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후예들, 하멜마을 예술 표류기

2010-09-03     안태호/문화활동가

전남 강진군 병영면 도룡리, 구멍가게 하나 없는 동네. 30여 가구, 60여 명의 주민이 복작복작 살고 있는 곳. 마을 한가운데로 냇물이 흐르고, 큰길 건너 논두렁 옆에는 300년 넘게 마을을 지켜온 당산나무가 터를 잡고 있다. 평화롭다 못해 심심할 것만 같은 이 마을에 한 달간 웅성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하멜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돌아왔다고? 그렇다, 돌아왔다. 347년 세월을 넘어 ‘뉴 하멜’들이 마을에 입성했다.

하멜 마을에 나타난 외국인들

<하멜 표류기> 저자 헨드릭 하멜은 조선의 사회상을 서양에 최초로 알린 사람이다. 그가 제주에 표류해 한양으로 압송되고, 중국 사신에게 탈출을 부탁한 것이 발각돼 강진으로 유배되어 고난을 겪은 11년은 조선의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적 실상을 익히는 수업 시간이었다. 하멜이 조선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 강진 병영이다. 도룡마을에는 하멜의 영향으로 보이는 특이한 양식의 돌담이 있다. 대개 한국의 돌담은 제주식으로 얼기설기 쌓거나, 내륙지방의 경우 차곡차곡 쌓아 빈틈을 메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도룡마을의 돌담은 마치 빗살무늬토기를 연상시키듯 사선을 긋고 있다. 이 돌담이야말로 30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 연결고리인 셈이다. 행여, 눈썰미가 예민한 이들은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서 하멜의 그림자를 발견해낼지도 모르지만.

7월 23일부터 8월 22일까지 한 달간, 마을에서는 국제레지던시 프로그램 ‘347년 만의 재회-뉴 하멜 표류기’가 진행됐다. 하멜의 표류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현대예술가의 ‘거주 및 창작 프로그램’을 창조적으로 변용한 것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하멜의 후손인 유럽인 중에서도 적통이라 할 만한 네덜란드 작가를 필두로, 프랑스·독일·영국·포르투갈·에스토니아·한국 작가들이 마을회관 및 와보랑께 박물관 민박집에 거주하며 작업했다.

<녹두장군>을 쓴 소설가 송기숙 선생은 마을을 두고 ‘아름다운 공화국’이라 명명한 바 있다. 상부상조 정신이 살아 있고, 사람 간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공동체를 꾸려나가던 시절을 회상하며 한 이야기다. 물론, 지금의 농촌도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넉넉한 인심과 공동체적 미덕이 살아 있는 곳이다. 그러나 농촌은 이미 미래를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20년 후면 농촌에 남아 있는 마을이 몇 안 될 거라는 씁쓸한 전망이 현실성을 얻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도룡마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을 주민은 대개 60~70살을 훌쩍 뛰어넘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김성우 이장은 작가들이 마을 주민과 인사하는 자리에서 외국 작가 중 최고령인 미나 가브리엘(61·독일)에게 엄포를 놓는다. “내 나이가 이제 예순셋인데, 이 마을에서 애기야. 여기서 어른 행세하면 안 돼요.” 이장님의 능청스러운 경고에 듣던 사람들은 모두 웃음바다를 이룰 수밖에. 농담으로 표현했지만, 마을 어른들도 마을에 미래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번 사업은 마을의 미래를 다른 방향으로 그려볼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한 방편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예술가들의 거주 프로그램을 진행한다지만, 마을에는 이미 예술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도룡마을의 명물인 바람개비 할아버지는 리어카만 한 설치물부터 손바닥만 한 장식품까지, 막걸리병으로 만든 색색의 바람개비를 마을 곳곳에 두었다. 직접 찾아간 할아버지 집에서 본 바람개비 작업은 별도의 전시를 가져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김성우 이장이 관장을 겸하는 와보랑께 박물관 역시 마찬가지다. 박물관은 사투리와 생활용품을 비롯한 온갖 민속품을 모아놓은 보고(寶庫)다. 압도적인 양의 인류학적 소품들은 어지간한 현대예술가들의 설치 작품을 무색하게 한다.

예술가, 마을과 만나다

작가들은 마을을 둘러보고 병영면의 하멜기념관을 답사한 후 작품 아이디어를 마련해 마을 주민들과의 간담회를 열었다.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구상을 발표하면, 주민들이 그에 대해 작품 위치나 재료 등을 조언해주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사실, 작업하는 내내 지속되었다. 한편으로는 예술가의 작업에 대한 간섭으로 여길 수도 있는 부분이건만 작가들은 기꺼이 주민들과의 적극적인 소통과 조율을 통해 작업을 완성해나갔다.

프랑스 작가 SP38은 하멜의 모험과 표류를 재해석해, 영화필름 형식을 빌려 벽화를 남겼다. 벽화의 제목은 <347년간의 유배>(347 Years in Exile). 주민들은 작가에게 그림에 대한 소개를 듣는 내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자기 마을을 주제로 한 예술작품은 평생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이들이다. SP38은 이외에도 골목 어귀마다 황금토끼를 그려놓았다. 이를 재밌게 여긴 주민들은 여기저기 빈 공간에 토끼를 더 그려달라고 했고,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포르투갈에서 온 안나 마누는 마을에서 어쩔 수 없이 수인(囚人)이었던 하멜의 고뇌를 현재에 옮겨놓는다. <탈출하거나 안 하거나… 그것은 당신의 선택>(Escape or not escape… That’s your choice)은 철 조각으로 된 고치 속에 콘크리트로 만든 사람이 들어가 앉은 모양새다.

프랑스 작가 장미셸 뤼비오와 카트린 알키에는 하멜을 동양과 서양의 마주침으로 해석한 작품을 선보였다. <모두를 위한 도서관: ‘우리는 모두 하멜’>(Library for all: ‘We are all Hamel’·사진)은 동양인과 서양인의 모습을 한 철골 구조물이 서로 마주 보는 형태를 띤다. 두 형상의 뇌 부분에는 아크릴로 제작한 박스가 들어가 도서관이 되었다. 마을 정자 옆에 설치된 도서관은 누구나 책을 가져다놓고 꺼내 볼 수 있게 했다. 지나치게 낭만적인 수사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겠지만, 해질 녘이면 두 형상이 마주 보는 모습은 꼭 한 쌍의 연인처럼 느껴진다.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상징성과 심미성, 야외 도서관이라는 실용성을 갖춘 작업이다.

독일 작가 미나 가브리엘 역시 동서양의 만남을 테마로 한 작품에 매달렸다. <하멜, 뉴 하멜의 대화-126655일 이후>(New Hamel Communication 126655 days After)라는 작품은 강진에서 수집한 청자 조각으로 마을의 한 바위에 서양과 동양의 방위를 측정해 모자이크로 만든 것이다.

주민들의 간섭 또는 소통

하멜의 가장 가까운 후손인 네덜란드 작가 예츠케 페르후펜은 조상의 언어적 혼란을 떠올리며 상징적인 바벨탑을 쌓았다. 마을의 폐목을 주워서 짜놓은 <직사각형의 타워>(Tower as Rectangle)는 언어적 소통의 한계를 상징하는 바벨탑과 낯선 땅에서 의사소통의 곤란을 겪었을 하멜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폐목으로 만든 구조물 안에는 각국 언어가 혼합되어 기록되었다. 작업이 완성된 후 페르후펜은 레지던시에 참여한 다른 작가들과 함께 5개국 언어로 같은 내용을 낭독하는 바벨탑 퍼포먼스를 했다.

가장 개념적인 작업은 한국 작가에게서 나왔다. 손민아는 354개 돌을 당산나무 둘레에 심었다. 하멜이 마을에 도착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354년의 시간을 상징하는 돌은 결국 1656년과 2010년이 만나는 모습으로 완성된다. 작품 제목은 <1656~2010. 1656년 그들이 왔다. 그리고 354년 후 2010년, 그들이 다시 오다>(1656~2010. In 1656 they came and after 354 years, in 2010 they come again).

김강과 김윤환이 만든 <뉴 하멜의 막걸리 뗏목>(Mak Gul Li Bottle’s Boat by New Hamel)은 마을 주민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 중 하나다. 지역의 명물인 설성 막걸리병을 활용해 만든 뗏목은 여러 차례 강에 띄워 뱃놀이에 이용되기도 했다. 하멜이 작은 어선을 구입해 탈출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이 작품은 지금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 위에 설치되어 마을의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한 가지 재밌는 일은 마을 사람들과 작가들 사이에 육체노동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작가들은 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농부들과 비슷한 일과를 보냈다. 새벽녘 일어나 오전 중에 작업을 지속하고, 낮에는 잠시 휴식을 취하다 서너 시쯤 되어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좀 잠잠해지면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마을 어른들은 뙤약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에 열중하는 벽안의 작가들에게 동질감을 느꼈음이 틀림없다. 만약 개념적인 작업이 주를 이뤘다면, 지금과 같은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는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멜 표류기>에는 당장 먹고살 물자가 부족해진 하멜 일행이 주민과 승려들에게 네덜란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구걸하는 대목이 나온다. 참여작가들은 이 대목에 착안해, 매주 ‘사랑방 모임’을 열어 각국의 풍습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네덜란드식 호박죽과 프랑스의 크레페, 독일식 감자전 등을 맛본 주민들은 예술가들과 부쩍 가까워졌다. 작가나 주민 모두에게 낯선 경험이었지만,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동서양이 347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다시 마주한 감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 동서양이 빚어낸 작품

사랑방 행사 외에 작가들은 종종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장님은 마을 방송을 통해 퍼포먼스를 알릴 때면 “인생에 다시 없을 신기한 구경거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표현했다. 작가 입장에서 보면 예술을 유별난 볼거리 정도로 이야기하는 이장님의 표현이 못내 아쉬울 수 있으나, 그의 표현은 어떻게든 많은 주민이 작가들과 함께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온 나름의 마케팅 전략이자 카피다. 뉘인들 퍼포먼스라는 말을 처음 접하는 주민에게 그 행위를 소개하고 홍보할 만한 문구를 매끈하게 뽑아낼 것인가.

한 달간의 체험은 예술에 대한 주민의 생각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예술에 대한 인식이 한층 깊어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전에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예술가들 역시 그저 보통 사람이라는 것, 예술 역시 손 닿을 수 없이 거창하고 고상한 무엇이 아닌 삶의 장소에 함께 놓일 수도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예술에 대한 생각은 질적 전환에 가까워졌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하멜이 동서양을 넘나들며 교역을 펼친 것처럼 현대예술가들은 국경을 초월하는 활동영역을 보인다. 그들은 각종 비엔날레를 비롯한 예술행사와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 거주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 각국의 문화를 연계하는 메신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뉴하멜 표류기에 참여한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들은 특히 일정 기간 정주를 통해 자신이 가진 문화적 관습과 태도를 드러냈고, 동시에 그 시간은 작가들에게도 도룡마을 주민의 관습과 태도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다. 농촌 벽지에서 보낸 한 달간의 경험은 어떻게든 작품의 소재와 주제에 영향을 미칠 것임이 분명하다. 이들은 문화사절단인 셈이다. 마을 주민 역시 마찬가지다. 어쩌면 주민은 희미해져가던 마을의 미래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이 ‘뉴 하멜’들의 기억은 그들이 마을에 남긴 작품과 함께 오래도록 값진 선물로 기쁘게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하멜’이라는 키워드로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이 도룡마을이라는 구체적 장소에서 소용돌이치며 만나 빚어낸 유쾌한 소통의 장이야말로 한 달간의 레지던시가 빚어낸 진짜 작품이다.

글•안태호
웹진 <컬처뉴스> 편집장을 지냈으며, 현재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함께 쓴 책으로 <리뷰, 오늘의 한국미술> <끝나지 않는 전시> <동네에서 놀자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