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대신 주술이 된 경제학
과학이 발전할 때마다, 인류는 과거의 표상을 허물고 진일보한 지식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표상을 구축한다. 하지만 매 순간 사상의 진보에 저항하며 후퇴를 거듭하는 유일한 분야가 있으니, 바로 경제다. 경제에서는 늘 힘의 논리가 이론적 문제에 앞선다. 우리 시대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처음에 그가 이 세계를 신비로운 생명체로 가득한 거대한 유기체로 인식했다면, 오늘날 그는 복잡한 우주 생성과 지구 생명체의 기원이 ‘창조의 소용돌이’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식이 변화하는 가운데 차츰 우주가 일정한 인과율과 법칙에 따라 운행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그는 아이작 뉴턴(1)에게서 세계가 시계처럼 질서정연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사디 카르노(2)에게서는 ‘에너지’라는 무형의 힘에 의해 세계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 에너지가 우주 속에서 분산되고 소멸하면서 창조의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그렇게 매일 조금씩 소멸하며 우주로 발산되는 태양 광선은 지구에 생명체가 등장하고 진화할 수 있는 기원이 되었다.
마르크스가 사랑한 열역학
중력에 의한 우주의 균형론이 경제학에서 애덤 스미스의 균형가격이론이나 레옹 발라스(3)의 일반균형이론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본인들도 그런 사실을 인정했을뿐더러,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애덤 스미스는 직접 천문학과 관련된 책까지 저술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현재 지구상에 움직이는 모든 에너지는 태양에너지가 변환된 것”이라는 카르노의 열역학을 자주 참고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나 특히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곧잘 인용했다.
과거를 해석하는 행위는 우리에게 상대성의 교훈을 깨닫게 만든다. 지식 발전은 지식의 축적이 아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도구를 가진 동일한 학자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를 기점으로 더 이상 동일한 천체를 동일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시계를 움직이는 기계학적 법칙과 세계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에너지, 복잡한 우주의 진화를 이끄는 에너지 법칙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고로 이런 법칙들에서 기인한 경제적 인식 사이에도 질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매번 경제적 인식이 변화할 때마다 경제 시스템의 규제나 발전 방식도 획기적으로 변화했다. 그러므로 경제에는 영구불변하는 보편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시대의 현실에 근거한 경제 이론은 그 시대의 현실에는 부합할지 몰라도, 다른 시대의 현실과는 완전히 어긋나기 마련이다.
천동설은 지동설로, 그럼 경제학은?
예를 들어 무엇보다 자본 축적에 의해 발전이 되던 초기 자본주의 시기에 경제서를 저술한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는 저축은 선이요, 소비지출은 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100년 후, 초기 자본 축적이 이미 실현된 영국에서는 경제의 원동력이 자본에서 지속 가능한 소비 쪽으로 옮겨간다. 이제 발전을 이끄는 것은 철도 부설이 아닌, 자동차 수요가 됐다.
리카도와는 반대로 케인스는 소비를 선으로, 저축을 악으로 보았다. 사실 자신이 속한 시대에 각자의 주장은 모두 정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케인스와 벌인 그 유명한 불꽃 튀는 논쟁에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4)가 리카도의 이론을 견지했을 때, 그는 시대착오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1920~30년대에 세계경제를 불황의 늪으로 몰아넣은 것과 유사한 경제 처방(국가재정 축소, 공무원 수 및 임금 삭감, 노동 유연성 강화, 총임금 축소, 사회복지 정책 비판 등)을 내놓으며 오류를 범하는 것과 유사하다.
신자본주의 시스템이 겪고 있는 현 위기는 시대의 요구에 역행한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위기다. 세계를 “실시간의 생활 단위”(5)로 만든 정보통신의 발달로 개방의 필요성이 요구되던 시기에, 신자유주의 정책은 오로지 금융자산의 수익률을 높이는 일에만 매달렸다.
무형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의 의미가 변화한다. 공간은 더 이상 거리 개념과 연계되지 않는다. 네트워크화한 공간은 여러 노드(Nodes)로 이어지며, 직접적인 상호소통을 가능하게 만든다. 각국의 주식시장은 24시간 내내 국경을 초월해 연결된다. 미국의 실리콘밸리와 프랑스의 소피아 앙티폴리스는 지리상 후배지보다 더 가까운 거리가 된다.
시간도 지속의 개념이지만, 순차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과거, 현재, 미래가 혼재한다. 오늘, 투자자는, 미래의 어느 날을 위해, 과거에 축적한 적이 없는 (그러니까 소유한 적이 없는) 돈을 가지고, 주식을 구매한다. 이때 매도자는 주식을 손에 쥐고 있지도, 매수자에게 주식을 양도할 의도도, 주식값에 해당하는 돈을 받을 생각도 전혀 없다. 비로소 거래가 성사되면 마침내 시장의 변화를 제대로 예측한 자에게 주가 차익에 해당하는 금액이 보상 형태로 지급된다.
유형자산은 소유 없이는 양도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반대로 무형자산은 교환을 거치는 과정에서 더욱 불어나기도 한다. 정보를 예로 들면, 다른 이의 수중에 넘어간다고 해도 초기 소유주가 손에 쥐고 있던 정보를 빼앗기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상호의존적 시스템에서는 개별 요인이 아닌, 모든 인자를 고려한 통합 시스템 전체가 생산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자본이나 노동 따위의 개별 요인의 생산성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생산성 향상을 원하면 더는 생산 시스템에 자본이나 노동의 단위를 추가로 투입할 필요가 없다. 대신 전체 시스템의 속도를 높이는 것만으로도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이때 비용은 거의 들지 않는다. CD를 생산할 때,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은 소프트웨어다. 나머지 부품은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식의 생산은 단가는 줄이고 채산성은 높일 수 있다. 과잉생산의 경우는, 경쟁력 향상을 위해 생산량을 늘리는 방법으로 가격을 낮출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과잉생산은 더욱 심화된다. 결국 시장은 불균형을 증폭시키는 온상이 된다.
불균형 오히려 증폭시키는 시장
우리는 물질 경제의 한계점에 이르렀다. 비로소 ‘유한세계’의 시대가 도래했다. 한편으로는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이 초기 전통학파가 말한 자유재(Free Goods)의 위상을 박탈당했다. 자연은 더 이상 영원불변하고 고갈되지 않는, 온갖 수지타산에서 초월한, 신이 주신 선물이 아니다. 이로써 ‘자연의 재생산’이라는 문제가 경제학 영역으로 편입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부의 생산은 일반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기본 수요의 충족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경제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이제 결핍 해소가 아니다. 부를 분배하는 것,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과잉생산을 제한하는 것이 경제의 목표가 됐다. 과거에는 (오늘날 최빈국도 마찬가지지만) 만성적인 식량난으로 인해, 식량 생산을 늘리는 것이 더 많은 행복을 만들어내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자동차는 어떨까? 자동차를 더 많이 생산한다고 행복이 늘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나라에서는 자동차가 넘쳐나 교통 체증을 유발하지만, 또 어떤 나라에서는 많은 이들이 기본적인 욕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결국 생산 증가는 ‘왜?’라는 무시무시한 문제, 즉 목적성과 윤리, 가치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처럼 물질 경제의 ‘한계점에 도달’하면서 경제학적인 합리성의 영역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과거에는 양적 성과가 행복을 측정하는 기준이었고, 양적 성과를 실현하는 것이 생산기기의 성능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결과나 인간적 목적성이 합리성을 평가하는 척도다. 과거에는 ‘도구’로 인식되던 합리성이 이제는 ‘목적’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실을 외면하려 든다.
양적 성장에서 인간적 목적성으로
합리성의 영역 변동은 이론적인 차원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경제적인 선택과 관리 기준도 완전히 전복됐다. 개인은 조정변수(Adjustment Variable)의 위상에서 목적으로서의 위상을 되찾았다. 국제무역을 규제하는 원칙도 수정됐다. 자원 개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훼손해야 했던 자연은 보존의 의무를 저버릴 경우 지구상에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논리에 의해 모태로서의 역할을 되찾았다. 이런 인식에서 비롯된 새로운 관리 기준은 한 국가의 경제는 물론, 국가 간 관계와도 연관된다.
우선 일국 경제의 차원에서 살펴보면, 조지프 스티글리츠·아마르티아 센·장폴 피투시 교수 등은 ‘경제적 성과와 사회적 진보 측정’에 관한 최종 보고서를 통해, 가계의 현실을 더 잘 반영한 새로운 경제지표를 제안했다. 특히 소득과 (생산보다는) 소비, 자산, 분배, 즉 불평등을 고려한 지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기준을 가족 간 서비스를 비롯한 비상업적인 활동에까지 확대하자고 제안한다. 모두 신자유주의 경제에 역행하는 지표다.
다음으로 국가 간 경제 관계 차원에 대해 살펴보자. 도구적 효율성을 중시하는 경쟁지상주의는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계없이 높은 생산성만 추구해왔다. 예를 들어 환금작물 재배는 후진국의 식량 재배에 압박을 가하며, 후진국 국민을 모두 빈곤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국제무역의 주요 원칙(최혜국 조항, 국내 기업에 대한 혜택을 외국 기업으로 확대하는 정책, ‘자연적’인 비교우위에 따른 전문화, 자유로운 상품 및 자본의 이동 등)도 이런 식의 논리를 따랐다. 하지만 목적 지향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시각에 따르면, 이런 기준은 바뀐다. 중요한 것은 이제 후진국에 자신만의 비교우위를 구축하기 위해 자신을 보호할 권리, 상호 보완을 위해 다국적 공동체(6)를 조직할 권리,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벗어나 자신의 기본적인 수요를 스스로 책임질 권리 등이다.
금융권력 척결이 급선무
자연의 차원에서는, 최적의 경제정책이 유지될 수 있는 환경 기준을 정하기 위해 물리적 지표를 창안해야 한다. 이런 ‘생물학적’인 접근법을 통하면, 경제나 정치 시스템에도 적용할 만한 새로운 조직 원칙을 많이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서 연대가 경쟁을 대신하게 된다. 이때 연대는 동정이 아닌 이성적 합리성에서 비롯된다.
모든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논리는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국가들 사이의 중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앞서 말한 변화가 가능하려면 우선 신자유주의 정책 아래서 번영을 누린 금융권력부터 먼저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금융권력을 사라지게 만들기를 바라는지, 아니면 계속 그에 굴종하기를 원하는지 증명하는 것은 정치 지도자들의 몫이다.
글•르네 파세 Rene Passet
경제학자. 이 글은 르네 파세가 저술한 <역사의 줄기를 관통하는 세계와 경제의 거대한 표상: 마법의 세계에서 창조적 소용돌이까지>(Les liens qui liberent 출판사·2010)에서 발췌한 것임.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아이작 뉴턴(1642~1727)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2) 사디 카르노(1796~1832)는 에너지 법칙을 발견해, 열역학을 창안했다.
(3) 레옹 발라스(1834~1910)는 경제학의 일반균형이론을 주창한 프랑스 경제학자다.
(4) 1932~36년, 임금과 소비 인상을 통한 경기부양책을 주장한 케인스와 소비 진작 및 임금 인상 대신 저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로 부상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사이의 논쟁을 의미한다.
(5) 정보화 사회 분석가인 마뉴엘 카스텔에게서 차용한 표현이다.
(6) 1957년 로마조약에 의해 생겨났다가 후에 변질된 것과 유사한 다국적 공동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