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기꾼이 아니다

피에르 라비의 반론

2018-10-31     피에르 라비 | 농부 철학자

 지난 10월호(프랑스어판 8월호)에 게재된 장바티스트 말레의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는 구세주인가?’라는 기사에 대해, 피에르 라비는 다음 자료들을 통해 반론을 제시했다.


‘시스템’과 마케팅에 관해

내가 나의 이익을 위해 ‘마케팅’을 하고 영리를 도모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가당치 않다. 더군다나 마케팅과 시스템, 두 개념은 서로 전혀 무관하다. 나는 내가 영향을 준 단체나 조직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으며, 이들은 서로 아무 연관이 없다. 이들의 재정적 독립성은 바로 시스템이나 마케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교육의 장소로서 이 단체나 조직은 ‘자급자족형 농장 모델’이 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또한 내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사변적 지식이나 단순한 암시만으로 농업생태학과 관련 활동들을 해왔다는 말에, 나는 상처를 받았다. 과연 이 기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나는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았으며, 내 입장은 증언과 주장으로 드러난다. 나는 사람들에게 종속과 소외 속에 가둬버리는 상업사회에 맞서 싸우라고 권유하고, 싸구려 장신구나 진보의 허상을 훌훌 벗어던짐으로써 사회의 변화 속에서 각자 자기의 몫을 하라고 권유하기 때문이다.


소위 내 멘토라는 사람들의 우파 성향에 관해

내 삶이 사람들과의 만남으로만 이뤄진 것도 아닌데, 사람들 중에는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나를 1960년대에나 물들었을 법한 반동적인 사상들에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듯하다. 피에르 리샤르 박사가 젊은 시절 청년 보조대에 몸담았고, ‘땅으로 돌아가기’ 사상들을 옹호했다는 단순한 이유로, 그를 ‘비시-아르데슈 출신’으로 매도하는 것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비시-아르데슈 출신’이라는 수식어는 그가 저항운동을 했었다는 사실을 묵살한다는 점에서 부적합하다. 세벤 국립공원의 창립자이자 민족학 운동에 심취한 의기 왕성한 의사로서, 그는 자신의 삶을 위험에 빠트리면서까지 언제나 자신의 2마력짜리 자동차로 세상을 누볐다. 내가 아르데슈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는 살 곳을 마련해주고 농장에 정착하는 것을 도와줬으며, 결혼식 증인이 돼줬다.
그러나 한순간도 어떤 이념을 전하려고 애쓴 적은 없었다. 우리는 오로지 생태계, 풍경들, 사람들에 대한 열정만으로 하나가 됐다. 농부이며 가톨릭 작가이자 시몬 베유를 발굴한 귀스타브 티봉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말레 기자가 그려낸 그의 모습은 왜곡된 것이다. 우리가 교류한 것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면에서였다. 우리는 35년간 만나지 않았으나, 나는 그의 풍부한 교양, 언어 능력, 기억에 감명을 받았다.
내 기억으로 당시 우리가 재정적으로 열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티봉이 우리를 도와준 건 맞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의 제자였거나 그가 내 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가톨릭이라는 같은 종교를 가졌지만, 그 외에 주 관심사나 문화적인 면에서 우리는 공통점이 없었다. 티봉은 나와 수준이 달랐고, 나는 옛사람을 공경하듯 그를 공경했다. 우리는 네댓 번 그를 만났을 뿐이고, 그마저도 만나는 횟수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나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었고, 그때는 우파든 좌파든 자기 자리를 찾으려고 어디든 기웃거리던 때였다. 나는 티봉이 내 멘토라고 말한 적도 없지만, 설사 그가 내 멘토라 하더라도 그건 아무 의미가 없다.


내 능력과 르네 뒤몽에 관해

이 이야기를 하려면 장바티스트 말레가 조롱한 부르키나파소에서의 경험을 다시 꺼내야 할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말레가 모리스 프로인트와 함께 왔을 때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묻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이야기에 부정확한 측면이 많다는 것이다.
1984년이면 나는 이미 4년 전부터 부르키나파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발전을 위한 농업인 국제관계 센터의 조제프 로셰가 내 경험을 전수해달라고 그곳으로 나를 초대했다. 어느 날 필리프 도미니아크가 모리스 프로인트를 데리고 우리 집에 왔다. 나는 [프로인트가 세운 전세기 회사인] 르푸앵 뮐루즈를 타본 적이 있었던 터라 프로인트라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가 호텔 야영지 문제를 털어놓고 난 뒤 나는 그를 돕기로 했다.
나는 굶주림이 들끓는 고롬고롬에서 농부들과 연수생들에게 기사에 나와 있는 것처럼 생명역동과 월력에 근거한 농업생태학 교육을 실시했다. 나는 액비와 퇴비를 포함한 거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혹은 농업생태학적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지 설명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우선은 농부들이 화학비료에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급선무였다. 내 책 『황혼녘의 봉헌(L’Offrande au crépuscule)』에 보면 우리가 사헬에서 어떻게 일을 진행했는지, 근거로 삼은 도식과 분석들을 설명해뒀다. 이 책은 농림부 장관 상을 받았고, 나는 여러 군데의 국제학회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하는 일을 ‘평가하라’고 르네 뒤몽에게 위임한 것은 모리스 프로인트가 아니라 토마 상카라다. 나는 뒤몽이 ‘아연실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처음에 팔짱을 낄 정도로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는 안타깝게도 오로지 화학비료만이 농업의 진보를 이룩해낼 중요한 열쇠라고 장담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의 책 『유토피아 혹은 죽음!(L’Utopie ou la mort)』(1973)에도 이미 나와 있다! 그는 매우 권위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퇴비가 기적의 해결책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황혼녘의 봉헌』, 1987, 2001년 판 194쪽 참조).
하지만 뒤몽은 내 믿음을 무너뜨리려 했고, 상카라는 나를 불러들였다. 이 모임이 끝날 무렵 상카라는 내게 유리한 쪽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이때부터 뒤몽은 쓰라린 고통을 계속해서 겪어야 했다. 토마 상카라의 친구인 기 델브렐이 증언한 것처럼, 토마 상카라는 비료산업에서 경제적 독립성을 선택했다. 상카라는 나를 농촌개발부 장관으로 점찍었으나 그가 암살당하고 말았다.
기사 내용과는 반대로, 나는 부르키나파소를 어쩔 수 없이 ‘서둘러 떠나야만’ 했던 것이 아니다. 내가 그의 암살 소식을 라디오로 들었을 때 나는 아르데슈에 있었기 때문이다. 농업생태학의 풍요로움과 그것이 사헬의 자연조건에 적합하다는 증거로서, 농업생태학은 부르키나파소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 수천 명의 부르키나파소인들이 농업생태학 교육을 받았고, 뒤몽만큼이나 권위 있고 검증된 농학자 마르크 뒤퓌미에가 말하길, 생명농학 덕분에 인간은 미래에도 모두가 먹고살 걱정이 없을 것이다.


기업 경영인들과 정치인들에 관해
나는 그 누구로부터도 회유를 당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다국적 기업 경영자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몇 년 동안 나는 그들 중 소수의 사람들과만, 그들이 요청했을 때 어떤 결과도 기대하지 않고 몇 번 인터뷰를 했을 뿐이다. 나에게 손님 대접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말레 씨를 접견한 것처럼 기업 경영자들을 접견한 것이다.
말레는 내가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에마뉘엘 마크롱을 만났다고 썼다. 정치참여 문제가 쟁점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홍보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마크롱과 내가 함께 아는 지인이 점심식사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는 편지로 이 약속을 지켰다. 나와 동석한 모리스 프로인트와 베르나르 슈비아가, 마크롱과 내가 내분비계 장애물질, 글리포세이트, 초등학교의 생태학 수업 개설 문제, 사헬, 말리에서 납치된 소피 페트로냉의 참극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을 증명해줄 것이다.


글·피에르 라비 Pierre Rabhi

농부이자 철학자, 작가, '생태 농업의 선구자'로 알려져있다. 저서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니콜라 윌로와의 대담집 《미래를 심는 사람》, 자전적 장편소설 《사막의 정원사 무싸》가 국내에 출간됐다.

번역·조민영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석사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