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의 수용, 정신의 재발견

2018-10-31     크리스토퍼 래시 | 학자

오만함의 죄악은 진보가 무한대로 이뤄질 것이라 믿는 것, 인간과 자연이 가진 한계를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장-클로드 미셰가 영감을 주는 인물들 중 한 명으로 꼽은 크리스토퍼 래시는 도덕적 보수주의, 충성심, 순수한 노동에 대한 존경심 등 그동안 폄하됐던 소시민 계급의 가치들을 되새기면서 개인생활과 공동생활에 다시금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많은 증거들이 진보에 대한 무한한 믿음의 위험성을 경고함에도, 진보에 대한 집착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잔혹함으로 점철된 이 세기에 진보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넘쳐나는 모순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던 중, 나는 18세기에 주목하게 됐다. 현대자유주의의 창시자들이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기에 그 욕망을 만족시키는 과정에서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고 믿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다. 과거에는 불만, 불행, 정신적 혼란의 원천으로 지탄받던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이제 경제발전의 강력한 기폭제로서 각광받게 된 것이다. 끝없는 욕망을 비판하기는커녕, 애덤 스미스를 위시한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욕구가 사회별로 다르다는 주장을 내놓았다.(1)(2)

문명화된 사회의 남성과 여성은 미개한 사회의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안락함과 편안함에 대해 가지는 개념을 끊임없이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생산성이 높아지고 부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명품이 곧 필수품으로 바뀌는 상황이 끝없이 반복됐다. 사람들은 편안함을 누리면 누릴수록 계속 편안함을 원했다. 이 욕망의 유연성은 진보에 대한 영미권의 믿음을 고착화했고, 이 믿음은 이후의 사건들, 예를 들어 20세기에 발발한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은 경제발전에 엄청난 역동성을 가져왔을 뿐이다.


향수의 수준을 넘어서서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의 생활수준이 확실히 발전했다는 가설 덕분에,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훨씬 아름답게 바라보게 됐다. 모든 것이 지금보다 단순했던 과거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것이다. 진보의 이데올로기가 지닌 이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간 시간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과는 또 다른 향수는, 사실상 기억에 대한 포기에 가깝다. 향수는 과거를 마치 이국처럼 느끼게 하며, 과거와 현재 간의 연결고리를 희미하게 만든다. 대중문화와 대학 시절의 사회학에 깊게 뿌리내린 우리의 향수는, 역사적 분석을 추상적인 유형론으로, 즉 전통사회를 현대사회로,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공동사회)를 게젤샤프트(Gesellschaft, 이익사회)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우리의 실제 과거를 재구성하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을 방해한다.

경제발전이 환경적인 측면에서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지금, 우리는 진보에 보다 엄정한 비판을 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향수는 이런 비판에 필요한 논쟁을 가로막는다. 진보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와 역사를 바라보는 일차원적인 관점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실망감으로 채워진 비관주의와 운명론적 낙관주의만이 유일한 기준점이 돼, 진보에 대한 비판은 현대사회와 공동사회, 복잡하고 복합적인 현대사회와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의 대표적인 특징인 유대 관계로 대변되는 공동사회 간의 단순비교에만 머물고 만다.

진보에 대한 믿음과 이에 따라붙는 공동사회라는 개념이 촉발시킨 논쟁은, 진보가 가져온 이익과 진보로 초래된 손실을 저울질하고, 진보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을 양분시킨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끝나지 않는 논쟁을 종결할 단 하나의 관점이자, 지배적인 유형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우리가 향수와 기억, 낙관주의와 희망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관점이다.

지배적인 관점에 대한 불만족감이 커지면서, 역사학자들과 사회 비평가들은 자유주의 전통과 대척점에 있는 대서양, 공화주의, 시민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의 전통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대학가에 의하면,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은 주도권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워낙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었기 때문에, 승리를 쟁취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또한 공화주의 전통은 19세기에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자유주의가 표방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사회적 이상향을 계속 주장해 나갔다.

19세기의 포퓰리즘, 그리고 더 많은 부를 갈망하는 욕구를 죄악시하고 ‘진보’를 경계대상으로 여기는 사유재산에 근거한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해석은, 역사학자들이 추구했던 공화주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나는 진보를 겨냥한 19세기의 비판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미덕의 개념이, 오직 공화주의에만 뿌리를 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민의 의무를 되새기고 자유주의가 부추긴 탐욕스러운 개인주의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최근 많은 연구들이 발표됐지만, 가장 강력한 미덕의 개념을 급진적 개신교의 형태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이는 거의 없었다. 존 밀턴과 같은 청교도에게 있어서 미덕은 공공재와 같은 객관적인 서비스가 아니라, 세상의 창조주가 우리에게 선사한 용기, 생기, 활력을 의미한다.(3) 밀턴은 미덕을 신이 인간에게 베푼 호의, 삶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찬 마음과 동일시했다. 삶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도전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과 같다는 것이다.

인간의 창의력이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며 운명과의 대결에서 확실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이던 19세기, 현대 칼뱅주의자였던 토머스 칼라일과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제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4) 또한 운명은 즐거움과 기쁨으로만 이뤄져 있지 않은 이 세상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경탄’과 미덕에 의해서만 정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내 생각에 그들이 인간의 한계를 그토록 중시했던 것은 ‘진보’에 대한 포퓰리스트들의 비판과 관련이 깊었던 듯하다.

비록 포퓰리스트들은 진보를 정치적인 차원보다는 철학적인 차원에서 해석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 에머슨에게 있어서 운명에 도전한다는 것은 일종의 탈세, 무언가를 공짜로 얻으려는 행위, 즉 욕망에 매겨진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시도나 다름없었다. 진보를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의 부 창출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고자 했지만, 에머슨과 칼라일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면 교정 및 보상의 원칙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된다는 오래된 도덕적 지혜를 믿었다.

비극의 인식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두 번 태어난(twice born)’ 것과 같다는 다양한 종교적 경험들을 날카롭게 분석한 글에서, ‘개신교 신학과 정신구조 간에 놀라운 연관성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두 번 태어난’ 이들에게 실패와 절망은 희망과 경탄의 경험을 위한 준비 과정에 지나지 않으며, 비극을 이미 인식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경험은 더욱더 강렬하다는 것이다.

제임스는 자기 포기(self-renunciation)의 도덕적 미덕에 대해서는 에머슨과 칼라일보다 더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지만, 종교에 대한 맹신, 미신, 무관용, 그리고 진보로 인해 인간은 종교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의 흔한 ‘협박’보다, 정신적 ‘메마름’이 현대사회에 더 큰 위험을 초래했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의견을 같이했다. 제임스에게 지적으로 빚지고 있다고 인정한 조르주 소렐은, 생디칼리슴을 사유재산의 주요 형태와 도덕적으로 동등할 뿐만 아니라 영웅적인 삶의 개념을 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행동으로 해석했다.(5)

반복되는 주제들 중 몇 가지는 진보라는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형식으로 영향을 줬다. 나는 이를 분석하고, 이것이 ‘공동사회’의 쇠퇴에 관한 전통적인 비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유재산에 동반되는 책임, 마음을 사로잡는 일에 몰두하다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잊어버리는 것, 물질적인 풍요로 인해 높은 이상향을 잃어버릴 위험, 인간은 행복만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 등이 개별적 혹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면서, 소렐의 생디칼리슴과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저항 운동에서 다시 등장한다.

그 모든 사상가들은 선대들과 함께였든, 아니든 한계의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했다. 한계야말로 모든 텍스트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주제였다.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한계에 관한 생각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지적 전통보다는 감수성을 되찾는다. 현대의 삶을 지배하는 경향들과는 상반되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그 감수성 말이다.

이 사상가들은 중산층에서도 가장 힘없는 소시민 계급의 의식에 주목했다. 그들의 우려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시기심, 원망, 비굴함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같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소시민 계급의 도덕적 보수주의, 평등주의, 양질의 노동에 대한 존경심, 충성심의 가치에 대한 이해, 원망에 대한 혐오 등은, 진보 비판론자들이 지배적인 교리인 진보에 맞서서 일관성 있는 대안을 마련하고자 할 때 필요로 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나는 소시민 계급의 문화가 편협한 정신과 촌스러움으로 대변된다는 사실을 축소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인종차별주의, 국수주의, 반(反)지성주의를 만들어냈으며,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에서 종종 언급되는 다른 여러 재앙들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소시민 계급의 문화에서 부정적인 점을 지적하는 데 정신 팔린 나머지 존경할 만한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들은 ‘미국의 오래된 전통’을 공격하면서, 도덕적 실재론,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 한계의 인정, 진보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 등 소시민 계급의 문화가 지닌 긍정적인 측면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들의 공격은 뉴라이트(New Right)의 등장에 결정적인 원인이 된 반자유주의자들의 반격을 초래했다. 누가 뭐라 해도, ‘혁신’의 수혜자라기보다는 희생자에 가까운 소지주(小地主)와 장인, 상인과 농민들은 진보라는 마법에 걸린 국가와 진정한 천국을 절대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


글·크리스토퍼 래시 Christopher Lasch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1932-1994). 대표 저서로는 『La Culture du narcissisme. La vie américaine à un âge de déclin des espérances(나르시시즘의 문화. 희망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미국인들)』, Climats, Paris, 2000과 『Le Seul et Vrai Paradis. Une histoire de l'idéologie du progrès et de ses critiques(단 하나의 진정한 천국. 진보의 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한 비판)』, Flammarion, Paris, 2002가 있으며, 본 텍스트는 후자에서 발췌함.

이 글은 <마니에르 드 부아> 2018년 10·11월호(161호)에 수록된 것이다.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

(1) 우리는 ‘자유주의자’라는 단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모호성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우리는 이 단어가 일반적으로 우파로 분류되는 시장 경제의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래시의 정신에 부합하는, 흔히 좌파로 인식되는 ‘새로운 사상’의 수호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2) 스코틀랜드 출신의 애덤 스미스(1723~1790)는 경쟁시장이 인간의 활동을 결정짓는다고 믿었다.
(3) 존 밀턴(1608~1674)은 영국의 시인으로, <실낙원>의 저자이자 풍자 문학가였으며,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국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4) 토머스 칼라일(1795~1881)은 영국의 수필가이자 역사학자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1803~1882)은 미국의 철학자이자 유심론자(spiritualist)이다.
(5) 조르주 소렐(1847~1922)은 혁명적 생디칼리슴을 통해 폭력의 재생적 기능을 주장한 이론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