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 뉴올리언스의 ‘죽음’
2018-11-29 올리비에 시랑 | 기자
젠트리피케이션에 포획된 지역 안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던 곳이 갑자기 돌연 관심거리로, 더 나아가 저항의 중심지로 떠오를 수 있다. 미국 뉴올리언스 지역의 프레렛 스트리트의 노점 이발소가 바로 그런 경우다. 데니스 이발관이 개업한 해는 백인 방문객이 이 거리로 길을 잘못 든다면 즉시 달아나곤 했던 1974년이다. 주인인 데니스 시규어씨는 이곳이 현재 “사라진 공동체의 마지막 흔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매일 15시간씩 일한다. 이발관 옆 애견 미용샵은 스패니얼 개의 샴푸서비스에 50달러를 받는다. 맞은편 프랑스산 와인바와 뷰티살롱에서 몇 미터 떨어진 요가연구실에선 월 150달러에 “스트레스 감소”와 “마음의 평정”을 판다. 그보다 약간 위쪽의 제퍼슨 애비뉴 모퉁이에는 2017년 말 자리 잡은 스타벅스가 있다. “이곳은 더 이상 제가 예전에 살던 곳이 아니에요”라고 시규어 씨가 한숨을 내쉰다.
“오랜 단골손님들은 거의 이 지역을 떠났습니다. 다행히 많은 손님들이 계속 오가고, 때로는 멀리서도 찾아옵니다. 이발관은 오랫동안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 ‘만남의 장소’인 셈입니다. 제 이발소는 술은 없지만 단골 술집과도 같은 곳이지요.”
도시는 어떻게 죽어가는가
15년 전 프레렛 스트리트와 그 주변은 뉴올리언스 시의 대부분이 그렇듯, 대부분 흑인들의 주거지였다. 뉴올리언스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비율은 2005년 67%에서 2013년에는 59%로 떨어졌다. 이런 추세는 가속화될 것이다. 대부분 빈곤층인 그들은 자신들이 도시에 새겨놓았던 문화적 흔적을 꺼내 보이며, 약간 모순적이지만 스스로를 “원주민”이라고 규정한다. 이들은 물가를 급등시킨 젊고 돈 많은 백인 인구의 유입에 의해 도시 변두리나, 또는 더 먼 곳으로 밀려난다. 바이워터, 마리니, 세븐스워드 혹은 프레렛과 같이 역사적으로 흑인과 서민이 거주했던 구역들은 지난 몇 년간 백인과 부자의 거주지로 변해왔다.
자신이 살던 곳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언제 알게 될까? ‘이발의 명인’ 시규어 씨에게 막 이발을 마친 52세의 버나드 라로시씨에게는 2013년이 그때였다. 4년간 600달러에서 1,100달러로 오른 아파트 임대료를 집주인이 또다시 인상한 해였다. “같은 시기, 급여는 1센트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저는 이 지역이 더 이상 제가 살던 곳이 아니고, 이제 떠나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해 주민회의에서 최근에 이사 온 주민들 100여 명이 야간순찰을 시행할 보안요원 채용을 위해 주민세를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제안은 결국 거절됐지만,(1) 라로시 씨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이 지역을 어느 정도로 변화시켰는지 확인한 계기가 됐지요”라고 강조했다.
볼리바와 워싱턴 거리 모퉁이의, 허름하고 정겨운 식당은 동네 노동자들에게 99센트짜리 아침식사를 제공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자리에는 4달러짜리 공정무역 커피와 12달러짜리 고급 햄버거를 파는 상점들이 들어섰다.
뉴올리언스의 젠트리피케이션은 ‘디프사우스(Deep South, 미국 남부 중 특히 루이지애나·미시시피·앨라배마·조지아·사우스캐롤라이나 5개 주를 지칭, 특히 흑인 차별이 심했음-역주)’의 역사에 깊숙이 뿌리를 둔 인종차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중상류층이 도시 중심부를 탈환하는 이 현상은 디트로이트, 파리, 리스본, 혹은 바르셀로나를 지나 뉴욕으로부터 베를린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서구 대도시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뉴올리언스의 경우는 특별하다. 다른 곳에서는 그 과정이 점차적으로, 간헐적으로 또는 장기적으로 진행된 반면, 여기서는 유례없이 갑작스럽게, 빛의 속도로 도시 전체에 밀어닥쳤다. 이곳에서는 자연재해가 촉매로 작용했다. 13년 전,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도시 전체를 강타했다.
2005년 8월 29일의 폭풍우에 이은 홍수 사태는 지역주민들에게 평생의 외상으로 남아있다. 카트리나 이전에는 10만 명당 9명이었던 자살률이, 카트리나 이후 26명으로 증가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2) 그러나 정책 입안자들과 경제 분야 지도자들에게 이 재해는 ‘신의 가호’이자 기회였다. 예산삭감으로 유지보수가 제때 이뤄지지 않아 방파 시스템이 파손된 바람에 시의 3/4이 물속에 잠겼다. 루이지애나 주의 중심부는 몇 개월간 주민들이 퇴거하면서 유령도시가 돼갔다. 시의 지도자들에게는 허리케인이 파괴한 도시를 새롭게, 성공적으로 완성할 절호의 기회였다. 변호사인 윌리엄 퀴글리의 표현에 따르자면, “스테로이드 호르몬으로 팽창된 자유주의”의 통치는 죽은 이들을 물 밖으로 끄집어내마자 시작됐다.
“세기의 기회를 위한 세기의 폭풍”
이때부터 시의 지도자들은 가난한 이들과의 전쟁에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다. 학교의 민영화, 공공 병원의 폐쇄, 치안 강화와 더불어, 주택 거래 규제는 완화됐고 임대료가 저렴한 연립주택들은 철거되거나 부동산 개발업자에 의해 고급주택으로 교체됐다. 신공항 및 수많은 고급호텔 건설을 계획적으로 진행하면서 관광산업에 특혜를 주는 한편, 세금감면 혜택을 아낌없이 퍼부으면서 기업가들을 극진히 맞이했다.
“세기의 기회를 위해서, 세기의 폭풍이 필요했습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카트리나가 지나간 지 보름도 안 돼 루이지애나 주의 민주당 주지사인 카틀린 블랑코는 이렇게 독려했다. 그녀의 말은 그저 경청된 정도가 아니었다. 뉴올리언스의 ‘부흥’이 미디어에서 종종 ‘성공 스토리 모델’(3)로 칭송받았다는 점에서, 앞으로 다가올 자연재해로부터 얻을 이득을 극대화 하고자 하는 모든 세계 지도자들에게는 어쩌면 일종의 지침이 될 수 있다. 허리케인 카타리나 재해가 안긴 첫 번째 교훈은 천재지변이 가진 것 없는 평범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타격한다는 것이다. 그 무렵 반복적으로 방송된 이미지들이 증언하듯, 수천 명의 생존자들이 자동차가 없어 대피할 수 없었기에, 초대형 경기장과 컨벤션 센터에 빽빽하게 갇혀있었다.
“계엄령이 선포되자, 거리 곳곳에서 경찰과 군인이 우리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우리를 도와주려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이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단체 ‘존엄과 저항’의 흑인 조합원인 60세의 알프레드 마샬이 말한다. “이웃의 한 청년이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버려진 상점에 들어갔다가 총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경찰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그들이 ‘약탈자’로 여기는 이들로부터 재산을 지켜내는 것이지, 재해로부터 생명을 구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구조돼 전국으로 흩어진 수많은 생존자들은 고통스러운 선택에 직면했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미 이런 상황들을 예고했다: “만일 새롭게 지은 건물에 빈곤층이 거주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뉴올리언스의 도시기능은 다시 예전처럼 마비될 것이다.”(4)
생존자들 앞에 놓인 장애물들은 점점 커져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교활한 형태는 연방정부 프로그램 ‘로드홈(Road Home)’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피난자들의 집을 재건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조지 W. 부시 대통령 행정부는 부동산 시장에서 자산 가치를 추정해, 수혜자에게 할당될 금액을 계산했다. 가든지구의 고급빌라 소유자들은 두둑한 보상을 받았지만, 극빈촌지역의 주민들에게는 푼돈이 주어졌다.
13년 후 뉴올리언스의 최빈곤층 중 약 10만 명은(허리케인 이전에는 약 45만 명) 결코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샬씨는 13년 전부터 쌓여온 분노를 담아 이렇게 내뱉었다.
“시의 지도자들은 생존자들이 과거에 살던 곳에서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다는 점을 잘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불청객’들을 추방하기 위해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마치 보안관처럼 이용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흑인들이 너무 많고 너무 무질서했던’ 이 도시에 복수했습니다. 제게 있어서 젠트리피케이션은 ‘제거’와 동의어입니다.”
7,500명 교사 해고, 그리고 ‘차터 스쿨’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뒤이은 몇 주간의 대혼란 속에서, 뉴올리언스 시의 민주당 시장인 레이 네이건(현재 부패혐의로 수감 중)과 주지사 블랑코는 ‘공립학교와 교사들의 처리’라는 공동목표를 위해 합세했다. 2005년 9월 말 학교위원회는 뉴욕에서 온 전직대령 윌리엄 로버티를 수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앨버레즈 앤 마셜’ 컨설팅 전문업체 소속이었고, 비용을 절감하는 일에 적격자였다. 학교위원회는 교육 제도를 재편성하기 위해서 1,680만 달러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진회색 서류가방을 든 고문단은 뉴올리언스의 관광명소, 비외카레(Vieux Carré) 지구에 도착했다. 이곳은 기적적으로 홍수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다. 이 구역에 즐비한 술집들은 이웃동네가 물속에 잠겼을 때도 발전기 덕택에 뉴올리언스에서 유일하게 문을 열었던 곳이다. 작가 제임스 리 버크의 표현을 빌리면, “이곳에서 만취한 손님들은 가로등 아래에서 마치 버려진 밀랍인형들처럼, 자신들의 찌꺼기 속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었다.”(5)
이제 뉴올리언스 학교 아이들의 운명은, ‘위기관리’ 전문가들에게 맡겨졌다.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학교위원회는 7,500명에 이르는 모든 교사들의 해고를 알리기 위해 도시가 텅 비었던 순간을 이용했다. 변호사 윌리 젠더스는 그때 상황에 관해 설명한다.
“이 소식이 현지 언론에서 방송된 순간, 대부분의 교사들은 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견디기 힘든 경제적 고통과 재해로 인한 외상에 시달리고 있던, 최악의 시기에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는 해고당한 7,500명의 교사들을 변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법정에 섰는데, 1심에서는 승소했지만 결국 루이지애나 주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왜 교사들을 해고했을까? 변호사 젠더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설명했다. “그들은 자연재해의 특성상 어쩔 수 없었고, 더 이상 주 정부에 예산이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 변명합니다. 그러나 교사들의 대규모 해고를 발표한 지 10일 후 루이지애나 주 교육부 장관은 교사들의 복귀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미연방 정부로부터 1억 달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돈을 받은 사람들은 교사들을 내쫓은 이들의 손에 쥐어졌습니다.”
변호사는 해고의 의도를 추후 방해요소가 될 세력을 꺾기 위한 것이라고 봤다. “해고된 교사들은 대부분 흑인이고, 지역투쟁에 자주 참여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해고함으로써, 도시와 국가는 그들의 노동조합인 ‘뉴올리언스 교사연합’도 약화시켰습니다. 그 조합은 노동조합의 불모지였던 루이지애나 주에서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드문 조직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변호사 젠더스는 이런 개입에 따른 최종목표가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전에 이미 존재했었다고 추측한다. 그들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의 최종목표는 대도시의 학교 전체를 ‘차터 스쿨’로 변형시킨다는 유일무이한 실험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차터 스쿨은 최근에 고안된 학교 체제로, 사립이면서(각각의 학교는 기업체의 사장과도 같은 운영자에 의해 관리됨) 동시에 공립이다(학교는 여전히 무료로 운영되고 사설 운영자는 이윤을 도모하지 않음).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지원으로 뉴욕에서 처음으로 시험 운영된 차터 스쿨 체제는 상황이 열악한 지역의 교육실패 문제들을 기적처럼 해결한다는 명성에 힘입어 눈 깜짝할 사이에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6) 그러나 대도시 규모로 강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차터 스쿨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우리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지역에 위치한 알제 구역의 초등학교인 폴 헤이번스 차터 스쿨(Paul Habans Charter School)로 갔다. 학교 입구의 사무실 벽에는 크고 붉은 글씨로 교훈이 적혀 있었다: “인내, 탁월함, 용기, 공동체.” 학교 복도의 표지판에는 “우리는 스스로를 향상시키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좀 더 가면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큰 것의 일부다”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조용한 학교 복도에서 우리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영광스럽게도, 학교 책임자는 우리에게 면담의 기회를 베풀었다. 미소를 띤 젊은 백인 여성, 케이트 메혹은 크레센트 시티 스쿨 그룹의 대표였다. 이 그룹은 이 학교를 비롯한 3개 학교의 관리를 맡고 있다. 그녀 또한 뉴욕에서 왔다. “각 학교는 학생 1명당 1년에 국가와 시로부터 지급되는 8,500달러를 수령합니다. 우리는 차별 없이 모든 아동을 입학시키고,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에 관해 설명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에게 어떤 교육 프로그램을 따라야 한다든가, 어떻게 교육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목표를 이행하는 이상, 우리는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있습니다.”
파면된 교사들을 대체하기 위해, 헤드헌터는 인도주의적 비영리 교육단체인 ‘미국을 위한 교육(Teach for America)’에 우선적으로 도움을 청했다. 이 단체는 대학을 막 졸업한 초보자들을 위기 지역, 흔히 외국으로 파견한다. 대학 졸업생들은 이를 통해 초보 교사로서의 경력을 쌓고, 이후에 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뉴올리언스에서 그들이 오랫동안 일하는 경우는 드물다. 메혹 대표는 “여느 회사들처럼 인사이동이 있습니다”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젊은 교사들을 채용하는 것도 하나의 기회라고 봅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들이 말하는 기회란, 저임금으로 젊은 교사들을 채용하는 것이 아닐까? 고용주들은 연 12만 달러(1억 3,500만 원, 메혹 대표의 경우)에서 몇몇 임원들의 경우 20만 달러 이상의 상당한 연봉을 수령한다. 채용과정은 어떻게 진행될까?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인터넷에 공지해서 지원을 받습니다. 지원자들의 서류를 검토하고, 필요한 경우 면접을 봅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그들도 이곳이 맞지 않으면 자유롭게 그만둘 수 있습니다.”
메혹 대표가 말하는 ‘기회’가 학생들에게도 기회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와 갈등을 겪는 학부모들에게 법률지원을 제공하는 사회복지사인 아샤나 비가드는 차터 스쿨 모델의 정치적 성공은 정확히 말하자면 훈육방식에 기인한다고 평가한다. 그녀는 설명했다. “그들은 이 규칙을 ‘가차 없는’ 규칙이라고 부릅니다. 아동들은 한 줄로 서서 걸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흑인인 일부 학교에서는 심지어 쉬는 시간을 없애 버렸습니다. 학생들은 벽에 기대거나, 머리를 책상에 대고 엎드리거나, 혹은 규정에 맞지 않는 색상의 옷을 입었다고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볼 때 가혹한 규정은 점심시간이나 낮잠 시간에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다. “4~8세 아동들에게 이러한 규칙은 사회적 정서 발달의 장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도시를 떠나기로 작정한 비가드씨는 차터 스쿨 때문에 비통함을 느끼고 있다. “저는 제 아들이 학교에서 음악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전에는 가능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모든 학교에 음악수업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수많은 음악인들이 수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끝났습니다. 제 종조부인 바니 비가드는 훌륭한 재즈 클라리넷 연주자였습니다. 그는 듀크 엘링턴,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연주했습니다. 하지만 제 아들은 지금 악기 근처에도 못 가고 있습니다.”
폭풍에 침몰했던 그들은,
지금도 침몰 중이다
발걸음마다 열광적인 소리가 몸을 감싸던, 미국 흑인음악의 태동지에서 음악가들이 처한 상황 역시 대혼란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언제나 고된 시절이긴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핫 에이트 브라스 밴드(Hot 8 Brass Band)’의 설립자인 베니 피터는 몹시 요란한 콘서트장 출구에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는 뉴올리언스 최고 수준의 음악훈련을 받았고, 전 세계를 순회하며 공연했다. 그러나 그의 단원들은 생활비를 충당하기도 어려운 상태다. 피터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돈다발을 들고 오더니, 이곳에서 집을 사고 정착했다. 그들은 돈으로 집만 산 게 아니라 지역사회까지 사버리고는 원주민들에게 떠나라고 강요했다. 이제 음악가들도 살기가 더 힘들어졌다”며 토로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 우리 밴드는 프렌치맨 가의 관광객 바에서 연주를 많이 했죠. 지금은 팁으로는 생활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음악을 계속하길 원했기에, 창고 관리며 우버 택시 운전사며 가리지 않고 일했어요.”
물론 지역적 성과가 있긴 했다. 매년 관광객 수가 늘어났다(2017년 1,800만 명으로 기록 경신). 반면에 갈채를 받은 예술가들은 우버를 운전해 손님의 에어비앤비로 가야만 할 정도로 가난해졌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뉴올리언스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의 주요 원인은 적정가격의 주거지 결핍이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주거지 결핍 현상은 주택가격의 예기치 못한 변화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이는 가차 없는 파괴 작업의 결과다. 2006~2014년 뉴올리언스 시의 도시공원을 형성했던 4개의 노동자 주택단지(총 4,500가구)가 모두 철거됐다. 이 또한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전에 이미 구상된 계획이었다.
1990년대 이후 빌 클린턴 행정부가 채택한 연방 프로그램은 공영주택들을 철거하고, ‘중위소득자들’을 위한 주택들로 대체하는 경우 국가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개발업자들에게 주어지는 이런 혜택에 힘입어, 뉴올리언스 시청은 2000년대부터 전체적인 해체작업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맹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던 중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따른 공황 상태와 시 지도층의 지지를 등에 업은 ‘골드러시 붐’은 도시의 해체 작업을 촉진했다.
시 외곽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구시가지, 칼리오페의 오랜 주민인 마샬씨는 자신의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조립식으로 지어진 인접한 작은 집들은 골드만 삭스 은행에 연계된 미주리 주 부동산 개발업자가 관리한다. 마샬씨가 사는 집은 사회복지 수당 수령자들 전용으로, 엷은 보라색 출입문으로 식별할 수 있는 주택 할당제에 속해 있다.
“이웃집 문은 노란색입니다. 그 집은 집세를 좀 더 많이 내기 때문이지요. 출입문을 다시 페인트칠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기야, 여기서는 바비큐를 하거나 친구들과 집 앞에서 식사를 하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것, 이 모든 게 금지되어 있지요. 여러 세대를 거쳐 우리가 이곳을 만들어왔는데, 심지어는 집 앞에 앉는 것도 금지랍니다. 결국 각자 자기 집에 갇혀 지내게 하는 거지요. 식물들은….”
그는 자기 집 앞에 심어진 푸르스름하고 생기 없어 보이는 것을 손가락으로 만져보라고 했다. 그것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인조나무였다. “보세요, 우리는 자라나는 진짜 식물을 심기 위해 이 끔찍한 것을 뽑아버리지도 못합니다.” 비슷한 규정이 부유층을 위한 주택들에도 해당되기는 하지만, 그들에게는 처벌조항은 없다. 마샬씨는 자기 동네서 일어난 일에 대해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칼리오페에 살았던 대략 1,500가구들 중에서 이제 60여 가구밖에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예전에는 이웃들끼리 친하게 지냈습니다. 사람들이 과일나무를 키우던 공용정원이 있었지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바로 이곳에서 그 일을 공동으로 함께 풀어나가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릅니다. 저기 맞은편에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곤 했던 공용정원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배타적인 구역이 됐지요. 그곳에 가려면 스포츠클럽에 가입해야 합니다. 저쪽에는 술집, 세탁소, 가게들이 있었는데 모두 흑인 친구들이 운영했었지요. 지금은 골판지로 지은 것 같은 이 작은 집들만 남았습니다.”
사회적 투쟁가로서 마샬씨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또 다른 현실에 직면한다. 휴가용 주택들의 부동산 거래 규제완화와 에어비앤비의 급속한 증가로 지난 10년간 집세는 지역에 따라 50~100% 증가했다. 그러나 대부분 최저임금으로 살아가는 흑인들의 수입은 오르지 않았다. 최저임금은 미국 정부가 허가한 7.25달러에 머물러 있다. 수만 명의 근로자들은 건설과 관광업 등에서 벌어들이는 푼돈으로 근근이 버텨야만 한다. 많은 이들이 일터로 가기 위해 새벽 4~5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저녁에는 60달러를 벌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버스요금도 되지 않는다.
“대체 이게 사는 건가요?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이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주말에 어떤 상태가 될 것인지요. 카트리나에 침몰당한 사람들은 계속 침몰 중인 겁니다.”
기업 복지국가를 위한 기적, 카트리나
‘존엄과 저항’ 조합원인 마샬씨와 그의 동료들은 최저 임금을 15달러로 인상하기 위한 운동에 참여한다. 그러나 루이지애나 주에서 이것은 매우 힘든 투쟁이다. 2018년 3월 지역 상원은 법정 최저 임금을 7.25달러에서 8달러로 인상해달라는 수차례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들은 고용주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한다. 고용주들을 위해 고안한 세금 우대조치들이 매해 축적돼, 이제는 초기의 각종 간접세 및 세액의 80%가 세금 우대 대상이 됐다. 2016년 공화당 주지사인 바비 진달은 퇴임하면서 “진실은, 우리가 세운 것은 기업들을 위한 복지국가라는 것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시인했다.
따라서 기업가들에게는 더없이 편한 세상이다. 존 앳킨슨은 ‘혁신 기업들’을 위한 투자기금의 공동창설자다. 지난여름부터 그는 현대 미술관의 꼭대기 층에 위치한 ‘테크’ 관련 기업가들의 연합인 ‘아이디어 빌리지’를 주관한다. 마치 고상한 취향과 돈의 결합을 축하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강렬한 스타트업의 활기 속에서, 재활용 컵에 든 커피를 홀짝이는 턱수염 기른 청년들로 가득한 오픈 스페이스의 중심으로, 그는 우리를 데려갔다. 연봉이 30만 달러에 달하는 앳킨슨은 2007년 학업을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왔을 때, 한창 “혼돈의 시대에 기회를 창조하기 적합한” 도시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 설명을 요청하자, 그는 자기 생각에 도취한 듯 자랑스럽게 말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모든 주민들을 기업가로 만들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창의력을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DNA에 새겨졌던 기업가 정신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도시를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도시든 죽일 수 있습니다.”
2006년, 한 뉴올리언스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7) 12년 후, 뉴욕 커낼가 하단에서 매사추세츠의 부동산 개발업자가 세계무역센터 자리에 초대형 5성급 호텔을 건축하고 있다. 뉴욕 시는 이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에,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인부들이 힘겹게 일하는 이 건설 현장에 4억 6,500만 달러의 자금을 선뜻 출자했다. 부동산 개발업자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 건물의 최상층에 위치한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붙어있다.
“루이지애나의 아프리카계 미국 문화를 기념하며: 음악, 음식, 그리고 전통.”
글·올리비에 시랑 Olivier Cyran
기자, 작가, 쥘리앙 브리고(Julien Brygo)와 공동집필한 저서 『지긋지긋한 일들! 구두닦이에서 금융 브로커까지. 직업들의 사회적 유용성과 유해성에 관한 탐색(Boulots de merde! Du cireur au trader. Enquête sur l’utilité et la nuisance sociales des métiers)』(La Découverte Poche, Paris, 2018)이 있음.
번역·권정아
프랑스 브레스트 대학교 심리학 박사. 공역서로 『피부자아』가 있다.
번역·이지원 lamyrrhe@gmail.com
서강대와 동 대학원 졸업. 역서로 『세계가 보이는 지도책』, 『100년 동안 우리 마을은 어떻게 변했을까』 등이 있다. 주한 벨기에대사관 근무를 거쳐 현재는 루터대에 재직 중이다.
(1) How to Kill A City: Gentrification, Inequality, and the Fight for the Neighborhood, Nation Books, New York, 2017.
(2) Chelsea Brasted, “뉴올리언스는 카트리나 이후 자살률이 급등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이다.” <The Times Picayune> 2018년 3월 29일.
(3) 베스 하파즈의 경우, “허리케인 카트리나 10년 후, 뉴올리언스의 관광 산업은 재탄생 성공 스토리의 교과서”라고 발언. <Associated Press>, 2015년 8월 13일.
(4) David Brooks, ‘Katrina’s Silver Lining’, <The New York Times>, 2005년 9월 8일.
(5) James Lee Burke, 『La Nuit la plus longue』, Payot-Rivages, Paris, 2011.
(6) Diane Ravitch, ‘Volte-face d’une ministre américain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0년 10월호.
(7)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스파이크 리가 촬영한 장면, When the Levees Broke, HBO, 2006.
[박스기사]
“나는 약탈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우리 주 정부의 군인과 경찰들은 총을 쏠 수 있고 죽일 수 있다. 이들은 완벽하게 실행으로 옮길 준비가 되어있고, 나는 이들이 그렇게 할 것을 기대한다.”
- 카틀린 블랑코, 루이지애나 주 민주당 주지사(2004~2008), 2005년 9월 1일.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어쨌든 낙후된 상황에서 살아오신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서는 결국 매우 잘된 일입니다.”
- 바바라 부시, 전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배우자이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어머니. 텍사스 주 휴스턴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구조자들을 위한 이재민 숙소를 방문했을 무렵. 2005년 9월 7일.
“이 도시가 복구되기를 원하는 이들은 도시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르게 변화되기를 바란다. (…) 우리가 살았던 모습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 제임스 라이스, 뉴올리언스 최대 부유층 중 한 가문의 상속자로 전용 헬리콥터를 타고 폭풍에서 피신함. <월스트리트저널>, 2005년 9월 8일.
“우리는 마침내 뉴올리언스의 공공 주택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우리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신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다.”
- 리차드 베이커, 루이지애나 주 공화당 하원의원(1987~2008), <워싱턴포스트>, 2005년 9월 10일.
“‘카트리나’는 비극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교육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할 기회이기도 하다.”
- 밀튼 프리드먼, 극단적 자유주의 경제학자. <월스트리트저널>, 2005년 12월 2일.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뉴올리언스의 교육 시스템이 처음으로 맞이한 최상의 것이다.”
- 아른 던컨,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교육부 장관(2009~2015), <워싱턴 포스트>, 2010년 1월 30일.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혁신과 변화를 위한 플랫폼이자 이 나라의 실험실이 되는 기회를 뉴올리언스에 제공했다.”
- 라이언 버니, 뉴올리언스 시장의 측근(2010~2018), <폴리티코>, 2015년 8월 15일.
“나는 시카고를 위해 파괴적이고, 극단적이고, 예측불가능하고, 맹렬한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는 폭풍우를 기대했었다. (…) 이것이 바로 뉴올리언스가 ‘리셋’ 버튼을 누르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였다.”
- 크리스틴 맥커리, <시카고 트리뷴> 편집위원, 2015년 8월 15일.
“당신들도 아는 것처럼 모든 것이 변했다. 카트리나는 축복이었다.”
- 앤 밀링, 휘트니 국립 은행 전 총재의 배우자, 자선활동에 참여함. 필자가 직접 수집한 발언. 2018년 8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