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난 모나리자에서 캠벨수프까지

2018-10-31     에릭 홉스봄 | 영국 사학자

이미지와 음악이 도처에 난무한다. 기술과 대중시장의 결합으로 미적경험이 우리의 일상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은 더 이상 독특하고 특별한 활동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날 예술가들은 예술을, 더 나아가 세계를 개혁하길 꿈꿨으나 이제는 현상에 순응했으며 예술의 완전한 실패를 선언했다.

한 세기(世紀)가 계속 진보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오늘날의 모든 예술가는 지난 세기의 예술가들과 달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특정 시대를 표현하는 방법이 새롭기만 하다면 지난 시대의 방법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듯 보인다.

새로운 기법들의 경쟁

물론 ‘당대의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그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서는 여태껏 의견이 일치된 바가 없다. 21세기가 본질상 ‘기계의 세기’라는 점에 예술가들이 동조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그 대답은 무의미하거나 쓸데없이 과장된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당대의 표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입체파 화가들은 이런 대답을 내놓지 않을까? 생물체의 부드러운 윤곽보다 기하학적 도식을 선호하는 것, 혹은 채색된 캔버스에 공산품적 요소를 붙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다다이즘 화가들은 이렇게 답할 수도 있겠다. 존 하트필드가 러시아 구성주의 예술가 블라디미르 타틀린에게 영감을 받아 공산품을 부품 삼아 만든 ‘전기기계식 타틀린형(形)’, 또는 기계문명에서 영감을 얻은 페르낭 레제의 휘황찬란한 그림이 그 답변이라고. 미래파 예술가들은 약삭빠르게 진짜 기계를 한구석에 가져다 놓은 뒤, 리듬감과 속도감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일 터다. 즉, 기계를 기반으로 근대성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서로 간의 공통분모가 전혀 없으며, 새로운 형태들을 뒷받침해주는 강박적 논리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수많은 유파와 양식이 공존할 수 있었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오래가지 못했으며, 한 명의 예술가가 예술양식을 손쉽게 갈아치울 수 있었던 이유다. 이게 바로 ‘근대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두 번째 실패는 다른 분야보다도 시각예술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르네상스 이후로 회화분야를 좌우한 것이 화가의 테크닉이었다면, 이제 더 이상 그것만으로는 ‘당대의 표현’ 혹은 새로운 기법과의 경쟁에서 명백하게 앞설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회화와 조각은 다른 예술분야, 즉 오페라부터 영화, 동영상, 록콘서트 같은 장르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다. 여러 예술 간의 통합을 추구했던, 아르누보를 비롯한 전위예술가들은 회화와 조각의 이런 한계를 가장 날카롭게 인식했던 이들이다. 회화가 영화에 미치는 영향은 근본적으로 제한적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표현주의 영화에 약간의 영향을 미쳤고,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이 할리우드 영화의 일부 무대장치에 영감을 줬을 뿐. 화가들이 부차적 역할이 아니라 온전한 파트너로서 제 역할을 맡았던 집단예술의 형태로는 발레가 유일하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시각예술이야말로 기술적으로 가장 낙후된 장르라는 것이다. 이 분야는 발터 벤야민이 명명한 ‘기술복제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한편 문학은 언어의 전통적 용법을 절대 단념하지 않았는데, 시로 말하자면 운율의 제약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처럼 실험적인 시도나 다다이즘 예술가 라울 하우스만의 <포스터-음성학적 시>처럼 작품으로 취급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음악에서는 19세기의 관용적 기법과 완전한 단절을 선언했지만, 대중은 대부분 클래식과 후기 바그너 음악에 충실하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콘서트 레퍼토리는 이미 세상을 떠난 작곡가들의 곡들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기관차 위에 부착된 카메라

전통적인 예술작품 가격이 하락한 것은 시각예술 분야, 그중에서도 회화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양차대전 사이 예술품 시장에서 회화작품의 가격이 급락한 것이 그 사례다. 전위회화는 이런 상황에서 장단점을 찾아냈다. 장점은 무대를 차지한 유일한 주인공이 됐다는 것, 단점은 대중이 전위회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상파 회화는 냉전시대에 가격이 상당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 두 사람 모두 추상파 회화를 적대시했고, 그 덕택에 추상파 회화는 공식적으로 독재에 대한 저항예술로 자리잡은 까닭이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인상파, 상징파, 후기인상파, 아르누보파 등의 전위예술가들은 사물의 재현을 포기하는 대신 주제의 폭을 넓힘으로써 오래된 표현법의 한계를 이겨냈다. 이 분야에서 사진과의 경쟁은, 역설적이게도 유익한 것이 됐다. 화가들이야말로 색채의 독점권을 지닌 자들로서 인상파부터 야수파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색채를 이상화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표현주의’라는 용어가 지닌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서 이 표현의 독점권을 얻었으며, 감동을 현실에 침투시키는 회화의 능력을 활용했다. 그리고 이는 빈센트 반 고흐나 에드바르트 뭉크가 잘 보여주듯, 자연파의 한계가 파괴된 만큼 더욱 강력하게 이뤄졌다.

또한 예술가들은 기술의 발전에 과학적 기법으로 대항함으로써 지각된 현실에 기계보다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폴 세잔이나 카미유 피사로가, 에밀 졸라와 기욤 아폴리네르와 함께 표방했던 바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회화는 눈으로 보는 것에서부터 멀어져 기호화된 예술적 규약에 머무르게 됐다. 하늘, 나무, 사람 등이 본래 어떤 생김새를 해야 하는지에 관한 규약 말이다. 그럼에도 입체파에 이르기까지 이 둘 사이의 거리, 즉 실제 사물의 모습과 규약 간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후기인상파를 비롯한 전위예술가들은 인정된 예술적 규약 속에 통합됐고, 해당 규약을 준수했던 예술가들은 공증된 대중성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대중과 예술가들 간의 진정한 단절이 발생한 것은 바로 그 다음 세기부터였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조르주 브라크와 반 고흐 간의 <구별 짓기>를 통해 확인한 바처럼, 20세기 말의 프랑스 대중은 계급을 막론하고 반 고흐를 선호했다. 요컨대 20세기 예술계의 진정한 혁신이 ‘예술’ 영역의 외부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부정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는 기술과 대중시장의 결합으로 탄생한 논리, 즉 미적 소비의 대중화를 통해 이뤄졌다.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빅터 플레밍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보다 예술적 차원으로 볼 때 우월함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적 차원에서는 회화보다 영화가 훨씬 혁신적이며 그 메시지를 전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라는 것. 광고와 영화를 제작하는 변사, 시나리오 작가, 기술자들은 매일의 삶을 미적 경험 속에 빠뜨렸을 뿐 아니라 화가의 작품이 등한시했던 시각적 표상의 대담한 혁신으로 대중을 이끌었다. 기관차 위에 부착된 카메라가 여느 미래파 회화보다 속도감을 훨씬 더 제대로 전달했던 것처럼 말이다.

1950년대에 들어서자 소리와 이미지, 상징의 혼돈으로 온 하루를 빈틈없이 채우던 소비사회가 세계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소비사회는 고유한 활동으로서의 예술을 파탄으로 이끌었으며, 전위예술가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예술가들은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는 셈이었다.

1960년대 이후, 즉 팝아트 이후부터 전위예술가들은 더는 예술을 혁신할 수 없었다. 예술의 파탄을 공언하는 것에 그쳤을 뿐. 기이하게도 개념미술과 1914년 직후 초창기 버전의 다다운동으로 돌아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 운동들은 기존의 예술을 파괴하고 종식시키고자 했다. 그것이야말로 마르셀 뒤샹이 ‘예술작품’으로 취급했던 모나리자의 콧수염 한 쌍이나 자전거 바퀴가 지닌 의미다. 반면 앤디 워홀과 팝아트 예술가들은 그 무엇도 파괴하거나 변혁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을 수용하고 나아가 세상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전통적인 예술가가 생산하던 시각예술은 -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의의를 제외한다면 - 더는 설 자리가 없음을 보여줬을 뿐이다. 워홀은 미디어의 포화를 경험한 세계에 순응하는 수동적 태도를 취하자고 주장했다. 마오쩌둥, 마릴린 먼로, 캠벨수프 깡통 등은 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들인데, 이는 (당대에 대한) 반어법도, 감상주의도, 논평도 아니다. 이 같은 이미지를 선택하는 기준에서 약간의 함의만이 드러날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당대의 미국인들이 경험했던 ‘당대의 표현’에 가장 근접했던 것은 - 완성된 작품보다는 - 작품의 작업과정 그 자체에 가깝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에 일맥상통했던 전위예술의 전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윌리엄 모리스에게서 시작된 미술공예운동부터 바우하우스 사조에 이르는 전통이다. 이 예술가들은 탁월한 창작자로 자처하기보다는 더 나은 사회를 구축하고자 했다.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133일 만에 붕괴한 뒤 헝가리에서 망명한 바우하우스 예술가 라슬로 모호이너지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구성주의란 시각의 사회주의다.” 1917년 이후의 이 전위운동은 1905년부터 1914년 사이의 비정치적 혹은 반정치적 전위운동을 건너뛰어 사회 참여적인 운동과 재결합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기계주의 시대’의 미학이 지닌 의미는 공허한 수사학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1920년대에는 사람들의 생활방식 변화를 목표로 하며, 이에 직접 참여 가능한 예술가들에게 호소하는 프로그램이 공공계획과 기술적 이상향을 혼합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것이 바로 자동차가 없는 이들에게 자동차를 공급하기를 원했던 헨리 포드와, 욕조가 없는 이들에게 욕조를 공급하길 원했던 사회주의적 지자체 간의 만남이다. 주택과 도시들은 공업활동이라는 보편적 논리의 산물로 인식됐다. 한정된 공간을 인간의 삶에 최적화시키고, 인체공학과 수익성까지 고려하는 방안을 찾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다. 여기에서 바로 수많은 이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했던 유익한 이상이 비롯됐다.

대중을 위해, 그러나 대중의 지지 없이

그럼에도, 바우하우스 사조가 스스로 발견했듯이, 일부 예술 사조와 연구소의 힘만으로 사회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들이 결국 이상을 실현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그 증거 아닌가. 우리는 1924년 당시 전성기였던 파울 클레가 바우하우스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현대미술에 관한 강연을 마무리했던 문장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중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바다. 그래서 우리가 저기 바우하우스에서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느 한 공동체로부터 출발했고, 이 공동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넘겨줬다. 그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글·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
영국 사학자(1917~2012). 대표작으로 『극단의 시대』가 있다. 이 글은 <마니에르 드 부아> 2001년 5·6월호(57호)에 실린 것으로, 2018년 10·11월호(161호)에 재수록돼 소개한다.

번역·박나리 
연세대 불문학과 및 국문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세금혁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