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변술인가, 치기의 향연인가?

2018-11-29     올리비에 바르바랑 | 작가

 자신의 의견을 잘 표현하는 능력은, 오래 전부터 사회 계급을 구분 짓는 징표이자 권력의 수단으로 간주돼왔다. 오늘날 다시 유행 중인 웅변술은 말재주와 표현력 향상, 경영 능력 개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표를 표방하고 있다.


수사학은 오랫동안 설득의 수단이자 언어 사용법의 연장선상에서만 이해돼왔다. 이를테면 말을 잘하는 기술, 이른바 웅변술의 법칙과 기법을 통칭한다고만 간주됐다. 즉 연설의 목적(설득, 즐거움, 감동 등)을 구분하고, 그 범주 안에서 연설하는 것을 뜻했다. 다시 말해 논거를 발견하고(착상 또는 논거발견술, inventio), 발견한 논거들의 배열 순서를 결정하고(논거배열술, dispositio), 표현방식을 구상하고(표현술, elocutio), 구상한 내용을 직접 발표하고 연기하며(연기술, action), 동시에 이를 위해 생각해둔 내용을 암기하는 과정을 뜻했다(암기술, memoria).
 
사실상 이런 사고관은 고대 로마인(특히 키케로)의 유산이기도 했다. 로마인의 변론술이나 연설은 오랫동안 모범으로 간주되며 예수회 대학 등에서 널리 교육됐다. 특히 17세기 문학작품들에도 이런 영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런 옛 모델에 대해 반발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문학’도 독자적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800년 제르멘 드 스탈은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문학론』이란 저서를 출간해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책은 당시 태동 중인 낭만주의가 새로운 모델을 창조하고, 수 세기에 걸쳐 오로지 언어와 언어의 힘을 성찰하는 데만 기대어온 과거의 형식과 기법을 탈피하고자 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연설집 <프랑스 ‘콘시오네스’. 혁명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웅변술>(1) 등을 주교재로 삼았던 각종 수사학 강의(고등학교 2학년 과정)는 1891년 고전교육을 통합한 ‘현대적 중등교육’이란 이름의 교육개편안이 실시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화됐다. 이어 1902년 교육개혁으로, 과학적인 성격의 교육과정이 확대됐고, 고대모델을 탈피한 국내문학사에 비중을 둔 문학교육이 늘어났다. 이로써 웅변술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대학을 중심으로 번지는 웅변대회 열기

그러나 오늘날 다시금 웅변술이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웅변술은 이제 변호의 대가들을 위한 교육을 뛰어넘어 모든 단계의 학교 교육, 모든 사회집단을 위한 교육으로까지 널리 확산되고 있다. HEC(고등상업학교), 시앙스포 파리(파리정치대학),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을 타깃으로 삼은 프랑스 국방성, 에콜 폴리테크니크(공과대학) 등이 모두 웅변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여기에 여러 파리 소르본 대학들이 함께 운영 중인 ‘웅변의 꽃’(2012년 창설)이나 스테판 드 프레타스(2013년 처음 개최)가 센생드니 지역 파리8대학에 처음 개설한 ‘엘로캉시아(웅변) 프로그램’, 여성재단이 주관하는 ‘지젤 알리미’ 상, 샤를 드골 재단 대회(2017년 대회 주제는 ‘참여’였다) 등 각종 웅변대회가 열풍에 가세하고 있다.
 
요컨대 웅변과 관련해 온갖 교본, 방법론, 교습, 학교 등이 번성하고 있다. 가령 2010년 파리에 세워진 웅변학교(2)는 창립자 스테판 앙드레의 방법론에 따라 각종 강연, 훈련, 진단 및 개인수업 등을 운영하고 있다. 명문 비즈니스 스쿨 ESSEC(고등경제상업학교)을 졸업한 스테판 앙드레는 『연사들의 비결』, 『리더십 기술』 등 제목부터 명확한 의도를 드러낸 저서들을 줄줄이 출간했다.(3)
 
그뿐만이 아니다. 요즘은 모든 고등학교와 대학이 저마다 웅변대회를 마련해 나날이 참가자와 관중이 늘어나는 등 큰 호응을 얻고 있다. 2016년 ‘엘로캉시아’ 웅변대회 참가자들의 경연 준비과정을 카메라에 담은 <우렁찬 목소리로>(4)도 마치 웅변시합을 한 편의 서사시처럼 그려 보였다. 한편 각종 웅변대회 동영상 기록물 역시 최근 웅변 열풍이 얼마나 거센지 잘 보여준다. 가령 2018년 10월, 2017년 HEC 웅변대회 결선 장면은 유튜브에서 무려 43만 7,000건의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웅변 열풍은 전통적으로 정치와 사법의 토대가 돼온 고전인문학의 부흥을 알리는 서막인 것일까? 사실 여러 대회가 표방하는 원칙들을 살펴보면 꼭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가령 현 웅변대회 열풍은 모두 두 가지 경향성을 띤다. 먼저 첫 번째 경향은 논증 능력의 사회적 유용성에 역점을 두고, 현대사회를 이끌 리더들, ‘경영’의 대상인 조직원들 앞에서 조금 더 능숙하게 발언하고 효율적으로 인력을 관리할 ‘인사관리’의 귀재 내지는 언어의 대가들을 양산해내는 것만을 주목적으로 삼는다. 
 
다음 두 번째 경향은 사회운동에 뿌리를 내린 경향으로, 말하자면 ‘아래로부터의’ 목소리,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모든 국민이 평등한 발언권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가령 2018년 6월 10일 열린 지젤 알리미 상 시상식에서, 심사위원인 크리스티안 토비라 전 법무부 장관은 “대중 앞에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여성에게는 그리 익숙한 일이 아니다”라며 지원자들의 ‘용기’를 치하하기도 했다.  
 
화려한 화술과 넘치는 카리스마로 각광받고 있는 변호사 베르트랑 페리에는 이 두 가지 경향을 멋지게 조합해내는 능력을 보여줬다. HEC에 출강 중인 그는 ‘엘로캉시아’ 프로그램 운영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엘로캉시아’란 서민층 출신으로 파리2대학(아사스) 법학과와 파리고등경제상업학교(ESSEC)를 졸업한 스테판 드 프레타스가 “더불어 사는 삶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협동조합 ‘앵디고’의 지원을 받아 개발한 웅변술 관련 수업 및 대회 프로그램이다. 
 
HEC가 소재한 주이엉조자스 지역에서 운영하는 엘로캉시아 프로그램의 경우 미래 경영자들의 뛰어난 능력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센생드니 지역의 프로그램은, 해방의 힘으로 기능하는 자유로운 표현 능력 개발을 목표로 삼는다(물론 채용면접용 역할도 톡톡히 하겠지만). 말하자면 발언권을 누리지 못하는 약자들의 의사표출과 지배언어를 다루는 기술, 이 두 가지가 짝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 바탕에는 현대 소통사회가 주최자나 참가자들 모두에게 강요하는 한 가지 생각이 중요한 논거로 자리 잡고 있다. 즉, 구직활동 또는 시민으로서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말을 잘하는 능력부터 갖춰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영화 <우렁찬 목소리로>에서 보이는 다소 요란한 서정성은 이런 이중성에서 비롯된다. 실상 이는 이른바 자유주의 시대가 지닌 이중성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그것은 오늘날 개인의 자아실현은 사회가 원하는 모습과 일치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영화 속에서 젊은이들은 스포츠 선수 팀의 신화(협력활동, 동고동락, 자아극복 등)를 떠올리게 하는 훈련을 거치며 점차 자신감을 되찾는다.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고, 자기 생각을 형성해나간다. 그들은 웅변수업이 상당한 이점을 가져다줬다고 칭송한다. 웅변수업이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을 회복하고, 유용한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도와줬다고 고마워하는 것이다.

‘원맨쇼’에 가까운 인기몰이 게임
 
각각의 웅변대회들은 서로 표방하는 목표가 제각각이지만, 현대의 웅변술이 지닌 특성만은 모두 동일하게 지니고 있다. 대회 장면이 담긴 기록물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금세 스탠드업 코미디 미학이 지배하는 현상에 충격을 금할 수가 없다. 점차 언어를 다루거나 청중과 접촉하는 연사들의 능력이 발전할수록, 신경을 박박 긁는 자극적인 조롱, 과도하고 인위적이며 기만적인 몸동작이 늘어난다. 어느새 고대인이 생각한 의미의 수사학 기술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마치 미국의 코미디언이나 그들을 계승한 프랑스 제자들의 계보를 잇는 듯한 한 편의 코미디를 지켜보는 기분이 든다. 
 
한 마디로 ‘원맨쇼’ 같은 개그, TV 진행자들을 본보기로 삼은 신랄한 태도, 청중을 선동하는 유머, 디지털 기업 경영자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격의 없이 청중의 호응을 유도하는 자유로운 태도가 주류를 이루는 것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웅변술은 형식 면에서 이미 세계화를 이룬 듯 보인다. 랩, 무반주 랩, 정곡을 찌르는 펀치라인 등이 어우러진 이 새로운 웅변술은, 언어에 대한 관심이 이제는 미디어로 새롭게 확립된 규칙들에 의해 얼마나 좌지우지되고 있는지를 여실히 깨닫게 해준다.
 
이런 가운데, 때때로 연사의 카리스마는 연설 내용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가령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기몰이에 성공한 HEC의 웅변대회는 헛되기 그지없는 공허한 재능을 지향하는 듯이 보인다. 특히 대회의 주제가 딱히 없다는 점도 이미 이런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2012년 대회까지만 해도 그나마 일반상식 시험 수준의 연설문을 요구했지만, 최근에는 아예 대회 자체가 무의미한 ‘수다’의 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2016년 대회 결선자들의 연설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누빌라, 그대는 나의 첫 발기 대상이자, 나의 마지막 성찰 대상이었노라.” 2등 수상자가 이 말을 하는 순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런가 하면 “나는 폴 리카르(Paul Ricard)보다는 폴 리쾨르(Paul Ricoeur)에 가까운 사람, 독주에 취하기(spiritueux)보다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다(spirituel)”라든가, “그곳은 벨 장시브(아름다운 잇몸) 호텔로 불렸다. 아마도 여주인의 미소 짓는 습관을 기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와 같은 연설에 1등의 영예가 돌아갔다. 
 
이런 새로운 ‘웅변술’의 표본은 뜨거운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며, 전체 연설의 90%가 이런 코믹 연설을 지향하고 있다. 나머지 10%도 갑작스런 분위기 전환을 통해 뜻밖의 비장미를 끌어내리고자 고의로 진지함을 추구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모두가 걱정하듯 이처럼 가장 인기 있는 대회가 마치 웅변술의 모범처럼 인식된다면, 결국 웅변술 교육도 그저 한낱 수다를 배우는 학습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말하기’에의 욕망이 
온전한 교육이 되려면

미디어의 세례를 받고 자라나 SNS 소통에 익숙한 채용면접 시대를 살아가는 현세대에게, ‘말하기’란 필수적으로 정복하고 싶은 수단일 것이다. 말하기는 사회적, 경제적 삶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지만, 정작 학교에서 잘 가르쳐주지는 않는 기술이니 말이다. 비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웅변 교육은 정식 교육 과목으로 정착하기까지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물론 이탈리아의 ‘콜로키오(구두시험)’ 제도에서 착안해 프랑스에서도 2021년 바칼로레아 시험개편에 따라 구두시험(Grand oral)이 도입될 예정이다. 여러 과목을 바탕으로 통합적 지식을 묻는 이 시험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은 과목이 동원돼야 할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만일 구두시험 도입에 대해 바칼로레아의 ‘시험수준이 하향화’될 것을 성급하게 개탄하는 과거의 향수에 젖은 사람들이 있다면, 부디 1808년 바칼로레아 시험이 처음에는 구두시험으로만 이뤄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욕망. 학생의 욕망에서 출발한 웅변 교육은 단순히 어설픈 익살광대의 재능을 계발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대신 구술연습을 통해 충분히 언어와 인간의 관계를 주조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특히 웅변술이 그 바탕을 이루는 것들, 즉 메모리아(Memoria), 콘텐츠, 지식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사상의 표현 등과 적절히 잘 어우러질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만일 학교가 새로운 웅변술과 경쟁하는 데만 만족한다면, 결국엔 언어와의 기계적인 관계, 얄팍한 연설 기술만을 가르치는 기술 교육에 그치고 말 것이다.
 
물론 말하기가 지닌 나르시스적인 욕망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웅변술 교육은 학생들이 자신의 표현력을 다듬고 언어활동에 더욱 관심을 가지도록 이끌 효과적인 지렛대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언어, 특히 언어능력의 부족함에서 출발해 발화 속도, 분절, 리듬과 강약의 조절, 음역 등을 훈련한다면, 결국 육체와 목소리로부터 나오는 살아 있는 언어는 다시금 수많은 실험과 관심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 순간 이미 대부분 사문화된 여러 작가들의 문체를 연구하는 일조차 다시금 가치 있는 일로 대접받으며 많은 이들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학생들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규칙들을 놓고 형식적 분석을 하는 학습에 그치지 않을 것이고, 웅변술 교육 역시 말하기와 쓰기의 지난한 변증법을 바탕으로 마침내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신의 표현력을 더욱 풍요롭게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대중 앞에서 발언하는 법을 배우는 교육은 오로지 사회적 유익함만을 추구하고, 근사한 연설형식을 흉내 내는 데 머물지 않고, 마침내 학생들이 규범을 이해하고, 규범과의 거리를 적당히 조절하며, 온전한 자신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교육으로도 충분히 발전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각자가 언어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모든 프랑스어 교사들이 한 번쯤은 꿈꿔볼 만한 이상이 아닐까?  


글·올리비에 바르바랑 Olivier Barbarant
작가. 프랑스 교육감독기관인 국가교육총괄장학총국(IGEN) 소속 감독관.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Joseph Reinach, 『Le ‘Conciones’ français. L'Eloquence française depuis la Révolution jusqu'à nos jours(프랑스 ‘콘시오네스’. 혁명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프랑스 웅변술)』, Delagrave, 파리, 1894년. Cf. Françoise Douay-Soublin, ‘Les recueils de discours français pour la classe de rhétorique(수사학 수업을 위한 프랑스 연설집)’, 『Histoire de l'éducation』, 제74호, 파리, 1997년 5월.
(2) www.ecoledelartoratoire.com.
(3) Stéphane André, 『Le Secret des orateurs. Politique, média et entreprise(연사들의 비결. 정치, 미디어 그리고 기업)』, Stratégies, Issy-les-Moulineaux, 2008년; 『L'Art du leadership(리더십 기술)』, ESF Editeur, Montrouge, 2016년.
(4) Stéphane de Freitas, Ladj Ly, ‘A voix haute. La Force de la parole(우렁찬 목소리로. 언어의 힘)’, 2016년 France2 에서 방영, 2017년 극장 개봉. Cf. 2017년 개봉된 Yvan Attal의 영화 <Le Brio>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