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미국 흉내
학교를 아웃소싱하다
[Spécial] 시장으로 간 교육
2002년부터 프랑스의 공교육 관련 법 개정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다. 이 개정안은 교사 양성 전문대학원(IUFM)과 학업부진 학생 전문지도 네트워크(RASED) 폐지, 읽기 교육 방식 재검토, ‘보충수업’으로 토요일 오전 수업 대치, 학교 평준화 완화 등을 골자로 한다.
교육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효율성’이라는 말 속에 중요한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한에서 그렇다. 유치원 단계의 교육 방법이 향후 학생들의 학업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초등학교 1학년 학급에서 처음으로 읽기 수업을 시작할 때 이미 학생 간 격차를 확인할 수 있다. 읽기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은 학업을 계속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부모가 생활이 넉넉지 못해 다른 수단을 강구할 수 없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따라서 수업시간과 다양한 학습 활동을 적절히 배치하는 것은 학습 능력의 격차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3)
효율성이라는 말 속의 모순
학년이 올라가고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되면, ‘우수한’ 자녀를 둔 학부모는 자녀가 비슷한 수준의 학생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 자신이 선호하는 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키거나 싫어하는 학교를 피하려고 온갖 전략을 사용한다. 이런 현상은 특히 중학교 입학 시기에 두드러진다.(4) 초등학교 때는 그럭저럭 학교 공부를 따라가던 학생도 중학교에 진학하면 어려움을 겪는다. 중학교 신입생은 새로운 지식을 배워야 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와 다른 학습방법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학업 능력 격차가 더욱 심하게 벌어질 수도 있다. 따라서 교육과정의 효율성에 초점을 맞춘 학교를 만들어가는 일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초등학교 교육이 이후 교육과정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 시기임이 틀림없다.(5) 따라서 교수법, 교사의 과외활동 참여 시간, 다양한 교육학적 접근법 등을 현재 논의(6)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교육 개정안 속에 등장하는 ‘효율성’이라는 말은 대부분 눈속임에 불과하다.
그 예로, 유치원은 학습평가라는 관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됐는데도, 이렇다 할 정당한 이유 없이 전체 수업시간이 주당 2시간 단축되고 토요일 오전 수업이 폐지됐다. 연간 총수업시간이 936시간에서 864시간으로 줄었다. 물론 전체 수업시간을 단축하는 대신 일부 학생에 대한 ‘보충수업’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전체 학습시간이 학업성취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 요소라고 봤을 때, 보충수업 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7)
평준화 완화와 열등감 심기
수업시간 단축과 보충수업 도입이라는 이중 방안은 현재 교육계를 지배하는 추세를 반영한다. 아동과 청소년의 과외 시간 관리 때문에 교육적 성격이 불분명한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1990~2007년 이와 관련한 방안만 6가지가 제출됐다. 덧붙여 2006년 1월 18일에는 사회 결속에 관한 법률이 공표됐다. 이같은 ‘동반교육’ 방안이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목표는 학업성취도 향상이다. ‘동반교육’이라는 개념은 “학교와 함께 학업성취도 향상을 위해 학생이 필요로 하는 도움과 수단을 제공하는 모든 활동을 일컫는다. 가정과 사회에서 충분한 혜택을 받지 못하는 학생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활동 역시 포함한다.”(8) 학교 평준화 완화와 함께 프랑스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안은 1980년대부터 계속된 경향을 더욱 강화할 뿐이며 이론적 관점에서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한다(‘학습 의욕’, ‘발견의 기쁨’ 등). 여기서 학습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교육학적 고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 공공정책은 동반교육 프로그램에 갈수록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평가 결과를 보면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사회학자 도미니크 글라스만은 “동반교육으로는 미국식 보상교육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별 효과가 없을뿐더러 학업성취도 격차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는 심지어 동반교육 프로그램이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못할 경우 의도와는 달리 특정 학생에게 열등생이라는 낙인을 찍고 급우 간에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9)고 경고한다.
‘효율성 강화’라는 공식적 목표와 효과가 의심스러운 개혁 방안 사이의 모순은 특정한 사회적 논리에서 비롯된다. 동반교육 프로그램은 학업 성취에 유리한 가정환경을 갖지 못한 학생에게 보상 차원으로 도입했다. 이 프로그램은 학생의 성공 가능성을 학교 교육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부정한다. 이런 논리 속에서는 학교 교육이 약화되고 가정교육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사회적 특권층에 속하는 학생에게 유리한 교육환경이 조성되고 재생산될 것이다.
특권층 학생에 유리한 환경 조성
오랫동안 학교 교육은 평등과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임무를 실행해왔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는 이 임무가 자격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에게 떠넘겨질 수 있다. 또한 학교 교육 실패의 책임을 가정이 떠안게 될 것이다. 이처럼 교육의 책임을 학교 밖으로 이전시키는 정책은 무엇보다 국가의 경제적 부담을 더는 데 목적이 있는 듯하다. 과연 이것이 합리적인 선택일까? 학생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학교다. 이 시간을 교육적으로 잘 활용하는 것이 학생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부모는 학교가 모든 학생에게 효율적인 교육을 제공할 것과 시간과 능력의 부족으로 자신이 자녀에게 해줄 수 없는 것을 대신 해주기를 기대한다. 이는 지극히 정당한 기대다.
소외계층 학생의 ‘학습권’을 보장해주겠다는 생각 역시 엄밀한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 일부 프로그램이 기본 전제로 하는 생각처럼, 부모가 저녁마다 자녀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읽기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될까? 책 같은 문화적 도구와 ‘친숙해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얼핏 생각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만 ‘비가시적 교육’의 효과를 과신하는 건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부모의 학습 지원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면, 중상위층 가정의 부모는 자녀 교육에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이들 중 일부는 자녀가 학업에 어려움을 느끼면 자녀를 직접 가르친다. 자녀가 즐겨 읽을 수 있는 책, 필요한 경우 참고서를 구입해주고 예습을 도와주기까지 한다. 과외 활동 프로그램이 그렇듯이, 부모의 참여를 유도하는 프로그램은 기술적 도움을 최소화하는 문제가 있다. 빈곤계층 부모가 과외 활동 프로그램에 기대하는 것도 이런 기술적 도움이다.(10)
37개 중학교에서 ‘학부모 교육’, ‘문화적 빈곤층 교육’이라는 원칙하에 시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에리크 모랭이 이끄는 파리경제대학원(EEP) 팀이 이 프로그램의 운영 결과를 평가했다. 학교 교육에 학부모의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부모가 자신도 자녀의 학교 교육에 일정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프로그램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여기서도 평가 기준에 의문이 제기됐다. 평가 결과에 따르면 학부모와 학교 간의 관계가 개선됐으며, 학부모가 학교 교육에 ‘관여’함으로써 학생들의 학내 생활태도가 좋아졌다. 그러나 학생들의 태도가 좋아진 것에 비해 학업 능력 향상 효과는 미미했다.(11)
교육 책임, 학교 밖으로 떠넘겨
중학생의 생활태도가 개선된 것이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좋은 환경의 학생들이 학업에 전념하는 동안 부모를 교육하고 ‘불량한’ 학생을 선도하는 것이 학교 교육의 목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의 교육적 역할에 대한 강조는 결국 학교 교육의 임무를 외부로 떠넘기고 학업 실패의 책임을 부모에게- 다시 말해, 불평등한 문화적 환경에- 전가하는 이중의 논리를 감추고 있다. 이처럼 학교가 학업 성취를 위한 중심 장소로서 기능하기를 멈춘 상황은 학업부진 학생 전문지도 네트워크(RASED) 폐지와 맞물려 중대한 변화를 내포한다. 정부는 동반교육 프로그램을 추진함으로써 교사들과 타협하고 있다. 학업부진 학생의 지원을 교실 밖에서 해결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런 타협이 과연 교사와의 갈등을 해결해줄지, 이것이 교육적 조처인지 되묻게 된다.
교실 밖에서 학업부진 학생을 돕겠다는 발상이 문화적 환경의 불평등을 해소해줄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공교육은 더욱 방어돼야 한다. 몇몇 교육 프로그램에서 중요시하는 ‘아동중심주의’(12)- 아이가 교육의 주체가 되어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생각- 는 특별한 전문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 지식을 평등하게 전수하는 일에는 전문적 능력이 필요하다.
글•상드린 가르시아 Sandrine Garcia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프랑스 교육부 학습평가, 전망, 역량 관리국(DEPP) 평가 자료, <읽기, 쓰기, 셈하기: 초등학교 최종학년(CM2) 학생 학업능력 변화 1987~2007>, n° 08.38, 2008년 12월.
(2) 학업성취도 향상 프로그램은 2004년 6월 30일 공개된 사회결속 강화 계획 15항과 16항에 명시되어 있다.
(3) Bruno Suchaut,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시간 편성: 활동 다양화가 학생 학업 습득에 미치는 영향>, L’Année de la recherche en éducation, pp.123~153, 1996.
(4) Frank Poupeau & Jean-Christophe François, <학교 배정의 의미>, Liber/Raisons d’Agir, 파리, 2009. <Actes de la recherche en sciences sociales>, n°180, ‘차별하는 학교, 재생산하는 학교’, 2009년 12월.
(5) Tristan Poullaouec, <학위, 약자들의 무기>, La Dispute, 파리, 2009.
(6) Jean-Pierre Terrail, ‘음절교육은 반동적인가?’, <Revue du Mauss>, n°28, 2006.
(7) Denis Meuret, ‘우선 교육 지역 정책의 효율성’, <Revue française de pédagogie>, n°109, pp.41~64, 1994.
(8) 동반교육 국민선언, 2001년 5월.
(9) Dominique Glasman, <방과 후 학습 활동>, 학교평가자문위원회의 요청으로 작성된 보고서, p.130.
(10) 이 주제와 관련해 ‘아동중심주의’ 혹은 ‘유아중심주의’에 관해 논할 수 있다. Daniel Thin, <빈곤지역. 학교와 가정>, PUL, 리옹, 1998.
(11) <르몽드>, 2010년 1월 12일자.
(12) Dominique Glasman, Pierre Blanc, Yves Bruchon, Georges Collonges, Paul Guyot, ‘과외 학습지원’, <Revue française de pédagogie>, n°95,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