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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선진국 사회복지의 함정, 인간주의<나, 다니엘 블레이크>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선진국 사회복지의 함정, 인간주의<나, 다니엘 블레이크>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19.01.2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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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속의 고독

영화는 주관적이고 자기 주장적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허구다. 하지만 좋은 의도를 갖고 있는 허구다. 영화가 역사라면 그 역사는 허구의 역사이고 보편적이거나 객관적인 역사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는 역사를 메타역사(metahistory)라 부른다. 이 영화 역시 현대 영국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현대인의 삶 역시 지나가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뿐이다. 선진국이며 복지제도가 잘 되어있어 사회적 약자에게 관대한 나라로 알려진 영국. 하지만 감독은 그 영국의 현대가 미래적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후진국이며 비인간적인 국가였다고 고발한다.

제목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되어 있어 ‘나’를 유난히 강조한다. 나를 앞에 붙이고 이름을 써서 다른 모든 것을 무시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격이다. 그 역설적인 이유가 있다. 어쩌면 이름을 강조한 것은 다니엘 블레이크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 여기 있어요’라고 크게 외치는 격이다. 제목처럼 그는 두드러진 인물이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새삼스레 그 이름을 외치고 싶어진다. 그는 대단한 영웅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 장면을 보면 다니엘은 중앙에서 걸어가고 있다. 그는 사람들에 묻혀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왼쪽에는 두 여자가 걷고 있고 가운데 전경에는 유모차를 끈 남편과 아내가 걷고 있다. 중경 우측에는 봉투를 든 장년의 남자. 후경에는 문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 한 청년, 오른쪽에 역시 한 청년이 서 있다. 그 건물의 이름은 ‘job center plus’ 다. 구인정보기관이다. 다니엘이 지향하고 있는 장소이다. 이 다음 장면은 소장과 얘기를 나누는 다니엘의 모습이다. 그 장면부터 보여줘도 될텐데 길을 건너 들어가는 모습까지를 두, 세 컷트로 나눠 보여주고 있다.

감독이 이 장면을 굳이 보여주고자 한 의도는 역설적으로 그를 의미있게 노출시키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다. 강조하려면 클로즈 업을 쓰지 왜 롱숏으로 멀리 있는 모습을 찍었을까. 다니엘의 의미는 이 사이즈에 있다. 그는 수상도 기업인도 연예인도 아닌 구직을 하고 있는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영국의 노인이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일상을 마치 기록영화처럼 포착한 것이 이 장면의 매력이다.

이 장면을 통해 다니엘은 평범한 영국시민으로서 많은 다른 시민들 사이에 섞여 살아가는 사람이고 군중속에서 잊혀질 수도 있는 그저 그런 사람이라는 게 요지이다. 드라마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 이 장면은 오히려 장소가 드라마이고 군중이 드라마 역할을 한다. 영화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익명성이 주제로 부각될 수 있음을 이 장면으로 증명해 낸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분명 다니엘 이지만 그가 영웅으로서 특별히 부각되는 방식이 아니라 남과 다를 바 하나 없는 평범한 사람이기에 부각될 수 도 있다는 사례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이 사람이 겪는 이야기, 소위 드라마도 다른 모든 사람이 겪는 이야기와 별 차이가 없는 보편적인 것이다. 불친절한 관료들의 말투, 복잡한 절차, 냉정하고 완고한 법준수, 약자에 특별한 배려가 없는 법체계 등의 공통분모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드라마가 되기 보다는 그저 다큐멘타리적인 느낌을 받는 이유이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사회적 약자에 속한다. 그는 수 십년을 목수로 커온 베테랑이지만 심장병이 있어 보조금을 받아야 할 형편이지만 국가는 그를 심사에서 떨어뜨려 어중간하게 일을 해야만 하는 억울한 상황에 빠진다. 문제는 모든게 말하고 설득하고 이해해서 해결되면 되는데 이 사회적 약자인 노인에게 관료들은 퉁명스럽기 그지 없다. 냉혹하고 인간미가 전혀 없다. 이렇게 사회적 약자를 대할 때 법은 모든 사람에게 형평해야 한다는 식으로 대한다. 영화는 바로 그 부분을 논의하듯이 그려나간다.

영국같은 잘 사는 나라가 복지 제도에 있어서 이런 허점이 있을 줄이야. 겉으로 보면 노인들을 위해 복지제도가 있어서 건강 검진을 받고 일을 할 수 없는 정도면 실직 수당을 지급해주는 천국같은 제도를 운용한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 보면 영화에서처럼 동네 의사는 쉬라고 하는데 정부 복지과의 상담사에게 불량하게 대하면 찍혀서 심사에 떨어지게 된다. 이건 갑질도 아니고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감정이 섞인 일종의 갑질인데 관료주의와 결합되어 묘한 결과를 도출한다.

 

내 성은 절망 이름은 굴욕

또 한 장면은 케이티가 절망에 싸여 잠시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장면이다. 그녀는 욕실청소를 하다가 벽이 오래 돼서 타일이 그냥 땅에 떨어져 깨져 버리자 망연자실 해진다. 가난한 살림

이지만 뭔가 인간답게 청소 좀 하고 살아야겠기에 벽을 걸레로 박박 문질렀는데 그만 와장창 깨져 버린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 화면 전경에 두 개의 벽이 그녀를 억압하듯이 늘어서 있고 그녀는 왜소한 모습으로 마치 찌그러진 형상을 하고 있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내려온 듯이 털석 주저 앉은 그녀 모습에서 굴욕감마저 읽을 수 있다.

 

케이티는 젊긴 하지만 대학을 나온 것이 아니라 화이트칼라 직종을 갖지 못한다. 그렇다고 다니엘처럼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청소 등과 같은 단순 잡부일을 그때 마다 할 뿐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다. 각각 다른 남편에게서 얻은 자식들이고 남자들은 애도 책임질 수 없는 같은 극빈층이라고 판단된다. 이런 최극빈 여인에게 정부는 구호품을 내주는 제도가 있어서 먹는 것은 그저 어떻게 영위해낸다. 하지만 집값, 전기값, 수도세 등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만 한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쉽게 구하지 못하는 복지 국가의 이면. 그 허점을 이 영화는 고발하듯 그려낸다. 남의 나라 일이라고 쉽게 봐넘겨선 안 된다. 오십보 백보다. 한국도 나름 복지제도를 가동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은전을 베풀고는 있지만 말이다.

 

 

글·정재형                                                                                                                                                                                                            동국대교수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을 역임했다. [영화이해의 길잡이], [영화영상스토리텔링100] 등의 역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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