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밭, 즐비해진 별장
어느 프랑스 농부 연대기

2010-10-08     피에르 수숑

   
▲ <여행자>, 2007-도로시 슈즈
1939년 폴(1)이 태어난 날, 그의 외할아버지는 기뻐서 아르데슈의 세벤 산맥 꼭대기의 온 마을을 뛰어다녔다고 한다. 농장을 물려받을 자손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장남은 땅에 속한다. 땅이 장남을 상속받는다”고 말했다.(2) 자식 셋 중 장남으로 태어난 폴은 전통에 따라 가족의 농사일을 물려받을 것이었다. 당시 농업은 다종작(多種作)과 가축 사육을 겸하는 형태였다. 지금은 농사일을 관둔 폴이 회상한다. “나는 사람이 직접 무거운 물건을 지고 옮기던 시대를 살았다.” 당시 아르데슈 지방 농민들은 ‘사콜’이라 부르는 망태기를 머리에 이고 돌이나 퇴비 등을 계단식 밭으로 옮겨야 했다. 말 등의 가축이 이동수단으로 사용되면서부터 사람들은 가장 힘든 노역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당시에 했던 작업을 떠올리기만 해도 피로가 몰려온다.” 제2차 세계대전 뒤, 폴의 농장은 주변 농장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화폐경제의 외부에서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농장이 3대를 먹여살렸다. 포도·올리브·밤 재배와 누에치기(양잠)뿐 아니라 염소·소·닭·토끼·돼지도 사육했다. “쉬지 않고 일했다. 마을의 80가구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일했다. 몇 세기 동안 변함없이 이어온 생활 방식은 현대 문명보다는 오히려 중세에 가까웠다.” <<원문 보기>>

농업에 도입된 생산성 지상주의

1961년 알제리 전쟁에서 돌아온 폴은 아버지에게 사냥허가권을 사줬다. “아버지는 사냥허가권을 살 돈이 없었다.” 당시 농업은 몇백 년 만에 찾아온 큰 변화에 직면해 있었다. 농업에도 ‘생산성 지상주의’가 등장한 것이다.(3) 폴의 부모는 곧 양잠을 그만뒀다. “인조섬유가 등장해 더 이상 수익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뽕나무가 뽑힌 자리에 버찌나무와 복숭아나무가 들어섰다. “그렇게 과수 재배가 시작됐다. 농업협동조합이 설립되고 처음으로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 폴은 동시에 여러 가지 직업을 겸해야 했다. 1968년 지역 보험회사 일을 시작했고, 시청에서 파트타임으로 비서일도 했다. 1970년에는 “처음으로 트랙터를 구입했다”. 트랙터가 오갈 길을 만들기 위해 농지 일부를 파헤쳐야 했다. “기계화는 일종의 함정이었다. 처음엔 기계 덕분에 농사일이 빨라지고 여유 시간이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산업화의 악순환에 빠져들게 되었다. 증산 압박에 시달리면서 경작 속도를 높이고 새로 땅을 사들여야 했다. 평생 농민으로 살아오며 내가 ‘변화’하고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변화 때문에 나는 두 배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이곳에 남기 위해 정신없이 일해야 했다.”

두 배의 삶을 못 견뎌 떠난 이들

그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아르데슈 농민들이 모두 이런 길을 간 것은 아니다. “내 친구들은 모두 도시로 떠났다. 경찰, 기계공, 벽돌공, 철도 노동자가 됐다. 사람들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참 견디기 힘들었다.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으려면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했다.” 이농 현상의 결과를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휴가 때 고향에 돌아온 젊은이들이 욕실이나 화장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고 불평을 했다. 그들은 잘난 체하며 우리를 주눅 들게 했다. 우리는 도시가 놀라운 것으로 가득 찬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삶의 조건이 모두 비슷하던 시절에는 시골도 살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방문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노예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삶의 방식에 대한 비교’가 일반화되면서 아르데슈의 농업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제 농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상속자’를 출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농업을 계속하기를 원하는 상속자가 필요하게 됐다. 다시 말해 자식이 부모처럼 살기를 원해야 한다.(4) 폴은 말한다. “나는 집 건물이나 대문을 현대적으로 만들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악순환이 계속됐다.”

1970년대에 30대가 된 폴은 조합과 대립하게 된다. 마을 청년회는 농민 회원이 점점 다양한 업종에 진출하려는 경향을 억제하려고 했다. “사람들은 내게 농민으로 남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려면 관광업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가다간 고향을 떠나거나 굶어죽는 수밖에 없었다.” 폴은 창고를 개조해 농가로 꾸몄다. “우선은 농가 체험의 초보적인 형태로 시작했다. 처음엔 드문드문 오던 손님이 점차 늘어나 인기를 끌게 되었다.” 1955년 아르데슈에는 3만여 개의 농장이 있었다. 그러나 농업부 통계 자료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5천 개 정도 남아 있다. 폴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쯤에는 농장 수가 80개에 달했지만 현재는 단 3곳만 남아 있다.

폴이 보기에 이렇게 된 책임은 로마조약에 있다. “로마조약이 농민을 죽였다.” 1957년 로마조약 체결로 창설된 유럽경제공동체(EEC)는 6개 회원국(5) 간의 관세장벽을 점차 철폐해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62년 농업공동시장이 출범하면서 관세 철폐 작업이 완결된다. EEC 안에서 농산품의 자유교역이 실현되고 관세 등의 세금과 정부보조금이 철폐됐다.(6) 유럽의 농업 분야가 시장경쟁에 뛰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1962년 프랑스 정부는 당시 225만 곳에 달하는 경작지를 이른 시일 안에 100만 개로 줄이기 위한 법률을 공표했다. 농민 60만 명이 종신연금이나 이농 보조금 등을 받고 고향을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빚을 내서 농기계를 사들여야 했다. 1960∼73년에 농가 부채는 4배 증가했다. ‘크레디 아그리콜’(농협으로 시작해 상업은행이 됐다)은 프랑스 제1의 은행으로 성장했다. 정부는 정기적인 간접 지원을 통해 이 ‘녹색 은행’을 정치적 실세로 키워놓았다.

경작 늘리려 억지 융자, 빚더미

정부는 1968년 최소 경작 면적을 23ha로 제한함에 따라 그 이하의 경작지 농민들은 농사를 그만둬야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이들에게 저금리 융자금 제공이 끊긴 것이다.(7) 그렇게 소농들은 가차 없이 쫓겨났다. “우리 마을은 예전의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스무 살일 때는 저녁마다 3대가 모여 얘기를 나누곤 했다. 노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이야기했고, 여자들은 농사일을 의논했다. 아이들은 그 사이를 뛰어다니며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다. 외양간마다 대여섯 마리의 소가 있었고, 노인들은 소를 이끌고 샘에 가서 물을 먹였다. 이따금 ‘미슐린 카’(타이어 달린 레일카)가 기적 소리를 내며 밀밭과 포도밭 사이를 지나갔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이런 풍경을 볼 수 없게 됐다.” 1982년 폴의 두 아이 중 첫째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아이에게 내가 심은 버찌나무들을 보여주었다. 그때만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뒤 폴은 한창 재배 중이던 버찌나무 100여 그루를 전기톱으로 모두 베어버렸다. 과일값 폭락으로 “버찌를 수확하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폴은 “재배를 그만둔 과수원은 보기에 흉할뿐더러 내버려두면 멧돼지가 몰려올 수도 있기 때문에 나무들을 베어버렸다”고 설명한다. 아르데슈에서는 50년 전만 해도 멧돼지를 구경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경작지가 줄어드는 속도에 비례해 그 수가 증가했다. “마을 곳곳이 잡초로 뒤덮이기 시작할 때 아버지와 그 문제로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난다. 우리는 확신은 없었지만 이 지역에서도 곧 멧돼지 사냥이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실제로 지금은 멧돼지 사냥을 하고 있다.”

전성기에 폴의 농장은 매년 밤 7t, 복숭아 9t, 버찌 4t, 포도주 100헥토리터(1만 리터)를 생산했다. 그러나 지금은 농가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그에게 농장이 어디에 있는지 물으면 “소나무, 참나무, 금작화와 잡목 말고는 더 이상 남은 게 없다”고 대답한다. 그의 두 자녀는 아르데슈를 떠났다. “아이들은 내가 제대로 된 대가도 못 받고 죽어라 일만 하는 걸 보면서 컸다. 그러고 나서 살길을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났다.” 갈수록 고용 상황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전쟁 직후 제1의 산업이던 농업 분야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아르데슈 지방 북쪽에 집중된 산업인력도 계속 감소했다. 2001∼2007년에만 13.6%가 줄었다. 무엇보다 섬유산업의 ‘몰락’ 때문이었다.(8) 이 기간에 섬유산업 고용인력의 절반이 감소했으며, 2007년에는 총고용 인력이 2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적은 수였지만 섬유산업은 여전히 아르데슈에서 자동차와 농업에 이어 규모 면에서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농업도 죽고 지역 공업도 죽고

1962년 15살에 공장일을 시작한 장 로랑은 섬유산업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그때에는 아르데슈에만 명주실 꼬아 잣기와 섬유 텍스처 가공 공장이 프랑스 전체의 절반이 넘는 240여 개가 있었다.(9) 공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장 로랑 역시 41년을 공장에서 일했다. 그의 고향 발레 드 뷔르제에서 그처럼 평생 공장에서만 일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 “내가 처음 공장일을 시작했을 때, 우리 지역 주민들은 농업과 섬유산업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전통에 따라 여성은 공장에서 일하고 남성은 농사를 지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가령 1970년에 내가 받은 시급은 3프랑이었다. 그런데 버찌 1kg 가격이 3프랑이었다! 버찌 1kg을 수확하는 데는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과일 재배로 얻는 수익이 짭짤했다. 이 두 산업 덕분에 우리 지역이 발전할 수 있었다.” 1차 석유파동이 닥쳤을 때, 그가 일하던 공장에는 100여 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그때부터 직원 수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농사 수익도 형편없었다. 과일 판매가 바닥을 쳤다.” 장 로랑은 지치지도 않고 문을 닫은 공장 이름들을 차례로 열거한다. 각 공장이 있던 자리에는 소매점, 바캉스촌, 소형 발전소, 시립 도서관, 임대용 주택, 공 놀이터, 소방구급대원 훈련센터 등이 들어섰다. 점차 지역 전체의 균형이 흔들렸다.

양로원이 가장 큰 일자리

장 로랑은 회상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마을을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남자들은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여자들은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고향을 떠났다. 그나마 도시에 공무원 자리가 조금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지역시설, 전력공사(EDF), 철도 등에 아르데슈 사람들이 상당수 취직했다. 내 동료들의 자녀도 모두 일을 찾아 떠났다.” 장 로랑은 2003년 아직 30여 명의 노동자가 남아 있던 공장을 떠났다. 그 공장은 2007년에 문을 닫았다. 장 로랑은 퇴직 뒤 농촌 지역 가사지원사업(ADMR)의 무보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직원 11명이 주민 35명을 돕고 있다. “이 지역을 이끌어가는 주역이 노년층임을 인정해야 한다.” 직원 20여 명을 거느린 뷔르제 양로원은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은 고용을 담당하고 있다.

이곳에서 몇km 떨어진 생피에르 드 콜롱비에, 72살의 알베르 소불은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에 “이 마을에만 공장 8개가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공장 노동자로 살았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부모님의 경작지를 물려받을 생각으로 학교에서 농업을 공부했다. 그 뒤 “18개월간 프랑스 국내에서 군 복무를 하고 10개월간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다. 그 사이 대고모가 내게 가족 유산으로 농지를 물려주셨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와서 그 농지로는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 수 없이 그 땅을 포기해야 했다. 과일 시장이 확장되던 당시 사과 생산량이 30~40t에 달하는 집들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당시는 공장 일자리를 구하기가 쉬웠다. 공장마다 많은 일손을 필요로 했다. 나는 그렇게 섬유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부업으로 농사도 지었다. 당시 공장 임금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 레이몽드 소불이 말한다. “결혼하기 전에 복권을 샀는데 일등에 당첨됐다. 상품으로 100kg 나가는 돼지 한 마리를 받았다. 나는 그 돼지를 삼촌에게 팔았다. 돼지 한 마리 값이면 당시 한 달 봉급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소불 부부는 지금도 자신이 먹을 채소를 기르고 돼지를 키운다. 포도주도 직접 만들어 마시고 난방용 땔감도 자신의 농지에서 마련한다. 신혼 때부터 유지해온 습관이다. 둘이 공장에서 받는 임금만으로는 먹고살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관광으로 연명, 그나마 계절 산업

3년 전 생피에르 드 콜롱비에에 마지막 남은 공장이 문을 닫았다. “우리 지역으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젊은이들은 모두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다.” 소불 부부의 외동딸도 고향을 떠나 파리 근교에서 일하고 있다. “고향에 머물면 좋았겠지만 이곳엔 일자리가 없다.” 벽돌공으로 일한다면 또 모를까. 이 지역에 별장이 들어서면서 주택설비회사 5곳이 성업 중이다. 이 회사들은 직원 20명 정도를 고용하고 있다. 소불은 “그 외에는 모두 떠났다”고 말한다. 1982년부터 아르데슈 지역의 실업률은 전국 평균 실업률을 웃돌고 있다. 2009년 1분기 아르데슈의 실업률은 9.7%로 프랑스 평균 실업률 8.7%보다 높았다.(10) 아르데슈 관광사무소 소장 자크 망장은 관광산업이 “아르데슈의 주요 산업이 됐다”고 말한다. 아르데슈의 관광산업 규모는 고용 인원 5200명, 연간 총 숙박일수 1600만 일, 매출액 4억2천만 유로에 달한다. 그러나 관광업은 특정 기간에만 수요가 몰리기 때문에 주로 ‘계절 노동자’를 고용한다. 당연히 임시직이 많을 수밖에 없다. 사회·경제적 상황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건 아르데슈 주민들이다. 그들은 저마다 ‘알아서’ 생활을 꾸려가야 한다.

니콜라는 도시에서 몇 년간 보험회사 직원으로 일하다가 귀향을 결심했다. 20∼30대 청년은 “고향의 산과 따뜻한 바위, 나무에서 직접 따먹던 즙 많은 복숭아”가 그리웠다. 그는 1년에 몇 달 정도 아르데슈 남쪽 레포츠센터에서 스포츠 강사로 일한다. 수영장 안전요원, 시설 수리, 청소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일이 없는 기간에는 실업자 신세가 된다. 실업수당으로 한 달에 900유로 이하를 받는다. 그의 아내 아멜리도 관광업 쪽에서 계절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니콜라와 아멜리는 함께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아멜리가 말한다. “이곳에 남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건 작은 일거리들뿐이다. 하지만 삶의 질을 위해 이곳을 선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최저임금을 받고 있지만 행복하다.” 두 사람은 가족 소유의 전통 농가에 살기 때문에 집세를 낼 필요가 없다. 거기에 정원까지 딸려 있다. 이들은 매년 여름 콩, 양상추, 감자도 재배한다. 다른 기간에는 생산자들에게 직접 채소를 사서 먹는다. “가격이 훨씬 싸기 때문이다.” 생산자가 팔고 남은 채소를 ‘떨이’로 넘겨받을 때도 있다. 겨울에 수확한 밤은 지역 협동조합에 내다 판다. 니콜라는 도시를 떠난 지 꽤 지난 지금도 이따금 아르데슈의 싼 생활비에 놀랄 때가 있다. 그리고 “소비가 훨씬 줄어들었다. 이곳에서는 숲이 영화관이다.” 아멜리가 미소짓는다. “물론… 아쉬운 것도 있다.” 농업의 몰락으로 좋아진 점도 있다. 근처 숲에 가면 땔감용 나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사냥꾼들이 멧돼지 고기 몇 조각을 나눠주기도 한다. 별로 비싼 값을 치르지 않고 고기를 먹을 수 있다. 니콜라가 말한다. “근처 소농들에게 얘기를 잘하면 새끼 양고기 반 마리 정도는 구할 수도 있다. 이것도 다 요령이 필요한 일이다.”

상부상조와 텃세 사이

28살의 다미앙은 트럭을 운전한다. 농장이나 공사장이 그의 일터다. “오랫동안 계속 트럭 운전을 했다. 이곳에서는 관광업 말고는 할 일이 그것밖에 없다.” 애인 리즈와 함께 살면서 어린 딸을 키우느라 사는 게 녹록지 않았다. 몇 년 전 그는 대형 화물차 면허를 취득했다. “특별히 가진 기술도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는 곧 지역 운수회사에 정규직으로 취직됐다. 아르데슈로 이주해온 지 6년이 지난 이 커플은 ‘운이 좋은’ 경우다. “좋은 자리는 아르데슈 출신들이 인맥을 이용해 다 차지해버린다.” 리즈도 맞장구를 친다. 농업 기술 바칼로레아(프랑스 대학입학 자격시험)를 통과한 그녀는 계절 노동자로 포도농장에서 일한다. “이 고장 출신이 아니면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농장 주인들은 아는 사람이나 이웃에게 일을 주고 싶어한다. 일이 너무 많을 때만 ‘외부인’들을 부른다.” 다미앙은 직업소개소에서 “소개해주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입소문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현지 출신’이라는 게 하나의 자본인 셈이다.(11)

리즈는 이런저런 농사일을 하거나 결원이 생긴 가사보조일을 대신하기도 한다. “딸을 키우는 데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다. 1년 내내 일해도 충분치 않다.” 두 사람은 몇 달 뒤 사정이 좀 나은 지역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집세, 식비, 수도세, 전기세, 전화비 등을 내고 나면 월말에 한 푼도 남지 않는다.” 다미앙은 필요한 수단은 모두 강구한다. 가령 트럭에 기름을 넣을 때마다 작은 통을 하나 준비한다. “800ℓ에서 10ℓ쯤 부족해도 눈에 안 띈다.” 하역 과정에서 물건이 손상되면, 그것이 음식이든 무엇이든 자신이 가져간다. 기계를 다루는 데 소질이 있는 다미앙은 자동차를 조립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고 여기고 헐값에 넘기는 자동차 부품들을 산다. 가령 사고가 나서 엔진만 남은 푸조 605를 사서 차체만 남은 다른 푸조 605와 함께 조립한다. 그럼 거의 새 차처럼 내다 팔 수 있다.” 그의 집 마당에는 수리를 기다리는 자동차가 여러 대 있다. 덕분에 월말 걱정을 조금 덜 수 있게 되었다.

현재 32살인 세바스티앙은 몇 년 동안 공동식당에서 일했다. 스무 살에 군복무를 마친 이 견습 요리사는 바캉스촌 식당과 학생 식당 등을 돌아다니며 정신없이 일했다. 임시직으로 몇 달간 공장 생산라인 관리도 했다. 그리고 그가 속한 단체에서 다양한 임시 업무들을 할당받았다. “청소, 설거지, 원예, 건물 수리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2002년 그는 결국 정규직으로 고용돼 한 달에 1200유로를 번다. 여러 단체에 속해 있으며 지역사회에서 발이 넓은 그는 “여기서 나는 참 편한 일자리를 얻은 편”이라고 말한다. 그보다 더 나은 일자리는 없다는 뜻이다.

글•피에르 수숑 Pierre Souchon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각주>
(1) 인터뷰 대상자는 모두 가명을 썼다.
(2) 카를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쓴 문구를 피에르 부르디외가 <독신자들의 무도회: 베아른 농민사회의 위기>(Seuil·파리·2002)에서 인용했다.
(3) Pierre Miquel, <프랑스와 프랑스 농민: 20세기 농촌의 역사>, L’Archipel, 파리, 2006.
(4) Patrick Champagne, <거부된 상속: 프랑스 농촌사회 재생산의 위기 1950~2000>, Seuil, 파리, 2002.
(5) 독일,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6) Confédération paysanne(농민 연맹), <농업정책을 바꾸자>, Mille et une nuit, 파리, 2002.
(7) Pierre Miquel, 같은 책.
(8) Florence Charpigny, Yves Morel, <명주실 생산지: 섬유산업에 대한 고찰>, Parc naturel régional des Monts d’Ardéche, Montpezat-sous-Bauzon, 2007.
(9) Ibid.
(10) 아르데슈 고용·노동·직업교육청 자료, 2009년 7월.
(11) Nicolas Renahy, <이웃관계: 농촌 젊은이들의 삶>, La Découverte, 파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