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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 시절의 모든 것은 어긋났지- <아비정전>, <중경삼림>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 시절의 모든 것은 어긋났지- <아비정전>, <중경삼림>
  • 안숭범(영화평론가)
  • 승인 2019.01.29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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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 느와르의 달뜬 분위기와 유다른 멜로드라마였다. 스타일이 내용을 부축해가는 기이한 영화였다. 거기엔 오우삼이나 임영동 영화 속 의리의 세계가 없었고, 비장미를 벗은 주인공 사내는 맘보춤을 췄다. <열혈남아>를 보지 못한 상황에서 <아비정전>은 그렇게 도착했다. 아비(장국영 분)의 낯선 ‘자유분방함’에 매료된 이들 중 적잖은 수는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 등을 여러 번 다시 봐야 했다. 그렇게 왕가위 영화를 입구 삼아 시네필이 된 그 무렵의 사람들을 안다. 짐 호버만이 ‘왕가위이즘’이라고 표현한 스타일과 정서에 매혹되어 영화의 신세계로 진입한 이들. 그들 중 일부는 같은 시기 창간한 <스크린>, <로드쇼>, <키노>, <씨네21>, <프리미어>의 필진들과 골방에서 저 홀로 토론하며 가상의 영화계를 그리곤 했다.

틀림없이 왕가위라는 이름은 특유의 스타일과 낯선 정서로 다가왔다. 주지하다시피 스텝프린팅은 피사체들 간의 움직임에 역설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과장적 기법이다. 왕가위의 스텝프린팅은 방황하는 청춘과 그들을 둘러싸고 안타깝게 흘러가는 시간을 단박에 체험시켰다. 축축한 정서로 가득 찬 홍콩이라는 상상적 도시와 그 곳의 구성원을 개별화시키는 익명성의 분위기를 전염시켰다. 등장인물의 내적 혼란을 가시화하는 핸드헬드와 이미지텔링에 예기치 않은 리듬을 만들어내는 점프컷도 인상적이었다. 애틋한 긴장의 시절을 몽환적으로 회고하는 듯한 슬로우 모션은 <화양연화>에서 절정을 이뤘다. 신체와 사물에 대한 클로즈업 쇼트들은 단순한 시청각적 페티시즘을 넘어 비인격적인 피사체가 감정을 갖고 연기를 하는 것 같은 착시를 안겼다. 그가 쓰는 광각렌즈는 기묘한 공간감을 부여하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왕가위가 고안한 협소한 실내 공간들을 두고 인물들의 심리가 확장된 세계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인물을 사로잡고 있는 관념과 정조의 습도를 느끼게 된다.

그렇게 왕가위의 개성적인 영화 언어 아래에서 일정한 감각의 공동체가 탄생했다. 혹자는 그의 영화를 두고 영상 스타일과 언어적 표현이 너무 과장적이라는 지적을 내놓기도 했다. 일각에서 형성된 충성도 높은 팬덤 역시 왕가위의 영화를 닮아 ‘과잉’이라고 했다. 여러모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충분한 의미화 과정을 생략하고도, 그러니까 즉자적인 영화체험만으로도 일군의 시네필이 단일대오를 형성했다는 건 매우 특별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객관에의 요구와 결별한 채, 좀 더 자기 고백적 진술을 하고 싶어지는 지금 이 상황도 그 무렵 왕가위 영화의 힘이라면 힘이다.

왕가위의 영화적 개성은, 특히 <중경삼림> 이후 ‘MTV 스타일’이라고 회자되며 광범위한 유행이 되었다. 그러나 유행을 확산시킨 주체들이 따라하지 못한 왕가위 영화의 아우라가 존재한다. 그 아우라를 두고 수많은 논자들이 여러 관점을 보탠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글은 그들의 문장에서 생산된 의미에서 더 나아가 보려는 기획이다. 그래서 세운 관점은 왕가위의 초창기 영화를 시간의 영화로, 더 엄밀하게는 ‘시간성’의 긴장에 의해 제어되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다. ‘운명’이란 단어는 때론 시간과 동의어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글은 운명의 구속력과 다투는 인물들의 관계망을 살펴보자는 제안이 될 것이다. 멜로드라마의 종국에서 엇갈리고 어긋나는 관계망을 보는 건 너무 평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제안을 따를 때, 왕가위 영화는 특별한 해석의 여지를 가진다.

<아비정전>과 <중경삼림>을 예로 부연하면, 영화 속 청춘들은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한 익명의 개인에 가깝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 종말을 암시하는 예정론적 질서 안에서 자신의 본래성을 자각해간다. 이들 영화에서 구축된 왕가위만의 스타일은 홍콩이라는 지정학적 공간과 그 들 청춘이 짊어지고 있는 ‘시간성’을 감각시키는 매끄러운 피부다. 인물들의 최종적인 자각은 최후의 ‘어긋남’ 이후에 오는데 그 매혹적인 순간에 이르는 하나의 길, 그 비좁은 통로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매혹의 예정론

왕가위 영화의 쾌감이 단지 시청각적 충만의 순간들 때문만은 아니라는 데서 논의를 시작하겠다. 물론 그는 무한의 시간대로 연장되는 어떤 찰나를 신비롭게 다룬다. 그 인상적인 찰나의 순간을 반복적으로 활용하면서 비극이 도사리는 종국의 시간을 암시한다. <화양연화>에서 차우(양조위 분)와 리첸(장만옥 분)이 만나던 호텔방 2046호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사랑에 관한 선언’을 목전에 두고 자기 안팎의 상황적·도덕적 장애물과 싸우는 남녀의 긴장이 확장된 세계다. 그런데 이는 홍콩의 완전한 중국편입이 예고된 2047년의 시점을 목전에 둔 ‘어떤 미래’의 상징이기도 하다. 1997년, 홍콩은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반환됐지만 이후 50년간 자치권과 고유의 법질서를 보장받은 채 특별 행정구역으로 남겨진 상황이다. 2047년은 중국의 정치적·법적 환경 안으로 홍콩이 실질적으로 귀속되는 중차대한 변곡점이다. 그처럼 왕가위는 홍콩의 역사와 개인사의 진실을 운명적으로 접합하며, 임박한 결정적 순간에 새나오는 긴장을 유려하게 활용한다.

이때의 심미적 긴장을 더 쉽게 설명하려면, <동사서독>의 영어 제목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시간의 재(Ashes Of Time)’라는 언명은 기실 매혹의 예정론을 단박에 수렴한다. 이 무협영화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강호의 세계는 안타까운 ‘시간성’을 음미하는 공간으로 뒤바뀐다. <동사서독>에 비중을 갖고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사랑의 신비에 사로잡혔던 첫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없이 서로의 감정과 기대로부터 어긋나는 삶을 살게 된다. 그 어긋남이 겹겹의 방향으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시간성’의 긴장은 중층화 된다. <동사서독>의 탁월한 색채감과 슬로우 모션은 그 긴장의 상승과 하강 국면, 곧 서사적 핵심 결절점(core node)을 영화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매혹적인 방식이다.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이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이 특정 인물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시간과 운명이 동의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의 시작부터 어떤 예정론적 질서가 그들을 그 자리로 데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비정전>과 <중경삼림> 역시 우리가 보고 있는 서사무대가 예정론적 세계라는 것을 정확히 상기시키며 진행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비정전>의 그 유명한 명장면. 아비는 수리진(장만옥 분)을 유혹하기 위해 자기 손목시계를 봐달라고 한다. 시계침은 1960년 4월 16일 3시 1분 전을 가리키고 있다. 이때 그는 말한다. “당신과 여기 같이 있군요. 당신 덕분에 난 항상 이 순간을 기억할 거예요. 이건 당신이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죠. 이미 지나간 과거니까.”라고 말한다. 그 ‘과거가 되어버린 현재’에 아비에게 마음을 빼앗긴 수리진은 훗날 자신을 떠난 아비를 잊지 못해 몸부림친다. 그녀는 무한의 시간대로 연장되는 그 1분의 포로가 된 것이다. “순간이란 정말 짧은 시간인 줄 알았는데 때로는 오랜 시간이 될 수도 있더군요.”와 같은 수리진의 대사는 이를 증명한다.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기억의 관성, 강렬한 감정이 규제하는 정서적 태도의 힘이 그녀의 목소리에서 만져진다.

아비가 입에 달고 사는 ‘발 없는 새’에 대한 우화는 좀 더 거시적으로 예정론적 세계에 갇힌 주인공의 운명을 예고한다. 우리로 하여금 어떤 종국의 시점을 의식하게 하면서 아비의 삶 전체를 뒤흔든 사연과 그때에 탄생한 감정의 소멸을 겹쳐 보게 한다. 우화에 따르면 그 새는 날다가 지치더라도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잠을 잘 줄 안다. 만약 땅과 닿는 때가 오면 그 새가 죽는 시간이다. 이는 아비가 했던 말인데, 그렇다면 그는 자기의 종말을 직관하며 스스로 정해 둔 예정론적 귀결을 따라간 것이 된다. 이 우화 덕분에 영화 밖 우리는 수리진보다 먼저 아비의 종말을 예감하게 된다. 그 예감이 베푼 감정들과 미리 동행하게 된다.

<중경삼림>에서 ‘223(금성무 분)’으로 불리는 경찰은 4월에 애인에게 버림받은 후 애인이 좋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하나씩 사 모은다. 그것도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통조림만 골라서 산다. 그 날은 자신의 생일이면서 스스로 정한 ‘미련 없는 이별’의 시간이다. 새로 시작하기 위해 다시 태어나야 할 시간을 미리 예정한 것이다. 이는 삐삐의 음성 비밀번호가 아직 “영원히 널 사랑해”인 상황에서, 아픔을 처리해야 하는 그가 만들어낸 유약한 이별 준비법이다. 그런데 4월 30일 저녁, 유통기한이 하루 남은 통조림을 더 이상 팔지 않는 편의점에서 그는 지연시켜 왔던 절망을 드디어 맞닥뜨리게 된다. 이제 이별은 만우절 농담이 아니다. 그날 밤 223은 그때까지 사 모은 30개의 통조림을 모두 먹어치운다. 그때 그는 감정의 유통기한에 대해, 결국 고독으로 되돌아가는 인생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이처럼 <중경삼림>은 피할 수 없는 중차대한 국면에 다가가는 과정을 중계하며 진행된다. <중경삼림> 초반, 223과 노랑머리 마약 운반책(임청하 분, 이하 ‘노랑머리’)은 서로 가까운 거리를 스쳐지나갈 뿐 아직 아는 사이가 아니다. 그런데 그 순간 233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다음과 같이 깔린다. “57시간 후, 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전지적 시점에서 틈입한 그 목소리는 단골 패스트푸드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일하게 된 페이(왕페이 분)의 미래를 미리 예견하기도 한다.(“6시간 후 그녀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장면에서 왕가위는 감각적인 프리즈 프레임을 사용한다. 이를 통해 그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라는 공간을 예정론적 질서가 구축/재구축되는 곳으로 그린다. 익명에 감춰져 있던 중요한 인연들의 마술적 교차와 중첩이 일어나는 장소로 활용한다. 전혀 대별되는 전후반부 에피소드도 그곳을 중심으로 접합된다. 전반부에 조성된 멜로드라마 정서의 연장도 그곳에서의 ‘만남’과 ‘머묾’, ‘떠남’과 ‘다시 만남’의 사건을 통해 성사된다.

후반부 에피소드는 633(양조위 분)과 페이 사이의 엇갈리는 마음을 보여주며 진행된다. 그런데 633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후, 페이의 감정 상태를 진술하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다음과 같다. “그 날 오후 꿈을 꾸었다. 내가 그의 집에 있는 꿈이었다. 거기서 나오면 난 깨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떤 꿈은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 이는 <아비정전>에서 아비와의 유일무이한 1분에 사로잡혔던 수리진의 독백을 적확하게 환기시킨다. 페이는 상대의 응답을 확신할 수 없는 사랑에 몰래 투신하는 중이다. 그녀에게 운명은 혼란과 불안을 거느린 거대한 압력이다. 그러나 <열혈남아> 이후 청춘들의 엇갈리는 사랑을 비극적으로 다뤄온 왕가위는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을 예외적인 희망으로 그린다. 비극의 예정론을 뚫고 나가는 그 장면은 초창기 왕가위 영화에서 특기할 만한 인상으로 남는다.

왕가위 영화에서 장만옥은 ‘수리진’이라는 이름으로 자꾸 되돌아온다. 예컨대 <아비정전>에서 아비에게 버림받았던 수리진은 <화양연화>와 <2046>에서 동일인이라는 착시 속에 다시 등장한다. 그녀는 매번 잃어버린 사랑,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두고 비감한 운명을 짊어진다. 수리진은 존재 자체로 ‘의식을 지배하며 지속하는 과거의 문제’ 이자 찰나의 감정이 무한으로 갈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 도구다. <화양연화>에서 수리진과 애틋한 연정을 쌓던 차우(양조위 분)는 동료에게 이런 말을 한다. “모르죠? 옛날엔 뭔가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어떻게 했는지? 산에 가서 나무를 하나 찾아 거기 구멍을 파고는 자기 비밀을 속삭이고 진흙으로 봉했다고 하죠. 비밀은 영원히 가슴에 묻고.” 이 장면은 ‘발 없는 새’에 관한 우화를 풀어놓던 아비의 반복이다. 차우는 자신이 뱉은 이야기를 자각하면서 고혹의 엔딩 신으로 나아간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라는 자막 이후 그는 이젠 낡아서 이끼 낀 앙코르와트 사원 한복판에 선다. 퇴색해버린 고색창연한 건축물들 사이에서 그는 빈 구멍을 찾아 수리진과 우리는 들을 수 없는 비밀을 털어 놓는다. 왕가위 특유의 푸른 새벽 빛깔이 배경을 장악할 무렵 차우는 그곳을 홀로 떠난다. 그때 천천히 트래킹하는 카메라는 부감으로 앙코르와트 사원 내 천정 장식들을 훑는다. 찬란했던 한때는 지났고, 누구도 흘러가는 시간, 혹은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엔딩 신을 채운 배경음악은 사람의 음역과 유사하다는 첼로 연주다. 그런데 음악이 그치자 풀벌레 소리가 침묵을 밀어댄다. 여기는 차우가 우화를 통해 미리 주지시킨 예정된 비극의 끝이다.

수리진은 주저했고 수줍어했으며 차우는 배려와 자제 사이를 오가며 소극적이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그들의 심장 안 쪽 빈 구멍에 묻힌 설렘과 망설임 사이의 시간이 아스라이 만져진다. 우리는 그 멀어져 간 ‘화양연화’의 시간 앞에서 회한에 가까운 감정을 나눠 갖게 된다. 왕가위 영화를 규율해 온 매혹의 예정론은 이 엔당 장면에서 미학적 절정을 이룬다. 왕가위이즘의 열렬한 신봉자였다면, 이 스타일리시한 엔딩에서 다시 한 번 감각의 공동체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영화 세계의 밀레니엄은 그렇게 도착했을 것이다.

 

정처 없음

초창기 왕가위 영화의 청춘들은 물리적·정신적 거처로부터 뿌리 뽑힘을 당한 상태에 놓인다. 거기가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아비정전>의 카메라는 그 시작점을 들여다보면서 종종 회고적 시선을 감추지 않는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좀 더 직접적으로 술회의 태도를 들키기도 한다. <아비정전>의 제작 시점을 염두에 두고 말하면, 1990년의 시선 주체가 뒤돌아보는 1960년의 한때가 포착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정전>의 몇몇 장면은 ‘그 시절 홍콩에서 우리는’으로 시작하는 소설처럼 먼 곳을 더듬는 감정을 실감시킨다.

이러한 회고적 뉘앙스 속에는 근원적인 불안이 내재되어 있다. 비극으로의 귀결을 이미 알고 있거나 예감한 자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시간성을 설명하면서 퇴락해가는 현존재가 자기를 상실해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의 종말을 의식하면서 아직까지 유예한 시간을 느끼는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매우 본래적인 상황이다. 유한한 시간성 아래에서 존재의미를 찾는 것, 이는 시간적 구조를 갖는 ‘마음씀(sorge)’의 한 양태이기도 하다. 현존재는 그렇게 불안 속을 떠돌며 표류한다.(1)

이러한 불안의 정서는, 아비가 결국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아비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안정적이지 못한 자아정체감 덕분에 여자를 함부로 유혹하고 사는 바람둥이였다. 결국 그는 자신을 버린 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친모와 늙어서도 사랑을 갈구하며 여러 남자를 옮겨 다니는 계모 사이에서 끝내 안식을 도모하지 못한다. <아비정전>은 ‘아비’의 여정을 중심으로 큰 줄거리가 뻗어가는 영화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두 명의 엄마와 두 명의 애인(수리진, 미미) 사이에서 ‘발 없는 새’로 살다가 자기 운명 앞에 서게 되는 표류의 이야기이다.

왕가위가 그를 통해 전염시킨 정서는 ‘정처 없음’의 불안과 다르지 않다. 이는 아비를 통해서만 전해지는 게 아니다. 자기 이름을 정확히 드러내지 않는 왕가위의 여러 인물들에게서 다른 결로 난반사된다. <아비정전>에서 수리진에게 잠시 마음을 줬던 ‘경관/선원(유덕화 분)’도 이름이 없다. 아비가 수리진을 내친 후 만난 미미(유가령 분)도 본명은 따로 있다. <중경삼림>에서 실연을 견디는 경찰로 나오는 223, 633은 말할 것도 없고 전반부 에피소드의 히로인인 ‘노랑머리’ 역시 이름을 들려주지 않는다. 어쩌면 왕가위는 그들 각자의 정체를 일관되고 고유한 호명 안에 가두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에게 안주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엇갈린다. 이를테면 <아비정전>에서 아비의 친구는 미미를 사랑하고, 미미와 수리진은 아비를 사랑한다. 그 스스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아비는 친엄마를 궁금해 하다가 그녀에게서 최종적으로 버림받는다. 그녀가 필리핀까지 찾아온 친아들을 만나주지 않으면서 아비는 두 명의 엄마와 두 명의 애인뿐만 아니라, 홍콩과 그 바깥 어디에서도 내침을 당한다.

이러한 뿌리 뽑힘, 정처 없음, 엇갈림의 사연은 633과 페이가 기적처럼 다시 조우하는 <중경삼림>의 엔딩에 이르기 전까지 반복된다. <아비정전>과 <중경삼림> 속 모든 인물들은 비좁은 집과 가게, 술집과 호텔에서 물리적·정서적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는 이성을 만난다. 그러나 관계의 진전은 더디거나 실패하고 만다. 그들은 서로가 짊어지고 있는 고독의 표피를 쓸어댈 뿐, 연애의 성사에 대한 전망을 좀처럼 안기지 못한다. 그런 어떤 순간에 우리는 그들 모두의 삶을 품고 있는 홍콩의 습하고 침침한 정서에 물들게 된다. 사실상 홍콩은 왕가위 영화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서사적 배경에 그치지 않는다. 고독한 익명성의 세계를 표상하는 동시에 인물들의 내면에 약동하는 감정을 체험시킨다. 캐릭터들의 엇갈리는 사연을 끌어안고서 거대한 배후 캐릭터처럼 기능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왕가위가 창조한 ‘발 없는 새’ 이미지의 가장 적실한 원관념도 사실상 홍콩이다. 특히 초기 영화 속 청춘들의 사연은 불안에 휩싸여온 홍콩의 역사와 유비 관계에 놓인다. <아비정전> 속 수리진은 마카오에서 온 여자다. 아파하는 그녀를 잠시 도왔던 경관은 선원이 되어 꿈꾸던 필리핀으로 간다. 아비의 계모는 새 애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며, 필리핀에 사는 친엄마를 만나러 간 아비는 끝내 홍콩으로 되돌아오지 못한다. 이처럼 그들에게 홍콩은 안정적인 정처가 아니다. 외부에서 틈입했거나 또 다른 외부를 꿈꾸는 이들이 잠시 접촉했던 공간에 불과하다. 정신적 방황과 물리적 방랑의 이미지로 점철되는 불균질한 장소들의 총합이다.

인물들의 이러한 사정을 홍콩의 역사적 상황과 연상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훌륭한 독법이 된다. <중경삼림>의 경우, 이질적인 홍콩 도심 이미지를 서로 다른 의미망으로 연결시키려는 기획이 엿보인다. 주지하다시피 구룡반도의 침사추이와 홍콩 섬에 위치한 올드타운 센트럴은 홍콩 도심을 양분한다고 할 수 있다. <중경삼림>의 영어 제목 ‘ChungKing Express’는 영화의 주요 배경인 ‘청킹맨션(ChungKing Mansion)’과 패스트푸드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Midnight Express)’에서 한 단어씩 가져와 합친 것이다. 두 장소는 각각 침사추이와 센트럴 란콰이펑에 위치한다. 청킹맨션은 다른 성격과 기능을 가진 세부 공간이 한 건물에 모여 있는 특이한 주상복합 건물이다. <아비정전>의 배경이 되는 시기쯤 지어진 이 건물은 정체성을 합의하기 어려운 홍콩의 역사와 닮아 있다. 일찍이 이질적인 문화와 문물, 서로 다른 민족이 뒤섞여 형성된 홍콩의 한 특징을 표상하는 셈이다. 왕가위는 청킹맨션과 그 주변에서 서양인(어쩌면 영국인)이 마약 밀매를 주도하고, 인도의 불법 이민자들이 포장과 배송 역할을 감당하는 것처럼 그렸다. ‘노랑머리’는 거미줄 망같이 복잡한 그곳을 뛰어다니며 도망친 인도인들을 뒤쫓는다. 청킹맨션 인근은 안정된 정체성으로부터 탈각된 기표들의 갈등과 공존을 적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은 폐업 후 역사 속으로 사라진 패스트푸드점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홍콩 경제의 심장부이자 변화에 민감한 거대한 상업지구 센트럴에 위치한다. 이곳은 자본의 논리와 서구식 생활문화가 완벽하게 뿌리내린 홍콩을 대변한다. 왕가위는 이 패스트푸드점을 활용해 변화의 속도에 적응해야 하는 홍콩인들의 일상을 순발력 있게 포착한다. 633의 집, 곧 떠나간 애인에 대한 633의 미련과 그 틈새를 비집고 잠입한 페이의 열망이 인상적으로 교차하는 그 공간도 센트럴 인근에 위치한다. 영화 속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특이한 관광자원을 홍보하기 위한 의도에서 등장하는 게 아니다. 보편적인 중국인의 생활방식과 리듬에 귀속되지 않는 홍콩인들의 오늘을 환기시키기 위한 도구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사장은 실연당한 223에게는 점원으로 일하는 메이를 소개시켜주려다가 그 다음 번엔 새로 온 페이와 만나볼 것을 권한다. 애인을 위해 항상 똑같은 샐러드만을 사는 633에게는 처음엔 생선튀김을 권하고, 다른 날엔 피자를 추천한다. 그 다음 번 만남에서는 핫도그를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렇게 왕가위는 변화에의 민첩한 적응과 대처가 요구되는 홍콩에서의 삶을 묘사한다. <아비정전>과 <중경삼림>에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코카콜라와 감자칩, 아이스크림, 맥도날드, 파인애플 통조림 등은 모두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그 때문에 <아비정전>, <중경삼림>에서 서로를 맴도는 ‘발 없는 새’들은 영국 해외부속령과 중국의 특별행정구 사이를 방황하는 홍콩인의 내면을 소환한다. 우선적으로 <중경삼림> 속 1994년 5월 1일은 현실 속 1997년 7월 1일(홍콩의 중국 반환일)을 상기시킨다. 반복되는 설정 쇼트 속에서 1994년 5월 1일로 육박해가는 시계가 등장하는 바, 앞에서 밝힌 것처럼 그 날은 233이 전애인과 완전한 이별을 자가 선언하는 날이다. 중국인의 신체 속에 서구인의 의식과 습관을 가진 홍콩인들은 북경어, 광동어, 영어가 혼재된 세계를 살아왔다. 이는 <중경삼림> 첫 번째 에피소드 후반부, 아픈 이별을 받아들인 233이 ‘노랑머리’에게 접근하던 풍경에 스며있다. 그 신에서 233은 북경어, 광동어, 영어, 일본어 등으로 파인애플 통조림을 권하며 그녀를 유혹하려 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마지막 시퀀스는 더욱 적확하게 반영론적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마약 밀매업자이자 펍의 주인인 듯 보이는 서양인은 어쩌면 영국인인지도 모른다. 그는 노란색 가발을 쓴 또 다른 홍콩여인에게 담배 심부름을 보낸다. 그날따라 비가 추적거린다. 그런데 펍 바깥으로 나온 그가 고양이 두 마리를 내려다볼 때, 임청하가 연기한 ‘노랑머리’가 다가와 그를 총으로 쏴 죽인다. 그 순간 그녀는 노란색 가발을 벗어 던져버리고는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진다. 이때 카메라는 길바닥에 버려진 파인애플 통조림, 유효기간이 1994년 5월 1일인 그 빈 깡통을 클로즈업한다. 일차적으로 이 장면은 영국에 귀속되어 지내 온 홍콩의 역사에 대한 재치 있는 묘사다. 임박한 홍콩 반환 시점으로부터 파생하는 불안을 던져 버리고 미래를 쿨하게 낙관하는 태도도 엿보인다. 우리는 ‘노랑머리’가 언제 비가 올지 해가 비칠지 몰라서 항상 레인코트에 선글라스를 착용했던 걸 떠올려야 한다. 자신의 흑갈색 머리카락을 드러내지 못한 채 그녀가 불안한 날씨를 의식하며 살았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후반부 에피소드의 내용과 결말 역시 전혀 다른 이야기 맥락을 따라 유사한 귀결점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633은 과거의 안정된 상태를 지키려는 성향이 강하다. 자기 집에 남겨진 옛 애인의 물건도 정리하지 못하고, 그녀가 자기 집에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계속 떨치지 못한다. 반면 페이는 그와 정반대다. 여행을 위해 돈을 모은다는 그녀는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다는 식이다. “캘리포니아 같은 데도 좋고 가보고 아니면 딴 데로 가죠.”라고 말하는 여자다. 그렇다면 633이 페이와 함께 가는 미래를 약속하는 장면은, ‘정처 없음’이 불안과 혼란의 이유가 아니라, 기대와 설렘의 근거가 되는 예외적인 엔딩이다. 거기엔 이전의 왕가위 영화에는 없던 태도가 담겨 있다. 그들의 로맨스는 홍콩의 근미래에 대한 달콤한 낙관과 통한다.

 

두 개의 쇼트

왕가위 영화 세계의 기저에는 멜로드라마의 감성이 흐른다. 외관상 무협액션에 속하는 <일대종사> 조차도 멜로드라마의 감성 위에 지어진 집이다. 이러한 개성은 그의 첫 영화인 <열혈남아>때부터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왕가위 영화에서 비주얼과 스타일이 두드러지는 장면들도 그 내막을 뜯어보면 내용과 형식 전체에 가득한 어떤 ‘상실의 감정’(2)을 짊어지고 있다. <아비정전>도 그러한 특징이 십분 묻어나는 영화다. 비중을 갖고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단념해야 할 대상을 가지는데, 포기가 너무 늦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짊어져야 할 슬픔을 함께 짊어지게 된다.

<중경삼림>은 외관상 멜로드라마 이외의 장르 관습이 두드러지는 것처럼 보인다. ‘노랑머리’가 끌고 가는 <중경삼림>의 전반부는 필름 누아르의 관습을 명확히 한다. 반면 후반부는 낭만적 로맨스물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223, 633으로 호명되는 두 사내의 현실, 곧 사랑의 상실을 견디는 두 남자의 감정과 행위는 다분히 멜로드라마의 뉘앙스를 풍긴다. 애인이 떠나고 없는 집에서 633이 집안 모든 물건들 붙들고 과장된 독백을 할 때, 우린 청승이 뚝뚝 떨어지는 그 공간의 정서에 함께 젖게 된다. 예를 들어 633은 쓰다 만 비누를 들고 “전에는 훨씬 뚱뚱했는데 지금은 너무 말랐어. 왜 그래? 자신감을 가져.”라고 말하며 과잉의 비애감을 표출한다. 이들 장면에는 대중적 멜로드라마의 통속성이 흥건하다 못해 넘친다.

그러나 왕가위만의 멜로 감성이 폭발하는 장면은 따로 있다. <열혈남아>에서보다 훨씬 세련된 방식으로 왕가위는 <중경삼림>만의 스텝프린팅 장면을 완성한다. 특히 후반부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두 개의 스텝프린팅 장면은 현실에서의 관습적 시간 체험을 중단시키면서 심미적 충격을 안긴다. 추측컨대 <중경삼림>을 통해 왕가위이즘에 매혹당한 이들이 있다면, 이 두 장면의 낯선 시간성에서 비롯된 여운을 한동안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중 첫 번째는, 633이 스튜어디스 애인으로부터 이별 편지를 받은 직후다. 633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페이가 대신 받았다가 건네 준 그 편지를 읽지 않는다. 블랙커피를 다 마시면 읽겠다는 말만 한다. 그때 도착한 스텝프린팅 장면을 보면, 갑작스러운 이별을 감당해야 하는 공포(633)와 미묘한 질투심이 촉발시킨 사랑의 기대(페이)가 사진적 구도를 형성한다. 자기만의 세계에 유폐되어 청춘을 앓는 자취가 거기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면, 프레임 왼쪽에는 매대 앞에서 블랙커피를 마시며 끝을 앞둔 사랑에 절망하는 633이 위치한다. 프레임 오른쪽 매대 뒤편엔 633을 향해 흔들리기 시작한 페이가 앉아 있다. 각기 다른 허공을 응시하는 그들의 시선도 흥미롭지만, 그들 사이의 먼 간격이 더 이채롭다. 이때 그들 앞의 무수한 행인들이 단속적으로 지나는 느낌은 현실에선 맞닥뜨릴 수 없는 영화적 시간 체험을 안긴다. 중경에 위치한 주인공들에게서 느껴지는 정적인 적막과 전경을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의 동적인 움직임이 의미론적 착란과 감각의 경련을 동시에 일으키는 것이다. 왕가위는 그렇게 현실의 시간감각이 지워진 두 사람의 들끓는 내면을 스타일리시하게 그려낸다.

그보다 더 인상적인 두 번째 스텝프린팅 장면은 캘리포니아 펍에서 페이를 기다리는 633의 모습을 담아낸다. 페이의 자신을 향한 마음을 비로소 알아 챈 633은 그녀에게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한다. 그리고는 약속대로 저녁 8시에 캘리포니아 펍에 가서 그녀가 오길 기다린다. 그곳에 이르기 전, 우리는 옛 애인의 스튜어디스 유니폼을 비로소 정리해버리는 633의 모습을 접한다. 그래서 그의 페이를 향한 하염없는 기다림에 비약적인 감정이 실린다. 우리는 멍한 표정의 633을 보지만, 실제로는 그의 내면을 다녀가는 복잡한 감정을 읽고 있다. 그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사장으로부터 그녀가 진짜 캘리포니아로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페이가 떠나며 633에게 남긴 편지는 그의 옛 애인, 곧 스튜어디스였던 그녀의 이별편지처럼 비행기 티켓을 흉내 낸 형태다. 캘리포니아 펍 다음 신에서 633은 이 편지를 빗속에 잠시 방치해 버린다. 그로 인해 ‘1년 후’라는 시간이 적힌 부분은 확인하지만, 목적지가 적힌 부분을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신은, 633을 바람맞힌 그 날 페이의 행적을 보여준다. 그녀의 회고적 진술이 보이스 오버로 깔리는 중 시간은 1년이 지난다. 점프 컷 후 삽입된 신에서 633은 페이의 사촌 오빠가 운영하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가게를 인수한 후 재개업을 준비 중이다. 이때 갑자기 스튜어디스 복장을 하고 캐리어를 끄는 페이가 들이닥친다. 그들의 인상적인 첫 만남 때 페이가 가게 안에 틀어놨던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이 프레임을 채운다. 곧이어 633은 그들 사이의 엇갈린 시간과 그 이유를 표지하는 페이의 편지, 곧 목적지가 지워진 비행기 티켓을 펼쳐 보인다. 그러자 페이는 티슈를 꺼내 새로운 비행기 티켓을 그에게 선물한다. 목적지를 묻는 페이에게 633은 “당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라고 말한다. 이 달달한 귀결은 <중경삼림> 후반부 에피소드에 고조되었던 인물들 간의 불협화음을 봉합한다. 비극으로 점철되어 온 왕가위의 예정론적 세계를 낭만적 초월의 세계로 옮겨버린다. 다시 말하지만 이 엔딩은 왕가위가 홍콩인에게 보내는 영상으로 쓴 편지다. 티슈에 손으로 그린 가상의 비행기 티켓처럼, 그 편지가 현실적 맥락을 구체화하고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왕가위는 1997년 7월 1일 이후에 대한 홍콩인의 불안을 긍정적 기대감으로 상쇄시키려 한다. 왕가위가 현실로 돌아가야 할 관객에게 베풀 수 있는 위로란 그런 것이다.

 

그 저녁의 멤버들

<아비정전> 속 아름다운 저녁에 아비는 수리진을 물리치고 미미를 등진다. ‘경관/선원’은 떠나가는 수리진을 붙잡지 않고, 미미에게 마음을 고백한 아비의 친구는 갑작스럽게 프레임을 빠져나간다. 233은 <중경삼림>의 어느 저녁에 떠나간 애인을 완전히 포기한 후 바에 처음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리라 마음먹는다. 633에게서 옛 애인이 떠나간 시간도, 캘리포니아로 떠난 페이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간도 저녁 무렵이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633이 되돌아온 페이와 틀림없는 사랑을 예감하는 시간대도 저녁이다.

이 황홀한 저녁의 풍경들은 비주얼리스트, 스타일리스트로서 왕가위의 야망을 드러낸다. 아티스트로서 그의 비전을 나타내 보인다. 물론 그 결과물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치기어린 감성을 느낄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자기 이미지에 취한 연출자가 과잉의 감정을 흘리는 중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평가든지 간에 자가의 취향에 대한 입장이 결정적 근거가 된다. 개인적으론, 그 저녁의 쇼트들이 그의 심미적 즉흥과 섬세한 직관을 개성적으로 웅변한다는 걸 강조하는 쪽이다.

믿을 만한 정보에 의하면, 왕가위 영화의 대사와 스타일은 현장에서 탄생하거나 새로 고쳐지는 경우가 많다. <아비정전>의 인상적인 쇼트 상당수도 대본이 완성되기 전, 홍콩과 필리핀을 오가며 얻은 미묘한 정취의 자식이라고 한다. 오프닝 타이틀과 함께 틈입하는 필리핀의 야자나무 숲, 그 숨 막히는 정경을 내려다보며 지나는 카메라를 놓고 이야기해보자. 카메라가 그 위치에서 그 각도로 밀림을 내려다보다가 그 속도로 내려와 야자 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합리적 계산보다도 심미적 직관의 결과다. ‘발 없는 새’가 땅에 발을 딛기 위해 내려오고 있다는 느낌을, 서사적 의미와 절묘하게 결부시키는 감각의 발로다. 별로 강조되지 않는 쇼트일지 모르지만, 이런 단순한 쇼트도 의미론적 구상과 감각적 테크닉이 서로를 효과적으로 부축할 때 탄생한다. 단 2주 만에 촬영되어 세 달 만에 완성된 <중경삼림> 역시 작가로서의 비전을 품었다고 해서 가능한 결과물이 아니다. 절망과 희망이 자리를 바꾸는 엔딩에 청춘의 모색과 홍콩의 희망을 뒤섞는 솜씨도 의도한다고 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다.

누군가에겐 주례사 비평으로 읽힐 이 글은 매우 솔직한 태도로 쓰였다. 당시 홍콩 영화의 별자리 바깥에서 폐곡선의 섬광으로 틈입한 별똥(왕가위)과 그때의 느낌을 적고 싶었을 뿐이다. 아직도 하비에르 쿠가의 ‘Maria Elena’와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이 들리는 저녁이면, 마음 안에 홍콩의 상상적 풍경이 내려앉곤 한다. 왕가위 초기 영화들을 보며 사춘기를 빠져나와 20대를 맞이했던 탓이라고만 하겠다. 페이가 633 때문에 얻은 몽유병을, 왕가위를 향해 현실에서 앓았던 흔적쯤으로 봐도 좋겠다. <화양연화> 혹은 <2046>으로 한 매듭이 끝나는 왕가위 영화에 대해 아직 쓰고 싶은 문장이 많다. 노란색 가발을 벗고 그 프레임을 떠나면서 영화계를 영영 등진 임청하의 마지막에 작별 인사에 대해서도 할 말이 더 있다. 그러나 왕가위 영화의 저녁 풍경을 통해 시네필의 지문을 확인하던 이들의 지금이 가장 궁금하다. 종종 객관을 잃은 이 글 속 여러 문장을 같은 온도로 동의해준 독자가 있다면, 당신도 그 신비한 저녁의 멤버가 될 수 있다.

 

 

 

 

(1) M. Heidegger, Holzwege, Frankfurt am Mein: Vittorio Klostermann, 2003, p.112.

(2) 존 머서, 마틴 싱글러, 변재란 역, 『멜로드라마』,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p.168.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안숭범

영화평론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지금은 문화콘텐츠 기획 및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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