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 신자유주의의 기습

2018-11-29     프랭클린 라미레스 가예고스 | 에콰도르 정치학 연구

라파엘 코레아 전 에콰도르 대통령은 집권 당시(2007~2017) 빈곤율을 줄이고 채권자들에게 채무 재조정을 요구하는 한편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에게 정치적 피난처를 제공하는 등의 행보로 진보 진영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렇다면 그의 정책적 계승자를 자처하며 대통령에 선출된 모레노의 180도 다른 정책 행보는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2017년 5월 레닌 모레노의 대통령 당선은 남미 진보세력에게 한숨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2013년 파라과이에서는 오라시오 카르테스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2015년 아르헨티나에서는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어 2016년에는 브라질에서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 탄핵 후 미셰우 테메르가 임명되는 등 남미에서 우파 세력이 약진하던 가운데, 은행가 출신 기예르모 라소 후보를 제친 모레노의 승리는 좌파의 반격과도 같았다.(1)

무늬만 좌파인 모레노 정권의 실체 

모레노는 후보 시절 라파엘 코레아 전 정부(2007~2017)의 국가 개발·재분배·재건을 골자로 한 ‘시민혁명’을 계승하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공격적이고 ‘수직적’이었던 전 정부의 소통 방식도 개선하겠다고 다짐했다. 대대적인 국가적 대화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일부 국민들에게 피로감을 줬던 정치적 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것이 그의 공약이었다. 더욱이 2015~2016년 경제위기와 코레아 전 대통령 측근의 부패 스캔들로 전 정부의 재검증 요구가 커지고 있던 터라 모레노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모레노 정부 출범 후 이 ‘국가적 대화’는 단지 (행정권을 가진) 정부와 반(反) 코레아 정권 세력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실제로 모레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자신의 직권으로 이런 정치적 화해가 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정작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던 그의 공약은 이제 희미해져 버린 것 같다. 모레노가 내세운 시장 친화적인 정책과 친미 외교정책에 대한 우파 세력의 환호와는 달리, 남미 좌파연맹은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그렇다면 모레노 대통령의 주적은 누구일까? 바로 라파엘 코레아 전 대통령이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 6년에 걸쳐 코레아 정부의 부통령을 지내며, 모레노 스스로 전 정부의 정책을 계승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는데도 말이다. 결국 모레노는 에콰도르의 국가적 변화를 이끌었던 ‘시민혁명’이라는 진보적 정책으로 권좌에 올랐으나 곧 이 정책을 해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2018년 2월, 모레노 정부는 ‘부패 척결’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하지만 이 국민투표의 실제 의도는 여전히 일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전 대통령의 힘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그가 표결에 부친 7가지 법안 중에는, 정치 지도자들이 같은 자리에 3회 이상 연임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시민참여 및 사회통제 위원회(CPCCS)에 소속된 전 정부의 측근 인물들을 해임할 수 있는 안도 포함됐다. 모레노의 이런 계획은 제법 성공을 거뒀다. 2012년 대선에 출마할 수 없게 된 코레아 전 대통령의 권력은 약해졌다. 그의 측근 세력들이 주도한 정세변화로, 대통령궁은 추락하던 엘리트층과 친기업 경영자, 우파 진영에게 안락한 보금자리로 거듭났다.

코레아가 대통령에 선출되기 전 2006년에 창당한 조국연합당(Alianza Pais)은 1979년 민주화 이후 가장 세력이 강한 정당이었다. 137개의 의석 중 100석을 차지했던 2013년보다는 적지만 2017년에도 여전히 절반을 넘는 75석을 얻었다. 하지만 선거법원은 모레노에게 조국연합당의 당권을 넘겼고, 친 코레아 세력은 새로운 정당을 창당할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이마저도 친 모레노 선거당국의 견제로 어려운 현실이다.(2)

모레노 대통령은 국민정당과 민중세력의 결집이 정치권 재구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결국 시민혁명의 구현에 함께 노력하던 세력이 분열하자, 모레노 대통령은 엘리트층과 더욱 가까워졌다. 이후 몇 개월이 지나, 경영인 단체를 이끄는 기업인 리차드 마르티네스가 재무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코레아 세력과 모레노 진영의 분열로 국회에서 과반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했던 모레노 정권의 핵심 정책이 힘을 얻게 됐다.  

하지만 모레노 정권은 기존의 엘리트 집단뿐 아니라,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인들과 노조 대표들, 하층민 계급에 속하는 원주민 권익 운동가들까지 포섭하고 있어 남미 좌파연맹 일각에서는 다소 충격을 받은 상황이다. 일례를 들자면, 198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은, 2018년 여름에 에콰도르 원주민연맹(CONAIE)에 공개서한을 보낸 바 있다. 사실 모레노 대통령은 원주민연맹의 입지 약화를 위해, 연맹으로 하여금 지역법에 따라 에콰도르의 남미국가연합(UNASUR) 지역 내에 정착할 것을 제안한 상태였다. 에스키벨은 공개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모레노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표방하는 다른 국가수반들을 지지하며 통합과 참여의 장을 해체하려 한다. 에콰도르 원주민들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언제나 결집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려는 모레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비탄을 금치 못하게 될 것이다. CONAIE는 UNASUR가 볼리비아, 에콰도르, 파라과이, 온두라스 및 기타 국가들에서의 쿠데타를 예방하고 규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결코 잊을 수 없지 않은가.”(3) 에스키벨은 아직까지 연맹으로부터 어떤 회신도 받지 못한 상태다. 
모레노 대통령은 코레아 전 대통령이 결단코 용인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노사단체와 소수의 반동세력을 재통합했다. 그리고 정치적 노선과 선거기반이 다르고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한 정당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마르티네스 재무부 장관은 우파 노선을 택해 초기예산 흑자와 시장자유화, 노동법 유연화 등을 목표로 삼았다. 2018년 8월에는 전 정부의 개발·재분배 정책들을 해체하는 긴축정책을 골자로 생산성 제고를 위한 법을 표결에 부치기도 했다. 

조세정책에서는, ‘투자자들의 회귀 장려’를 구실로 불량납세자 사면과 대기업을 위한 일련의 특별 혜택들을 담은 법문을 마련했다. 국가 재정 확보라는 명분으로 거물들의 조세 저항에 굴복한 셈이다. 게다가 자산을 은닉하거나 공장 설비를 철거하는 등의 행위로 노동자들의 이익을 해친 기업주들을 소추할 수 있는 노동권 보장에 대한 기본법 제1조도 폐지했다. 

정부는 개발정책의 일환으로 원자재 가격 폭등과 해외자금송환에 대해서는 과세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또한 브라질과 마찬가지로 공공지출을 연 3% 초과 확대하는 것을 금지하고 적자예산은 부채이자 상환분으로 제한하고 있다. 공공정책의 일환으로서의 투자도 사라졌다. 그러나 정부는 다년간 보조금을 보장하는 지원책을 마련해 민영화 촉진을 도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해외투자에 대해 국제적 분쟁조정제도를 도입하며 헌법도 서슴없이 위반했다.(4)

모레노 대통령은 UNASUR와 라틴아메리카·카리브 국가공동체(CELAC)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일조했으며, 보수진영이 이끄는 라틴아메리카 국가 간 자유무역 기구 태평양동맹(Pacific Alliance) 가입을 장려하고 있다. 또한 미국 송환을 피하고자 주 영국 에콰도르 대사관에 피신 중인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를 대사관에서 내보내려는 입장이다.

한편 2007년 37%였던 국민 빈곤율이 2016년 23%까지 감소하고 국내총생산(GDP)이 68% 증가한 사실을 보면, 에콰도르 신자유주의자들이 비난하는 ‘포퓰리즘에 따른 경제 붕괴’를 증명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해외시장에 영합하고자 경제 붕괴를 사회 재구성의 명분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새로운 경제원리도 결국 과거 과두지배세력을 지탱했던 오랜 이권논리와 흡사하다. 

에콰도르는 과거 코레아 정부 기간에 진보주의의 긴 주기를 겪었기 때문에, 지금의 급변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이려면 뿌리 깊은 곳에서부터 정치적 알력관계, 그리고 권력의 정당성 확보 메커니즘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이 ‘신자유주의의 기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장자유화를 
정당화한 ‘부패척결’이라는 슬로건

‘신자유주의의 기습’은 2001년 수잔 스토크스가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5) 스토크스는 기존의 자유주의 방침들과 상반된 계획을 세운 남미 정권이 새롭게 권력을 잡은 후, 이를 시행하지 않았던 이전 정권들의 민주적 정당성 결여를 어떻게 비난했는지 분석하고자 했다. 현 모레노 정권도 그중 하나다. 예컨대 1990년대 페루에서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대신 (‘빛나는 길’이라는 반정부 게릴라 단체의 위협에 대해) 안전과 질서를 약속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2018년에는 모레노 대통령이 ‘코레아 정권의 도덕적 해이’를 근절하는 방안으로 신자유주의 노선을 택한다. ‘부패척결’이라는 슬로건이 시장자유화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후 모레노 정부는 적폐청산을 앞세워, 코레아 전 대통령을 대중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기 위한 강력한 미디어 캠페인과 사법권을 정치적으로 활용해왔다. 또한 정부방침과 SNS 노이즈 마케팅, 신문 ‘1면’ 등을 통해 ‘반 코레아 공작’을 확산하고 있다. 결국 법원은 피고인을 심판하는 대신 정치인들의 직무 적합성을 판단하는 사법기관으로서 존재하게 돼, 호르헤 글라스 전 부통령을 폭력단체 연루 혐의로 기소 수감하고 현재 벨기에에 거주 중인 코레아 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6) 이런 식으로 모레노 정부는 2007~2017년 경제성장과 빈곤율·불평등율 감소 등 소위 ‘코레아의 승리한 10년’에 대한 국민의 의심을 부추기는 데 성공했다. 모레노 정부는 미디어를 통해 “이전 좌파정부의 재분배정책으로 부패가 만연한 상황에서는(7) 긴축정책이 도덕적 의무”라고 설파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다. ‘모레노 대통령이 시민혁명의 실질적 위기를 기회로 삼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실제로 현 정권이 ‘일부’ 국민의 지지를 얻은 데는 과거 국가공금을 횡령한 책임자들이 그동안 처벌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몫한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주의자들은 ‘모레노의 배신’에 대한 좌절감을 표출하는 데만 그칠 수 있을까?

‘청렴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묵살하는 모레노 정부의 전략은, 신자유주의가 불평등한 정책임을 증명하려는 좌파의 모든 시도를 꺾어버릴지도 모른다. 현재 에콰도르의 진보 진영은 반 코레아 좌파세력과 친 코레아 세력으로 분열돼 있는데, 반 코레아 좌파세력의 경우 현 정권의 정치적·법적 공세와 자기반성의 부재로 힘을 잃은 상태다. 이런 이유로, 정부가 좌파노선으로 선회하기란 다소 불투명해 보인다. 

에콰도르에서는 1998년 이래 단 한 번도 우파 대통령이 나온 적이 없다. 정권의 지지율이 하락한다면 모레노 대통령은 자신의 후보시절 좌파진영의 지지층과, 집권 후의 변신 덕택에 새로 얻은 보수진영의 지지층 모두에게서 외면당할지 모를 일이다. 바로 미셰우 테메르 전 브라질 대통령처럼 말이다. 테메르의 퇴진 후, 브라질의 뒷이야기(우파 포퓰리즘 정권으로 급선회)는 이미 너무나도 유명하다.  


글·프랭클린 라미레스 가예고스 Franklin Ramírez Gallegos
에콰도르 정치학 연구 교수

번역·김진주 kim_jinjoo@hot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Anne Vigna, ‘경제 위기 속에 날개를 단 브라질 우파Au Brésil, la crise galvanise les droite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7년 12월호·한국어판 2018년 2월호.
(2) 친 코레아 그룹에는 29명의 의원이 소속돼 있다.
(3)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이 에콰도르 원주민 연맹(CONAIE)에 보낸 공식 서한(Carta pública de Adolfo Pérez Esquivel a la Conaie)’, 텔레수르(TeleSur), 2018년 8월 29일자, www.telesurtv.net
(4) Benoît Bréville & Martine Bulard, ‘국가를 유린하는 다국적 기업 Des tribunaux pour détrousser les État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6월호·한국어판 2014년 7월호.
(5) Susan Stokes, 『Mandates and Democracy. Neoliberalism by Surprise in Latin Americ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6) 2012년 야당의원 납치사건에 연루된 현재 기소된 ‘정치범’으로 2018년 9월 인터폴에 수배 명단에 올랐다.
(7) Renaud Lambert, ‘브라질 사람들은 모두 파시스트인가? Le Brésil est-il fascist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