-31     크리스틴 로스 | 뉴욕대학교 비교문학과 교수

 

대학생들은 그라피티와 바리케이드에 시적 표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키고, 유쾌하고 자유롭게 반문화(Counter-culture)를 외친다. 이런 68혁명의 지배적인 이미지들은 68혁명을 사랑스럽고 대수롭지 않은 대상으로 보이게 하는 한편, 총파업의 형태로 시작된 68혁명의 핵심 정신은, 평등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추구했던, 지식인들의 비판과 노동자들의 투쟁의 결합이었다는 사실을 덮어버린다.


1968년 5월 초, 프랑스 전역에서 파업이 일어났고 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격렬한 시위가 곳곳에서 이어졌다. 5~6주간 프랑스는 완전히 마비됐다. 1960년대는 멕시코, 미국, 독일, 일본 등 전 세계적으로 반란과 폭동이 확산되던 시기였지만, 그중에서도 프랑스와 (프랑스보다 정도가 약하기는 했지만) 이탈리아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식인들의 거부와 노동자들의 저항 간의 ‘만남’이 성사됐던 유일한 두 국가였다.
당시 총파업이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모든 직종을 불문하고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는 사실은 모든 분석의 틀을 넘어선다. 프랑스의 경우 인민전선(Front Populaire)이 집권했던 1936년에 비해 3배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했고, 파업이 발생한 간격도 예외적으로 짧았다.

정사(official history)는, 68혁명의 가장 급진적인 생각과 행동의 일부가 ‘시장’에 의해 회수돼 재사용되고 있다고 외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가 68혁명이 추구했던 열망의 실패를 상징하기는커녕, 68혁명의 가장 근본적인 열망의 성취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또한 목적론을 내세우면서, 오늘날 실제로 나타난 결과와는 다른 결과를 추구하고 꿈꾸었던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그렇다면 68혁명이 고작 시적 정서가 가미된 ‘청춘들의 반란’ 또는 삶의 양식 변화의 계기로서만 인식되게 된 경유는 무엇일까? 답은, 모든 사건을 역사 속에 끼워 넣기에 적합한 상태로 압축해버리는 정사의 서술적 특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전략의 첫 번째인 시간적 축소는 ‘68혁명’이라는 표현 자체에도 이미 반영돼 있는데, 일련의 사건들을 앞뒤로 잘라내고 오직 ‘1968년 5월 한 달간 일어난 일들’만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 ‘68혁명’은 5월 3일에 시작된다. 이는 소르본 대학생들이 공권력에 의해 처음으로 체포된 날로, 그 뒤 몇 주 동안 ‘라탱 지구(Quartier Latin)’ 거리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그리고 68혁명은 5월 30일에 끝이 난다. 샤를 드골 당시 대통령이 군부대 투입이라는 카드로 위협을 가하면서 대통령직 사임을 거부하고 의회를 해산한 날이다.

20년간 주목받지 못한 정치적 급진주의

그 결과 68혁명은 오로지 5월 한 달로만 한정됐다. 프랑스 전역에서 다양한 사회 계층의 노동자들 9백만여 명이 파업을 이어갔던 6월은 여기에 포함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총파업은 기억에서 잊혔고, 알제리 전쟁이 끝날 무렵 혹은 1960년대 초반부터 이미 보이기 시작했던 반란의 각종 징후들도 묻히고 말았다. 5~6월에 일어난 사건들에 종지부를 찍은 정부의 과격한 진압도, 1970년대 초까지 지속됐던 좌파의 폭력도, 모두 같은 운명을 따랐다. 그렇게 정치적 급진주의는 15~20년이나 빛을 보지 못했다.

비록 소수에 의한 것이었지만 알제리 전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던 상황 속에서, 그리고 수많은 프랑스 국민들이 반식민지 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에 따라 ‘제3세계주의’에 동참하던 상황 속에서, 정치적 급진주의의 징후들이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게다가 1960년대 중반에 가까워지면서 프랑스 공장의 노동자들 간에 분쟁이 계속 발생하고 있으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스탈린주의가 부상하고 있다고,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한 수많은 언론매체들이 지적했음에도 말이다.

사실 당시 프랑스의 경우, 노동계에서나, 루이 알튀세르에 빠져있던 대학가에서나, 소수의 마오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그룹에서나, 연구 분야에서나,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는 마르크스주의가 철학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측면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68혁명이 느닷없이, 그리고 완전히 자연발생적인 방식으로 등장하면서 이 모든 상황은 단숨에 뒤바뀌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망각은 ‘표현의 자유’를 탄생시킨 아름다운 5월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지불한 대가임이 틀림없다.

라탱 지구로의 자기중심적 축소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한 시기를, 오직 5월 한 달 내로 압축시킨 시간적 축소는 다양한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 시간적 축소는 사건의 무대를 파리, 더 구체적으로는 라탱 지구로 한정시키는 지리적 축소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한편 이를 더욱더 강화했다. 그렇게 다시 한번, 파리 교외와 지방에서 일어난 노동자파업은 역사로부터 외면받았다. 노동자, 대학생, 농업종사자들 간의 성공적인 연대 경험도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일부 출처에 따르면, 5월과 6월 사이 시위는 파리에서보다 지방에서 훨씬 더 지속적이고 격렬하게 일어났지만, 정사는 이 부분에 대해 침묵할 뿐이다. 낭트와 캉,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공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도, 68혁명의 주인공들이 택한 자유주의 및 절대자유주의 패러다임에는 들어갈 수 없었던 평등에 관한 무수히 많은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도, 정사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68혁명을 라탱 지구에만 한정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정사는 68혁명에 국제적 차원을 더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정사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 그리고 독일, 일본, 미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발생한 저항운동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국제적 사안, 즉 제국주의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을 은폐했다. 프랑스 68혁명에 있어서 베트남 문제의 비중은 극도로 줄어든 나머지, 1980년대에 TV로 방영된 68혁명 기념행사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고, 성 혁명의 주제에만 모든 이목이 쏠렸다.

그리고 정사는 이 부분을 은폐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68혁명을 위한 새로운 ‘국제적’ 차원을 만들어냈다. 전 세계 각지의 젊은이들이 일으킨, 정확한 형태나 목적이 없는 시위들에 대해 자유와 개인적 자율성 추구라는 명목을 부여한 것이다. 세르주 쥘리가 이야기한 ‘자유주의와 절대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문화대혁명’이 바로 그것이었다.

68혁명 20주년 기념행사에서 전 대학생 지도자들과 기타 권위 있는 언론들은 68혁명의 의의를 개인적 및 정신적 탐구로 축소 규정한 뒤, 그 대상을 전 세대, 모든 연령대로 확대시켰다. 1960년대의 간절한 열망이라 생각됐던 가치들, 예를 들어 평등은, 1980년대의 모토였던 ‘자유’에 의해 확실하게 그리고 시대착오적으로 대체됐다.

정사가 주도한 시간적 공간적 축소 덕분에 대학생들과 대학가는 68혁명을 대표하는 역할을 독점적으로 수행하게 됐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상황이다. 바리케이드, 소르본 대학교와 오데옹 극장의 점거, 시적 표현이 담긴 그라피티는, 프랑스 방송에서 10년마다 방영되는 68혁명 기념행사에서 보이는, 과거 대학생 지도자들이 늙어가는 모습만큼이나 우리들의 뇌리 깊숙이 각인돼있기 때문이다.

지성인들과 노동자들 간의 결합

그러나 사실 1960년대 프랑스 중산층 젊은이들의 대대적인 정치화는, 노동자들과 반식민주의 활동가들이라는 두 세력과의 논쟁적인 관계 맺기와, ‘동일시(Identification)’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68혁명의 핵심정신은 지식인들의 비판과 노동자들의 투쟁의 결합이었다. 다시 말해 1968년 5월에 등장한 정치적 주체성은, 동일시, 공통된 열망, 성공적인 만남, 결합, 실망, 환멸을 모두 경험한 끝에, 평등에 관한 논쟁으로 점철된 관계에 따른 결과였다. 그 당시 평등은 이미 많이 경험된 가치였다. 다시 말해, 현재에 묘사된 것이고, 그 자체를 우리가 경험한 대로 존재하는 것일 뿐 더 이상 도달해야 할 목표는 아니었다. 평등이라는 가치는 어떤 미래를 표현하는 데 있어 거대한 도전이 되는 셈이다.

전통에 종말을 고하는 활동을 계획하고, 리더와 일반 활동가들 간의 구분을 없앤 정치적 사절단을 만들고, 전문가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의 정치참여 방안을 마련하는 등, 다양한 평등의 경험들은 과거 우리가 일상생활과 사회상을 설명하기 위해 쓰던 몇 가지 방법들을 위협했다. 그리고 평등의 문제는 그로부터 20년 후인 1980년대에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됐는데,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평등에 대해 전반적으로 반대하는 이데올로기적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평등에 반대하는 이들은 평등을 획일성, 강압, 적대감, 자유경쟁을 방해하는 대상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지식인들의 비판과 노동자들의 투쟁 간의 결합이 약화되고 기억에서 잊히기 시작하자, 68혁명은 ‘해방’ 반문화의 전조현상, 욕망과 해방의 형이상학, 주체적인 경험에 깊게 뿌리박힌 ‘욕망하는 기계’와 ‘자율적인 개인’으로 구성된 세계가 전반적으로 되풀이되는 것 정도로만 잔존하게 됐다.

정치적 영역에서 윤리적 영역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는 노동자와 반식민지 활동가의 뒤를 이어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됐다. 가난하고 힘없는 ‘평민’의 추상적인 이미지가 고통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오늘날 인권과 관련된 담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게다가 ‘반체제 인사(dissident)’까지 등장하면서, 1960년대에는 북-남 문제에만 온통 쏠려있던 프랑스 국민들의 관심이 이제는 냉전문제로 옮겨갔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의 희생자가 주인공이 되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은 단순히 ‘버림받은 사람’이 돼, 어떤 정치적 주체성도,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주변에 알릴 능력도 없는 순수하게 이타적인 인물로 가공됐다. 희생자인가, 야만인인가. 최소한 프랑스에서는, 활동가였던 자신의 과거를 애써 외면하면서 68혁명 이후의 환멸감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기를 원하는 전 좌파들(Ex-leftists)이 만들어낸 인권을 둘러싼 새로운 윤리적 담론이, 68혁명을 잊히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좀 더 설명하자면, 1976년 무렵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한, 68혁명을 부정하려는 욕구로 인해 68혁명은 정치적 영역에서 윤리적 영역으로 소속을 바꿨으며, 이는 68혁명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68혁명이 남긴 유산의 핵심까지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68혁명의 주역이었던 전 좌파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변화’에 걸맞게 68혁명의 의미를 수정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본래 68혁명의 문화는 1970년대 말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도덕적 담론에 극도로 반대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정치가 아닌 개인의 도덕성에 의해 68혁명의 문화는 재정의되고 말았다.

 

글·크리스틴 로스 Kristin Ross
미국 뉴욕대학교 비교문학과 교수. 본 기사는 <Complexe>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2008년 공동 편집한 크리스틴 로스의 저서 『Mai 68 et ses vies ultérieures(68혁명과 그 이후의 삶, 영어원제 May '68 and Its Afterlives)』의 서론에서 발췌한 것임.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4월호에 실린 것이다.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