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바다를 둘러싼 욕망의 모자이크
[르포르타주] 흑해의 항구들
환경오염의 영향이 심한 내해이자, 때론 ‘외진 곳’으로 인식되는 흑해가 중대한 전략적 판도를 뒤엎을 핵심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유럽연합, 러시아, 터키,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및 중동아시아 국가 사이의 새로운 역학관계 시험의 장으로 변모한 흑해 주변 각 지역의 상황을 알아보자. <<원문 보기>>
시노프-터키
2010년 5월 1일 시노프 노동조합 소속 조합원들은 아타튀르크 광장에 집결했고, 시노프 항구의 원양어선에는 ‘시노프는 원자력발전소를 원치 않는다!’는 대형 펼침막이 내걸렸다. 흑해를 바라보는 터키의 작은 연안도시에서 원전 건설 계획 때문에 주민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 이스탄불에서 시노프로 이어지는 해안선은 아직 야생 그대로의 자연이 보전돼 있으나, 시노프에서 그루지야로 이어지는 약 600km 구간은 전부 콘크리트 도로가 깔려 있다. 도시와 해안 사이가 고속도로 하나로 완전히 막혀 있고, 갑작스레 개발된 촌락에는 종종 준공이 끝나지 않은 수백 개 건물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바다를 메워 만든 고속도로는 현재 침식 위험이 있으며, 이를 예방하려고 몇km마다 콘크리트 제방을 세웠으나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꼴이 됐다. 콘크리트 제방이 해류를 막고 퇴적물을 쌓이게 하기 때문이다. 도로를 건너가야 도달할 수 있는 이곳 ‘신항’은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수많은 선박이 버려진 듯 보인다.
과거 흑해의 활발한 어업 활동도 어로 자원의 고갈로 위협받고 있다. 러시아는 터키에 엄격한 어업구역 제한 규정을 부과했다. 흑해의 해수는 부영양화로 위험에 처해 있다. 이런 현상은 농업에서 야기된 질소와 인 같은 영양분이 과도하게 바다로 흘러든 데 따른 직접적인 결과다. 주로 드니에스테르강과 다뉴브강 같은 거대 지류가 흘러 들어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염도가 낮은 흑해에서 이런 부영양화 현상이 확대되고 있다.
흑해오염방지위원회 같은 다양한 정부 간 기구가 몇 해 전부터 이 문제를 경고해왔으나, 조직력이 없는 이 기구들은 권고안밖에 내놓지 못했다.(1) 게다가 그동안 환경보호는 연안국의 우선 과제가 아닌 듯했다.
15년 전 에너지 시장이 민영화되고 국영기업인 터키전력청의 독점이 끝난 뒤 댐 사업 프로젝트가 양산되는 상황에서, 터키 정부는 정부기관인 EPDK를 통한 시장 조절 역할에만 만족하고 있으며, 향후 49년간 하천 사업 권한은 민간 기업에 양도됐다. 터키 내에서 제출된 댐 사업 프로젝트는 1300건이 넘고, 그 가운데 600건은 흑해 지역과 관련한 프로젝트다. 피르티나 유역에 작은 호텔을 갖고 있는 셀코 귀네이는 “사람들의 반대 운동에 힘입어 현재 이쪽 유역의 발전소 프로젝트는 기각된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 댐은 지역 에너지 수요의 0.14%만 커버할 예정이나, 전력 수송과 관련한 손실은 발전망 전체에서 30%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귀네이는 피르티나 유역에 생태주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창한다.
삼순- 터키
“역사적으로 6대째 시르카시아인들은 생선을 먹지 않는다.” 삼순 시르카시아 협회 대표 오탕 도그베이의 설명이다. 시르카시아인은 러시아가 흑해 북쪽 연안을 정복한 뒤, 터키로 유입된 민족이다. “선조들은 노보로시스크에서 소치에 이르기까지, 현재 러시아 소속 연안 전체에서 군락을 이루며 살았다. 19세기 초부터 제정 러시아는 시르카시아를 정복하려 안간힘을 썼다.(2) 결국 제정 러시아는 1864년 목표를 달성했고, 시르카시아인은 크바다 전투에서 굴복했다. 터키로 피신한 시르카시아인은 자신을 태워갈 배가 오길 기다리면서 연안에 몰려 살았다.(3) 많은 이주민이 이 지저분한 지역에서 살다 말라리아나 다른 질병으로 죽었고, 나머지는 이주 도중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주검이 바닷가에 버려졌다. 시르카시아인이 여전히 생선을 먹지 않는 이유다.”
그런 터키 시르카시아인 4천~5천 명이 움직이고 있다. 바로 2014년 소치에서 열릴 동계올림픽에 반대하기 위해서다. 주로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건 고산지인 ‘크라스나야 폴랴나’ 스키장이다. 크바다 전투가 벌어진 곳과 일치한다. 시르카시아 단체들은 국제올림픽위원회에 제소했으나 만족스러운 답은 얻지 못했다. 시르카시아 단체들은 시르카시아인에 대한 ‘인종 학살’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4월 초, 미국에 본부를 둔 세계시르카시아총회 대표단이 그루지야 의원들과 회동했다. 미하일 사카슈빌리가 이끄는 그루지야 정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모스크바에 반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루지야가 이런 인종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지 않을까.
트라브존-터키
20세기 내내, 흑해 연안은 인구의 혼합이 극심했다.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인구 교환을 명시한 로잔 협정(1923) 이후, 터키 쪽 흑해 연안에서 ‘흑해’ 그리스인들은 실질적으로 모두 자취를 감췄다. 과거 그리스의 ‘트레비존드’(4)라고 불린 트라브존은 터키 민족주의 최후의 보루다. 2007년 1월 19일 암살당한 아르메니아 기자 흐랭크 딩크의 살해 용의자도 이곳 출신이었다.(5) 윌테킨 위세잔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서 본뜬 ‘룩셈부르지스트 혁명가’를 자처하며 인권 수호에 앞장서는 현지 위원회를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저녁 때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는 우리에게 군대 및 여러 첩보기관이 여전히 트라브존을 하나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 사이에서 케말리즘의 군사 전통은 죽지 않았다.”(6)
페리선은 매일 터키의 트라브존과 러시아의 소치를 이어주고 있는데, 선박은 낡고 불규칙하게 움직이더라도 분주해 보이는 수많은 사람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배에 오른다. 함께 배에 탄 승객 가운데에는 ‘보따리장수’ 러시아 여성이 더러 있었다. 이들은 되팔기 쉬운 물건이나 의류가 담긴 보따리 몇 개를 들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루지야 출신의 러시아 이주노동자도 터키를 지나가야 한다. 2008년 전쟁 이후 그루지야에서 러시아로 바로 가는 모든 길이 끊겼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장차 올림픽 손님을 맞이하게 될 소치의 아들러 연안에서는 크라스나야 폴랴나로 향하는 고속도로 건설이 한창이다. 아들러의 아담한 해수욕장은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아브하지아 자치공화국과의 경계에 맞닿아 있다.
수후미 압하스 자치공화국-그루지야
압하스 대통령의 자문역인 비아체슬라브 쉴릭바는 “물론 우리는 올림픽에 따른 경제적 파급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확언한다. 현지어로 ‘영혼의 나라’라는 뜻의 ‘Apsny’로 불리던 옛 소비에트 유역의 ‘진주’ 압하스는 1994년 8천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혹독한 항전 끝에 그루지야로부터 분리됐다. 압하스 자치공화국은 그루지야군과 러시아군 사이의 2008년 8월 전쟁 이후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7) 인구 25만 명의 작은 자치공화국에서 압하스인은 전체 인구의 45%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과 더불어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 흑해 그리스인이 살아가고 있다. 25만 그루지야인의 대부분은 압하스를 떠나거나 1994년 전쟁 이후 추방됐다.
압하스는 그루지야가 선포한 금수 조치로 타격을 입고 있다.(8) 이 조치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적용된다. 그런데 흑해를 향해 펄럭이는 커다란 압하스 국기가 걸린 압하스의 수도 항구 수후미에는 트라브존에서 출발한 화물이 주기적으로 들어온다. 이 선박들은 그루지야 바투미에서 합류할 예정이지만, 바다에서 항로를 변경해 압하스에 화물을 하역하러 온다.
수도 거주민들이 해변 도로의 카페에 앉아 있다. 모스크바가 이 작은 지역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지만 아직 관광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수후미가 러시아의 하수인이 될 생각은 없다. 바갑시 대통령은 “우리가 1만 명 규모의 두 러시아군 기지를 받아들인 건 그루지야군의 공격에 맞서 시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라고 강변한다. 그의 어조는 한층 더 강경해진다. “압하스가 러시아의 보호령이라면 그루지야는 미국의 보호령이 아닌가? 코소보가 독립국으로 인정됐다면 압하스가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수도권에서는 삶이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무너질 듯한 건물이나마 사람들이 입주해 살고 있고, 카페나 작은 상점이 곳곳에서 생겨난다. 전쟁의 후유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압하스 주립대학 건물이 1만 명 가까운 학생들로 붐비고 있다. 스무 살 남짓 된 남학생 구디사 츠칼리아는 이곳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한다. 학교에서 약 50여km 떨어진 구다우타시 출신인 이 학생에게는 장차 외국에서 자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이 있다. 현재로서는 러시아,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나우루공화국, 그리고 트랜스니스트리아·남오세티야 등 아직 독립이 인정되지 않은 군소 공화국, 혹은 북키프로스 터키공화국 등의 나라에서만 압하스의 독립국 지위를 인정한다. 유엔 주재로 그루지야와 진행 중인 협상은 현재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2009년 6월 압하스는 유엔사절단을 철수시키고, 유럽 군 감시단이 자국 영토를 관측할 수 없게 조치했다.
바투미-그루지야
압하스와 그루지야 사이의 ‘국경’에는 잉그리강 위로 놓인 다리가 지나간다. 우리는 아브하지아에 주재하는 그루지야인과 마주쳤는데, 이들은 강 건너편에 있는 그루지야의 주그디디시에서 장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길이었다. 두 지역을 이어주는 길목에서는 압하스 민병대와 그루지야 경찰들이 열과 성을 다해 일하고 있었으며, 국경지대에서는 사고가 빈번히 일어났다. 지난 6월 8일에는 압하스의 국경 수비대원 한 명이 살해됐다. 그루지야는 무력으로 압하스를 정복하는 것 외에 다른 시나리오는 고려하지 않는다. 2003년 11월 23일 ‘장미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은 아자리야, 압하스, 남오세티야 등 분리독립을 원하는 자치국을 그루지야로 다시 편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곳은 아자리야 하나뿐이다.
이제 서방 친화적 성향의 그루지야 정부는 바투미를 그럴싸한 모델 도시로 만들려고 한다. 그루지야 대통령 측근이 요직을 전부 차지한 지금, 그루지야 정부는 바투미에 열성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낡은 매력의 해수욕장에는 고급 호텔들이 솟아오르고 있는데, 24층 규모의 셰러턴 호텔이 지난 4월 1일 문을 열었고 하이엇·힐턴·래디슨 등 수많은 호텔이 건축 중이다. 2008년 전쟁 이후 바투미에는 관광객이 거의 전무한 상황이지만 터키에서 금지된 카지노를 즐기러 올 터키인을 노리고 있다. 호텔 수만큼이나 카지노가 많기 때문이다.
오래된 도시 바투미의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상업항 또한 리노베이션이 한창이다. 이 항구는 향후 49년간 카자흐스탄 석유 지주회사 ‘카즈트랜스오일’에 양도됐다. 2009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철로를 통해 바투미로 오는 석유의 연간 수송량은 700만t으로 늘어났다.
항구 책임자 사무국에는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두 사람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주라브 슐가이아는 소비에트 시절 22년간 외교관을 지낸 인물로, 주로 아랍권 국가에서 직무를 수행하며 경협 업무를 담당했고, 이어 그는 카자흐스탄 주재 그루지야 대사로 임명됐다. 외교계를 떠난 뒤 자신에게 바투미 항구 책임직을 요구한 게 자국의 이익을 고려한 카자흐스탄 당국이었다는 점을 그는 인정하고 있다.
러시아와 관계가 돈독한 카자흐스탄은 현재 그루지야에 막대한 투자를 감행하고 있다. 이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 사이에서는 두 가지 이론이 통용된다. 하나는 카자흐스탄 기업이 러시아 자본의 가림막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 반대로 카자흐스탄이 러시아와의 지나치게 배타적인 친선 관계에서 벗어날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것이라는 점이다. 슐가이아는 그루지야와 러시아의 관계가 거의 단절되다시피 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전쟁에는 끝이 있다”며 긍정적 태도를 고수한다.
포티-그루지야
바투미 북부에서 50여km 떨어진 곳에 ‘포티’라는 항구가 있다. 2008년 8월 전쟁 때 러시아 흑해함대의 폭격을 받은 포티항은 향후 49년간 에미라 드 라스알카이마크사(社)에 양도돼 있다. 현재 항구 재건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며, 앞으로 캅카스와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주요 해양 관문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근거지를 둔 흑해항구연합 대표 막심 쇼닌은 포티항과 불가리아 바르나항 사이의 교류 관계 발전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러시아를 따돌리면서 흑해 동부와 서부 연안 사이의 교류가 늘어난 것은 유럽∼캅카스∼아시아 운송로 연결 사업인 트라세카 프로젝트의 맥락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1998년 시작된 트라세카 프로젝트에는 유럽연합과 역내 14개국이 참여한다.(9) 이 프로젝트는 카스피해 및 중앙아시아의 연료 수송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트라세카 프로젝트는 소아시아로의 접근성 확보도 겨냥한다. 포티항은 아르메니아로 연결되며, 이에 따라 이란으로의 접근이 용이해진다.
우크라이나의 오데사항과 불가리아의 바르나항은 서로 치열하게 맞서며 대립하고 있다. 현재의 교류 증가는 우크라이나를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지난 2월 7일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당선된 뒤 친모스크바 쪽으로 질서를 재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모든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다. 러시아와 터키의 교류에 비해 포티-바르나 라인이 아직 뒤처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쇼닌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는 선박의 80%가 러시아 선박이거나 러시아행 선박”이라고 내다본다.
세바스토폴-우크라이나
세바스토폴은 오랜 기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갈등이 점철된 도시다. 소비에트 시절, 이 도시는 우크라이나에 편입된 크림 자치공화국에 소속되지 않은 채 특별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뒤, 러시아는 여전히 이 도시에 대한 키예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폐쇄 도시’의 지위를 아직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에 가려면 통행 허가증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1997년 조약이 체결돼 모스크바는 더 이상 세바스토폴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권리에 반대하지 않게 됐다. 다만 흑해함대용으로 쓰일 항구가 러시아 쪽에 임대됐다. 지난 4월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 임대계약을 연장해주었고, 단기 임대차계약 기간은 이제 2042년까지 늘어났다. 현재 러시아군 2만 명 가까이가 세바스토폴에 주둔해 있으며, 대개는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
커다란 레닌 동상 옆에 있는 세바스토폴 정박지에는 러시아 해군 수로 측량국 건물이 있다. 페인트칠은 색이 약간 바랬지만, 애국적 장식은 소비에트 시절 이후로도 변한 게 없다. 예브게니 게오르기예비치가 환한 미소와 진심 어린 악수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크라이나 국적의 러시아 장교 게오르기예비치는 “흑해함대가 경비를 맡아주고 있다”며 자신한다. 2008년 8월 전쟁 때 포티항에서 그루지야 함대를 격파한 것도 바로 세바스토폴에서 출발한 군함들이었다.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난간에 팔을 괸 채, 안드레이 코볼레프는 자신이 너무도 잘 아는 이 항구를 바라본다. 일간지 <세바스토폴스카이아 가제타>의 소유주인 코볼레프는 세바스토폴에서 꽤 알아주는 서정시인이기도 하다. “다수의 주민에게 세바스토폴은 전쟁 중 나치에 저항한 도시이자 소비에트연방의 자부심으로 인식된다. 이런 과거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소비에트연방과 그 영웅적 신화는 늘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도시도, 그렇다고 러시아의 도시도 될 수 없는 세바스토폴은 하나의 항구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며, 확실히 따로 떨어진 독자적인 도시다.”
코볼레프는 전쟁의 도시였던 세바스토폴이 평화의 도시로 탈바꿈해 일종의 치외법권 같은 것을 누리는 꿈을 내려놓지 않고 있다. 물론 그의 꿈과 무관하게 러시아 흑해함대가 계속 이곳에 주둔해 있는 게 현실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주둔 기지를 강화한 이후 러시아가 ‘흑해의 성채’를 포기할 가능성은 더욱 만무해졌다.
오데사-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가 최근 몇 달 들어 정상화됐지만, 우크라이나와 불가리아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 상태다. 다뉴브 삼각주가 양국 사이 불화의 씨앗이 되고 있다. 3500㎢에 가까운 면적의 다뉴브 삼각주는 두 나라 모두에 걸쳐 있다. 유럽 하천에서 흑해로 이어지는 관문인 다뉴브 삼각주는 유럽 유일의 천연 삼각주로,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곳에는 식물 1200여 종, 조류 300여 종, 민물 어류 45종이 서식하고 있다.
“다뉴브 삼각주의 보호는 루마니아 당국과 협력하에 해야 한다. 생태계에는 국경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게 니콜라이 베를린스키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몇 년 전 우크라이나 정부가 다뉴브 삼각지를 훼손하려는 걸 막기 위해 키예프 학술원과 싸우다가 심장 발작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덧붙인다. 현재 오데사 수리학 연구원에서 연구 중인 베를린스키 교수는 “나는 운하도 반대하지 않고, 다뉴브에서의 항해로도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뉴브 삼각주를 개발하는 방식은 끔찍할 정도”라고 말한다.
2004년 우크라이나는 자국 내 영토에 위치한 삼각주의 천연 지류 비스트로를 항해로로 뚫기 위한 공사를 시도했다. 2007년 5월 14일 이후 3년간의 공사 끝에 화물선과 컨테이너 운반선이 흑해에서 다뉴브와 유럽 내륙 지역으로 드나들 수 있게 됐다. 몇 달 동안 불도저로 퇴적물 준설 작업을 했고, 몇 km에 이르는 해안 방파제를 우크라이나의 다뉴브강 하구에 만들었다. 우크라이나가 중요시하는 건 영리적 차원의 목표다. 그동안 루마니아 영토에 속한 술리나 지류를 경유하던 100여 척의 우크라이나 선박이 루마니아의 관세에서 해방되는 것, 그리고 우크라이나 정부에 추가로 얼마의 외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새로운 국제 항해로를 여는 걸 겨냥한 것이다.
베를린스키 교수는 “환경적 영향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운하의 정비 사업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고 개탄한다. “강둑을 과도하게 개발해 다뉴브에서는 퇴적물이 떠내려갔고, 이에 따라 삼각주는 매년 약 40m가 더 늘어난다. 이는 깊은 물에서 항해로를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운하를 준설해야 한다는 걸 뜻한다.” 현재 비스트로에서 준설된 퇴적물은 연안에서 5km 떨어진 곳에 버린다. 퇴적물은 다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물을 따라 떠내려간다. 루마니아 쪽에 위치한 삼각주의 또 다른 항해로인 술리나 지류의 하구에 쌓인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이 루마니아의 화를 돋우는 것이다.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뒤, 두 나라는 해상 국경과 영해를 규정하는 해안선 결정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논란이 되는 대륙붕 밑에 수백억㎥의 가스와 1천만t의 석유가 매장돼 있을지 모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쉽사리 넘겨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루마니아가 헤이그국제재판소에 제소한 양국 간 분쟁은 2009년 2월 3일로 종결됐다. 문제가 되는 지역의 20%, 즉 2500㎢는 우크라이나 법원이, 9700㎢에 달하는 나머지 80%는 루마니아 법원이 해결하게 된 것이다.
빌코보-우크라이나
이런 지정학적 문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소도시 빌코보는 도시를 관통하는 운하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베니스’라 불리며, 8천 명 가까운 인구가 살고 있다. 2004년 운하가 이 지역에 4천 개 일자리를 가져다줄 거라던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약속과 달리 이 지역의 경제 상황은 여전히 끔찍한 상태다. 군인 출신으로 지금은 관광가이드 일을 하는 니콜라이 대위는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 더 이상 일자리도 없고, 소비에트 시절의 항구와 공장은 문을 닫았으며, 그나마 아직 돈이 되는 일은 갈대를 꺾어 네덜란드에 수출하는 게 유일하다” 고 개탄한다.
빌코보 바로 맞은편, 반대쪽 연안에 있는 루마니아와의 교류는 거의 불가능하다. 도로도 다리도 없고, 삼각주에 있는 루마니아 대도시 툴체아와 빌코보를 이어주는 연결 수로도 끊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마니아에 가려면 몇 시간이 걸리는 여행을 감행해야 하며, 가는 길도 무척 험하다. 니콜라이 대위는 “이제 루마니아는 유럽연합 회원국이기 때문에, 루마니아에 가려면 비자가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갈대숲과 늪지대 사이에 위치한 소규모의 우크라이나 경찰 초소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엄하게 감시한다. “소련 시절보다 훨씬 더 굳게 국경이 닫혀 있다. 오늘날 삼각주는 새로운 ‘철의 장막’으로 나뉘어 있다.”
글•장아르노 데랑 Jean-Arnault Dérens, 로랑 제스랭 Laurent Geslin
데랑은 <르 쿠리에 데 발칸>의 편집인이며데랑은 <르 쿠리에 데 발칸>의 편집인이며, 제스랭은 이 잡지의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고라니인 나라로의 여행: 21세기 초의 발칸반도>(Voyage au pays des Gorani: Balkans, début du XXIe sècle·Cartouche ·Paris·2010)을 같이 펴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의 역서가 있다.
<각주>
(1) ‘다뉴브 및 흑해 지역’(La région du Danube et de la mer Noire), Europa.eu, 2005년 6월 참고.
(2) 옛 캅카스 지역. 인구 대부분이 이슬람계다.
(3) Alexandre Grigoriantz, <캅카스: 끝없는 전쟁의 기원>, Gollion, Infolio, 2006.
(4) 이 표현은 흑해를 일컫는 그리스 단어 ‘Pont Euxin’에서 왔다. 1990년대 이후 옛 소련의 수많은 그리스인이 그리스로 옮겨갔으나, 러시아와 크림반도에는 여전히 큰 규모의 그리스 공동체가 있다.
(5) 흐랭크 딩크는 2개 국어 신문 <아고스>를 창간한 인물로, 터키의 아르메니아 공동체에서 영향력 있는 지성인이다.
(6) 정교분리 원칙과 민족주의를 고집하던 터키 공화국 창시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로부터 계승된 이데올로기.
(7) Vicken Cheterian, ‘캅카스를 뒤흔든 5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2월.
(8) Leon Colm, <확률 제로의 압하스: 가상 국가 담론>, Autrement, Paris, 2009. Jean Radvanyi, Nicolas Beroutchachvili, <캅카스의 지정학적 아틀라스>, Autrement, Paris, 2010.
(9) Jean Radvanyi, ‘러시아 남부의 교통 및 전략 지정학’,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