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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330부, 그리고 황금돼지
‘사라진’ 330부, 그리고 황금돼지
  • 성일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18.12.31 14:2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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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지요? 먼저, 황금돼지해를 맞아 모든 독자님들의 가정에 골든 샤인이 깃들길 기원합니다.    

얼마 전 신문잡지부수 인증기관인 ABC협회 직원들이 본사를 방문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이하 <르디플로>)의 발행 및 판매 부수에 대한 실사를 벌였습니다. 연간 판매부수가 전년대비 약 330부 감소해 판매매출이 4천만 원 이상 줄었다는군요. 그 사이에 종이 값과 인쇄비, 우편료, 수송비 등은 꽤나 올랐는데도 말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좋은 번역과 좋은 글, 좋은 편집, 좋은 서비스를 위해 저희 임직원을 비롯해 역자, 필자, 그리고 편집위원들이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뒷걸음질쳤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큽니다.

그나마 최근 급격한 독자 감소로 폐간을 고려할 정도라는 유력 언론사들의 시사 주간지의 상황에 비하면 다행이라 할 수 있지만, <르디플로>에 대한 독자분들의 ‘변함없는 지지’를 고려해볼 때, 이는 실망스러운 결과입니다. 곰곰 따져보니,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문화부의 ‘우수콘텐츠잡지’ 선정에서 <르디플로>가 제외된 것이 독자 감소의 큰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마다 우수콘텐츠 잡지선정은 문화부가 후원하고 잡지협회가 주관합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문 정권은 2018년도 지원사업에서 라이센스 매체의 경우 심사대상에서 아예 제외시켰습니다.

박근혜 정권하의 문화부는 딱 한 차례이긴 하지만, 2017년 우수콘텐츠잡지로 선정된 <르디플로>를 매달 110부씩 구매해, 작은 도서관 같은 기관들에 보내주었고, 1면 표지에 ‘2017 우수콘텐츠잡지’라는 마크를 찍어 <르디플로>가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에서 선택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해마다 수백 개의 잡지가 이 같은 문화부의 지원을 받고 있고, 한번 ‘우수 잡지’로 선정되면 길게는 몇 년씩 지원을 받아온 터라, 부끄럽지만 저희 편집진도 2018년에도 기대했습니다. 사실, 도서관들의 ‘우수 잡지’ 마크 선호에 힘입어 2017년엔 ‘우수잡지’ 선정의 후광효과를 어느 정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도종환 장관 체제 하의 문화부는 2019년 지원사업에서 심사대상에서 라이센스 잡지를 제외하더군요. 문화부의 위임을 받아, 지원사업을 주관하는 잡지협회는 왜 갑자기 심사조건이 바뀌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저 “문화부의 지시사항”이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추측컨대, 공무원들이 오랜 관례의 정책을 단번에 바꿨을 리 없고,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서정시인 출신의 도종환장관이 ‘국내 잡지의 질적 발전’이라는 단순한 열망을 가졌거나, 라이센스 잡지에 대한 알 수 없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어쩌면 가야사 복원발언이나 동북아역사왜곡대책 위원활동 같은 행보로 취임 초부터 민족주의적 사관의 찬반 논란을 일으킨 도 장관의 소신이 라이센스 매체에 대한 불편한 심기로 이어지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도종환 장관에게 묻고 싶습니다. 라이센스 잡지를 제외한 이유가 진짜 무엇인가요? 장관께서 한번이라도 <르디플로>를 읽으셨다면, 이 매체가 단순히 외국어를 한글로 옮겨놓은 게 아니라,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이슈를 많은 지면에 할애하고 있고, 또 제작과 관련된 직업군이 얼마나 다양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매달 <르디플로>의 발행을 위해 20여명 이상의 번역진과 필진을 포함해, 편집, 관리, 교열, 인쇄, DM발송, 배송, 택배운반 등 적지 않은 인력들이 동원됩니다. <르디플로>의 매출에 따른 수익은 결코 프랑스로 송금되지 않으며, 순전히 <르디플로> 한국어판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쓰이고 있을 따름입니다.

저는 앞뒤가 꽉 막힌 ‘늘공(직업관료)’들을 그다지 믿고 싶지 않습니다. 더욱이 뚜렷한 소신과 철학 없이, 어쩌다가 얼떨결에 장관이 된 ‘어공’도 미덥지 않습니다.     

독자님들도 아시다시피, <르디플로>는 어느 특정정파나 특정단체에 속해 사실을 곡해하거나, 권력과 자본에 아부하지 않고, 오로지 독자분이 원하는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는데 존재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다만, 관변단체의 회보나 종교단체의 정기간행물까지도 ‘우수잡지’로 선정되는 마당에 자칫 <르디플로>가 ‘우수잡지’가 아닌 매체로 오인될까봐 걱정됩니다.

저희는 결코 지난 1년 동안 사라진 330부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부의 지원에 의존해 ‘우수 잡지’ 선정에 희비가 갈리는 작금의 출판계 현실이 너무나 씁쓸하고, 지극히 충동적이고 근시안적인 관료들의 행태가 답답합니다.

존경하는 독자님!

저희는 오로지 독자님을 믿고, 독자님들께만이라도 ‘최우수 잡지’로 평가받으려 합니다. 2019년에도 변함없이 <르디플로>를 사랑하고 격려해주시고 채찍질 해주시길 바라며, 늘 강건하시길 기원합니다. 또한 독자님 모두의 마음속에 예쁜 황금돼지 한 마리 키우시길 바랍니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파리 8대학에서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요 저서로 『비판 인문학 100년사』, 『소사이어티없는 카페』,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20세기 사상지도』(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화들』,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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