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보르도' 아성 무너뜨리다
새로운 스타일과 전통 와인의 대결
보르도의 악몽, 1976 '파리의 심판'
세계 와인 역사상 이상 기류를 몰고 온 일대기적 사건 한 가지를 꼽는다면 바로 1976년 5월 '파리의 심판'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와인과 캘리포니아 와인의 한판 승부가 될 것이다. 당시 파리에서 열린 저명한 프랑스인 와인 전문가 9인으로 구성된 평가단의 블라인드 테이스팅 결과, 캘리포니아 와인이 유수의 보르도 특급 와인들을 누르고, 각각 화이트와 레드 와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함으로써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와인 종주국의 자존심에 일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여기에는 보르도의 자존심이라 할 샤토 무통 로췰드(Ch. Mouton Rothschild), 샤토 라투르(Ch. Latour)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였기에 주최 측은 물론 스스로의 가능성을 알지 못했던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자들조차 놀라워했고, 프랑스 와인 관계자들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프랑스에서는 테이스팅 결과를 부정하는 일부 시각과 여러 반론이 제기되었는데, 주요 쟁점 중 하나는 오랜 기간 숙성이 필요한 보르도 와인과 그에 반해 비교적 숙성이 빠른 캘리포니아 와인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의 우스꽝스런 이변으로 치부되고 잊힐 뻔한 '파리의 심판'이 그로부터 30년 후 다시 재현되는 일이 벌어졌다.
'파리의 심판', 30년 만에 재현되다
세계 와인 역사를 다시 쓴 테이스팅으로 기록되는 '파리의 심판'을 기념하는 30주년 시음회가 2006년 5월에 다시 열렸다. 1976년에 경쟁했던 문제의 빈티지 와인들이 다시 한 번 블라인드 테이스팅 평가대에 올랐다. 이번엔 캘리포니아와 런던에서 동시에 진행된 이 시음회는 공정한 판정을 위해 한층 더 엄선된 저명한 와인 전문가 평가단이 구성되었다. 이 행사는 30년 전의 기적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들과 세계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열렸다.1) 캘리포니아 와인이 장기간의 숙성 후에도 과연 보르도 와인처럼 맛의 하모니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속에 진행된 결과, 이번에도 캘리포니아 와인들이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부문에서 각각 또 한 번의 놀라운 결과를 재현해 내었다. 뿐만 아니라, 레드와 화이트 부문 모두 10위권 안에 6개씩이나 대거 입상함으로써 캘리포니아 와인 역시 고급 보르도 와인처럼 훌륭한 장기 숙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또한 30년 전 일이 우연히 일어난 충격적 사건이 아니라, 캘리포니아 와인의 부단한 노력으로 이룬 가치임을 세계의 눈은 재확인하게 된 것이다.
2008년 10월 한국 시장에서의 결전
보르도 와인과 캘리포니아산 와인이 지난 10월 한국 시장에서도 한판 승부를 벌여 와인 애호가들의 미각과 후각을 즐겁게 했다. 두 정부가 자국 와인산업을 홍보하기 위해 주관한 시음 행사들은 한국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는 업계 종사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때 출품된 와인들을 살펴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와인의 현황 뿐 아니라, 앞으로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보르도 메독 와인 시음회
지난 10월 21일 프랑스 농식품 진흥공사('소펙사'SOPEXA)와 메독 와인 협회(CVM)주관으로 열린 이 행사에서는 보르도의 주요 지역인 메독의 테르와(Terroir, 토양조건)에 대한 세미나를 통해 현재 국내에 유통되고 있는 100여 가지의 다양한 메독 와인들이 공개되었다. 앞서 지난 3월 '소펙사'가 주최한 또 다른 시음회에서는 시중 판매가 1만원~4만원대 중저가 보르도 와인 100 가지가 선정된 바 있다. 이는 프랑스가 가격 대비 만족도를 중시하는 국내 소비자들에게 기존 보르도의 비싼 이미지를 불식하고, 칠레 등 저가 와인 생산 국가들과의 경쟁을 의식한 조처로 풀이된다.
캘리포니아 와인 시음회
10.15 캘리포니아 와인 시음회에 선보인 와인들은 스타일이나 품질에 있어 지난해에 비해 한층 더 나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캘리포니아 와인'하면 떠오르던 무개성의 이미지(업계에서는 이를 비꼬는 말로 일명 "코카콜라"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를 완전히 탈피한 듯 했다. 본래 캘리포니아 와인은 오리건에서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테르와의 개성이나 각 와이너리의 스타일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멜로(Merlot) 같은 대중적인 품종으로, 똑 같은 스타일의 상업적인 와인을 찍어냈으나 이젠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자신감을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캘리포니아에서는 보르도에 대적할 만한 카베르네 블랜드를 선보여 왔다. 뿐만 아니라 이번엔 세련된 절제미가 돋보이는 피노 느와(Pinot Noir), 개성이 뚜렷한 쉬라(Syrah), 이 밖의 독창적인 캘리포니아만의 블랜드 등이 출시되어 새로운 창의력을 무기로 내세우며 캘리포니아 와인의 역동적인 변화를 읽게 했다.
1976년 테이스팅 - 화제의 캘리포니아 와인들
- 스텍스 립 와인셀라 1973 (Stag's Leap Wine Cellars, 샤토 무통 로췰드, 샤토 오브리옹, 샤토 몽로즈를 제치고 레드 부문 1위 우승)
- 릿지 빈야드 몬테벨로 1971 (Ridge Vineyards, Monte Bello, 레드 5위)
- 하이츠 와인셀라, 마르타즈 빈야드 1970 (Heitz Wine Cellars 'Martha's Vineyard', 레드 7위)
- 클로 뒤 발 1972 (Clos du Val, 레드 8위)
- 마야카마스 1971 (Mayacamas Vineyards, 레드 9위)
- 프리마크 에비 1967 (Freemark Abbey Winery 레드 10위)
-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 1973 (Ch. Montelena, Chardonnay, California 고급 부르고뉴 와인들을 누르고 화이트부문 1위 우승)
30주년 기념 테이스팅에서 장기 숙성의 우수성이 입증된 와인들
- 릿지 빈야드 몬테 벨로 1971 (Ridge Vineyards, Monte Bello 1위 차지)
- 스텍스 립 와인셀라 1973 (Stag's Leap Wine Cellars, 레드 부문 2위)
- 마야카마스 1971 (Mayacamas Vineyards, 레드 공동 3위)
- 하이츠 와인셀라, 마르타즈 빈야드 1970 (Heitz Wine Cellars 'Martha's Vineyard', 레드 공동 3위)
- 끌로 뒤 발 리저브 1972 (Clos du Val Reserve, 레드 5위)
- 샤토 몬텔레나(Ch. Montelena 2003, 화이트 1위)
- 보르도 와인: 샤토 무통 로췰드 (6위), 샤토 몽로즈 (7위), 샤토 오브리옹 (8위)
캘리포니아 와인 시음회vs 메독 시음회
지난 10월 21일의 메독 시음회에서는 2002~2006년산 가운데 국내 소비자들이 가장 많이 찾은 가격대인 시중가 5~10만 원대의 와인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지속적인 고품질의 명성을 이어가는 몇몇 샤토들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선보인 2004년산의 경우 전반적으로 아직 덜 익은 타닌과 함께 드라이한 맛으로 인해 균형감이나 완성도가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었다. 격심한 폭풍의 피해를 보았던 2002년산 메독 와인의 대부분은 희석된 밋밋한 맛을 보여, 그 해의 암울한 날씨를 그대로 표현하였다.
반면 2005~2007년산 와인을 중점으로 선보인 캘리포니아 와인 시음회(10.15)에서는 소규모 생산자에 의한 고급 와인들이 많이 선보였다. 가격도 4만~13만 원대로 한층 선택의 폭을 넓혔다. 이처럼 다양한 가격대에서 만족의 폭이 넓은 품질을 제공하는 것으로 미루어 한국 소비자 앞에 성큼 다가온 캘리포니아 와인의 입지가 느껴진다.
2008년 10월 한국시장에서 벌어진 캘리포니아와 보르도 메독 와인의 대결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캘리포니아 와인의 판정승이라 하겠다. 이는 '파리의 심판'처럼 전문 평가단이 비교하는 시음이 아니라, 국내 소비자 기준에 의거하여 내린 필자의 소견이다. 필자가 나름대로 정한 평가 기준은 첫째 가격에 비해 만족도가 커야 하고, 둘째 비교적 나쁜 빈티지로 인한 맛의 굴곡이 없어야 하며, 셋째 구매 즉시 마실 수 있어야 한다.
지난 30년간 세계시장을 향한 양국 간 선의의 경쟁이 와인의 품질을 한층 더 향상시켜 온 것을 지켜보는 것은, 한 사람의 와인 마니아로서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스타일의 변화로 거듭 성장해 온 캘리포니아 와인과 꿋꿋이 전통의 가치를 이어가는 보르도 와인의 경쟁, 향후 30년이 또 다시 기대된다.
이달의 주요 행사
<누보가 왔어요!> <이탈리아의 맛> <와인을 배우고 싶다면> |
1) Jancis Robinson, Michael Broadbent 등 세계적인 와인전문가들이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