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이 살인행위가 될 때
여러 사건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 전형적인 경우도 하나의 특수한 사건으로 치부하게 될 수 있다. 지난여름 판결에 의하면, 프랑스의 통신회사 ‘프랑스 텔레콤’의 디디에 롱바르 전 최고경영자와 그의 후임 루이-피에르 웨네스, 올리비에 바브르보 등은 자사 직원들에게 정신적 학대를 가했다는 혐의로 오는 2019년 법정에 설 예정이다. 이들에게는 2000년대 말에 일어났던 수십 명에 달하는 프랑스 텔레콤 직원들의 연쇄 자살사태에 대해 답변할 의무가 있다.
당시 프랑스 텔레콤은 운영체제를 바꾸고 있었다. 2004년부터는 당사 지분 중 민간투자의 비율이 절반을 넘어서기 시작했고, 더불어, 프랑스의 정보통신 분야 전체가 경쟁에 돌입하던 시기였다. 이에 프랑스 텔레콤은 사원 전체에 ‘책임’을 지우는 ‘거버넌스 경영’을 도입했다.
이제 회사의 단순한 직원이 아닌 ‘파트너’가 된 노동자들은 업무팀을 꾸리는 직속 상급자들에게 적절한 인물로 보이기 위해 필요한 방법들을 터득해야 했다. 쓸모없는 취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비현실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굴욕적인 판매방식을 전개해야 했다. 또한 직무보수 교육을 받고, 새로운 조직에 자리 잡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새로운 기술들을 개발해야 했다.
“문으로든 창문으로든 내보낼 것”
게다가 프랑스 텔레콤이 내세운 이 전략에는 무려 2만 명의 직원들을 공식적으로 해고할 필요 없이 스스로 좌절해서 회사를 떠나도록 만드는 목표가 포함돼 있었다. 실제로 2006년 10월 20일, 디디에 롱바르 전 최고경영자는 회사 간부들에게 이 전략을 설명하며 “나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들을 문이든 창문이든 어느 쪽으로든 나가게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목표를 달성했다. 프랑수아 슈발리에는 저서 『자기 경멸의 사회(La Société du mépris de soi)』에서 이런 직원관리방식이 지닌 놀라운 효율성에 대해 기록했다. 행정적 모호함 하에 놓인 개개인은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여기게 된다. 따라서 문제가 빚어지면 스스로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게 된다. “학대받은 사람들, 또는 그에 준하는 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자신을 비하하고 파괴한 이들에게 반항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려는 그들의 의도에 따라, 아주 빠르게,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 오히려 그들이 옳다고 인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1)
프랑스 텔레콤의 전략은 오늘날 여러 대기업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지난 2018년 8월, 에어프랑스-KLM은 직원들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여 온 캐나다의 경영인 벤 스미스를 최고 경영자로 임명하면서, 프랑스 내에 이런 문화를 뿌리내리는 데 일조했다. 집권당인 ‘레퓌블리크 앙 마르슈(LREM, 전진하는 공화국)’가 스스로를 ‘정치기업’이라고까지 칭하면서 경영 관련 용어들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있는 만큼, 에어프랑스-KLM 지분의 14.3%를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 정부 역시 이 결정에 기꺼이 찬성의 뜻을 표했다.
자신이 과거 한 기업의 인사 담당자였다고 밝힌 이른바 ‘인사팀의 저격수’는 두 개의 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강제배분법’에 대한 내용을 밝힌 바 있다.(2) 그의 일은 전체 직원 중 업무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일정 비율의 인원을 정해진 기준에 따라 회사 밖으로 확실하게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그에게 지시했던 경영자는 “이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이 당신 일이다. 결국, 당신이 제대로 일을 한다면 더 나은 사람들을 고용할 수가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사람들을 내보내야 한다”, “(그들에게) 두 번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 “한 번 잘못한 사람은 앞으로도 평생 잘못을 저지를 것” 등의 말도 덧붙였다고 밝혔다.
또한 직원들을 내보내는 것에도 타당한 이유가 없었으며, 그 이유라는 것도 지어낸 수준인 경우도 많았다. 직원들은 연간 상여금을 받았거나 또는 받지 않아서, 또는 오래된 기록 속에서 찾아낸 과거의 실수. 또는 무관한 사건들에 얽혀서 쫓겨나야 했다. 이유들이 충분하지 않으면 협박이 더해진다. 이에 대해 그는 “그렇다고 해도 반항할 수는 없다. 회사는 당신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편 스스로를 “비정상적인 지독한 소사장”이었다고 칭한 경영진 출신의 한 인물은 프랑스 기업들이 사용하는 “재활성화”라는 단어는 결국 “해고를 뜻하는 일종의 암호”라고 말하기도 했다.(3) 실제로 신조어에 기반한 이런 언어적 장치들은, 직원들에게 암묵적인 위협을 가하고 경영진들의 감각을 마비시키곤 한다.
테일러시스템을 능가하는 ‘첨단경영’
지금의 ‘첨단경영’은 거버넌스라는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가 완성했던 분업 시스템을 뛰어넘는다.(4) 업무를 분배하는 것을 뛰어넘어 이제는 노동의 주체를 분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망쳐야만 끝이 나는 일련의 노동적, 인지적, 도덕적, 심리적 환경 속에서 분열되고 조각나 부서져 버린 노동 주체들은 말도 안 되는 업무량에 몸을 맡겨야 한다. 경영야만주의의 시대에서는 ‘기능통합 솔루션 조성’과 ‘프로세스적 특성’이 직원들을 ‘관리’한다기보다는 ‘처리’하는 셈이다.
실제로 이런 경영방식은 사원들의 인성을 산산조각내서, 조직, 적성, 직무, 생산성 등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구직자’들에게 ‘지원동기’를 적도록 해 ‘고용시장에 팔릴 기회’를 주는 것에서부터 이미 노동자들의 온전함에는 흠결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채용과정에 발을 내디딘 이들은 그 의미와 영역이 모두 낯설기만 한 테스트들을 치르게 된다. 전문가들은 지원자들을 집단면접의 자리에 모아 놓은 채 그들의 신체언어를 분석하고 심리유형을 파악하며 무의식을 표출하도록 만든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원자들은 기업이 자신들에게서 무엇을 구하는지, 구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다. 기업은 지원자들의 양심과 이성 그 어느 쪽에도 질문을 던지지 않고, 다만 부지불식간에 그들의 경향성을 파악할 뿐이다. 지원자들은 하게 될 일과는 관련 없는 이상한 주제의 모의실험 속에 놓인다. 일례로 장-로베르 비알레 감독의 다큐멘터리 ‘노동의 사형(La Mise à mort du travail)’에 포착된 입사면접에서 지원자들은 단체로 휴가를 간다는 가정하에 어느 도시로 떠날 것인지 토론할 것을 요구받는다.(5)
이런 토론을 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짜 이유는 이 가짜 닭장 속 싸움을 지켜본 담당자들의 논의에서 드러난다. 담당자들은 순종적인, 즉 싫은 기색 없이 가이드라인을 따르는 인물, 직급의 사다리를 기어오르기 위해서라면 동료들을 고발할 준비가 된 단순 ‘팔로워’를 찾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지원자 중 그 누구도 자신이 채용된 이유를, 또는 채용되지 못한 이유를 명백히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채용된 직원들은 교육도 거의 받지 못한 채 쏟아지는 일들 속에 몸을 밀어 넣어야 하는 일이 다반사다. 자아실현의 방법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공식석상에서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창의력, 자주성, 책임감 등을 보여줄 필요는 없고, 그저 시스템이 요구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서 추측해야 한다. 시스템은 더 이상 자신들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결국 직원들에게는 평가와 자기비판이라는 모욕의 시간이 돌아올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짐을 지고 있는 직원들을 ‘파트너’ 또는 ‘멤버’라고 부르기로 결정함에 따라, 때로는 복장을 갖추거나 업무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것조차도 그들의 몫이 되곤 한다. 자유주의가 그들을 회사와 비즈니스 관계를 맺는 독립적인 개인으로 만든 탓이다. 이런 심리적 구조 안에서 회사는 그저 계약 당사자에 지나지 않게 된다.
모든 책임과 부담을 노동자에게 넘겨라
이 같은 상황은 나아가 전에 없던 물리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회사는 직원들이 직장이라는 틀 안에서 충동을 억누른 채 “돈 줄 테니 입 다물라”는 암묵적인(때로는 명시적인) 명령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불평, 불만, 분노, 반감을 마음속에 묻어야 하는 이런 노동은 현대식 경영에는 더 이상 충분하지 못하다. 이제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에 극적으로 매달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회사의 권력자는 직원들이 강제적인 요인들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나아가 직원들이 이러한 요인들을 더욱 열렬히 지지하고 갈망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주의, 위험, 노동(Attention danger travail)>의 감독들도 도미노 피자 매장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이런 현상을 담아냈다.(6) 이곳엔 신조어와 영어식 경영용어들이 가득하고, 그 속에는 심리적 협박이 전적으로 가해지고 있다. 급여도 보잘것없는 이곳을 직원들은 ‘최고의 피자집’으로 만들고자 열정을 쏟아부어야 했는데, 최고가 되면 “기분이 좋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프랜차이즈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그런 이유를 대며 “몸이 부서져라 열정적으로 일하기”를 원하고, 미국, 프랑스, 독일 어디에서도 방법과 외관 모두 서로 바꿀 수 있을 만큼 균일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또한 마리-클로드 엘리-모랭은 저서 『행복의 독재(La dictature du bonheur)』에서 캐나다의 스포츠 의류 브랜드 ‘룰루레몬’ 매장에서 일어난 직원 간 살인사건을 언급했다.(7) 당시 피의자는 본사에서 요구하는 교육을 받고 개인의 수련이나 웰빙과 관련된 본사의 뉴에이지 정신을 따라야 했는데, 그 정도가 과해 정신이상에 이르렀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약리학자들은 구매력이 높은 상상 속의 환자들에게 팔아넘길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으며, 판매업자들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노인들이 필요로 하지 않을 가구들도 외상으로 팔고 있고, 자유기고가들은 전체를 읽을 일이 결코 없을 긴 글에서 몇 문단만을 따와 바쁘게 번역하고 있다.
상점에서는 경영진이 계산원 수가 많다고 판단하면, 매니저가 나서서 계산원들에게 정신적 학대를 가해 스스로 나가게끔 만들고 있으며, 엔지니어들은 기기에 오류가 일어나도록 프로그래밍해서 기기를 교체하려고 하고 있다. 병원시설부터 작은 동네 카페에 이르기까지 어디든 설치된 각종 IT 수단들로 직원들의 업무가 감시되고 있고, 이는 소소한 활동조차 분석해야 할 변수로 여겨지게 만들어버렸다.
심지어 담당자들도 예외일 수 없다. 실제로 자크 코타, 파스칼 마르탱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번아웃의 비밀(Dans le Secret du burn-out)>에서는 프랑스철도청(SNCF)에서 근무했던 한 관리직 직원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담아 이를 증명해 보였다.(8) 프랑스철도청은 국영기업으로, 그가 이곳에 채용됐다는 것은 곧 공공서비스에 최적화된 인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맡은 업무는 인력감축, 부서 통폐합, 수익증대 등 일반 사기업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자신이 사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처지에 이르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도 경영진들은 직원들이 불합리한 상황에도 타협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며 ‘모호함을 용인하는 능력’이란 시적인 표현을 만들어내고 있다.
1970년대 기업 경영진을 분석했던 사회학자 뤽 볼탄스키의 초기 연구부터 데이비드 그래버의 『관료주의, 규칙들의 유토피아』, 그리고 여기 언급된 여러 다큐멘터리를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 또 하나 있다. 고용주들은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없애거나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규정들을 세운 덕분에 그들 자신은 그로 인한 의무들조차 지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9)
데이비드 그래버는 저서 속에서 대형 레스토랑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만일 어느 날 저녁 레스토랑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경영자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누구든지 당장 매장으로 달려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직원에게 질책을 쏟아붓고 사무실로 돌아갈 것이다. 그 후, 마치 경기 후 실책을 돌아보는 선수들처럼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은 직원들의 몫이다. 이제 경영자가 할 일은 가장 수익이 높았던 경우를 뽑아 귀감으로 삼아서 모든 직원들에게 ‘성과’를 내도록 강요하는 것뿐이다.
직장이라는 사회와 노동법과 관련된 문제들은 정치권력의 질서가 올바르게 정립되지 않는 거대한 예외다. 다수의 헌법조항들도 노동이나 상업이라는 새로운 질서에 권한을 부여할 때는 그 의미가 흐려지고 만다. 표현의 자유도 종속과 비종속의 개념에 근거해 상당수 제한됐으며, 결사의 자유 역시 노조결성과 관련된 법 정도로 축소되고 말았다. 실질적인 자주성은 배제됐고, 협박의 위력은 거의 절대화됐다.(10) 그 이면에도 정치권력과 알릴 권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 텔레콤의 연쇄자살 사건은 다른 사례들보다 더욱 자극적이고 비극적이었기 때문에 특히 주목받았다. 그 덕분에 이 분야에 대해서는 개념이 모호한 사법기관에서도 사실관계를 (부분적으로나마) 규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러 번 반복된 동일한 관행 속에서 조용히 사라져 간 목숨들은 대체 어찌해야 할까?
글·알랭 드노 Alain Denault
국제철학콜레쥬 교수. 저서로 『보통 사람의 통치(Médiocratie)』(Lux, Montreal, 2015)가 있다.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미래 대예측』 등이 있다.
(1) François Chevallier, 『La Société du mépris de soi. De L'Urinoir de Duchamp aux suicidés de France Télécom(자기 경멸의 사회, 뒤샹의 변기부터 프랑스 텔레콤의 연쇄자살까지)』, Galimar, Paris, 2010.
(2) Leila Djitli&Clémence Gross, ‘Didier Bille, le sniper des RH(디디에 빌, 사원 저격수)’, ‘Les Pieds sur terre’, <France culture>, 2018/04/11. Virginie Vilar&Laura Aguirre de Carcer, ‘L'exécuteur, Confessions d'un DRH’(실행자, 인사 담당자의 고백), ‘Envoyé spécial’, Frnace 2, 2018/03/08.
(3) Lucia Sanchez&Emmanuel Geoffroy, ‘Petits chefs: les repentis’(회개한 소사장), ‘Les Pieds sur terre’, <France Culture>, 2018/01/18.
(4) Frederick Winslow Taylor, 『La Direction scientifique des entreprises(과학적 회사 경영)』, Dunod, Paris, 1957(1st edition: 1911).
(5) Jean-Robert Viallet, ‘La Mise à mort du travail(노동의 사형)’. 2. L'Aliénation, YAMI 2 Productions, France. 2009.
(6) Pierre Carles, Christophe Coello, Stéphane Goxe, ‘Attention danger travail(주의, 위험, 노동)’, CP Productions, France, 2003.
(7) Marie-Claude Elie-Lorin, 『La Dictature du bonheur(행복의 독재)』, VLB Editeur, Montreal, 2015.
(8) Jacques Cotta&Pascal Martin, ‘Dans Le Secret du burn-out(번아웃의 비밀)’, France 2, 2016, 52min.
(9) Luc Boltanski, 『Les Cadres. La formation d'un groupe sociale(경영진, 사회조직의 구성)』, Les Editions de minuit, coll. ‘Le sens commun’, Paris, 1982; David Graeber, 『Bureaucratie. L'utopie des règles(관료주의, 규칙들의 유토피아)』, Les Liens qui libèrent, Paris, 2015.
(10) Danièle Linhart, ‘Imaginer un travail sans subordination(종속 없는 노동을 상상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7년 7월호‧한국어판 2017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