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려면

2018-11-29     이혜정 |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 교수

수많은 어려움을 뚫고 2018년 4월 27일 한국과 북한이, 그리고 몇 주 후인 6월 12일에는 미국과 북한이 합의에 이르렀다. 비핵화가 전제조건이 되지 않은 최초의 대화였다. 이 대화의 세 주인공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화해한 듯 보이지만, 이 이례적인 상황이 만들어낸 기반 위에 새로운 안보체제를 만들고 구체적인 로드맵을 수립하는 일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한국이 나타나, 마침내 우리는 살 수 있었다.”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딘 애치슨은 자신의 회고록 『현대사가 만들어지는 현장에서』 (1)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간략하게 줄인 회고록 제목에서부터도 미국의 입장으로 쓰였음을 암시적으로 알 수 있는데, 실제로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소련, 북한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세계를 위협한다는 기치 하에 독일, 일본 그리고 한국을 자신의 헤게모니 안으로 끌어들였다. 미국은 이 헤게모니를 통해 경제적 우호관계뿐만 아니라 동맹체제도 구축하게 됐다. 

하지만 이 헤게모니는 소련 붕괴 이후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과거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고문이었던 게오르기 아르바토프가 이미 예언한 바 있었다. “상대방에게 가장 치명적인 일은 바로 상대의 적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새로운 위협을 찾아 떠난 미국은 서둘러 북한의 핵 문제를 자신의 도구로 삼았다. 한국전쟁으로 생겨난 정전체제를 냉전이라는 틀 외연으로까지 확장시키고자 한 것이다. 미국, 한국 그리고 일본으로 구성된 동맹은 북한에게 경제적·외교적 이익을 제공하는 대가로 핵무기와 미사일 포기를 요구했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한정상회담과 같은 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은 앞에서 살펴본 과거 판도들과는 아주 다른 양상을 띤다. 이 두 번의 정상회담들을 통해 평화로 나아가기 위한 총 3가지 사안이 합의에 도달했는데, 새로운 남북한 및 북미관계 수립·한반도 평화체제 수립·한반도에서의 완전한 비핵화가 바로 그것이다. 

“평화, 새로운 시작”이라는 희망 가득한 슬로건과 함께 판문점에서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만났다. 두 지도자는 앞으로 양국 간에 더 이상 전쟁과 적대행위들은 없을 것이라 천명했다. 남북한이 함께 협의한 공동선언문인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에서는 과거 대한민국 내 보수층과 미국 외교전문가들이 대화의 필수조건으로 내세웠던 북한의 일방적 비핵화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 가지 사안을 담은 전략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내 군사적 긴장상태를 실질적으로 해소한다는 내용의 1,2조에 이어 판문점 선언 3조 4항에서는 평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시하고 있다.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 남과 북은 북측이 취하고 있는 주동적인 조치들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해 대단히 의의 있고 중대한 조치라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앞으로 각기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로 했다. 남과 북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기로 했다.”
크게 세 가지 사안으로 구성된 이 새로운 전략은 비핵화 문제를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 그다음에 배치함으로써 이미 “새로운 시작”을 보여준다. 역시나 대한민국 내 보수층, 미국 전문가들 그리고 한국-미국-일본 3국 동맹을 지지하는 이들은 각종 의심, 회의주의적 태도 그리고 비판들을 쏟아냈다. 

실제로 2018년 6월 13일에 열린 한국 지방선거 바로 전날, 한국 내 주요 보수정당인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에 나라를 통째로 넘겼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자유한국당 고위 인사 중 한 명인 홍준표 대표는 북한, 더 나아가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반드시 대화의 선행조건으로 비핵화를 내걸어야 하며, 한미동맹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의 소속정당이자 중도진보 성향을 띠는 더불어민주당은 이런 상황에서도 광역자치단체장 총 17석 중 14석을, 동시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도 총 12석 중 10석을 차지했다. 

역사적인 싱가포르 합의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새로운 북미관계수립, 한반도 내 평화체제 구축,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노력을 통한 판문점 선언 구체적 실행 재확인, 그리고 전쟁포로와 전시 행방불명자에 대한 유해송환 총 네 가지 사안에서 합의를 이뤘다. 

맹목적으로 한·미·일 동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북한이 도덕·정치적으로 비열한 행동을 하며, 전략적으로는 하나에만 집착하는 편집광과 같다고 주장한다. 또한 중국과 과거 소련과 달리 너무나 터무니없는 행태를 보이기 때문에, 핵무기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상대편도 핵무기로 위협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북한은 핵무기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언제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선의를 가지고 접근하는 미국과 대한민국 협상가들을 배신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 끔찍한 공산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한국과 미국의 ‘전쟁 게임(War game)’, 즉 한미 연합훈련을 막대한 비용이 들고 북한을 도발한다는 이유로 미국이 이를 중단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를 두 번 저지르는 꼴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더해 한국과 일본 등지의 한·미·일 동맹 지지자들은 북한이 냉전 시대 이후 한국·미국과 엄청나게 격차가 벌어졌다는 사실, 한국 GDP의 규모가 북한의 40배 이상이라는 점, 미국은 4,0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한 반면 북한은 20~60개에 불과하다는 점 등 중요한 사실들을 망각하고 있다며 손가락질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냉전시대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도 평화협정의 체결, 비무장, 그리고 적대행위의 근절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의 협정 탈퇴

그에 반해 미국은 북한의 붕괴를 기대하며 북한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이행하지 않는 등 북한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미국은 2002년 반탄도미사일조약에서 탈퇴했으며, 러시아와 중국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미사일 방어체계를 배치하는 등 핵확산 방지에 있어서도 의심스러운 선례들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자국 내 핵무기는 꾸준히 증가시키면서도 북한의 민간용 핵 보유를 거부했으며 2003년에는 UN의 승인 없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최근에는 ‘국제사회’의 지지에 힘입어 이란 핵 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기도 했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35세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핵무기는 잠시 내려놓고 경제발전에 집중하는 장기적 생존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과거 핵 문제를 이야기할 때 언제나 미국과 북한, 두 나라의 문제라고 말했던 반면, 지금은 핵 문제 및 한반도 평화 문제에 있어 한국 역시 그 당사자임을 인정하며, 이런 시각은 판문점선언에서 잘 드러난다. 그로 인해 과거 미국과 북한의 협상 당시 소외되곤 했던 한국은 이제 진정한 한반도 긴장완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사실 현재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기술을 고려했을 때, 북한의 협조 없이 비핵화를 진행하는 일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남북한의 경제개발격차가 너무 벌어져, 한국의 젊은 세대는 과거 전쟁을 경험한 부모세대들과는 달리 더 이상 북한을 “무시무시한 위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2017년 북한과의 무력충돌 위기로 인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평화를 열망하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전쟁과 분단에 의지해 살아가던 한국 내 보수층은 점점 버티기 어려워졌으며, 남북협의를 반대하던 보수성향의 전직 대통령 두 명이 모두 투옥됨에 따라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다. 

과거 미국과 북한의 핵 협상은 정치지도자들이 역사적, 제도적 그리고 정치적 긴장상태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실패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민주당 출신의 윌리엄 클린턴 대통령은 1994년 북한과 제네바 합의(2)를 맺었으나, 그다음 달 선거에서 패하면서 의회 과반수를 잃고 결국 물밀 듯 밀려오는 공화당 세력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반면 의회 과반수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가 “전 세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며 자신의 주요업적 중 하나로 치하했다. 

유권자들의 생각대로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게 되면서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이 고수하던 “전략적 인내”는 구식이 되고 말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초기에 천명했던 북한을 향한 예방(Preventive)전쟁 역시 멀리 따돌려버린 북한이다. 

자신의 지지층이 원하는 대로 보수적인 행보를 이어가던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전통 엘리트층과 민주당의 십자포화를 견뎌야만 했다.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민주주의와 미국 헤게모니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내건 공약을 지키기 위해 이미 중국을 비롯해 전 세계와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반응에 휩쓸려 2018년 11월 열린 미국 중간선거 이후 자신의 공약을 번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상황이 어찌 됐건, 미국이 언론을 통해 군사적 옵션을 사용할 수 있음을 수차례 밝혀왔음에도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조를 얻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앞으로 지금의 흐름을 유지하면서 안보문제를 다룰 때는 상대 국가에 상호성을 바탕으로 양보가 있으면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18년 6월 시진핑 주석과의 세 번째 만남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북한 공산당, 정부, 인민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견고한 지지 약속을 받아낸 바 있다. 

한 마디로, 과거 질서는 완전히 뒤집혔고 더 이상 2016년과 2017년의 모습으로 돌아갈 일은 없다. 실제로 2017년은 온갖 위협과 전쟁, 팽팽한 긴장상태로 점철된 시기였다. 2016년 한국에서는 보수정당 출신의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극도의 친미주의 외교정책을 펼쳤고, 중국의 계속된 반대에도 사드 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했으며 ‘위안부’ 합의에 서명하면서 한·미·일 3국 동맹은 더욱 견고해졌다. 

반면 남북한 관계 및 교류는 모두 끊어지고 말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임기 말기에는 온갖 군사적 위협과 한·미 공동의 경제적 가치 및 이익들이 한·미 전략적 동맹의 버팀목이었다. 이 동맹은 미국 헤게모니 지지자들과 한국 보수층이 원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2017년 말, 문재인 정부는 중국과 “3 no”라는 이름의 약속을 맺었다. 한·미·일 군사동맹을 하지 않고, 사드 추가배치를 하지 않으며, 기타 미사일 방어 체제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친미주의적 정책에서 벗어나 지역안보 판도에 미국, 중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과 같은 강대국을 참여하게 해 남북 양국에 평화를 되찾겠다는 것이 문재인 대통령의 지정학적 목표다. 지리·경제적으로는 “신 북방·신 남방 정책”을 통해 한반도 남쪽 지역과 북쪽 지역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정책을 마련했다. 여기에서 북방 지역은 러시아와 유럽지역을, 남방 지역은 동남아 지역과 인도를 일컫는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는 협력하고 있지만, 경제 분야에서 자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한국과 같은 우방국들을 뒤흔들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세탁기 등 한국산 제품 수입에 추가적인 세금을 매겨 한미 양국 간 FTA협정 개정을 이끌어냈다. 즉, 이제는 한미 간 전략적 동맹을 지탱하던 토대가 사실상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이다.

평화 실현하기

그러나 이 새로운 질서는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통적 한·미·일 동맹 지지자들은 여전히 한국, 미국, 일본 외교와 국방 분야의 높은 자리에서 제도와 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만약 한국과 미국 평화주의자들이 대북 제재 철폐, 한미동맹 판도 변경, 구체적 평화비전 수립에 실패한다면 큰 혼란과 함께 대북대응 기준이 부재하는 기간이 지속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단계적으로 대북제재를 해제하고 남북협상 시 제재 예외적용을 시행해야 미군 전사자들의 유해송환(3)과 남북관계 재정립을 담보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치적 금기사항인 전통적 동맹관계 재정립에 관한 모든 논의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한국에 주둔하며 한미 연합군과 유엔사령부를 이끌고 있는 주한미군사령관문제는 여전히 쟁점이 되고 있다. 북한은 핵폭탄 위협 등 자신들에 대한 적대적 정책을 멈춰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한다. 만약 미국과 한국이 동맹의 큰 틀을 바꾸지 않은 채 현재의 모습 그대로 한국 내 미군 병력과 파견을 계속한다면 한반도의 비무장 그리고 평화에 획기적인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DMZ

영어로는 DMZ라고 표기하는 한반도 비무장 지대는 가느다란 띠 모양으로 생긴 길이 250km, 폭 4km의 지역이다. 북위 38도선에 위치한 이 완충지대는 1953년 7월 27일 발효된 판문점 정전협정으로 만들어진 곳으로, 현재 남북한의 국경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비무장지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양쪽으로 북한군 70만 명, 한국군 41만 명, 대한민국을 지원하는 미군 2만 8,000명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최근 양국관계가 완화됨에 따라 단계적으로 병력을 줄여나갈 예정이다. UN이 관리하는 공동경비구역(JSA)은 땅에 그려진 금을 넘어 대한민국과 북한이 오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DMZ는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약 10만 명의 사람들이 매년 이곳을 찾아 망원경을 통해 지척에 있는 북한 땅을 보고, 북한군이 DMZ 지하에 파놓은 좁은 길인 “남침 땅굴”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둘러보며 기념품 가게도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다.  


*이 글은 <마니에르 드 부아> 2018년 12월~2019년 1월호(162호) ‘Corées, Enfin la paix? 한반도, 마침내 평화?’에 실린 것으로, 불한 번역하여 소개한다.

글·이혜정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 교수

번역·신경주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졸업, 기술번역 다수.

(1) 딘 애치슨 저, 『현대사가 만들어지는 현장에서』, 국무부에서 보낸 시간들(Present at the Creation. My Years in the State Department」, W.W. Norton&Company, 뉴욕, 1988년 판(1969년 초판)
(2) 본 합의는 북한 핵 프로그램의 동결, 경수로 건설, 양국 관계 정상화를 골자로 한다. 
(3)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합의 이후 2018년 8월 2일 미군 전사자 유해 55구가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미국 측에서는 아직 송환되지 않은 유해가 5천 구 가량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