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하지 않은 ‘아시아 리얼리즘’

[리뷰]

2010-09-03     윤범모/경원대 교수, 미술평론가

덕수궁미술관에서 이색적인 전시가 열렸다. 이름하여 ‘아시아 리얼리즘’, 그동안의 미술관 관행과 비교하면 일종의 ‘궤도 이탈’ 전시라 할 수 있다. 리얼리즘? 그것도 아시아? 이 행사를 주관한 국립현대미술관, 무슨 마음으로 이런 전시를? 관객은 다소 의아히 생각할지 모른다. 우선 미술관 쪽 홍보용 전단에 요약된 전시 내용부터 살펴본다.

“싱가포르국립미술관과 공동 기획하여 양국의 국립미술관을 순회하는 ‘아시아 리얼리즘’전은, 아시아 10개국(한국·중국·일본·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타이·베트남·필리핀·인도)의 근대미술 명화 106점을 한국에 최초로 소개하는 전시다. 19세기 말 서양과 접촉을 통해 새로운 ‘재현’의 기술로서 리얼리즘이 도입되는 과정에서부터, 20세기의 복잡다난했던 아시아 역사를 관통하며 나와 주변, ‘현실’에 대한 자발적인 인식이 성장하는 과정까지, 다양한 층위와 ‘리얼리즘’ 담론과 만나게 된다. 아시아의 격변기를 살다 간 예술가들의 ‘리얼’ 스토리를 경험해보기 바란다.”

아, 그렇구나! 한국 최초 격변기를 살다 간 아시아 작가들의 리얼 스토리, 그것을 경험해보라고! 미술 애호가들은 ‘리얼 스토리’에 대한 큰 기대감을 갖고 덕수궁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아마도 그들은 이같은 ‘진짜’ 미술전시를 마련해준 미술관 쪽에 고마운 마음까지 갖고 덕수궁에 갔을 것이다. 아시아 리얼리즘, 정말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말이다.
 
무엇이 아시아 리얼리즘인가

결론부터 말하고 싶다. 전시장을 일별하고 난 소감, 그것은 무엇이 아시아 리얼리즘인가. 어둠 속에서 코끼리를 더듬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100점이 넘는 그림을 본 것 같은데, 도대체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리얼리즘은 치열함과 진정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텐데, 어디서 그런 열기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너무 심심한 전시였다. 과연 무엇이 리얼리즘, 그것도 아시아의 리얼리즘이란 말인가. (고맙게도 이번 전시도록은 제법 두툼한 볼륨에 여러 편의 논고를 게재해 독자에게 공부를 시키고 있다.) 이번 전시는 2007년 9월 서울에서 개최한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단됐다. 당시 발표 내용이 이번 전시의 참고 자료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조이스 팬과 김인혜의 공동 집필에 의하면, 이번 전시 성격은 이렇게 정리된다. 리얼리즘 주제는 대상과 현실을 재현하는 진실에의 근접 시도이며, 더불어 정치·사회적 이슈를 분석하는 태도의 문제다. 이 때문에 리얼리즘은 단순히 양식적 범주에 머무르기보다 도전적인 시도다. 20세기 아시아는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가 지배적인 시대였다. 그래서 사실주의 미술가들은 아시아적 리얼리즘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아에서의 리얼리즘은 이같은 정치·사회적 토양과 맞물리는 특수 상황의 산물이다.

리얼리즘과 관련한 주의·주장은 실로 다기다양하다. 논자에 따른 시각의 차이도 있지만, 리얼리즘을 담는 각 민족의 상황도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과 아시아의 정치·사회적 차이는 실로 크고도 넓다. 19~20세기 아시아의 대부분은 유럽 국가의 식민지로 ‘암흑시대’를 공유했다. 제국주의 시대가 힘을 잃으면서 1940~50년대 아시아는 식민지 압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필리핀은 스페인과 미국으로부터, 인도와 싱가포르는 영국으로부터,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 그리고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쟁취했다. 특히 20세기 중반 아시아를 검은 구름으로 덮게 한 일본제국주의의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기치 아래의 침략전쟁은 간과할 수 없다. 일제의 침략은 아시아 지역을 광범위하게 유린했다. 이 전쟁은 인류 역사상 원폭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동원시키는 불행도 초래했다. 이렇듯 격동기를 감내하면서 20세기 미술가들은 일찍이 경험할 수 없던 ‘리얼’ 사회와 대응해야 했다. 꽃 노래만 불러도 되는 평화 시절과 시대 상황은 사뭇 달랐던 것이다. 시각 현실은 바로 리얼리즘의 현장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양분되는 세계의 구도였다. 따라서 미술언어의 문법이 특성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 미술에서 리얼리즘의 정의는 서구의 맥락만을 존중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 더불어 침략자였던 일본의 입장을 다른 아시아 지역에 그대로 적용하기도 곤란하다는 점을 망각할 수 없다. 관점은 분명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리얼리즘 전시는 관점을 분명히 드러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리얼리즘 전시의 구성과 문제점

이번 전시는 아시아의 격동기였던 19세기 말부터 1980년대까지의 시기를 대상으로 삼았다. 더불어 전시는 5가지 주제로 나누었는데, (1) 새로운 재현 형식으로서의 리얼리즘(시각적 경험을 평면에 있는 그대로 옮기는 근대적 기술 중시), (2) 은유와 태도로서의 향토(자연과 환경에의 관심과 자발적 민족의식 추구), (3) 노동자를 환호하다(사회적 소외계층에 대한 미술 주제로서의 새로운 주목), (4) 전쟁과 리얼리즘(리얼리즘 회화의 유행을 제공한 전쟁의 문제), (5) 사회 인식과 비판(독립국으로서 20세기 후반의 사회현실 비판과 새로운 리얼리즘 운동) 등이다. 이같은 구분 아래 대표적 작품으로 다카하시 유이치(일본)의 <오이란>(1872), 페르난도 아모르솔로(필리핀)의 <모내기>(1924), 신드다르소노 수조요노(인도네시아)의 <앙클룽 연주가>(1956), 판깨안(베트남)의 <하노이 크리스마스 폭격>(1985), 이종구의 <속 농자천하지대본>(1984) 같은 작품을 대표작으로 소개했다. 나는 쉬베이홍(중국)의 <우공이산>(1940)이나 이시가키 에이타로의 <무쇠탈>(1929), 야마시타 기쿠지(일본)의 <아케보노 마을 이야기>(1953), 찰렘 나끼락(타이)의 <닭싸움>(1954), 레나토 아불란(필리핀)의 <민족의 드라마>(1982) 같은 작품을 흥미롭게 보았다.

아시아 미술에서 리얼리즘의 출발을 서구 미술의 수용으로부터 설정한 시각, 흔쾌히 동의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부분은 별도의 논고를 필요로 한다. 유럽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일본의 경우를 필요 이상으로 부각시킬 필요가 있을까. 특히 한국 미술의 경우, 작품 선정 기준이 분명하지 않아 아쉽다. 아무리 ‘재현’이란 개념에 의미를 부여했다 해도 고희동의 <자화상>(1915)을 출품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야말로 사료 가치에 불과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서구 유화의 아시아 보급 창고로 일본의 역할을 추인하겠다는 ‘식민지 근성’과 무관하기만 빌 따름이다.

안타깝게 하는 부분은 특히 ‘전쟁과 리얼리즘’ 부분이다. 예술가는 평화와 자유를 갈구하려는 속성이 있다. 하여 예술가는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운다. 전쟁 예찬은 일종의 부역 행위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동원된 예술가는 글자 그대로 동원된 예술가일 따름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심각한 반성을 요한다. 아시아에 전쟁을 반대하는 예술가가 얼마나 있었던가. 왜 아시아 미술과 반전(反戰) 미술이라는 개념은 친숙하지 않은가. 1937년 일본은 중국을 침략한 바, 중국은 항일미술운동의 기치를 높게 들었다. 저항으로서의 미술, 이는 리얼리즘의 정신과 맥락을 같이하는 부분이다. 마땅히 이번 전시의 전쟁 부분에서 중국의 항일미술 작품을 주목했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거꾸로 침략자 일본의 전쟁기록화를 진열해 일종의 면죄부를 발부한 것처럼 보였다. 전범(戰犯)의 그림을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리얼리즘’이란 이름으로 전시장을 장식한 것이다. 그래서 관객은 <메나드에 내리는 낙하산 부대>(미야모토 사부로·1943)와 <말레이 가교 공병대>(시미즈 토시·1944) 같은 ‘전쟁 예찬’ 그림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라고 강요당했다. 이런 의미에서 평생 반전·반핵 운동에 앞장섰던 마루키 부부 화가의 반전 작품이 누락된 것은 못내 아쉽다. 더불어 몇 명 되지도 않는 일본의 리얼리즘 화가인 도미야마 다에코가 누락된 것도 지적하게 한다.

‘재현’은 ‘진실’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진실 자체를 왜곡하면서 리얼리즘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전화황(1909~96)의 <전쟁 낙오자>(1960·광주시립미술관 소장)를 보자. 이 유화에 대한 전시도록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언덕 위 달동네를 배경으로 하여 나무판자로 엮어진 허름한 움막 같은 곳에서 목을 축이고 있는 노인과 아이를 그렸다. 전구 하나로 어둠을 밝히고 있는 누추한 곳이긴 하지만, 삶을 이어가고 있는 전쟁의 낙오자이지만, 아이의 모습을 통해 작은 희망을 품고 있는 듯하다.” 원두막처럼 벽도 없는 허름한 실내, 조명시설은 전구라기보다 석유 등잔 하나뿐이다. 그 움막 구석에 앉아 있는 남자, 그는 진정 전쟁 낙오자? 전화황의 작품은 전쟁(의 비참한 모습)을 고발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한 것은 아니다. 1962년(1월 1일) 일본에서 발행한 화집을 참고하자. 발행처는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미술부, 화집의 제목은 <재일조선미술가 화집>(비매품)이다. 이 화집은 ‘편집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조선 인민에게 거대한 희망과 앞으로의 전망을 주며 새로운 시대를 지시해준 조선 로동당 제4차 당대회에 드린 것’이다. 이른바 총련 계열의 미술가들에 의한 작품집인 것이다. 거기에 전화황의 작품 <전쟁 낙오자>가 원색 도판으로 수록됐다. 하지만 <재일조선미술가 화집>에 의하면, 전화황 작품의 제목은 ‘안타깝게도’ <남조선의 가난한 생활>(1961)이다. 작가는 전쟁 자체를 비판하려 한 것이 아니고, 당시 총련의 일반적 분위기처럼, ‘남조선의 가난한 생활’을 지적하려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작가는 램프 옆의 가림막에 글자도 뚜렷한 ‘U.S.A’라는 표시를 ‘은근히’ 강조했다.

부분적으로 아쉬움이 없지 않았지만, 이번 아시아 리얼리즘 전시는 서울에서 보기 어려웠던 주목할 만한 전시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이번의 ‘궤도 이탈’을 경험 삼아 향후 본궤도로 진입해 아시아, 특히 이른바 제3세계 미술의 다양한 면모를 소개하기를 진심으로 갈망한다. 리얼리즘, 이는 살아 있어야 한다. 기획자의 글 결론 부분으로 졸고를 마무리한다.

“‘당대’의 현실을 재현한다는 관점에서 리얼리즘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강력하고 적합한 표현의 수단이 될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또다시 리얼리즘이 ‘활용’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진실’에 대한 소박하고 용기 있는 희구가 계속되는 한, ‘태도로서의 리얼리즘’은 계속될 것이다.”

글•윤범모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저서로 <미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미진사·1994), <한국 미술에 삼가 고함>(현암사·2005), <김복진 연구>(동국대 출판부·201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