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밀호랑이’는 잡혔어도 타밀족엔 또다시 디아스포라
스리랑카 정부는 지난 6월 유엔 사찰단 입국을 거부했다. 사찰단은 정부군이 '타밀엘람해방호랑이'를 제압한 2009년에 발생한 인권유린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됐다.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고, 타밀족에 대한 폐쇄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타밀족은 타밀호랑이의 몰락을 자신들의 패배로 여기며 인구 다수를 구성하는 불교 싱할리족의 식민지배를 우려하고 있다.
스리랑카 내전에서 분리독립주의자의 마지막 보루였던 정치조직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이하 타밀호랑이)가 패배함에 따라 스리랑카 정부는 2008년 3월부터 게릴라군의 영향권에 살던 30만 명에 가까운 타밀족을 캠프에 수용했다. 스리랑카 북부 바부니야주 메닉 팜 캠프에는 최대 22만8천 명이 수용돼 있다. 타밀호랑이가 대패한 지 10개월이 지난 지금에도 7만 명의 난민은 아직 수용소에 갇힌 채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가가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정부군의 허가를 받아 ‘임시복지마을’이란 캠프를 방문했다.
수용소에 기약 없이 갇힌 타밀족
캠프 입구에는 높이가 6m나 되는 마힌다 라자팍세 대통령의 동상이 승리를 축하하듯이 손을 높이 든 채, 열지어 들어선 막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간인을 테러리스트로부터 격리해놓아야 합니다. 테러리스트가 또 그들을 인질로 삼을지 모르니까요. 민간인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지뢰를 충분히 제거하기 전에 그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습니다.” 캠프사령관은 타밀족을 대거 수용할 수밖에 없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캠프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에 속하는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들도 캠프 내부의 생활환경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전했다.
서방의 한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정부군도 타밀호랑이의 영향권 아래 이렇게 많은 타밀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10만 명 정도 예상했지요. 실제로는 30만 명이나 되니 정부군이 버거워할 만합니다. 어쨌든 유엔 산하기구, NGO, 군 실무자 간 공조회의 때 보니 타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군인들도 있더군요. 저는 이보다 상황이 더 나쁜 다른 유엔 난민촌을 본 적도 있습니다.” 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민족에 따라 시민을 구분해 대거 수용하는 조치는 다분히 차별적인 행동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만약 이들이 싱할리족이었다면 스리랑카 정부는 결코 동일한 방식으로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대장를 비롯해 우리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하라는 임무를 띤 두 명의 타밀족과 함께 캠프를 둘러봤다. 캠프 규모는 상당히 컸고, 의료센터·학교·상점·은행·우체국 등이 수용자들의 숨통을 터주고 있었다. 수용자들은 필요한 경우에는 임시외출증을 받을 수 있었다. 인터뷰했던 타밀족들에게서 최악의 시간은 지났다는 안도감이 보였다. 그들은 지난 몇 달간 교전의 화염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지금 그들은 살아 있고, 먹을 게 있고, 치료를 받으며, 새롭게 삶을 시작할 준비가 돼 있다. 타밀족 한 무리가 흥분하는 바람에 인터뷰가 잠시 중단됐다. 우리와 동행했던 타밀족이 검은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더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합니까? 우리 집에 있던 물건은 죄다 도둑맞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풀려나는데 왜 우리만 계속 잡아두는 겁니까? 도대체 기준이 뭡니까? 유엔은 뭐하고 있는 겁니까?” 총선 선거전이 한창인 때에도 그들은 캠프에 민주주의란 없다며 개탄했다. “총선 기간 중 대통령을 지지하는 후보자만 이곳에 들어올 권리가 있다니까요.”
메닉 팜에서 젊은 청년은 찾아보기 힘들다. 타밀호랑이에서 활동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대부분 수감됐기 때문이다. 스리랑카 정부는 게릴라로 의심되는 1만1천~1만3천 명의 타밀족을 감금했다. “그들은 개입 정도에 따라 분류됐다”고 전 국무장관이자 대통령의 측근인 라지바 위제신하가 전했다. “1천 명 정도만 기소될 겁니다. 더는 아닙니다.” 그가 못박았다. 대부분의 타밀호랑이 단원이 스스로 항복했지만, 갈 때까지 가보자는 반란군에 신물이 난 타밀족이 신고해 체포된 반군도 있었다. 타밀호랑이의 패배는 예정돼 있었다는 이야기다. 생존자들은 이렇게 전한다. “한 가구당 많게는 두 명의 아이를 징집해갔습니다. 정부군 관할 지역으로 도망가는 사람들한테 총까지 쐈어요.”
메닉 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어린이 병사를 대상으로 한 재활센터를 찾았다. 정부군의 관리하에서 소년·소녀들이 마침내 전장을 떠나, 인접 지역에 있는 타밀족 출신 교사들로부터 직업 교육을 받고 있었다. 타밀호랑이가 시바네시를 징집해갔을 때 그의 나이는 13살이었다. “군인을 죽였어요. 저도 상처를 입었어요.” 17살이 된 시바네시가 맥없는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이에게는 여기저기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제가 속한 분대에는 어린아이들뿐이었어요. 정부군이 우리를 포위했고, 대장이 죽어서 우리는 항복했어요.” 시바네시는 항복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타밀호랑이는 제 삶을 앗아갔어요. 가족과의 연락도 끊어버리고, 학교도 다니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만 가르쳐줬지요. 정부군은 제게 직업 교육을 해줘요. 가족이 저를 보러 올 수 있게 허가도 해줬어요. 저는 지금 정보처리 기술을 배우고 있어요. 조만간 집으로 돌아갈 거예요.”
재활 시급한 어린이 병사들
청소년 재활에 힘쓰는 정부의 노력은 가상하지만 혜택을 받는 어린이 병사 수는 극히 미미하다. 또한 타밀호랑이 반군 수감자를 면회할 자격이 주어진 한 취재원은 관련 정보가 많이 부족하다고 개탄했다. “정부는 어떤 명단도 주지 않고 있습니다. 가족도 아무것도 모르지요. 아무도 누가, 어디에, 무슨 이유로 수감됐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즉결처분이 횡행하는 나라이니 걱정되지요.” 더구나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도 수감자를 만날 수 없는 상황이니 더 우려할 수밖에 없다.
좀더 북부에 있는 바니 지역은 20년간 타밀호랑이의 지배를 받다가 2009년 초 정부군이 탈환한 뒤 전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외국 언론도 지금까지 이 지역에 접근할 수 없었다. 이곳을 지나는 A9 도로에는 100m마다 벙커가 늘어서 있다. 벙커 주위에는 초목을 제거해 적군이 매복할 수 없도록 했다. 여기저기 설치된 해골 그림 표지판은 지뢰가 있다는 표시다. 도처에 무장한 군인이 보인다. 몇 안 되는 시민만이 무너진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텐트를 치고 살고 있다.
폐허지로 여행 오는 싱할리족
우리가 방문했을 때 싱할리족 관광객을 태운 버스 10여 대가 지나갔다. 스리랑카 정부는 오랫동안 접근 금지였던 북부를 방문하라고 적극 권장하고 있다. 게릴라군이 최초 독재정체(1)의 정부 조직을 설립한 타밀호랑이의 옛 ‘근거지’인 킬로노치에는 성한 건물이 하나도 없어 예전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포탄 파편으로 수많은 구멍이 뚫린 저수탑은 모로 누운 채 이제 싱할리족 관광객의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었다. 승려와 가족 단위 관광객은 이 무참한 광경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뒤 다시 스리랑카 국기, 대통령과 ‘위대한 정부군’을 찬양하는 포스터로 장식한 버스에 올라탔다.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를 빼면 킬로노치에 새로 들어선 건물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불교 사원이다. 정부군이 서둘러 건립한 이 사원은 타밀족, 힌두교도, 기독교도에게 위화감을 주고 있다.
메닉 팜에서 얼마 전 풀려난 타밀족은 친지들의 소식을 알지 못한 채, 슬픔에 겨워 국제 원조로 근근이 살고 있다. 그들은 정부의 의기양양한 태도에 진저리를 냈다. ‘나얀’은 “우리는 지옥에 다녀왔다. 그들은 우리를 찾아와 비웃었다”며 분개했다. 타밀호랑이를 지지하는 나얀은 물라이티부 주위에서 있었던 최후 일전에서 살아남았다. 정부군은 이곳에서 타밀호랑이 반군과 그들이 앞세운 민간인을 향해 끊임없이 폭격을 가했다. “타밀호랑이는 마지막 실탄을 다 쓸 때까지 투쟁했습니다. 그러곤 목에 걸고 있던 청산가리 캡슐을 먹고 자살했지요. 포탄이 비 오듯 쏟아졌어요. 저희 어머니도 제 눈앞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저도 다쳤고요.” 그가 팔과 장딴지에 난 커다란 흉터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폭격이 끝나고 나서 정부군이 민간인들에게 올바르게 대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민심을 얻고 싶었을 테지요.” 그래도 나얀의 신념을 꺾기에는 부족한 듯 보였다. “타밀호랑이의 지배를 받으며 몇 년을 살았습니다. 그때도 잘 지냈어요. 질서가 유지됐고 일자리도 있었지요. 사회복지는 물론 정의도 살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타밀호랑이 지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나얀도 타밀호랑이 지도자인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믿지 않았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프라바카란 본인임이 판명되었는데도 말이다. “텔레비전에서는 프라바카란을 닮은 수염 난 남자 주검을 보여준 거예요.” 그는 타밀호랑이가 후퇴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헬리콥터 5대, 장거리포 35문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디 있냐고요? 타밀호랑이는 숨어 있습니다. 곧 나타날 겁니다.” 그는 그렇게 믿고 싶어했다.
타밀호랑이 잘못 불구, 심정적 의지
반면 다수인 싱할리족은 승리를 만끽하며 더 이상 자살테러의 공포 속에 살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하고 있었다.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싱할리족은 타밀족과 정겨운 이웃으로, 업무 파트너로, 친구로 지내며 내전을 ‘테러와의 전쟁’으로 정리했다. 그들은 언론이 집중 보도한 대로 정부군이 범죄조직으로부터 타밀족을 구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타밀호랑이의 패배로 갈등은 종결됐고, 스리랑카에는 마침내 화합과 평화가 찾아올 것이며, 25년간의 공백기 끝에 투자자와 관광객을 유치하게 되리라. 스리랑카는 2016년에는 현재 수준보다 5배 많은 25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려 한다. 유수의 호텔 체인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트링코말리만(灣)을 눈독 들이고 있는데, 이곳은 타밀호랑이의 옛 근거지였다.(2) 이런 발상은 타밀족의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난 것이 타밀호랑이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30년 전 스리랑카 정부가 소수민족에게 취한 차별 정책 때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낙관적 생각이 아닐 수 없다.(3) 메닉 팜 철조망 뒤에서 타밀족은 정부가 그들을 제2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으로 여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타밀호랑이의 전체주의와 권력 남용, 어린이 병사 징집 등에도 불구하고 타밀족 대부분은 아직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래요. 타밀호랑이가 지배할 때는 최소한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지 않았느냐고 말이에요.” ‘빌루투’(전진) 타밀계 비정부기구 대표인 샨티 사치타난담은 타밀호랑이로 인해 피해를 입었지만 이렇게 말했다. “타밀족은 타밀호랑이가 잘못한 일도 있지만 자신들을 위해 투쟁한다고 생각했지요. 타밀호랑이의 패배는 그들에게 충격일 수밖에 없어요. 그들은 할 말을 잃었어요.”
아이러니한 것은 타밀호랑이가 그들과 경쟁이 될 법한 타밀족 정치인을 체계적으로 암살했기 때문에 지금 타밀족을 이끌 지도자가 없다는 점이다. 친타밀호랑이 정당이던 ‘타밀민족동맹’(TNA)은 내부분열이 일어났다. 정당 인사들은 타밀호랑이의 총알을 피하려고 TNA에 가입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외압이 사라지자 각기 다른 정당을 등에 업고 총선에 출마했다. 그중에는 정부의 지지를 받는 후보도 있었는데, 정부도 타밀족을 이간질시키기 위해 적극적이다. 새로운 국면을 받아들이지 못한 TNA는 정치 성명을 통해 아직도 ‘북부와 동부의 연방 구조’에 관한 꿈을 밝혔다. 내전에서 승리한 ‘사자의 자손’ 싱할리족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TNA 후보자 마바이 세나티라자는 “우리는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정부와 협상하고 교민들의 힘을 모아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낼 겁니다.(4) 저희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불복종 캠페인을 벌일 것입니다.” 그는 자못 비장하게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했다.
타밀 정당은 연방제를 바라지만…
스리랑카 북부의 자프나 반도는 1996년 정부군이 수복한 이래 고위험지역으로 분류됐다. 타밀족의 역사적 중심지 입구에는 기관총이 늘어선 두 개의 벙커 사이에 영어로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이라고 쓴 큰 패널이 서 있었다. 타밀호랑이, 다른 타밀 반군단체, 인도 원정군(1987~1990)과 정부군이 서로 뺏고 뺏기고 하는 사이 자프나 지역은 1990년부터 황폐화됐다. 공사 현장 어디에도 재건축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나아지고 있습니다.” 한 유엔 공무원은 그래도 이렇게 말했다. “야간통행금지도 해제됐고, 어부들은 다시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갈 수 있습니다. 신원확인 조사도 많이 줄었지요.” 그렇지만 자프나 지역에는 여전히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정부군의 감시는 물론이고 1987년 스리랑카 정부와 연합한 타밀 조직 ‘엘람인민자유당’(EPDP)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내전 마지막 시기인 2006∼2009년 수많은 시민이 암살되거나 ‘실종’됐다. 인권운동가들은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한 정부 관계 인사는 “엘람인민자유당이 타밀호랑이에 복수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전했다. 엘람인민자유당 당수인 더글라스 데바나다 장관은 타밀호랑이를 싫어할 만하다. 13번이나 테러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를 암살하는 데 실패한 타밀호랑이는 그의 아내를 살해했다.
극우파 불교 승려들의 주인 행세
2008년 말 이후 친정부 조직이 저지른 살인 사건이 없었는데도 시민들은 우리 인터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다. 타밀족 가톨릭 주교인 토마스 산더르나얀만이 사회적 신분 덕분에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었다. “2006년 8월 짐 브라운 신부가 자프나 반도 연안의 가야 섬에서 실종됐습니다. 운전사도 함께 사라졌지요.” 그보다 앞서 한 정부군 장교는 타밀족 사제가 게릴라 반군과 공모했다고 비난하며 살해 협박을 했다. “저희는 수사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보낸 수사관은 타밀어를 모르더군요. 군인들도 협조를 거부했습니다.”
가야 섬 앞바다의 나이나티부 섬에는 싱할리족 관광객 수천 명이 모여 있었다. 부처가 방문했다는 나가디파 사원에 성지순례를 온 것이다. 해병대원들은 순례자들이 이미 정원 초과인 배에 오르도록 돕거나, 더위에 쓰러진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다. 한 장교는 “어제는 1만500명이 방문했다”며 뿌듯해했다. 스리랑카 남부에서 왔다는, 주황색 승복을 입은 승려는 이렇게 말하며 기뻐했다. “타밀 반군이 이 사원을 무너뜨렸지요. 정부군이 와서 다시 세웠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불교가 이 나라에 다시 돌아온 거지요.” 스리랑카 승려들은 정치적으로 극우파이며 스리랑카는 불교신자인 싱할리족만의 국가라고 여긴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총선에 출마한 승려들은 선거 포스터에서 군인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이런 상황에서 힌두교와 기독교 타밀족은 나이나티부 섬을 찾아오는 불교 성지 순례자들을 보며 ‘식민지화’의 압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은밀한 식민지화 의도는 스리랑카 동부에서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곳은 싱할리족, 타밀족, 소수인 회교도(전체 인구의 7%)가 서로 어울려, 때로는 맞서며 지내는 지역이다. 암파라 지구에서는 수천 명의 회교도 농부가 ‘고고학 유적 발굴’을 핑계로 토지를 빼앗겼다. 자신도 회교도 신자인 미온 무스타파 전 고등교육부 장관은 회교도인의 토지를 몰수하는 조치는 “고위층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며 “대통령 측근에 침투한 불교극단주의자들 때문”이라고 했다. 나이 든 농부 파리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승려들이 오더니 내 밭에 비석을 세우더라고. 그러더니 거기가 역사적인 곳이라면서 더 이상 손대지 말라더군.” 그때부터 파리드의 밭은 방치됐다. 그는 공권력이 승려들 편임을 알고 있었다. 북부에서처럼 이곳에서도 법에 의한 지배는 먼 나라 이야기다. 이 지역 경찰은 2004년 반군을 이탈해 전향한 전 타밀호랑이 동부 사령관 ‘카루나 분파’의 막강한 지원을 받고 있다. 그 대가로 카루나(본명 비나야가무티 무랄리다란)는 데바나다 장관과 마찬가지로 장관직을 차지했다.(5)
콜롬보에는 반대파를 침묵시키기 위한 친정부 타밀 단체가 없는 대신 ‘화이트 밴’이 있다. 등록되지 않은 흰색 소형 트럭이 밤에 정치적 반대 인사를 납치하고는 경찰의 감시망을 유유히 통과해 사라진다. 삽화가 프라지트 에크날리고다는 지난 1월 24일 퇴근길에 이렇게 ‘사라졌다’. 지난해 1월 8일에는 신랄한 사설로 유명한 <선데이 리더>의 편집장 라산다 위크레마툰게가 도로 한복판에서 살해됐다. “그들은 쿠마라퉁가 전 대통령의 사촌인 라산다를 살해했습니다. 그것도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말이지요.” 한 타밀족 지식인이 한숨지었다. “그 뒤로 그들이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인권운동가, 변호사, 기자들에게 배신자이자 타밀호랑이의 앞잡이였다고 비난하며 살해 협박을 하고 있다. “기자들은 자유롭게 기사를 쓸 수 있다. 하지만 기자 살해범 또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고 타밀계 일간지 <타나쿠랄>(매일 찾아오는 목소리) 편집장 타나 바라싱암은 비꼬았다.
지난 1월 26일 재선에 성공한 라자팍세 대통령은 반대파와 독립언론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대선에서 라자팍세 대통령과 접전을 벌인 사라스 폰세카 전 합참의장은 2월부터 수감돼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살해 협박에 시달리는 한 인권운동가는 “대통령은 폰세카가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쿠데타를 일으킨 건 그 자신”이라며 도처에 있는 군인들과 대통령의 형제이자 국방부 장관인 고타바야 라자팍세의 절대권력이 그것을 방증한다고 전했다.
자치권 허용이 유일한 분쟁 해법
라자팍세 대통령은 전임자들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 바로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타밀호랑이를 물리친 것이다. 내전 승리는 중국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중국은 자국 석유 유입로에 위치한 스리랑카가 경쟁국 인도와 손잡을까 우려했다. 한편 미국은 중국과 스리랑카의 연합에 불안해져 폰세카의 대선 참여를 은밀히 지지했다고 한다.
많은 논평가들은 인권을 존중하지 않은 것이 내전 승리의 한 요인이라고 평가했다. 타밀호랑이의 교섭은 오로지 시간을 벌기 위한 목적일 뿐이라고 생각한 인도는 스리랑카 총력전을 지원했다. 상당한 수의 인도계 타밀족을 구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6) 인도에서 낙살리스트 반군의 공격이 거세지자(4월 6일 차티스가르주에서 매복 중이던 경찰 75명이 살해됐고, 5월 28일 벵골 옥시덴탈에서 기차를 파괴해 민간인 148명이 숨졌다), 스리랑카는 인도에 반군을 제압하는 ‘노하우’를 전달했다.(7)
라자팍세 대통령 체제는 승리에 도취돼 기념물을 만들고 싶은 것 같다. 앞면에는 대통령이, 뒷면에는 1945년 이오지마에서 성조기를 올리는 미 해병을 연상시키는 모습의 국기를 꽂는 군인들이 그려진 천 루피 신권이 한 예다.
정치적 타협도 요원하다. “동부지방의회는 들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부가 지방에 실질적인 특권을 제공한다면 민족 문제는 해결될 겁니다.” 소마순드람 푸시파라자 무소속 타밀족 지방의회 의원은 이렇게 말하며 안타까워했다. 그 역시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대통령과 측근 인사는 내전 지역을 재건하기만 하면 소수민족을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산더르나얀 주교의 말은 달랐다. “타밀족은 중앙집권식 경제발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타밀족의 의견은 전혀 수렴하지 않는 정부가 주도한다면 더 그렇겠지요.” 게다가 재건 계획을 진행하는 책임자가 다름 아닌 대통령의 다른 형제인 바실 라자팍세라면 오죽하겠는가.
제안 페레라는 타밀호랑이의 패주가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다원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말레이시아와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권위적인 체제, 제한적 민주주의로 후퇴하고 경제발전이 인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말입니다.”
글•세드릭 구베르뇌르 Cédric Gouverneur
프리랜서 기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GEO>의 정식 특파원으로 활동.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각주>
(1) ‘타밀호랑이 반군에 있어 사실상의 국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4년 2월호 참조.
(2) <France3>의 프로그램 ‘탈라사’, 2010년 4월 2일 방송 참조.
(3) 에릭 폴 마이어, ‘스리랑카 타밀 분리주의자를 움직이는 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4월호, <스리랑카, 배타주의와 세계화 사이에서>, 라 도큐멍타시용 프랑세즈, 파리, 2001.
(4) 150만 이상의 타밀족이 망명 중이며, 특히 북유럽과 캐나다에 거주한다. 타밀호랑이는 이들이 제공하는 자발적 혹은 강제적 기부금으로 운영됐다.
(5) 아누라다 헤라스, ‘카루나 사령관의 무용담’, <허핑턴 포스트>, 2009년 7월 참조.
(6) ‘스리랑카 내전에서 얻는 교훈’, <인디안 디펜스 리뷰>, 2009년 9월 참조.
(7) 마오쩌둥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게릴라 반군 ‘낙살리스트’는 1967년 서벵골주 낙살바리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에서 출발했고, 2004년부터 인도 중심부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고 있다. ‘인도 낙살리스트 반군의 세력 확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12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