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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감성을 파고드는 대중성이 ‘춤의 본질’ - BTS의 ‘삼고무’ 퍼포먼스 저작권 논란
관객 감성을 파고드는 대중성이 ‘춤의 본질’ - BTS의 ‘삼고무’ 퍼포먼스 저작권 논란
  • 김정은 | 무용평론가
  • 승인 2018.12.31 1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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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1일 MMA 공연에서 한국의 대표급 아이돌인 방탄소년단(BTS)이 국악버전의 IDOL노래에 한국전통창작무인 ‘삼고무’를 퍼포먼스로 선보이면서 한국무용계에 처음으로 저작권 논란이 불거졌다. ‘삼고무’는 한국전통춤의 거목인 우봉 이매방(1927~2015) 선생이 1948년에 공연예술화한 한국춤이다. 무용수의 뒤편인 정중앙과 좌우에 북을 하나씩 놓고 추는 창작 춤으로, 현란한 북가락과 몸동작을 통해 북의 울림을 최대치로 끌어 올린다. 황홀하고 매력적인 춤사위가 특징이다. 이런 ‘삼고무’가 최근 문화유산으로서의 대중적 향유가 아닌 전문적 상품으로서 사적 소유권을 내세웠다. 이른바 대중의 공적 찬사에 법적 지위의 정당성과 저작물에 대한 수익성의 권리에 대해 거론하고 나선 것이다.  

‘삼고무’를 시작으로 쟁점화한 무용계와 유족 측(우봉이매방아트컴퍼니) 간의 입장차는 이렇다. 유족 측은, 지난 1월 이뤄진 ‘삼고무’의 저작권 등록은 금전적인 이윤추구가 목적이 아니며, 이매방 춤의 작품에 대한 인정과, 법적 권리에 대한 창작자의 당연한 권리라는 것이다. 반면 이를 사적 이윤으로 보고 반대하는 무용계의 입장차는 다르다. ‘삼고무’는 고인의 창작 작품이기 이전에 수많은 전통무용가들에 의해 공유돼 발전된 춤이기에 특정 개인이 사유화한다는 것은 무용인의 공공성인 생존권과 예술 활동을 저해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무용계와 이매방 아트컴퍼니 양측의 주장 모두 다 일리가 있다. 북춤인 ‘무고’는 삼국시대 이전인 고대부터 집단적인 제천의식이나 민중의 해방을 드러내는 춤으로 추어져 왔으며 법고, 외고, 삼고, 오고 등 시대적 반영물로서 다양하게 표현돼 왔다. 이런 작품의 공공성 덕분에 지금처럼 대중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었다. 이매방의 독자적인 저작권 역시 예술사적으로 봤을 때 전통적 무고를 체계화시켰다는 점에서 저작물에 관한 소유권은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예술행위에서 권리라는 것은 자칫 자신의 생산물을 보호받는 동시에 장인 혹은 명무라는 이름으로 창작자가 아닌 생산자로 고립될 위험이 따른다. 그동안 무용은 관료주의나 소수 지배계층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소비돼왔다. 따라서 무용가들의 창작활동은 공적영역인 대중을 타깃에 두지만 작품 활동의 구체적인 전략은 여전히 전공대학, 예술고등학교라는 특정 영역에 한해 소비되고 있다.

다른 장르의 예술이 문화산업의 일환으로 대중이라는 저변성 확보에 노력해왔지만, 무용예술은 여전히 보수적 문화의식을 고집해왔다. 이런 견해는 그간 무용예술이 대중성보다 엘리트적이고 고급문화의 위계화를 추구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가 무용계 구조의 한쪽 면만을 보고 논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잔치, 굿이야, 나는 굿장이고… 여러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게 부추기는…예술은 민중이 춤을 추도록 대중 속에 파고 들어가야 한다.”
(백남준, <중앙일보> 인터뷰 중, 1984)

일명 반(反)예술로 불리는 플럭서스 운동은 한국의 경우 백남준을 비롯해 홍신자, 안은미, 김덕수 등이 대표적이다. 뒤샹이 변기를 미술관에 설치하고 예술의 기존가치를 부정했던 것처럼 무용계에서도 고급문화로서 무용이 갖는 품위와 권위에 불편함을 느끼는 무용가들이 점차 늘고 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과의 공공성, 혹은 지속성이다. 

 

집단주의적 모더니즘과 예술의 대중성
 
부르디외의 사회집단 간 구별 짓기는 이제 분리된 소비계층의 취향을 문화적 이해관계로 바꾸는 창조적 요소가 돼 버렸다. 실제로 샤넬 로고가 찍힌 제품들은 더 이상 부르주아만의 독자적인 소비품이 아닌 집단적으로 소비하는 대중문화의 상징이 됐다. 12월 해마다 공연되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은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감성적 소재가 돼 2018년 영화로도 개봉됐다. 예술에 있어 이런 평등주의적 소비는 대중문화가 가진 비전으로서 예술 간의 융합은 물론 ‘직업으로서의 예술’, 산업 생산품으로서 ‘생활 예술’을 창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의 미적 신화나 숭고적 가치는 지금 이 시대의 소비 욕망을 담기엔 다소 진부한 담론이 돼버렸다.

니체와 쇼펜하우어, 바그너와 같은 예술 신봉자들은 한때 ‘예술을 위한 예술’만이 미적 자율성을 가진다고 본 반면, 마르크스의 계급담론은 예술을 사치스러운 계급 소유물 정도로 재현했다. 또한 프로이트와 라캉의 억압된 소망은 예술을 근원적인 공포와 우울, 정신병적인 언어를 치유하는 소통의 장으로 활용했다. 이러다 보니 실질적으로 예술은 문화의 한 장으로서 삶의 의미를 나눈다기보다 특권계층을 중심으로 예술의 자율성을 정의하는 다분히 정치적인 면모를 보여 왔다. 그런 예술이 이제 생활예술, 친숙함이라는 대중성으로 전치돼 이른바 공유된 분배라는 소비에트식(?)의 ‘공공의 예술성’을 제안받기 시작했다. 사회적 계급투쟁 노선에서 벗어나 이제 예술은 ‘공공성’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매번 새로운 예술적 혁신을 강요받고 있다.

새로운 소비수단으로서의 예술은 이제 삶이라는 보다, 인간적인 모더니티 속에서 생활 그 자체를 담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 그 찰나의 순간 속 완벽한 공생, 혹은 공감의 장을 만드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 돼 버렸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이 개인에 대한 상실의 시간을 발견하는 데서 의미의 서사를 재현했다면, 지금의 예술은 모든 과거와 현재의 시간에서 ‘공감’이라는 공동의 의미를 추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경우 ‘뉴트로(New-tro)’ 문화를 통해 문화적 연대성을 보여준 바 있다. 그와 동시에 머큐리의 숨겨진 에피소드가 새롭게 조명받으면서 보헤미안 랩소디와 로열발레단의 협업공연이 인터넷 검색창을 메웠다. 록이라는 대중음악과 클래식 발레와의 퍼포먼스 협업은 80년대 말 만해도 대단히 파격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물론 머큐리의 리프트 동작은 우아한 발레라기보다 억지스러운 설정(?) 정도로 보였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낯섦이 수용자의 눈에는 자신의 경험과 인식을 환기시키는 각성의 순간이 돼 뇌리에 꽂혔을 게 분명하다. 반짝이는 은색 옷을 입고 ‘보헤미안 랩소디’ 음악에 맞춰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머큐리의 모습을 어떤 누가 잊을 수 있겠는가. 뻔하고 익숙한 것이 대중예술이기도 하지만 적당히 자극적이고 낯설 때 오히려 대중들은 열광한다. 때로는 그 부자연스러움이 수용자들을 강하게 흡입하는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로열발레단 입장에서는 고상한 것은 더 이상 발레가 지닌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발레의 대중화를 꾀했을 것이고 “발레를 대중에게 퍼트리겠다”는 머큐리의 목적은 28년이 흐른 지금 순간에 인터넷 검색어를 통해 빛을 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지고 보면 대중성은 구별 짓기에 앞장서는 소수의 주도층이 만들어낸 여론몰이일지도 모른다. 이는 흡사 광적인 군중심리를 이용한 파시스트의 대중주의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이런 집단주의적 심리가 오히려 위계적인 사회적 분할을 폐지하고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예술을 단순화시키는 모더니즘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예술체험에 있어 집단 간의 일체감과 감성적 나눔은 반드시 개인의 반성적 숙고를 필요로 한다는 점과 다시금 개인주의에 대한 사회적 회복을 촉구한다는 면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서로가 서로를 모방할 때 예술가다운 공공의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경험의 공공성, 감각의 미학, 신체화된 상호작용 이 모든 것은 말하고 행하는 춤추는 신체를 통해 가능하다. 춤은 본질적으로 의례적이고 치료적이며 축제로서 공공의 장을 만든다. 이제 무용현장에서의 공동주의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전략이 됐다. 창작 작업 역시 안무자 개인의 감각을 넘어 협업이라는 공동작업을 통해 춤에서의 예술적 해방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바로 이 같은 ‘진보적 무용’을 실천하는 중심세력에 10개의 민간현대무용단들로 구성된 쿱코다가 있다. 

글·김정은
숙명여대 겸임교수. 무용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교대와 창원대에서 무용미학을 강의하고 있다.

 

 

현대무용협동조합 쿱코다 김성한 대표

 

“협업 통해 인간을 담고 싶다”

인터뷰/현대무용협동조합 쿱코다 김성한 대표

컨템포러리댄스(Contemporary Dance)와 커뮤니티 댄스(Community Dance)의 약자인 쿱코다는 순수예술이 아닌 대중예술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운 민간현대무용단들로 구성된 단체이다. 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 예술감독인 김성한 대표를 중심으로 2017년 6월에 창립됐으며 대표작으로는 <가을 운동회>, <두 개의 시:작> 등이 있다. 다음은 지난해 12월 3일 서울 강동아트센타 상주단체인 세컨드네이처 대표이자 쿱코다를 이끄는 김성한 예술 감독 인터뷰 요지다.

 

세컨드네이처의 최신 공연 <기억의 지속>

 

 

- 유럽으로 진출한 1호 무용수로서 프랑스와 한국이 바라보는 무용예술의 관점에는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 좀 포괄적으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겠다. 프랑스에서 무용단원으로 활동할 시기(90년대)에는 한국에서 유럽무용에 대한 인지도가 낮을 때였다. 그러다 보니 동양인 중에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프랑스 무용현장과 한국의 무용현장은 시스템부터가 아주 다르다. 지금은 유럽스타일인 탄츠시어터가 주를 이루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은 테크닉 위주의 움직임을 선호했다. 나 역시 기술 위주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연극적인 요소가 강한 프랑스 현대무용을 접했을 땐 신선함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프랑스에서는 무용가라는 타이틀을 따기 위해서 학교가 아닌 현장을 찾는다는 점도 차이가 있다. 매회 공연마다 치러지는 테스트를 뚫어야지만 유명한 민간단체의 일원이자 무용수로 무대 위에 설 수 있다. 그런 데 비해 한국은 무용가가 너무 많고 너무 쉽게 예술가라는 말을 쓴다. 춤을 추던 안 추던 간에 무용만 전공하면 누구나 무용가, 예술가가 된다. 그 이유는 여전히 대학을 중심으로 무용계를 바라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 무용계가 단시간에 수준 높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학무용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대학무용 위주의 시스템이 무용을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프랑스와 한국이 갖는 무용예술에 대한 인식적 차이이다.”

 

- 현대무용협동조합 쿱코다를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국립현대무용단이 8년간 현장에서 현대무용의 대중화를 시도해왔다면 쿱코다는 대중과의 커뮤니티 축제를 만들기 위해 설립됐다. 10개의 쟁쟁한 무용단이 협업을 통해 만든 단체이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유명한 무용단, 무용수들 대부분이 쿱코다와 함께한다. 그만큼 프로패셔널한 단체다. 쿱코다 단체를 만든 제일 첫 번째 이유는 대중과의 커뮤니티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동안 무용은 그들만의 리그라는 반 우스갯소리를 종종 들어왔다. 이제 여기서부터 질문을 시작해야한다. 왜 무용은 대중적이지 못했을까? 그건 바로 무용가들만의 관습적인 언어방식 때문이다. 모든 예술에는 관습이 있다. 무용도 마찬가지다. 만화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공포물을 보여주면 서로의 소통채널은 그때부터 딴 세상 이야기가 된다. 그동안 무용이 대중과 소통하고자 한 방식이 예를 들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대중에게 익숙하게 말할 수 있도록 표현의 관습을 바꿔야 한다. 그것이 안무가의 영향력이라 생각한다. 대중과의 커뮤니티 축제를 만다는 것, 그것이 쿱코다의 설립 목적 중 두 번째인 공공의 예술성까지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는 현대무용에 있어 대표적인 민간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쿱코다가 좋은 무용가와 좋은 안무가, 혹은 좋은 단체들을 양성하는 장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댄싱나인을 통해 스타급 무용수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정작 무용현장에서 그들의 능력을 구체화해줄 대표적인 민간단체는 부족한 실정이다.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 쿱코다의 역할이 중요하다.”       

 

- 쿱코다 안에서의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협업은 쿱코다의 꿈이다. 지금은 기존 안무자가 자신의 무용단에 속한 무용수를 중심으로 작업을 해오고 있다. 10개의 민간단체들이 모여 공동의 작업 과정을 가지기에 무용수들도 많고 춤을 공유하는 데 있어 스케줄을 맞추는 것도 힘들다. 하지만 1년 6개월의 시간은 쿱코다에 좋은 경험이었고 관객과의 놀이라는 예술적 전유방식을 잘 살려내는 과정이 됐다. 내년에는 이런 방식을 더 잘 살려 10개의 단체들과 각 단체에 소속된 무용수들 모두 오디션을 보고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해보고자 한다. 이런 방식은 기존 춤의 스타일을 의도적으로 변형해봄으로써 협업이라는 공동의 작업과정을 좀 더 확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 협동조합 이사로서 김성한 감독의 개인적 철학이 궁금하다.
“2002년도 한국에 귀국한 후 많은 고민을 했다. 무용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공연을 할 것인가 아니면 대중을 위한 예술을 할 것인가. 물론, 이런 생각은 무용가로서 늘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고민은 결국 사람에게로 옮아갔다. 그 뒤로 나의 개인적 철학은 사람이다. 사실 그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지나고 나니 춤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쿱코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관객이 없는 예술은 없다. 대중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작품,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자는 것이 나의 예술철학이다. 예술이라는 것이 어떤 기준적인 잣대를 가진다기보다 그저 보여주는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저 관객에게 보여줄 뿐이다. 작품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은 없다. 그저 논란과 논쟁만 있을 뿐이다. 사실 춤은 참 단순하다. 춤의 본질은 결국 인간이다. 익숙함을 좋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와 참신함을 원하는 인간!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대중성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반대로 예술성만을 고집해서도 안 된다. 대중적인 호감과 이윤도 내면서 예술적인 아우라도 지녀야 한다. 그래서 나의 작품에는 예술작품이 주가 아니고 인간이라는 복잡다단한 존재가 가장 중요하게 등장한다.”

 

인터뷰어·김정은
무용평론가

인터뷰이·김성한
세컨드네이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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