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화해의 이면

2018-10-31     제라르 프뤼니에 | 대서양위원회 연구원

2018년 여름,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모두의 놀라움 속에서 시선을 끄는 화해를 이뤄냈다. 9월 16일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선으로 양국이 평화협정에도 서명했다.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이 끝난 2000년 이후 두 독재국가는 병력 대치라는 불안정한 평화 속에 살아왔다. 이번 화해의 지속 여부에 아프리카 뿔 지역 전체의 안정이 달려있다.

 

평화혁명이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관계를 뒤흔들고 있다. 1998~2000년 전쟁 이후 두 나라는 2006년 소말리아에서 에리트레아 동맹군을 공격한 에티오피아의 군사개입과 같은 소규모 교전을 치르며 공존해왔다(소말리아 내전에서 에티오피아는 소말리아 과도 정부를 지원한 반면, 에리트레아는 소말리아 내부의 반정부 집단을 지원했다-역주).(1) 두 나라의 수도에 군림하는 권위주의는 종종 이웃국가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대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2018년 4월 6일, 아비 아흐메드가 총리직에 입성하며 에티오피아가 먼저 변화의 물꼬를 텄다. 에티오피아 인터넷 및 전화 관리 감독 조직인 ‘인포메이션 네트워크 시큐리티 에이전시(Information Network Security Agency)’의 임원 출신인 아흐메드 총리는 오로모 족이다. 오로모 족 중 많은 수가 분리독립주의를 표방한다. 아흐메드 총리는 에티오피아 인민혁명 민주전선당(EPRDF) 출신 정부의 쇠퇴를 저지하기 위해 정치사범 석방, 언론 봉쇄 해제, 야당 인정 등 즉각적인 개혁의 물결을 일으켰다.
에티오피아에서 일어나는 일 중 사소한 것은 없다.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던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전체의 상징이다.(2) 1974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폐위된 후 에티오피아는 1991년까지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에티오피아의 초대 대통령이자 군인)의 지휘 아래 군사 스탈린주의 체제를 겪었다.(3) 이후 멜레스 제나위가 설립한 EPRDF당이 15년의 내전 끝에 정권을 잡았다. 티그레 인민해방 전선(TPLF)이 주도하는 EPRDF는 개혁과 권위주의 성격의 신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하는 종족 기반 정당들의 연합이다.
이 정권이 행한 독재의 실체는 오랫동안 경제활력(2005년 이후 평균 7%의 성장률)에 가려졌다가 2012년 설립자의 사망 이후 그 전말이 드러났다. EPRDF 정부는 지역 불균형의 압박 속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부의 종족-지역주의 지도자들은 ‘국제사회’의 호의를 사기 위해 민주화라는 카드를 꺼내 들어 급격한 경제성장 속에서 그들의 몫을 챙기고 이를 은폐했다. 서방의 ‘에티오피아 경제 기적’ 찬양자들 역시 제나위가 스스로를 ‘보나파르트식’ 체제라 칭했던 것에 대해 묵인했다.


고립에서 벗어나고픈 에리트레아
그러나 아디스아바바 도심구역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수도주변에 사는 오로모 주민들의 반란을 야기하며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오로모 농부들은 부동산 투기가 TPLF의 티그레 정치인들의 배만 불려줄 것을 염려했다. 소요사태는 2015년 11월부터 오로모족 인구 35%가 살고 있는 오로미아 주 전체로 번졌다.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체포됐지만 폭력행위는 멈출 줄 몰랐다. 2018년 6월 23일 아디스아바바에서 일어났던 테러도 오로모 사람들의 소행으로 추정됐다. 이 테러사건에서 총리는 겨우 화를 면했고, 2명의 사망자와 150명 이상의 부상자를 냈다.
이런 긴장상태는 심각한 금융위기의 발생과 동시에 재발했다. 2012~2018년 외국인 직접 투자(FDI)가 10억 달러에서 40억 달러로 늘었지만, 같은 기간 무역적자 역시 30억에서 140억으로 늘어났다. 나일강 댐 건설 프로젝트와 등 과도한 프로젝트들로 대표되는 비용만 많이 들고 체계가 없는 ‘개발주의’가 문제였다. 터무니없이 증가한 투자 역시 수입을 증가시키면서 무역적자를 심화시켰다. EPRDF 정권은 서서히 붕괴하고 있었고, 지난 4월 아흐메드가 정권을 잡았을 때는 정권의 생존까지 위협받고 있었다.
총리는 내부개혁과 함께 가장 긴박한 두 가지의 지역현안에 대해서도 외교적 공세를 펼쳤다. 바로 나일강 수자원 이용 문제와 1998~2000년 전쟁으로 쟁취한 독립 때문에 지역적 고립 상태에 빠진 에리트레아와의 평화문제였다. 6월 10일 아흐메드 총리는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에게 이집트의 젖줄인 나일강 물의 이집트 할당량이 줄어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4) 이런 행동은 이집트가 주축이 된 사우디-에미리트 진영에서 지금까지 카타르 편에 섰던 에티오피아 내에서도 큰 변화였다. 닷새 후, 무함마드 빈 자이드 나하얀 아랍에미리트 왕세제는 에티오피아에 30억 달러 원조를 약속했다.(5)
두 나라의 국경에 위치한 티그레 지역의 분리독립 요구가 커지고 있는 만큼, 에리트레아와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중요해졌다. 정권이 쇠약해짐에 따라 소외됐던 티그레 사람들 사이에서 분리독립주의에 대한 열망이 되살아나는 것을 에티오피아는 불안해했고, 에리트레아 역시 사라이, 하마시엔, 아켈레 구자이 등 에리트레아 지역에 정착한 티그레 주민들이 자신을 공격할까 두려워했다. 각국 영토에 대한 권한을 다시금 확고히 해야겠다는 공통적인 의도에 따라, 아흐메드 에티오피아 총리와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에리트레아 대통령은 2018년 9월 11일 에티오피아 새해를 맞아 공동 국경을 거닐며 양국의 화해 분위기를 연출했다. 군복을 입은 이들의 상징적인 산책은 티그레 분리독립 시도의 숨통을 조이려는 것이었다.
2018년 7월 28일, 에리트레아와의 화해(두 나라는 7월 9일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라는 외교적 승리에 뒤이어 아흐메드 총리는 미국을 방문해 수많은 에티오피아 교민들에게 자신이 본국에서 제창한 ‘대변화’에 동조할 것을 권유했다. 8월 7일 귀국한 총리는, 남부지역을 피로 물들인 충돌의 주동자 오로모 해방 전선(OLF)과 협정을 체결했다. 총리 본인 역시 오로모족이기에, 잠재적으로 분리독립주의 경향을 띠는 민족주의를 불법화하는 동시에 오로모 주민들에게도 ‘대변화’에서 오는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을 약속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총리가 취한 이 아슬아슬한 태도는 결국 역설에 부딪혔다. 에티오피아에서 분리돼 나온 국가(에리트레아)의 수도인 아스마라에서 협정이 체결됐으니 말이다. 이유는? 다우드 입사 아야나 OLF 대표가 아페웨르키 대통령의 보호 하에 18년 전부터 에리트레아에서 망명생활 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사 아야나 대표는 오로모 해방 전선의 일부만을 통제할 뿐이고, 대부분은 에티오피아의 오로미아에 거주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협정이 지속될 것인지에 대한 미래는 불투명하다.
에티오피아는 개혁의 종을 울렸고, 에리트레아는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종소리만을 기다려왔다. 2006년 소말리아에서 에티오피아에 맞섰던 군사개입 이후, 에리트레아는 국제 경제 제재를 받았다.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성전을 선언했고, 소말리아의 정권을 잡고 있는 이슬람 법정 연합(ICU)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던 바 있다. ICU가 알카에다와 연관됐다고 생각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는 결국 소말리아의 수도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을 쫓아내고 말았다.
이미 가난에 시달리고 있던 에리트레아는 잘못된 군사적 선택의 대가를 치렀다. 모든 외국인 직접 투자와 거의 모든 원조가 중단돼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아페웨르키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접촉해, 사우디아라비아의 동맹인 아랍에미리트가 예멘분쟁에서 이용할 전쟁항구 및 공군기지 건설까지 수용한 것이다. 에리트레아 대통령은 에티오피아와의 이 평화협약을 통해 ‘국제사회’의 환심을 사고자하고, 이 협약으로 에티오피아에 대한 강력한 권한을 잃지 않으면서 제재가 해제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이라는 시나리오는 멀어진 듯하다. 에리트레아의 보호를 받고 있고, 모든 반에티오피아 행동의 핵심인 에티오피아 반군 진봇7(Ginbot 7) 역시 아흐메드 총리가 인기가 많다고 생각해 그에게 과감히 맞서는 것을 주저한다. 한편, 에리트레아의 티그레 주민들은 이번 화해가 20년 가까이 막혀있던 무 교류 재개를 유리하게 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화해를 통해 20~45세의 국민 모두에게 해당되는 군 복무 제도가 폐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많은 수의 에리트레아인들이 망명을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와의 화해가 정권자유화를 가져올지 아니면 완고한 독재권력 유지를 가리기 위한 수단일 뿐일지는 아직 미지수다.
아흐메드 총리의 정책이 성과를 만들어내는 동안, 에리트레아의 권력약화와 무능력한 영토관리는 불안함의 주된 요소가 되고 있다. 종족들 사이의 경쟁이 늘어나면서 스스로 평화적이길 바라는 ‘대변화’가 위협받고 있다. 이런 갈등이 심화한 이유는 ‘제39조의 고아들’이라 명명되는 종족역사로부터 기인한다. 1974년 멩기스투의 혁명 때 민간혁명 극좌파는 종족 문제에 대해서 스탈린주의 군대와 반대되는 입장이었다. 다문화 제국인 에티오피아는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종족들 중 한 종족이 항상 나라를 지배해왔다.
1991년, TPLF 게릴라 부대는 각 지역 주민들에게 권력이 분배되는 종족연방제 창설을 요구했었다. 하지만 이 ‘혁명적 균형’은 속임수였다. 공식적인 평등주의 뒤로 옛 암하라족 엘리트는 우세한 티그레 세력들의 이익 때문에 소외돼버렸다. 종족 연방제의 법제화를 통해 각 지역이 분리독립할 가능성을 얻게 됐지만(헌법 제 39조), TPLF의 지배로 인해 효력이 없어진 이 조치는 금세 정부의 거짓말과 군소 종족들의 자치행정이라는 이룰 수 없는 꿈을 상징하게 됐다. 7~8개의 대규모 종족들이 70개 부족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이것은 해답을 얻기 힘든 방정식이다. 따라서 완전한 종족 연방제는 필연적으로, 에티오피아가 지향하는 국민국가의 해체로 이어질 것이다.
EPRDF 정당국가의 와해가 야기한 중앙집권국가의 쇠퇴와 함께 다수의 종족들은 영토 관리의 핵심 요소들(학교, 지역 경찰, 지역 세금)에 대한 통제권을 쥐면서, 또한 헌법이 부여한 가능성을 밀고 나가면서 이 궁지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무의미한 다툼뿐만 아니라 수십 명의 사망자를 야기하는 무장 폭력이 발생하기도 하며, (오가덴 지역의 일명 ‘리유 경찰(Liyu Police)'이라 불리는 소말리아 보충 경찰력의 경우) 분리독립을 향한 혼잡한 가두행진도 추진됐다. 9월 18일 아흐메드 총리는 국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에티오피아의 연방제는 커다란 모순들을 다루고자 고안된 것이지 소수 지역들의 분쟁 확산을 다루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정부의 역사적 권위주의에 대한 논란에 근거한 이런 총리의 계획들은, 분명 지역적이지만 그럼에도 보편적인 무질서의 위험을 안고 있다. 실제로, 중앙 권력은 국가의 분해로 탄생한 이 같은 과잉 민주주의에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할지 모른다. 군대가 여전히 국가 통일성을 대변한다고 해도, 국가 통일성은 종족들 사이의 긴장 상태에 가로막힌다. 이런 애매한 시기에, 설득력 없는 헌법을 명분으로 질서를 바로잡는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는듯하다.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는 ‘시민 사회’도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에티오피아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아랍세계까지 분열시킨 갈등이 널리 확산된 아프리카 뿔 지역에게도 도전은 거대해 보인다. 폭력 속에 이뤄지는 에티오피아 정권붕괴의 영향은 국경 너머 멀리에까지 도달할 것이고, 반대로 에티오피아의 긍정적인 변화는 아프리카 대륙의 안정을 위한 결정적인 진전이 될 것이다.

 

글·제라르 프뤼니에 Gérard Prunier
프리랜서 컨설턴트, 대서양위원회(Atlantic Council) 연구원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

(1) Jean-Louis Peninou, ‘Éthiopie-Érythrée, une paix en trompe-l’œil(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 평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0년 7월호.
(2) 이탈리아의 짧았던 점령(1936~1941)은 아프리카 식민지 역사의 일부분이라기 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 봐야 한다. 1896년부터 식민 지배를 받아온 에리트레아는 ‘아비시니아(1270년 세워진 에티오피아 왕국-역주)’ 안에서 고유한 역사를 주장한다.
(3) Christopher Clapham, ‘Transformation and Continuity in Revolutionary Ethiop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African Studies> coll., 1988.
(4) Habib Ayeb, ‘Qui captera les eaux du Nil ?(누가 나일강의 물을 차지할 것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3년 7월호.
(5) Gérard Prunier, ‘La Corne de l’Afrique dans l’orbite de la guerre au Yémen(예멘 전쟁에 휩쓸리는 아프리카의 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9월호‧한국어판 2016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