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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5) - 41번째 학생이 벨을 울린다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5) - 41번째 학생이 벨을 울린다
  • 안치용(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9.01.31 17: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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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의 형이상학과 존재의 원환(圓環) 넘어서기

부조리극 하면 반드시 거론되는 작품 중 하나인 외젠 이오네스크의 『수업』에서는 ‘수업’이란 제목을 반영하듯 선생과 제자가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 이 작품의 초반부, 제자의 실력을 점검하는 대목에서 선생이 “1+1이 얼마냐”고 묻는다. 제자가 “2”라고 대답하자, “대단한 학식”이라며 손뼉을 치며 칭찬한다.

‘1+1=2’를 확인한 다음에 선생은 ‘4-3’이 얼마인지를 묻는다. 대단한 학식을 지닌 학생은 그러나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반면 경 단위의 엄청나게 큰 단위의 숫자들 계산에 대해서는 즉각 정답을 내놓는다. 누구나 이 풍경이 부조리하다고 직관적으로 느낄 법하다. ‘느낌’에서는 부조리란 말의 울림이 큰 만큼 직관이란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

수(數)는 그저 주어졌다고 본다고 해도, 등호(等號)[‘=’]는 결코 그저 주어질 수 없다. 등호치기는 주체의 행위다. 인식의 주체인 ‘나’가 좌변과 우변이 동일하다고 판단할 때 등호를 칠 수 있다. 컴퓨터에게든 사람에게든 어떤 등호도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나’ 없는 등호는 성립하지 않는다. 등호치기를 구조화하고 체계화해 사실상 무한하게 등호치기를 실행할 수 있는 AI는, 단백질로 이뤄지지 않은 특정 영역의 ‘나’라고 할 수 있다. 

 

미세먼지는 부조리하다

이오네스크의 『수업』에서 학생은 더하기의 결과를 묻는 말에서 등호를 칠 수 있다. 그때 그 학생은 ‘나’다. 반면 빼기의 결과를 묻는 말에서는 등호를 치지 못한다. 그때 그는 ‘나’가 아니다. 더하기와 빼기는 수학논리에서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기에 더하기를 할 줄 알면 빼기도 할 줄 알아야 하지만, 이 학생은 그러하지 않다. 

등호는 좌변과 우변이 같음을 주체가 선언하는 기능이므로, 주체가 확고하고 선언 또한 확실하면 좌변에 있던 더하기 기호[‘+’]는 우변으로 넘어가 빼기 기호[‘-’]로 변환할 수 있다. 등호는 좌와 우가 같다는 의미이므로 우변과 좌변을 바꿀 수 있고, 그렇게 하면 전통적인 질문과 답변의 구조, 즉 먼저 묻고 이어 ‘등호를 통해’ 대답하는 방식이 완성된다. 그러나 『수업』의 학생은 좌변의 [‘+’]를 등호(즉 자신의 인식주체인 ‘나’) 우편으로 넘겨서 [‘-’]로 변환하지 못한다. 학생의 등호는 너무나 허약하다(혹은 학생의 ‘나’가 허약하다.). 그 등호는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동시에 감당해낼 만큼 강건하지 못하다.

『수업』에서 학생이 경 단위의 큰 숫자들로 이루어진 산수 문제를 암산으로 즉각 해를 찾아낸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수업』에서 학생의 대답은 계산한 것이 아니라 기억한 것으로 제시된다. 즉 주체적으로 좌변과 우변을 비교해 등호를 넣은 것이 아니라 등호까지 포함된 하나의 수학적 진술을 암기한 것이기에 여기서 등호치기는 인식주체의 판단 행위가 아니다. 판단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어느 엑셀 파일에서 애초에 ‘1+1=2’를 수식으로 저장해 놓았다면, 이후 각각의 셀에 다른 숫자를 넣어, 예를 들어 ‘5’와 ‘7’을 넣어 다음 셀에서 ‘12’를 ‘자동으로’ 산출할 수 있지만, 애초에 ‘1+1=2’ 대신 ‘5762592+23642012=29404604’를 수식을 빼고 저장했다면(즉, 산식 없이 단순 ‘값’으로만 넣었다면), 후자에서는 이후 기존 숫자들 대신에 간단하게 ‘1’과 ‘1’을 넣어도 ‘2’를 산출할 수 없다. 

전자의 엑셀파일에서는 좌변을 입력함으로써 우변이 자동으로 생성되지만, 후자의 엑셀파일에서는 좌변을 입력한다고 우변이 자동으로 생성되지 않기에 우변 값이 필요하면 엑셀이 아니라 사람이 수동으로 입력해야 한다. 전자에서는 좌변을 보고 엑셀이 판단해 우변을 산출할 수 있지만, 후자에서는 좌변을 보고 인간이 우변을 산출한다. 후자의 방식으로 기록된 엑셀파일은 판단이 배제된 단순 기록지다. 후자의 방식으로 기록할 것이라면 엑셀로 기록하나 한글로 기록하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수업』의 단순 암기에서는 아무리 많은 양을 외워서 해를 술술 답변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등호치기와 무관하다. 반대로 ‘엑셀’은 산식이나 함수를 부여하면, 즉 등호치기 기능을 부여하면 거의 모든 것을 계산(計算)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암기(暗記)’할 수 없다.

좌변을 ‘엑셀’로 묻고 우변을 ‘한글’로 대답한다고 상상해 이 상황을 인간사에 적용하면 전형적인 부조리가 된다. 부조리는 좌변과 우변에서 각각 또는 동시에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등호치기 자체에 존재한다. (근대적) 인간 또는 (인식의) 주체의 이성적인 호소에 대한 불합리한 세계의 침묵. 실존주의에서 이렇게 말하는 부조리는, 간단히 호소에 대한 침묵으로 요약된다. 엑셀과 한글? 호소 없는 침묵은 불가능하며, 침묵이든 무엇이든 반응을 전제하지 않은 호소 또한 불가능하다고 할 때 부조리는 관계의 양상이며 현상이다.

비유로써 말하면 부조리는 타이어에서 발생한 미세먼지라고 할 수 있다. 자동차를 주행케 하면서 마모되는 석유화학제품 타이어는 부재로써 존재를 확인하는 역설적인 존재론을 갖는다. 완벽한 형태의 타이어는 존재가 결여된 상태에 처해 있으며, 부재를 축적해 타이어의 기능을 무화함으로써 완벽한 형태의 타이어에서 가장 멀어졌을 때 타이어는 비로소 존재를 실현한다. 

이런 역설적인 존재실현은 타이어가, 마찬가지로 석유화학제품인 아스팔트와 맞대어 주로 타이어 자신이지만 서로를 마모시킴으로써 미세먼지로 변형되고 종국에는 타이어가 아닌 것으로 되는, 정확하게는 타이어의 자격을 잃어 다른 타이어로 교체돼 버려지는 상황과 흡사하다. 호소와 침묵의 구조에서 부조리가 발생한다고 했는데, 이 비유에서는 미세먼지가 부조리다.

타이어와 아스팔트의 접면에서 탄소화합물계 유해성 미세먼지가 생기는 까닭에, 미세먼지를 원천 차단하는 방법은 접면을 없애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접면 없이 자동차가 주행하지 못한다고 할 때 마모와 이에 따른 미세먼지화는 타이어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자동차에 붙어 있지 않은 타이어는 새 제품이라면 비존재이고, 떼어진 후에는 부재하는 존재다.

『수업』의 결말은 살인이다. 선생이 학생을 죽임으로써 문답이 종료된다. 그것은 자신의 파괴이자 상호파괴다. 살인으로만 끝났다고 해도 이 작품은 모종의 부조리를 전시한다. 살인은 부조리와 등가다. 『수업』은 살인 다음엔 타임루프를 등장시켜 부조리의 완성도를 높인다.

“딩동!” 

아마도 살해될, 41번째 학생이 선생의 집 벨을 누른다. 살해된 학생은 40번째 희생자였으며, 그는 그저 40명 중의 하나로 독자성과 개별성을 갖지 못한다. 타임루프에 갇힌 존재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타임루프 영화 ‘사랑의 블랙홀’과 달리 『수업』의 끝이 아마도 해피엔딩이 아닐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사랑의 블랙홀’이 루프를 돌파해 확정된 결말을 보여주는 반면 『수업』은 원환의 새로운 시작만을 보여줌으로써 열린 결말을 취한다. 말이 열린 결말이지 정확하게는 등호치기의 결여다. 

『수업』이 보여주는 ‘열린 결말’에는 일반적으로 ‘열린 결말’에 부여되는 긍정적인 느낌이 없다. 왜냐하면 『수업』이 ‘열린 결말’을 취한 이유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디스토피아란 확정된 결말을 예비하고 있지만 ‘등호치기’를 결행할 능력이나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2+2=5’를 확신하는 세상

『수업』이 디스토피아를 암시하는 부조리극이라면, 조지 오웰의 『1984』는 ‘조리(條理)’를 갖춰서 디스토피아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상상한, 혹은 묘사한 정통 소설이다. 『1984』에도 중요한 산식이 나오는데, ‘2+2=5’다.

여기서 더하기 빼기 같은 산수의 논리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등호만이 중요하다. 등호치기의 주체는 ‘나’이지만 이 ‘나’는 말하자면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 같은 특정한 개인만의 ‘나’는 아니다. ‘나’는 시대와 공간을 공유하는 사회 안의 다른 무수한 ‘나’들과 인식의 틀을 공유하며 사회적 자아인 개별성의 ‘나’를 구축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한,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나’는 언제나 순수한 ‘나’일 수는 없다.

‘2+2=5’를 보면서 우리는 ‘2+2=4’, ‘2+2≠5’, ‘2+2<5’ 등 다른 해를 떠올린다. ‘2+2=5’를 거부하는 까닭은 여기에 들어있는 등호가 사회적 자아인 개별성의 ‘나’가 친 것이어야 하기에, 사회적 자아와 개별성의 ‘나’를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등호치기를 세분하면 등호를 치는 것과 그 등호를 수용하는 두 가지 과정으로 나뉘며 이 두 과정이 모두 무리 없이 진행돼야 등호치기가 완성된다. 만일 두 가지 중 하나의 과정만을 충족시켜야 한다면, 여전히 문제는 문제이겠지만 이론상으로는 문제가 간단해진다. 

사회적 자아와 개별성의 ‘나’ 가운데서 개별성의 ‘나’만이 작동하고 주장하는 인간을 우리는 광인이라고 부르기에 그에게는 어떤 등호도 가능하다. 또는 어떤 등호도 불가능하다. 반면 사회적 자아와 개별성의 ‘나’가 원초적으로 긴장하며 분열된 상태의 인간이라면 그는 어떤 등호 앞에서도 동요하게 된다. 후자의 예를 상상해보면, 사람이 보편적으로 세 개인 눈을 갖고 태어나는 세상에서 두 개의 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할 때 “방 안에 사람이 세 명 있습니다. 이때 눈알은 모두 몇 개일까요?”와 같은 질문 앞에서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쓰지 않는 ‘살색’이란 표현도 그러하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한쪽이 흑인인 이른바 다문화가정의 아이에게 ‘살색’은 분열된 색깔이다. 혹은 그 색깔 앞에서 분열된다.

‘2+2=5’는 후자 예의 인간에게서 납득이 가능한 산식일까. 그렇지는 않다. 사회적 자아와 개별성의 ‘나’가 상충하고 분열할 때 광인의 길을 걷지 않는 한, 예의 사건들은 예외이며, 예외의 인간들은 자신 안의 예외적 ‘나’를 사회적 자아로 수렴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개별성의 ‘나’로 적응시킨다. 개별성과 예외성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광인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한, 예외성은 개별성에 괄호 쳐진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1984』에서 제기된 ‘2+2=5’의 세계관은 분열과 통합을 말 그대로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 산식에서 등호를 치는 주체는 사회적 자아로 통합된 혹은 승화한 ‘비아(非我)’이며 좌변의 2와 2의 합이 우변의 5라는 ‘결정’을 수용하는 주체는 개별성의 ‘나’다. 수용하는 개별성의 ‘나’가 반드시 사회적 자아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전체주의의 대리인 ‘비아’는 ‘나’와 대립하다가 ‘나’의 자발성에 근거해 ‘비아’가 ‘나’로 전환한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가 ‘나’의 제국이라고 말했을 때의 의미가 이것이다. 전체주의는 이 전환을 체계로 구축해 일상화하고 영구화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등호를 치는 주체와 등호를 수용하는 주체 사이에 불일치가 존재하지만, 노력 가운데서 그 결실로 증거되는 극적인 일치로 전환하는 감동의 드라마야말로 전체주의 사회의 일상이다. 이때 ‘나’는 진정한 나인가?

그러려면 분열이 필요하고 통합이 필요하지만, 말 그대로 유기적인 결합이 필요한 대목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나를 나로 확신하면 안 된다. 그렇지만 나아가 나를 내가 아니라고 판단을 내려서도 안 된다. 전체주의에서는 한나 아렌트식으로 말해 개인 누구나 전체주의 그 자체가 돼야 하는데, ‘비아’에게 ‘나’를 잃어버려 ‘비아’만이 남게 되면 그것은 로봇과 다름없게 돼 전체주의 사회의 구성원이 될 자격을 잃는다. 열광과 자발성에 근거해 ‘나’를 ‘거아(巨我)’와 일치시킬 정도의 ‘나’는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이어서도 안 되지만, 나는 내가 아니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됐을 때만이 ‘2+2=5’는 강제로 수용되지 않고 진리로 승인된다.

『1984』에서 ‘거아’의 대리인인 오브라이언이 한 흥미로운 말 중에 “오르가즘마저 없애 버리겠다”는 것이 있다. 이 말을 윈스턴의 애인 줄리아가 윈스턴에게 한 “당신은 허리 밑으로만 반역자”란 말과 연결 지어 생각하면 흥미롭다.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하면 오르가즘은 반역이 된다. 소설 속에서 오르가즘은 실제로 반역이다. 지금은 윈스턴과 교류하지 않는 윈스턴의 부인은, 사랑 없는 결혼이지만 섹스, 정확하게는 교접에는 열심이었다. 『1984』에서는 모든 결혼에서, 모든 연애에서 사랑이 배제돼야 하기에 그녀가 오르가즘을 느낀 적이 없다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오르가즘 없이 규칙적으로 섹스를 한 이유는 종족번식이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윈스턴의 부인의 부부생활 방침에서 ‘2+2=5’의 가치관, 나아가 세계관은 전일하게 작동한다.

반면 성경의 돌아온 탕아처럼 ‘2+2=5’를 진리로 승인하기 전까지 윈스턴은 ‘2+2=4’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2+2=4’는 주체로서 세상과 담대하게 맞선 근대인의 세계관이었다. 이성적인 호소에 대해 때로 불합리하기도 하지만 신처럼 변덕스럽지 않고 대체로 합리적인 세계가 침묵하지 않고 대답하리라고 그는 기대를 품었다. 『1984』에서 그의 기대는 충족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 역사 또한 그러했다고 볼 수 있다. 『1984』의 세계에서 이성적인 호소는 침묵이 아니라 즉각적인 응답을 받았으며, 그것은 합리성이나 이성과는 무관했다. 곧 호소는 사라지고, 인간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지만 즉각적이고 전능한 응답만을 기다리는 기이한 존재로 말하자면 재창조된다. 

 

‘2×2=4’를 꿈꾸는 세상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 러시아 작가 체르니솁스키(1828~1889)는 1860년대에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러시아 지성의 아이콘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1821~1881)가 자신보다 연배가 어린 체르니솁스키를 한때 추종했을 정도다. 당대 두 사람의 명성 차이는 이후 세계문학계에서 완벽하게 역전된다.

더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인이 아니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도스토옙스키를 통해 체르니솁스키를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러시아혁명사에서 체르니솁스키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긴 하지만, 러시아혁명에서 더 이상 매혹을 느끼지 못하는 요즘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체르니솁스키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통해서나 알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의 성격을 지닌다.

체르니솁스키는 당대의 많은 러시아 지식인들처럼 소설가이자 철학자였으며 크게 보아 혁명가이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나오는 산식 ‘2×2=4’로 상징된다. 체르니솁스키 인간 본성이 원래 선하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사악해진 까닭은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선하게 행동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인간이 이해하게 된다면 인간은 악에서 탈출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체르니솁스키는 자신의 이런 이성적 이기주의 이론에 따라 인간을 교육하고 개화한다면, 인간이 악해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런 맥락에서 ‘2×2=4’가 등장한다. 이 산식이 상징하듯, 인간의 행동은 이성적 이기주의가 제시하는 이익 공식에 따라 해명될 것이기에 모든 (인간의) 문제에는 해답이 있다고 주장했다. 

체르니솁스키의 ‘2×2=4’는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인 수정궁으로 귀결한다. 이런 사회주의적 지상낙원의 도래를 그는 믿었고 동시대의 젊은 지식인들 또한 그의 신념을 공유했으며 앞서 언급한 대로 도스토옙스키는 한때 그 집단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체르니솁스키의 ‘유토피아론’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다.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도스토옙스키는 수정궁의 허황됨을 공박하고 ‘2×2=4’는 죽은 공식이라고 선언한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맞는 공식은 ‘2×2≠4’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우선 근대성의 첨단 휘장이라고 할 ‘2×2=4’를 톤다운 한 다음에 논의를 이어가도록 하자.

인간 주체의 발견과 구축은, 주체에 내재한 이성의 빛을 세계에 비추어 세계를 해명하고 정복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을 가져왔으며 그렇게 근대는 계몽에 착수한다. 그러나 계몽이 곧바로 곱하기로 시작했으리라고 보는 것은 비약이다. 곱하기에 돌입하기 전에 근대성과 계몽주의가 더하기에서 시작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이오네스크의 작품 『수업』에서 첫 부분에 ‘1+1’의 해를 묻듯이 계몽의 근대성은 ‘1+1’에서 ‘2+2’로 찬찬히 계단을 밟아갔을 터다.

‘2×2=4’는커녕 ‘2+2=4’의 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한 유럽의 후진국 러시아에서 체르니솁스키가‘2×2=4’를 떠벌린 것은 열등감이자 과대망상의 발로였으며 조울증의 징후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직 더하기를 시작하지 못한 조국 러시아에서 곱하기를 말하는 체르니솁스키에게, 그 이상의 원대함에 매료될 수 있었겠지만 곧 그 허황됨에 실망할 수도 있었는데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다.

18세기 말에 출간된 토마스 로버트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비슷한 논리를 목격할 수 있는데, 더하기의 세계와 곱하기의 세계는 판이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간단하게 살펴보아도 ‘2+2’와 ‘2×2’의 해는 같지만, 다음 정수인 ‘3+3’과 ‘3×3’에서는 다른 차원으로 진입한다. 따라서 도스토옙스키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표방한 세계관은 ‘2×2≠4’보다는 ‘2+2≠4’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이상은 흔히 망상이 되고 만다. 도스토옙스키가 체르니솁스키에게 내린 판정이 아마도 그러했을 터다. 

 

‘2+2=4’의 무게

도스토옙스키가 ‘2+2=4’를 감당할 수 없었던 데는 서유럽과 비교할 때 미개상태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당시 러시아의 후진성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2+2=4’의 세계관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같은 낭만주의를 포용할 수 있었던 고전주의자에게 오히려 적합한 것이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는 ‘질풍노도’라는 형태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 발현된다. 인간 의지의 자유와 권능을 확신한 베르테르는 죽음으로 자신의 결단을 상대에게 구겨 넣는다. 등호치기를 위해서 자살마저 불사하는 결기는 낭만주의와 고전주의가 중첩된 근대성의 기획이었다.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 정초한 자본주의에 정초한 근대국가는 ‘2+2=4’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세속화의 방향으로 극단까지 밀어붙이게 된다. 베르테르의 무모한 자기 확신과 자신의 자유의지를 보편화하려는 근대성의 열정은, 상호파괴적이기는 했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적어도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다는 측면에서 베르테르는 ‘2+2=4’ 세계관 중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베르테르를 계승한 근대주의자들은 세계와 객체에 동화하려는 베르테르의 열정을 세계와 객체를 정복하려는 야심으로 변조하고, 일치를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순수의 투기를 철없는 행동으로 폄하한다. 이들은 베르테르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근거 있는 계산으로 바꾸어 놓고, 결국 자기희생과 동화의 열정이 사라진 근대의 이성은 파괴의 플랫폼으로 전락한다. 근대성은 1차, 2차 세계대전에서 결정적으로 좌초하고 만다. 

루이저 린제의 『삶의 한가운데』는 근대성에서 상처받은, 실존의 위기에 직면한 니나라는 개인의 무망한 타개를 다룬다. 니나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2+2=4’에 속해 있다. 니나 같은 사람은 ‘2+2=4’를 너무나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이기에 ‘2+2=4’의 세계관을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차라리 ‘2+2=4’의 세계를 고전주의적 전망에서 복원하고 싶어 한다. 나치의 광기나 슈타인에서 발견되는 온기 없는 증발의 삶보다는 차라리 베르테르의 무모함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니나는 베르테르의 실패를 목격한 베르테르의 후대이기에 ‘2+2=4’의 세계는 엄정한 ‘2+2=4’의 세계이어야 하고, 그 세계를 견디지 못한다면 차라리 ‘2+2=4’에서 등호[‘=’]를 제거하며 버텨내는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등호를 걷어내는 일은 근대성에 기반한 현대사회를 사는 이들에게 지난한 일이다. 따라서 니나 같은 인물은 드문 현상이 되며, 흔히 우리는 니나 옆에서 니나 같은 삶을 질시하는 언니의 삶을 모색할 수 있을 뿐이다. 니나의 삶을 읽은, 제법 나이가 든 여성 독자들이 “니나처럼 살고 싶었지만 니나의 언니로 살고 말았다”고 술회하게 풍경은 개인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속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은, 잘해야 더하기나 가능한 『수업』의 학생이거나 니나의 언니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관일까. 그러나 ‘2+2=5’를 진리로 수용하거나, ‘4-3’을 계산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훨씬 낙관적이다. 근대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나’라는 것이 근거 없는 자신감에 불과했으며, 세계의 어둠을 밝히느라 애썼지만 정작 그 어둠을 밝힌 이성 안에 더 큰 어둠이 존재했다는 뒤늦은 깨달음 앞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좌변과 우변을 비교해 어떻게든 등호치기를 실행하려고 하고, 또는 등호에 맞는 좌변과 우변을 찾아내는 존재라고 할 때, 조금 더 세상과 자신을 낙관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근대 이후 인간의 운명인 셈이다.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 5] ‘41번째 학생이 벨을 울린다-산수의 형이상학과 존재의 원환(圓環) 넘어서기’는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 ▲1984년(조지 오웰) ▲대머리 여가수(외젠 이오네스코) ▲수업(외젠 이오네스코) ▲지하철 소녀 쟈지(레몽 크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요한 볼프강 폰 괴테) ▲생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를 참고했습니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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