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노동’의 세계적 모델

[Spécial] 대위기, 제2막

2010-09-03     뤼실 가르송·라미 주라이크

매일 아침, 안티레바논 산맥 뒤에서 해가 뜨기 무섭게 베카 평원에 늘어선 임시 숙소 야영장에는 일터로 출발을 알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울린다. 곧 남자들과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이 빵과 치즈, 삶은 감자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하나씩 들고 텐트를 나와 픽업 트럭에 올라탄다. 낡은 긴 옷 안에 옷을 여러 벌 껴입고, 머리에는 베두인이 쓰는 긴 터번 비슷한 케피야를 쓰고 있다. 레반트와 베카 고원의 베두인들,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농부들의 전통 복장이다. 그들은 땅으로 먹고사는 새로운 노동자군, 새로운 유목민 유형에 속한다.

유목민에서 유민으로

베카 고원의 산악 사이 충적토 토양의 평원(40% 이상이 레바논 영토)은 고대부터 곡물을 재배하는 땅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과일과 채소를 생산하고 있다. 국가 차원의 농업정책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국가는 무엇보다 투자를 끌어들일 수 있고, 특히 요르단과 걸프 국가를 수출 대상국으로 삼는 자본주의적 산업 분야로 발전시킬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이런 전략은 채소를 재배하는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농사를 집약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농사는 거의 계절을 타지 않는다. 토마토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온실에서 자란다.

그리고 1980년대 이래, 매년 봄이 오면 텐트가 등장했다. 텐트는 가죽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마대를 이어붙인 것이거나, 커피로스터 로고나 의류 브랜드 카피가 곳곳에 박힌, 광고판에서 주워온 플라스틱 방수포로 만든 것이다. 시리아 사람들이 안티레바논 산맥을 넘어 베카에 머물게 된 것은 불과 몇 세대 전의 일이다. 예전에는 양떼를 방목하기 위해 산맥을 넘었지만, 이제는 이유가 달라졌다. 경제 시스템이 극도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기업의 경쟁력 제고와 수많은 개인의 금전적 필요가 이주의 큰 이유가 됐다.  

최근 미국이나 유럽의 섬유공장을 아시아로 옮기도록 부추긴 ‘비교우위’ 논리는, 몇몇 농민이 자본은 없고 노동력만 풍부한 국가에서 노동력을 수입하는 데도 적용되었다.(1) 시리아와 레바논 사이에서 국제무역 규칙은 무리 없이 돌아간다. 예컨대 두 나라 사이의 국경 인접성과 상호 방문의 용이성, 그리고 레바논에 건설된 “1920년대의 이주민 정착지”(2)는 헐값으로 시리아 노동자들을 유입시키고 있다. 그래서 농산물 식품가공업체들이 이 임시 숙소에 노동자를 구하러 오는 것이다.

유럽의 “법정 시간당 최저임금이 외국인에게는 최고 임금”(3)이 되는 것처럼, 레바논의 농업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시리아에서 보면 터무니없이 많은 금액이다. 베카에서 최저임금으로 지불되는 일당이 라카(시리아)에서 받는 임금의 4배가 된다.(4) 온 가족이 함께 넘어온 시리아 사람들은 수백 명이 기거하는 임시 숙소에서 다시 만난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1년 중 몇 달을 머물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가정을 꾸리고, 조그만 사업을 벌이고, 농토를 사들이고, 아들이 24개월 군복무를 마치는 동안 가족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할 돈을 모으려고 몇 년씩 머물기도 한다.

레바논으로 흘러드는 시리아인들
 

이 시리아 사람들은 흔히 단순 노동자로 고용된다. 농산물 가공업 분야에서 노동일수는 다르겠지만, 맡는 일은 거의 비슷하다. 포도가 되었든 올리브가 되었든 오이가 되었든 간에, 농작물을 따거나 줍기 위해서 허리를 구부려야 한다. 공장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트럭에서 짐을 내리고, 저장하고, 상자 포장을 하고, 트럭에 싣는다. 봄이나 가을이나, 똑같은 고무장갑을 끼고 콩을 까거나 양파의 진흙을 턴다. 이들은 살충제와 태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케피야를 쓴다. 52살의 여성 노동자 나이파는 어느 누구도 열의를 보일 수 없는, 온 종일 계속되는 노동의 단조로움을 한탄한다. “수확할 때 부르는 노래가 많이 있지만 지금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좀처럼 볼 수 없다.” 텔레비전이 방영하는 예능 오락물과 휴대전화에 저장된 노래들이 전통 농요들을 제치고 들어앉았다.

 

동포 브로커, 그리고 성별 분업

11월, 베카 고원은 감자 수확을 서둘러야 한다. 농부 한 명이 자신의 3ha 농토에서 일할 일꾼들을 부르면, ‘샤위시’(Chawish)라 부르는 브로커가 픽업 트럭 뒤 짐받이에 일꾼 70명을 태운다. 농부는 트랙터 두 대를 빌리고, 땅 주인은 자기 트럭을 불러와 농부에게 일   꾼들을 제공한다. 대부분 시리아 사람들인 샤위시는 수확기에 급히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때를 대비해 노동시장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다. 샤위시라는 직위를 얻기 위해 서류 같은 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차량 한 대와 소유주들의 연락처가 저장된 휴대전화 하나면 충분하다. 샤위시는 노동자에게 노동 장소와 생활을 보장한다.

불시의 사고가 나면 그 비용을 책임지고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조절해주기 때문에, 고용주들에게는 적절한 수익성을 보장한다. 15년 전부터 샤위시로 일하는 아부 타메르는 엄격한 업무 분담으로 최대의 효율성을 보장한다. 여자에게는 수확을 맡긴다. 트랙터로 파놓은 밭고랑을 걸어가면서 보따리처럼 묶은 치맛자락 안에 감자를 담게 한다. 남자에게는 작업을 감독하게 한다. 여자들이 1분도 허비하지 않게, 채소 하나 떨어뜨리지 않도록 감독한다.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여자아이들은 플라스틱 포대에 농작물을 담고, 남자아이들은 허리춤에 실패와 바늘을 차고 돌아다니면서 몇 바늘 꿰매 포대를 봉한다.

로커에 떼주고 나면 빈손 일쑤

어떤 고용주는 샤위시를 통하지 않고 일꾼을 고용하기도 한다. 생산성을 높이려고 성과급 작업을 하는 것이다. 아몬드는 바구니당 돈을 지불한다. 요르단이나 걸프 국가 쪽으로 상품을 수출하는 포장 공장이나 냉장 창고의 노동자들은 트럭에 실은 상품 양에 따라 돈을 받는다. 베카 고구마로 유명한 알리 파야드 타르시시에서는 1t당 1달러를 준다. 담배는 말린 담뱃잎 묶음으로 계산한다. 노동자는 담뱃잎을 따서 계산대로 가져가고, 그것을 둥글게 꿰서 집으로 가져가 말린다. 주인이 그 노동자 집에 들러 말린 담뱃잎 꾸러미를 가져갈 때까지 온 가족이 함께 일을 거든다. 아버지는 5살 난 막내 타라야에게 뽀뽀 한 번으로 일을 격려하고, 능숙한 큰아들에게는 가게에서 과자 한 봉지와 맞바꿀 동전 한 푼을 쥐어준다.

점심시간 휴식 30분을 제외한 하루 10시간 노동으로 받는 일당은 8천LL(리비아파운드·약 7유로)를 넘는 경우가 드물다. 점심시간은 급료에서 제한다. 베카 고원의 농부들은 다른 곳보다 일당을 적게 주는데- 레바논 남부의 평균 일당은 2만5천LL인데 이곳에서는 1만LL이다- 일당에서 다시 샤위시에게 돈을 떼줘야 한다. 샤위시는 데려온 일꾼 한 명당 1500~2천LL를 받는다. 어떤 노동자들은 한 푼도 받지 못한다. 그들이 샤위시에게 개인적으로, 또는 가족이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라에드와 그 가족은 일하는 달의 급여로 지난해 다마스의 병원에서 수술받은 어머니의 병원비를 갚아나가고 있다. 어머니의 디스크 수술비는 150만 시리아파운드(약 2만4천 유로)였다. 빌린 돈을 다 갚기를 기다리며, 그리고 시리아에서 가져온 비상금이 바닥나면 이 노동자들은 근처 가게에 외상을 달며 살아간다.       

천막촌에 땔감도 물도 없다

오후 서너 시, 와르셰(Warxheh·작업팀)의 일이 끝나가고 남자아이들이 마지막 포대를 묶으면, 여자아이들은 씨알이 작거나 트랙터 바퀴에 걸려 흠집이 나거나 으깨진 감자를 주울 수 있다. 그들은 숙소로 돌아오는 즉시 길거리에서 주운 낡은 신발이나 요구르트병 같은 플라스틱을 태운 불에 감자를 익힌다. 주변에서 장작을 주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씻고 빨래를 하기 위해 물을 끓인다. 물론 물이 있을 경우에만 그렇다. 주민들은 샤위시에게 매년 일정 액수의 돈을 바친다. 샤위시들이 땅 주인에게 집세를 해결해주고, 발전기에 필요한 연료를 사다 주고, 물을 공급해주기 때문이다.

힐라니예에는 우물이 없다. 그런데도 임시 숙소 야영장 한가운데 있는 물탱크는 항상 가득 차 있지 않다. 물탱크에 물을 채워야 할 샤위시가 지난달 시리아로 떠났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마음이 편치 않다. “그 사람이 왕복 교통비를 낼 방법이 있다는 건 다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서열상 우위는 텐트를 장식하는 조악한 치장과 텐트 크기, 그리고 전축, 위성 텔레비전, 수연통 등이 갖춰진 것으로 알 수 있다. 파와즈와 그 형제들은 40달러(약 30유로)가 드는 왕복 교통비를 마련할 수 없어, 샤위시가 숙소를 비운 동안 그 숙소를 지키고 있다.

텐트는 방 2개로 되어 있다. 창문이 없고, 간신히 20m²가 될 정도의 방은 땅바닥에 나일론 거적을 깔아 습기를 막는다. 밖에 낡은 양탄자가 걸려 있는 곳이 화장실이다. 좁은 공간에 도자기 그릇 같은 것을 땅에 박아 화장실로 쓰는데, 도자기가 가득 차 넘치면 그 옆에 다시 구멍을 파서 도자기를 박는다. 때로는 동물 사체가 텐트 사이에 방치된 쓰레기와 함께 며칠씩 버려져 있기도 한다. 주거환경은 열악한데 거주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분쟁이 일어나기 딱 좋다. 가뜩이나 비좁은데 신참 노동자들이 도착하면 텐트 하나에 20명이 함께 지내기도 한다. 말하자면 일하는 계절 봄이 돌아오면 친해지려는 마음은 땅에 묻히고 만다. 유엔이 정해놓은 최소한의 규정에 부합하는 사항은 하나도 없다.(5) 곤경에서 벗어나는 요령이 있으면 때로 일상생활이 개선되기도 하지만, 생활조건은 대체적으로 비참하다.

1984년 이래 알리 나흐리에 살고 있는 하브라는 “여기에는 모자라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이 야영지를 작은 낙원으로 소개한다. 상점 두 곳이 시리아에서 싼값에 생필품을 수입해온다.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염소와 닭들을 기른다. 농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수확이 끝난 뒤 양을 방목할 수도 있고, 들판에서 버섯을 딸 수도 있다. 깨진 자동차 백미러를 보며 머리를 빗고, 비료 양동이를 엎어놓고 밥을 먹는다. 이 야영지 대부분 사람들의 기본 식사는 빵과 감자다. 샤위시들은 보통 한 가족 10명이 하루 빵 4자루를 소비한다고 계산한다. 사람들은 감자를 양파와 함께 요리해서 먹거나 수프처럼 만든 키슈크(Kishk)를 아침에 먹기도 한다.  

라마단에도 일을 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농업 노동자를 ‘3D 직업’으로 분류한다. 농업 노동자 일은 “천하고, 품위가 떨어지고, 위험한” 것으로 평가된다. 야영지를 방문하면 불가피하게 트랙터에 발이 잘려나가거나 회전분쇄기에 팔이 떨어져나간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적절한 보호장비 없이 유독성 화학물질에 노출되기 때문에 피부 질환이나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불편한 자세로 수확하다 보니 근육골격 장애도 흔하다. 이는 특히 여성에게 심한데, 장시간 무릎을 꿇거나 구부린 자세로 일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허리와 무릎 통증에 시달리거나 농작물 따는 행위를 반복해 손 건염으로 고통받는다.(6) 게다가 휴가도 없다. 라마단 기간은 일정이 다소 완화되지만 현대 농업의 일정은 축제일을 모른다. 이슬람 축제의 하나인 아이드 축제 기간에도 담배농장 주인은, 20여 년 전부터 타라야에서 사는 아부 후세인의 아이들을 작업장으로 데려가려고 방문객들과 헤어진다.

몇몇 사람들은 건축이나 다른 분야의 일자리를 찾아서 베이루트나 키프로스로 떠나려 한다. 다른 사람들 역시 샤위시가 되거나 상인이 되기 위해 들판을 떠나려 한다. 2년 전부터 알리는 집세를 더 내고 수확기에 저가로 협상한 감자를 텐트 하나에 저장하고 있다. 그는 두 명의 동업자와 함께 시세가 좋을 때는 알이 작은 고구마를 파종용으로 내다 팔고, 농한기에는 여자들을 시켜 도로가에서 굵은 고구마들을 팔게 한다. 지금까지 그 결과가 썩 좋지 않았지만, 곧 사업으로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차별받으며 증오의 대상이 되다

세계의 다른 농경지역과 비교해보면 베카의 산업화 정도는 한심한 수준이다. 안달루시아 평원의 수확량(32만ha에 설치된 온실에서 매년 300만t의 과일과 채소를 수확해 다국적기업에 넘긴다)과 비교해볼 때 베카의 생산성은 지극히 낮다(103만ha의 농경지에서 100만t 남짓 수확). 그렇다고 이곳 노동자들의 상황이 더 낫다고 할 수도 없다. 그리스의 루마니아 노동자, 중국 목화밭의 위구르 노동자,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폭력에 희생되고 있다. 그들은 민감한 지정학적 상황 탓에 더 심각한 증오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그들이 레바논 비자로 바꿀까봐’ 그들을 고용하기를 두려워하면서도, ‘시리아인들은 비싸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고용하는 사람들의 인종차별적 발언에는 특별한 적의가 덧붙어 있다. 2005년 레바논에 주둔하던 시리아 군대가 철수한 이래 시리아인들은 레바논에서 반복되는 테러의 목표물이 되었다. 가장 최근인 2009년 12월, 데이르 엘 아마르에서는 여행객을 태운 버스가 공격을 받았다.


글•뤼실 가르송 Lucile Garçon 지속가능발전과 농업 분야 엔지니어
    라미 주라이크 Rami Zurayk 베이루트아메리칸대학 식품공학과 교수, 농대 학장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텔레비전의 종말>(2007) 등이 있다. 

 

<각주>
(1)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중해 연안에 살면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2) 존 섈크래프트, <보이지 않는 감옥, 레바논의 시리아 이주노동자들>, 스탠퍼드대학 출판부, 2009, p.21.
(3) 장피에르 베를란, ‘농업과 이주’, <Revue européenne des migrations internationales>, n° 3, Poitiers, 1986, p.9~32.
(4) 많은 농업 노동자들이 유프라테스강 계곡에 위치한 라카그에서 온다. 시리아에서는 평균 일당이 75시리아 파운드, 1일 약 2유로고, 다른 분야의 미숙련 노동자의 평균임금보다 낮다.
(5)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생활 장소 주변에 30m², 1인당 3.5m²의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20명당 화장실 1개, 거주지에서 최대 50m 이내에 식수를 공급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  
(6) 리마 하비브, 파이 파탈라, ‘레바논 이주여성 농업노동자-건강 문제’, Migration and Urbanization Workshop, American Universtiy of Beirut, 2009. 
 


[박스기사]

‘계절 노동’의 세계적 모델

세계 도처에서 농업 분야는 노동권과 상당히 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부정기적이고 일시적인 생산 특성 탓에 농업은 수많은 국가의 입법 체계에서 예외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모로코·튀니지·폴란드 등지에서 프로방스의 ‘감자 공장’(1)으로 돌아가게 할 일꾼들, 또는 랑그도크 지방의 포도 수확 일꾼들을 확보할 목적으로 1960년대에 ‘계절 노동’이란 개념이 생겼다. 국제이주기구(IMO)나 2005년 이를 대체한 국립외국인이주인안내기관(ANAEM)의 계약서는 정의상 임시적이고, 법적으로 제한된 자격과 만기일자가 적용되는 시민 지위를 줄 뿐이다. 사회보장은 체류증과 노동 기간에 따라 제한된다.

영국의 계절농업노동자계획 또는 2000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정의한 ‘수확작업보조자’(Erntehelfer)가 1950년대 이래 유럽에서 일반화된 농업 모델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계획에 관한 한 ‘캘리포니아 들판의 공장들’(2)은 오래전부터 유명해졌고, 미국으로 일하러 오는 멕시코인 계절 농장노동자(Bracero)들의 드라마틱한 인생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3) 캘리포니아 모델은 근동에까지 영향력을 미쳐서, 이스라엘 정착민에게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넘쳐나고, 이집트인들은 요르단에서 치료를 받지 못한다. 민감한 주제, 다시 말해 레바논에서는 일종의 금기와 같은 시리아 노동자들의 존재는 어떤 형태로도 통제되지 못한다. 2005년 만들어진 사전고용허가서 획득은 사장되어버렸다. 시리아 북부 마을 에들렙 출신의 힐랄은 우물을 파다가 다리가 부러졌다. 농장 주인이 석고붕대 비용은 주었지만 진통제나 목발 값은 지불하지 않았다.

식품 대기업의 생산 시스템에는 ‘노동자 없는 노동’(4)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노동자들은 완전히 익명 상태로 밀려난 채 ‘순수한 노동의 힘’(5)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흔하다. 농업 노동자에 대한 보고서는 전세계 농업노동자들의 상황이 가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주 여정은 17세기 노예선이 대서양을 건너던 일을 연상시키고, 그들의 숙소는 목화밭의 오두막집을 떠올리게 한다. 중세 이래 농업 착취 시스템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어휘는 현재에도 적용된다. ‘노예’나 ‘농노’(6)라는 표현은 현대의 몇몇 ‘정착자’(7)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에서도 자주 발견되고 있다.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파브리시오 가티는 고용의 사전 조건으로 봉건시대 영주의 초야권을 언급한다. 계약을 원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젊은 처녀를 주인에게 데려가야만 한다는 것이다.(8)

스코틀랜드의 농장에 고용된 프랑스 학생 로맹 팡탱은, 스타하노프(소련의 노동자 주도의 생산성 향상 운동) 같은 작업 흐름을 강요하기 위해 성과급을 제시하면서 잠시 쉴 틈을 주지 않는 작업반장들의 명령 아래 일해야 하는, 몹시 힘든 나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이탈리아, 미국, 멕시코, 브라질 등지에는 샤위시의 아바타들이 등장했다. 미국 동부 연안에서 ‘하사나 노동자 도급업자’라 부르는 사람들이나 ‘코요테’ 또는 ‘고양이’라 부르는 사람들이다. 법제상 허점만큼이나 그 수가 많은 ‘작은 대장’들은 최악의 권한 남용을 허용한다. 집약농업 농장에서 과일이나 채소를 수확하는 사람들 모두 이 노동을 ‘지옥에서의 한철’로 부르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각주>
(1) 파트리크 에르만, ‘쓴맛의 과일과 채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3년 4월호.
(2) 캐리 맥윌리엄스, <들판의 공장들, 캘리포니아의 농장이주 노동자 이야기>, Archon Books, Hamden, 1969.
(3) 안 오렐리아 로페스는 1941년 멕시코와 미국이 서명한 농장 노동자 비상사태법과 관련해 캘리포니아에서 고용된 이주노동자 가족들의 증언을 수집해 펴낸 <농장 노동자들의 일기>(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Berkeley·2007)에서 사회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보여주고 있다.
(4) 알랭 모리스, ‘노동자 없는 노동’, <합법>, 파리, n°61, 2004, p.2~7.
(5) 장피에르 벨랑, ‘사회모델로서의 농업 이주자?’, <농촌연구>, 파리, n°182, 2008, p.219~225.
(6) 파트리크 에르만, ‘사람들이 농노를 발명했다’, <Politis>, Paris, n°1040, 2009년 2월 19~25일.
(7) 1960년대 마오주의 신봉자들 사이에서는 공장 노동자나 항만 노동자가 되는 일이 흔했다. 가장 유명한 경험은, 파리 슈아지의 시트로앵 2CV 공장 라인에서 1968년부터 1년 동안 일한 로베르 리나르가 <정착자>(Editions de Minuit·Paris·1978)에 풀어놓은 경험담일 것이다.     
(8) Fabrizio Gatti, ‘Io schiavo in Puglia’, <L’espresso>, 로마, 2006년 9월 1일.
(9) 로맹 팡탱, ‘계절 노동자: 수확 또는 중병’의 편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블로그, blog.mondediplo.net, 2009년 8월 18일.
(10) 폴린 그롤, ‘지옥에서의 한철’, <Politis>, 2008년 7월 10~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