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한 한반도는 국가의 평화와 안녕을 열망했으나,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면서 그 뜻은 좌절되고 만다. 분단된 적이 없었던 나라는 처음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첨예한 대립이 소용돌이치는 격랑의 시대를 거치게 된다. 이후 어떤 형태의 평화조약도 체결되지 않은 채로 6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945년 9월 10일 밤, 지진대의 균열선과도 같은 분단선이 한반도를 파고들면서 오랜 세월 단일문화권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지켜온 나라를 둘로 갈라놓았다. 한편,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군대는 이북지역에 남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며 빠르게 남하했고, 일본의 패망 전부터 이미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을 우려한 미국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 남북을 각각 미국과 소련이 나누어 관할하는 분할통치안을 서둘러 마련한다. 이 같은 미소분할통치는 본래 한시적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자주적인 독립국 실현에 대한 한민족의 부푼 기대는 곧 좌절과 환멸로 바뀐다. 한반도의 38도선을 축으로 한 미소의 군정 체제는 남북에 각기 다른 정부가 수립되는 형국을 초래한다. 1948년 8월 15일 남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이어 9월 9일 북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됐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역사 이래 처음으로 공식적인 분단 상황에 놓였고, 남과 북은 서로가 한반도의 정통적인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념적 대립으로 시작된 한반도 분단은, 우리로 하여금 1945년 8월 당시 남과 북 모두 사회변혁을 위한 준비가 이미 충분히 무르익은 상태였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한다. 자생적으로 꽃을 피운 민중운동과 건국준비위원회의 설립이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동서진영의 대립구도는 한반도의 자주적 독립국 실현을 가로막았다. 훗날 첨예한 대립국면으로 치닫게 되는 각 국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어떤 양상을 보였을까?
북한식 스탈린주의 모델
소련은 북한에 상당한 물자와 기술 지원을 제공하는 한편, 당과 군, 정부와 헌법 등의 체계를 재편해 나갔다. 만주빨치산 파는 소련군정의 후원을 바탕으로 실권을 장악했고, 소련은 북한 지도부를 통해 북한 내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1948년 말 소련군정이 북한에서 철수하면서 동유럽의 위성국들과는 매우 다른 사회주의 체제가 수립됐다. 이는 북한의 스탈린주의화라 일컫기보다는 스탈린주의 모델을 북한식으로 해석해 적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해방 직후 한반도의 공산주의자들은 출신 배경이나 성향을 불문하고 정당성 결여 문제에 봉착한다. 자주적인 조국해방을 이뤄내지 못한 것이 주된 원인이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은 투옥되거나 비밀리에 활동을 이어갔고, 일부는 중국 옌안으로 퇴각한 상태였다. 김일성을 수장으로 하는 만주빨치산 파의 경우, 일본 관동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령 연해주로 월경해 있다가 일제 패망 후 소련군정을 따라 북한에 돌아올 수 있었다. 만주빨치산 파는 소련군정 시절 한반도 내에서의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었다. 김일성은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항일무장투쟁을 계승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이를 건국신화로 채택해 한 치의 이견이 없는 지도자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한다.
해방을 계기로 남한의 정치지형도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한반도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선포한 미군은 당시 한반도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구 식민지배관료 출신 인물들과 일제하에서 경찰로 복무했던 인물들을 기용함으로써 대중적 반감을 사기도 했다. 이런 반감은 머지않아 항쟁과 반란을 통해 표출됐고, 지방을 중심으로 무장봉기로까지 발전했다. 특히 미군정이 발탁한 정부관료에는 친일파 계열의 인사들이 주로 포진해 있어 대중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미군정은 미국에 협조적이면서도 여론을 규합할 만한 인물을 찾으려 국외로 눈을 돌렸고, 미국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내고 당시 70세에 접어든 이승만을 적임자로 점찍었다. 이승만은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일 뿐 아니라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1945년 10월에 김일성은 소련군정의 귀국환영 홍보 속에서 평양주민들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후 불과 며칠 만에 남쪽에서 미국은 이승만의 귀국을 축하하는 공식환영회를 열어 ‘전설적 애국자’로 그를 일반에 소개했다. 이후 이 두 사람은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이남과 이북에 각각 진주하고 있는 미국과 소련의 이념을 구현하게 된다.
미군정은 초기부터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창설해 군사분계선을 방위하는 국경경비대를 구성했으며,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우익의 편에 서서 저항세력을 억압하는 경찰조직체계를 마련했다. 당시의 대 공산권 봉쇄전략(Containment)은 남한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개입을 시사한다. 미군정은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이 창당한 조선인민당(1945년 12월 불법단체로 규정)과 같이 불온하게 여겨지는 좌익활동을 견제하는 데에만 열중한 나머지, 사회적 동요의 근원이 좌우이념을 초월해 과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독립국을 되찾고자 하는 민중의 열망에서 비롯됐음을 간과하고 있었다.
군정 사령관 존 하지 미 육군 중장은 경찰기구의 인력을 일본 식민지 시기의 85% 규모로 유지했다. 미국중앙정보국(CIA)은 1948년의 보고서를 통해 당시의 경찰대가 ‘극우 세력 및 보수 지배계급이 주를 이루는 정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극히 폭압적’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1948년 공포와 폭력의 분위기에서 실시된 5.10총선거는 가히 폭동에 가까운 상황으로 확대됐다. 미군의 주둔과 우익 테러단체 등에 반대하는 무장 투쟁이 제주에서 발생했는데, 1948년~1949년 기간의 사망자 수가 2만 명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에 동조하거나 그럴 것으로 추정되는 무리에 대한 학살도 서슴없이 자행됐는데, 심지어 여성과 아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사실은 집단발굴된 희생자 유골을 통해 밝혀졌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즉결처형으로 인한 희생자가 20만 명에 달하며 그중 2만 명은 1950~1951년 말 정치범에 해당한다고 집계하고 있다.
투쟁의 배후세력은 누구인가?
남한 정부는 이런 무장투쟁을 좌익세력들이 주민들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으로 봤다. 브루스 커밍스는 그의 저서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남한에 침투했을 수는 있으나, 쟁점은 “누가 폭동을 유발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왜 폭동이 더는 확대되지 않았는가의 문제”라고 CIA 보고서를 인용해 지적한다.(1) 1950년 봄에 이르러 남부지역에 집중된 정부군의 진압으로 무장항쟁은 사실상 중단됐지만, 38선 부근에서는 남북 간의 국지적인 무력충돌이 제법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적인 우위를 점하던 남한의 공습에 제대로 대응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1949년 5월 개성시(베를린에 세워진 4개의 점령구역처럼 개성은 2개 구역으로 나뉘어 남과 북이 분할 점령함)와 옹진군, 서해안, 그리고 서울시 북부로 이어지는 치열한 국지전이 발생했다. 이런 국지전은 8월에 이르러 더 활발해지는 양상을 보이는데, 어느 진영에서 선제공격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앞서 1949년 국지전이 발생했던 옹진반도에서 첫 교전이 일어났다. 얼마 안 가 38선의 전역으로 교전이 확대돼 북한의 7개 사단은 38선 이남으로 진격했다.
이때 북한군의 인원은 7만 명으로 4만 명의 남한보다 수적으로 우세했고, 도중에 의용군도 합류해 전속력으로 남진할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 열세인 남한군은 북의 화력에 밀려 맥없이 무너지고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된다. 9월 초에 이르러 북한군은 부산을 제외한 한반도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대부분 각료 및 잔류 군부대와 함께 부산에 피신해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미국 지휘 하의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해 북한군의 배후를 공격하면서 전쟁의 판도는 뒤집혔다.
소련의 반대, 중국의 동의
미국은 UN 결의를 끌어내고 20여 개 회원국(프랑스 포함)에서 파견한 군대로 결성된 UN 연합군을 지휘한다. 2주 후, 남한의 군대와 UN군은 38선을 넘어 중국 접경의 압록강까지 북진을 계속한다. 9월 28일 김일성은 소련의 전면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소련이 개입을 거절하자 중국에 다시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이윽고 10월 8일에 중국은 인민지원군을 결성하고, 그 후로부터 열흘 후 마오쩌둥이 참전 명령을 내린다. 그렇게 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11월 말에는 가장 격렬한 전투가 펼쳐진다. UN 연합군은 11월 8일 신의주에 소이탄 550톤을 투하했으며, 보다 동쪽에 위치한 회령에 네이팜탄 폭격을 감행한다.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북한군은 UN 군대를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시키기에 이른다. UN 연합군의 철수로 인한 혼란 속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11월 30일에 핵무기 사용까지 고려했지만, 이후 쏟아질 비난을 우려해 시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듬해 2월 말에 연합군은 서울 남부까지 밀려나지만, 4월과 5월에 이어진 격전을 치른 끝에 여름 즈음에는 38선을 경계로 전선이 안정된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북에 대한 미국의 폭격은 계속됐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약 4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민간인이었다.
글·필립 퐁스 Philippe Pons
기자, 본 기사는 필자의 저서 『Corée du Nord. Un État-guérilla en mutation(게릴라 국가 북한의 변혁)』(Gallimard, Paris, 2016)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번역·이푸로라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KDI 국제정책대학원 졸업
(1) 브루스 커밍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전쟁의 기원), vol II: 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년
북에서 남으로의 역사
여지없이 두 교전당사국은 한국전쟁(1950 ~1953) 개전 주체에 대해 철저히 다른 입장을 견지함을 알 수 있다. 일본의 교과서는 한국전쟁이 일본에 미친 경제적 효과에 중점을 두고 서술한다.
북한–공화국의 위력이 날을 따라 강화되자, 이에 당황한 미제침략자들은 공화국을 요람기에 없애버리려고 침략전쟁을 다그쳤다. (중략) 오랫동안 침략전쟁을 준비해온 미제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놈들은 주체39(1950)년(1) 6월 25일, 드디어 조선전쟁을 일으켰다. 이날 이른 새벽 적들은 38선을 넘어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불의의 공격을 게시했다.
38선을 넘어선 적들은 공화국북반부로 점점 더 깊이 기어들었다. 우리 조국과 인민 앞에는 커다란 위험이 닥쳐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험에 처한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기 위해 적들의 침략전쟁에 정의의 해방전쟁으로 대답할 단호한 결심을 내리시고 침략자들을 쳐부술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셨다.
-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의 혁명력사: 고등중학교 제4학년용』, 교육도서출판, 평양, 1999년
남한–북한 공산주의자들은 통치기반을 정비한 후,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남침 준비를 서둘렀다. 그들은 소련과 비밀 군사 협정을 맺어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6·25 전쟁 직전에 북한의 병력은 20만 명에 이르렀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투기와 전차 등의 현대식 무기까지 갖췄다. 그러나 당시 남한은 각지에서 발생한 소요사태와 파업 등으로 사회가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으며,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식량부족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정당과 사회단체의 난립으로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실정이었고 군사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남한의 병력은 10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무기와 장비도 뒤떨어진 상태에 있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남침 준비를 서두르면서도, 겉으로는 남한에 대해 평화공세를 펴 그들의 남침 의도를 숨기려고 했다. 그러다가 1950년 6월 25일, 마침내 북한 공산군은 38선의 전 지역에 걸쳐서 남침을 감행했다.
- 『중학교 국사』 ,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서울, 2000년
일본 – 북한군이 빠르게 남하하는 사이,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유엔군을 결성해 남한을 지원하기로 했다. 미군을 중심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한반도 북쪽에 중국접경까지 진격해 올라갔고 중국은 의용군을 북한에 파병했다(...). 1953년에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조선전쟁이 일어나자 일본본토와 오키나와의 미국 군기지가 사용됐고, 대량의 전쟁물자 조달을 일본에 발주하는 특수가 증가해 일본경제는 급속한 성장을 기록했다.
- 『일본 현대사: 중학교 교과서』, 도쿄, 국제교육정보센터, 1994년
발췌문 출처: <수상한 교과서(Manuels scolaires, le soupço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3년 9월
(1) 주체연호: 김일성이 탄생한 1912년을 원년, 즉 1년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