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회당 제3의 길 ‘케어’ 정책의 대변혁, 기대해도 좋을까?
[Horizon]
존중, 아니면 타인에 대한 배려? 마르틴 오브리 사회당 제1서기는 요즘 ‘케어’(Care)의 대응어 찾기에 부심하고 있다. 그녀는 사회당 사회정책 기조로 ‘케어’라는 영어 단어를 지목했다. 하지만 혹 사회당이 동정이나 개인윤리를 선결과제로 내세우며 자칫 생산관계나 사회구조를 간과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인간 존중의 사회다. 냉혹하고 난폭하고 거친 이기적인 사회가 아니다.”(1) 이 지당한 말씀에 그 누가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명문 중의 명문이요, 구구절절 옳은 소리다. 그런데 ‘사랑과 평화’가 어쩌니 하며 뜬구름 잡는 상투적 연설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 문장을 듣고 피식 조소를 머금는다면 그도 왠지 경솔한 처사일 것 같다.
왜냐하면 사회당 제1서기 마르틴 오브리가 밝힌 이 소망에는 단순히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기 힘든 데서 비롯된 막연한 불안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사회문제뿐 아니라 민주주의 기능까지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사회 민주주의 가치를 새로이 재정립하려는 야심찬 기획이 실려 있다. 결국 오브리가 던진 말은 결코 전시성 구호도, 개인의 감상적인 포부도 아니다. 그녀가 말하려는 것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Liberal Socialism)의 목적과 수단을 재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울함에 사로잡힌 수많은 시민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어온 좌파가 새로운 길로 들어서려는 것일까? <<원문 보기>>
오브리가 내건 사회정책의 기저에는 ‘케어’(Care·보살핌)라는 개념이 자리한다. 굳이 이 영어 단어를 선택한 것은 어딘지 조금 엉뚱해 보인다. ‘Care’는 프랑스어 사전에 ‘배려, 보살핌, 관심’ 등을 의미한다고 나와 있다. 제아무리 무심한 관객일지라도 한 번쯤 미국 영화 속 주인공들이 작별인사를 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Take care’(잘 가)라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무미건조한 말을 내뱉는 것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프랑스어 단어 ‘Sollicitude’(배려)로는 표현할 수 없는, 뭔가 ‘케어’만의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바로 이 개념의 이론적 배경이다.
모호하고도 섬세한 표현, ‘케어’
‘케어’는 지난 30년간 북미 페미니스트들이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했다.(2) 사실 ‘케어’의 정의는 그다지 명쾌하지 않다. 적어도 데카르트에게서 계승된 지극히 합리적 사고방식을 지닌 이들에게는 꽤나 불분명한 개념으로 느껴질 것이다. 실용적 차원과 윤리적 차원이 서로 겹치거나 뒤섞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케어’는 ‘사람에 대한 보살핌’과 그에 대한 연구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대개 대상은 여성이나 외국인, 가난한 사람 등 ‘피지배층’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케어’의 필요성은 모두 중요하게 인식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긍정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훗날 ‘케어’ 이론은 더욱 광범위한 범주에서 ‘의존성’이란 개념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비자율적 존재의 범주에는 단지 병자, 노인, 어린이, 장애인만 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사실상 의존성이란 모든 인간에게 고유한 특성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 그리고 인간으로 남기 위해 우리는 신체적·사회적·정신적 측면에서 타인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는 어머니에게, 노동자는 고용주에게 의존한다. 심지어 정체성마저 “의존적인 특성을 지니기 마련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형성된다.”(3)
진정한 ‘독립성’은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우리의 다양한 욕구(생리적·정서적 욕구)가 타인에 의해 충족된 것을 가지고 독립성을 획득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일단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의존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좀더 친절하게 바뀐다. 더 이상 의존성은 질병이나 실패의 상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의존성은 본질적으로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서로 의존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보살핌(Care)의 사회’는 결국 오브리가 말한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다. 그것은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지배·피지배의 수직적 관계를 초월한 사회이며, 비자발적 의존성이 아닌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상호의존성에 근거하는 사회다.
이쯤 되면 오브리의 사회정책이 제2의 이타주의 찬가쯤으로 여겨질지 모르겠다. 혹은 연민 계통의 어떤 특수한 감정을 추구하는 새로운 버전의 좌파적 감수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보험 부문 및 경영자 권리 분야 이론가로 활동하는 프랑수아 에발드(4)가 전문가답게 지적하듯이, 오브리의 주장이 예고하는 것은 일종의 ‘대변혁’이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사회구조를 변혁할 핵심 가치가 될 때, 각기 연약한 개개인을 돕고 대변하고 만족시키는 것은 집단의 의무가 된다. 그리고 이 의무를 저버린 집단은 대번에 소외를 부추기는 불공정한 사회로 치부되고 말 것이다.
자발적 상호의존성의 사회
이는 정치적 의미의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많이 공격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유민주주의는 인격이 배제된 개인에게 모두 동등하게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추상성으로 자유민주주의에서 평등은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시민’은 실체가 있는 사람이 아닌 추상적 존재며, 뼈와 살을 지닌 욕망의 존재가 아닌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떠한가? 현실에서 개인은 결코 하나의 보편적 전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진정한 평등이 실현되려면, 평등이라는 것이 단순히 ‘원칙의 총체’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저마다 원하는 다양한 기대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평등이 되어야 한다.(5)
마찬가지로 인권은 인격을 부여받은 구체적 상황 속의 인간을 대상으로 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개인을 권리의 주체에서 권리의 소유자로 변화시키는 것, 형식적 평등에서 실제적 평등으로 나아가는 것은 사실 소수자, 여성, 어린이, 이민자, 동성애자 등이 아주 오래전부터 요구해오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케어’는 이런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경우보다 다양성 존중을 요구하는 더 많은 사례들을 만들어내며, 그로 인해 민주주의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여러 갈등을 표면화할 우려가 높다. 이 과정에서 ‘공적인 문제’를 공·사의 경계가 모호한 윤리 속에 희석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공과 사를 가르는 이 경계야말로 국가(Re Publica)의 존립 기반이 아니던가.
개인은 취약한 존재이기에 서로 의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케어’ 이론은 자유주의의 어쩔 수 없는 현실적 한계를 인정한다. 따라서 개개인의 고유한 욕구를 존중하기 위한 제일의 책무로 “일단 인지된 욕구에 책임을 다하고, 이를 충족시킬 방법을 모색할 것”을 제안한다.(6) 여기서 말하는 ‘개인의 욕구’는 어떤 형태로 발현되든지 간에 행복에 대한 욕구로 귀착한다. 그리고 이 행복의 욕구가 실현될 수 있는 곳은 오브리가 말한 “모든 것을 소유한 사회”에 반대되는 “행복한 삶을 제공하는 복지의 경제”다.(7) 철학가 악셀 호네트는 “한 사회의 정상·비정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회가 각 구성원의 완전한 자기실현을 보장할 조건을 갖추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아비샤이 마갈릿(8)의 이론을 빌려 오브리가 주창하는 이 “품위 있는 사회”(Decent Society)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은 우선 공과 사의 경계를 크게 완화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공적 문제의 경계 모호해질 수도
자기실현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비자발적 의존성’은 각 개인의 상황이 불평등한 데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 사람마다 부와 권력의 정도, 신체적·정서적·지적 자원이 다르기 때문에 ‘비자발적 의존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기실현이 가능한 사회가 되려면, 사회는 단순히 각 구성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각 구성원이 서로 존중할 수 있는 풍토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평한’ 삶이 아닌 ‘행복한’ 삶이다. 개인의 욕구를 배려한다는 것은 일단 각자가 ‘능력’(Capabilities)을 발휘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주는 것이다.(9)
개인의 잠재적 능력만이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요건인 존엄성과 자신감 획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연대의식이나 관심이 정서적·사회적·정치적 환경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결국 행복한 삶, 더 나아가 최상의 삶이 실현되려면 ‘상호 간의 보살핌’이 선행되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사회 수당도 배려의 문화, 가족·동료 간 연대의 관심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오브리도 말하지 않았던가. 결국 집단 투쟁의 틀 밖에서 새로운 사회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실상 물질주의가 뭐 그리 대수롭겠는가.
‘보살핌(Care)의 사회’라는 개념은 위대한 두 사상가, 프랑스의 레옹 부르주아와 영국의 앤서니 기든스를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장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프랑스 프리메이슨 종단(Grand Orient de France)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으며, 1920년에는 국제연맹을 탄생시킨 노고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레옹 부르주아는 재화가 아닌 인간의 사회화를 주창한 ‘연대주의’(Solidarism) 이론가 중 한 사람이다. 한편 토니 블레어가 말한 앤서니 기든스는 영국 신노동당의 이론가로,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기 위해”(10), 약화된 연대 의식 강화와 이를 잣대로 한 복지국가 개혁을 정책 기조로 삼은 인물이다.
복지국가의 개혁과 만나다
‘케어’ 개념에 내재된 각 개인의 차이를 인정한 실제적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앞서 말한 복지국가의 개혁이 필요하다. 때때로 복지국가는 민간이 주도하는 정책에 비해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진다. 민간 부문은 보편성이라는 미명 아래 특수성을 소홀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지국가를 개혁한다고 해도 공공 부문의 주요한 역할, 즉 개인의 ‘인생설계’(Life Project)를 아주 가까이서 지원하는 역할은 계속되어야 한다. 오브리도 “공공 부문은 각 개인이 최상의 자기실현을 할 수 있도록 국민을 교육하고, 지원하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늘 쉬운 일만은 아니다. 해방이란 개인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대체 어떠한 암묵적 기준을 잣대로 자기실현의 완성도를 측정한단 말인가?
더욱이 ‘인생 설계’는 지배 모델과 서로 연관되어 있지 않은가? 결국 ‘더불어 사는 삶’을 준수한다는 미명 아래, 공공 윤리 규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 각자의 인생 성취가 제약을 받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개인이 공공 부문에 성공적인 인생 보장을 요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각자 예기치 못한 욕망 때문에 겪게 되는 내면 충돌이나 생각을 위한 노력, 삶을 위한 수고로움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런 것들이 있기에 인간은 꿈꾸고, 행동하고, 각자의 삶에 책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 가능할까
논리적으로 따져볼 때, ‘근접성’을 중시하는 ‘케어’ 이론의 이상은 네트워크, 협회, 포럼, 회합 등에 근거한 ‘참여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틀을 필요로 한다. 보통선거의 ‘보편적’ 표에 의해 개인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는 제도 말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개인의 욕구를 배려하는 과정은 환경정책의 경우가 그러하듯, 간섭의 의무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생각, 즉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 불행에 대해선 전혀 책임이 없다는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것이다”.(11) 하지만 총체적으로 볼 때 ‘케어’ 정책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사회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한 작은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법의 절대성에 대한 문제다. 이제 법은 개인 간의 계약을 위해 협상될 수 있고, 제한되기도 하며, 수정이 가능한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더 이상 일반적인 사회적 협약은 무의미해진다. 심지어 퇴직 연령도 마음대로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촉발된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갈등은 현 자본주의가 그토록 열렬히 희망해 마지않는 ‘거버넌스’에 더욱 힘을 실어줄 우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갈등이 사회문제를 사회의 부수적 문제로 왜곡할 우려, 그리고 정치적 문제와 공공의 문제를 심리적 기준에 근거한 윤리 속에 희석시킬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심리적 윤리는, 도덕성은 유지하면서 소외·착취·굴욕을 일으키는 원인 중 가장 불편한 원인, 즉 경제구조를 전혀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 자유주의를 신봉한 뱅자맹 콩스탕도 말하지 않았던가. “권력은 공정성만 갖추면 되고, 우리의 행복은 우리 스스로가 알아서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작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각주>
(1) 마르틴 오브리, <르몽드 매거진>, 2010년 6월 5일. 마르틴 오브리를 인용한 부분은 모두 이 기사를 참조한 것.
(2) 캐롤 길리건의 이 선구적 에세이는 1982년 미국에서 출간됐다. <다른 목소리: 보살핌의 윤리를 위하여>, 아니크 키아텍 번역, 바네사 누로크 감수, 플라마리옹 출판사, ‘에세이’ 총서, 파리, 2008.
(3) 조안 트론토, <취약한 세계: 보살핌의 정책을 위하여>, 에르베 모리 번역, 라 데쿠베르트 출판사, ‘참고서적’ 총서, 파리, 2009.
(4) 프랑수아 에발드, www.rue89.com, 2010년 6월 5일. 에발드는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의 측근, 제롬 모노가 창설한 정치혁신재단 내 과학위원회 위원장이다. 2000~2001년, 프랑스경영자협회(Medef)가 주창한 ‘노사관계의 재정초’(Refondation Sociale) 입안에 참여했다.
(5) 조안 트론토, 앞의 책.
(6) 마리 가로, 알리스 르고프, <보살핌, 의존성에의 정의, 보살핌 이론에 대한 소개>, PUF 출판사, ‘철학’ 총서, 2010.
(7) 카트린 오다르가 인용한 악셀 호네트,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윤리, 정치와 사회>, 갈리마르 출판사, 폴리오 에세이 총서, 파리, 2009.
(8) 아비샤이 마갈릿, <품위 있는 사회>, 플라마리옹 출판사, 샹 총서, 파리, 2007.
(9) 아마르타 센, <불평등을 재검하자>, 쇠유 출판사, 파리, 2000.
(10) 앤서니 기든스, <좌파와 우파를 넘어>, 스탠퍼드대 출판사, 팔로 알토(캘리포니아), 1994.
(11) 조안 트론토, 앞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