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메리카' 시대가 도래한다
금융계를 초토화시킨 폭풍우가 몰아치기 바로 얼마 전에 신문 지면을 장식한 몇 가지 흥미로운 소식들이 있었다. 중국 네티즌 숫자가 미국 네티즌 수를 넘어섰으며,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미국인들의 인터넷 트래픽(정보 이동량)이 10년 전 50%에서 현재는 25% 아래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국제 무역협상을 주도하기 위해 도하 라운드를 재가동시키려는 미국의 노력이 인도와 중국의 거부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도 있다. 이들 국가는 자유 무역으로 인해 자국의 농민들이 더 이상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루지야 사태 때 러시아는 미국의 어정쩡한 항의를 무시하면서 코카서스 지방에서 자국 이익을 지키는데 몰두했다.
이런 내용의 국제 소식들은 이미 국제 관계가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세기 전반기부터 시작된 서구의 일방적인 독주가 종식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금융 체계의 붕괴는 서구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시킬 뿐이다. 9월 30일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오만함의 종식'이라는 제목 아래에 '미국이 경제 지배자의 역할을 빼앗기다'라는 부제를 덧붙이고 있다. 역사의 변덕인가? 구(舊)소련이 이끌던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된 지 20년이 채 안 되어, 이번에는 미국식 자유경제주의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예언에는 늘 위험이 따른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구 소련의 권좌에 오르기 전인 1983년에 정치철학자 장 프랑수아 르벨은 '민주주의의 사망'을 예고했다. 민주주의가 "가장 무시무시한 외부의 적이자 전체주의의 완성된 모델인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1)는 논리 때문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미국과 서구 모델의 일방적 승리를 진단하면서 '역사의 종언'에 대해 예언했다. 제1차 걸프전(1990-1991)이 끝난 후에는 무수한 논객들이 미국이 주도하는 21세기에 대해 예언했다.
15년이 지난 후 또 다른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한층 실체에 가까운 듯한 그 논리는 우리가 '포스트 아메리카'2)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정부가 2008년 6월 채택한 <국방 및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백서>(이하 <백서>)가 인정하고 있듯이, "유럽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세계는 1994년과 비교해볼 때 더 이상 경제적, 전략적 주도권을 유일하게 행사하는 주체가 아니다."3)
세계가 다극 체제로 변한 것일까? 미국이 오랫동안 군사력을 포함한 많은 분야에서 여전히 지배 세력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미국은 베이징과 뉴델리, 브라질리아와 모스크바에서 새로운 세력권이 대두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의 지지부진,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 이란 핵위기, 우여곡절이 많은 북한과의 협상 등은 유럽연합 동맹국인 미국이 더 이상 자신의 관점을 강요할 수 없으며,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다른 파트너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이 같은 새로운 강대국들에 더해, 리처드 하스가 <극이 없는 세계>4) 속에서 언급한 일련의 기관들을 추가할 수 있다. 리처드 하스는 국제에너지기구(IEA), 상하이협력기구5), 세계보건기구(WHO), 상하이나 상파울루와 같은 대도시들, 알자지라부터 CNN에 이르는 위성방송들, 헤즈볼라와 탈레반 같은 용병들, 마약 카르텔, 비정부기구 등을 거론하며 "오늘날의 세계는 권력 집중보다 오히려 분산된 권력을 더 인정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인물로서 국무부를 거쳐 현재 뉴욕에 소재한 미 외교협회장 직책을 맡고 있다.
금융과 권력의 변동, '브릭스' 등 신흥 강대국들 부상
금융위기로 세계화 붕괴, 미·서구 세계 경영 총체적 도전
지정학적 이익 집착 '분쟁도 치열'
세계화의 맹렬한 공격에 붕괴할 것이라 예견되었던 국가들이 이젠 '햇볕이 드는 쪽'의 자리를 원하고 있다. 중국, 인도, 러시아, 브라질은 야심을 감추지 않으며 자신들을 소외시키는 국제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란, 이스라엘, 남미 국가들,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좀 더 제한적 목표를 지닌 또 다른 국가들은 '이기주의적 이익'을 옹호하고 있다.
그 중 어떤 국가도 옛 소련처럼 총체적인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채택하고 있지 않으며, 대안적 모델을 자처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국익을 타협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들 국가는 천정부지로 값이 치솟는 석유, 가스 등 희귀성 광물자원의 장악을 위해 힘쓴다. 이는 불충분한 농업 생산과 지구 온난화로 인해 고통 받는 자국민들을 먹여 살릴 능력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들 국가는 자국의 정치적 비전 뿐 아니라, 오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자국의 지정학적 이익을 지키려 하고 있다. 중국과 타이완 및 티베트 간의 분쟁,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카슈미르 분쟁, 세르비아와 코소보간의 마찰, 터키와 쿠르디스탄 간의 분쟁 등도 이 같은 지정학적 이익을 둘러싸고 초래된 사건들이다. 이들 분쟁은 대개 해피엔딩으로 귀결되기 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더욱 격화되기 마련이다.
세계 지도로 분석해보면 이러한 분쟁의 대부분은 대서양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위기 궁선(arc de crises)' 주변에서 전개된다. 프랑스 정부의 <백서> 집필자들은 "중동과 근동지방,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분쟁들이 통합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백서>는 "흔히 비밀리에 진행되는 핵무기, 생화학무기 개발 프로그램들은 위험을 가중시킨다."면서, "이 지역 국가들 대부분이 공개적 혹은 비공개적으로 전투기와 미사일에 토대를 둔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백서>는 적대적인 커뮤니티들로 나뉜 이라크의 불안정이 중동 전역으로 확대될 위험이 크다고 경고하고 있다. '궁선' 주변의 불안정은 유럽 각국의 이익을 직·간접적으로 해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몇몇 국가들은 나름대로 명분과 자격을 내걸고 차드,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군사력을 배치하고 있다. <백서>는 유럽과 프랑스에 "이 지역의 위기를 예방하고, 해결하기 위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하였다.6)
'워싱턴 합의' 뒤집은 '베이징 합의'
이와 함께 미 국무부의 주요 책임자인 윌리엄 번스가 시도하는 전략적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10년 전 유럽은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이었다. 그 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특히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 체제에서는 유럽보다는 근동지방이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20세기 내내 미국의 역대 행정부가 중요하게 여겼던 지역이 유럽에서 근동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7)
더욱이 원유 값이 뛰어오르는 지금, 세계 석유 매장량 대부분이 이 지역에 묻혀 있다는 사실은 중동의 전략적 성격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구의 군대가 이라크에서 차드에 이르는 지역, 아프가니스탄에서 레바논에 이르는 지역에 전례 없이 집중적으로 배치된 사실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전투를 '대테러 전쟁'이라는 테두리 속에 뭉뚱그리면서 미국은 '저항 인터내셔널'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인터내셔널'은 종종 잡다하고 분열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미국의 헤게모니에 반대한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저항은 경제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시아, 러시아에서 벌어진 이전 위기들과는 달리 현재의 금융 위기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의 역할을 대수롭지 않게 만들었다. 2000년대 초에 러시아, 태국, 아르헨티나, 브라질, 세르비아, 인도네시아 등 많은 나라들이 IMF에 자국의 외채를 미리 상환하기로 결정했다. 8), 그것은 국제기구들이 내세운 요구 사항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워싱턴 합의'9)가 '베이징 합의'10)에 의해 대체될 수 있을까? 이 용어를 만들어낸 경제학자 조슈아 쿠퍼 라모에 따르면, '베이징 합의'는 남반부 국가들이 세계질서 속에 자리 잡는 방식을 정의한 3가지 정리(定理)로 압축된다. 혁신의 추구를 통한 국민총생산의 증가뿐만 아니라 삶의 질 제고와 불평등 극복, 서구 등 외부세력의 간섭 거부를 통한 의사결정의 독립과 자율권 추구 등이 그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수많은 토론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11) 예를 들어 국내에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지만 세계화를 받아들인 중국이 실제로 '새 모델'을 제공하고 있는가? 그러나 탈식민화 이후 처음으로 남반부 국가들은 독립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워싱턴 시각에 동조하지 않는 파트너들(기업과 국가들)을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중국-아프리카 정상회담 혹은 9월 26일 뉴욕에서 열린 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외무부장관 회담은 새로운 관계가 구축되고 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러 나라들은 '워싱턴 합의'라는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일 필요 없이 발전을 추구하고자 한다.
서구의 개입 방식, '도전' 받아
국제사회의 중요한 또 다른 변화는 세계의 지정학과 관련된다. 2007년 4월 1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사상 처음으로 지구 온난화와 관련된 정치와 안전 문제를 다루었다. 현재 이 문제는 미국, 프랑스 혹은 호주에서 전략적 성찰의 대상이다.12) 지구 온난화는 식물 경작에 영향을 미치면서 전염병 확산을 용이하게 한다. 또 수면 상승은 수백 만 명에 달하는 환경 난민들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산호초나 섬들을 사라지게 하면서 영토 분할,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크기와 관련된 논쟁을 낳고 있다. 일부에서 추정하는 바에 따르면 환경 난민의 숫자는 2050년에 1억5천만 명에 달할 예정이다. 식료품 가격의 급등은 많은 나라들의 안정을 위협할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서구의 경제적 지배 체제만이 차후 다극체제 등 새로운 도전을 야기하거나, 다양한 형태의 변화와 발전 형태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선악을 구분하고, 국제법을 정의하며, 도덕과 인도주의 이름으로 세계 각지에 개입하는 서구의 방식 전체가 문제될 것이다. 프랑스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위베르 베드린은 서구가 '역사'와 '위대한 이야기'를 독점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200년 전 이래의 세계사는 유럽의 '등극'과 '우월성'을 과시한 역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다극체제로 나아가는 길은 진정한 보편주의로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서구에선 때로는 근거 없는 공포심을 조장할 것이다. 아마도, 일부에서는 세계가 야만인들에 의해 점점 더 위협적으로 변할 것이며, 서구의 가치는 중국, 러시아, 이슬람 등 사방으로부터 공격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다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지휘 아래 '서구를 파멸시키려' 애쓰는 '야만인'들에 맞서 새로운 십자군 전쟁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조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예언이 반드시 실현될지도 모를 일이다.
번역 |이상빈 malraux21@ilemonde.com*
<월스트리트 저널>, 자유시장 찬양 포기 세르쥬 알리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발행인 1972년부터 1989년까지 17년 동안 <월스트리트 저널>의 주필이었던 로버트 바틀리의 오른팔 격인 조지 멜로안은 5년 전에 의미심장한 '비밀'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금융인과 언론인이 자신들의 독선적 원칙을 위해 국민 전체를 희생시키려 했던 '고집'에 관한 것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권좌에 오르기 전 지미 카터 대통령은 폴 볼커를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으로 임명하면서 그에게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라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볼커는 의장직에 오른 직후 로버트 바틀리와 나를 점심식사에 초대한 자리에서 혹시라도 자신이 어려울 때 지지해달라고 부탁했지요. 나는 옆자리의 바틀리가 머뭇거릴 때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후 달러가 다시 강세로 돌아서고, 인플레가 높아지자 라틴아메리카의 채무국들과 미국 농부들이 졸지에 어려움을 겪게 됐습니다. 이때 볼커는 인플레를 잡기위해 협조를 요청했지만, 우리는 그를 외면했습니다."1)
1) 조지 멜로안, '바틀리와 보낸 32년간의 몇가지 추억들', <월스트리트 저널>, 2003년 12월 16일자. |
'워싱턴 합의' 19년… 다극체제 시동 ▷1989년 |
밀턴 프리드먼과 통화주의 밀턴 프리드먼(1912-1996)이 피력한 '통화주의(monetarism)'는 경제활동의 중요한 결정 요인을 화폐 공급에서 찾는다. 시장에 개입하지 말고 화폐공급량을 통해 경기를 조절하자는 주장이다. |
* 1948년 이집트 출신. 중동 전문가로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의 갈등의 진실>(2001), <종교와 세속의 쟁점>(2005) 등의 저술로 잘 알려져 있다.
1)<민주주의는 어떻게 종식되는가>, Grasset, Paris, 1983.
2) 파리드 자카리아가 쓴 <포스트 아메리칸 월드(Norton, New York, 2008)를 읽어볼 것. 마찬가지로 이 책에 대해 위베르 베드린이 쓴 서평(<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8년 9월호) 참조.
3) <국방과 국가안전보장에 관한 백서>, Odile Jacob, La Documentation fran먫aise, Paris, 2008, p. 34.
4) '다극체제의 시대 : 누가 미국의 지배를 뒤따를까', <포린 어페어즈>, New York, 2008년 5~6월호.
5) 2001년에 공식적으로 창설된 OCS는 중국,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을 결집시키고 있다. 인도, 파키스탄, 이란과 몽골은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하고 있는 중이다.
6) <국방과 국가안전보장에 관한 백서>, p. 44.
7) http://bostonreview.net/BR32.3/burns.html
8) 자크 사피르가 쓴 <새로운 21세기. 미국의 시대에서 국가들의 귀환으로>(Seuil, Paris, 2008)를 읽어볼 것. 특히 164~170쪽을 주목하라.
9) '워싱턴 합의'란 표현은 1989년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John Williamson)이 만들어낸 표현으로, IMF를 포함한 국제기구들이 위기 상황을 겪는 국가들에 부과하는 자유적 조치들과, 이들 국가의 '인권' 침해 여부를 동시에 지칭한다.
10) <베이징 합의>(The Foreign Policy Center,
London, 2004).
11) 아리프 딜리크의 'Beijing Consensus : Bei-jing 'Gonshi'. Who recognizes Whom and to What End?' 참조. 인터넷에 수록된 이 글은 장소와 날짜 표시가 없다.
http://anscombe.mcmaster.ca/global1/servlet/Position2pdf?fn=PP_Dirlik_BeijingConsensus
12) 앨런 뒤퐁, 'The Strategic Implications of Climate Change', <서바이벌>, The 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 London, 2008년 6~7월호.
13) 배타적 독점수역은 해양 권리에 대한 유엔 협약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 개념은 한 국가가 자신의 해안으로부터 200마일(370㎞) 이내에서 일정한 권리를 행사하도록 규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